『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Ⅱ
- ▣판 메이헤런-위작 사기▣이카로스의 추락▣피카소-한국전쟁▣다빈치-두 벌의 모나리자▣마네-아스파라거스 다발▣메디치家 명품 컬렉션▣수련에 집착한 모네
9. 판 메이헤런 - 히틀러 오른팔을 속인 '위작 영웅'
알코올·모르핀 중독 판 메이헤런, 나치에 동조·협력한 미술 사기꾼
전문가 자만심 등 허점 노려 사기..나치의 수괴 속여 민족영웅 행세
미술품 위조의 역사는 유구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조각을 땅에 묻었다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물로 속여 파는 일이 횡행했고 당대 작품도 위조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판화가 알프레히트 뒤러(1471~1528)는 역사상 최초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위조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 A와 D로 독특한 서명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서명까지 위조한 판화가 나도는 판국이었다.
그럼에도 재판관은 모방작임을 밝히면 팔아도 괜찮다고 판결했다. 뒤러에게는 위조품이 나올 만큼 중요한 화가로 여겨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뒤러는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품 위조범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30~1940년대에 네덜란드 출신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를 위조한 한 판 메이헤런(1889~1947)일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체포됐다.
위조가 발각된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나치 독일에 반출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재판 과정에서 나치에 넘긴 명작이 사실은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실토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나치에 대한 협력죄보다 위조죄 형량이 가벼웠던 것이다. 그는 가짜 페르메이르를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 헤르만 괴링에게 팔았다.
대중은 판 메이헤런이 나치의 수괴를 통쾌하게 속였다며 열광했다. 변호사들은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 판 메이헤런이 자기를 무시한 전문가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위작을 그렸을 뿐 악한 의도는 없었다고 옹호했다. 판 메이헤런은 사기꾼에서 일약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여기까지가 대중에게 알려진 신화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토머스 호빙은 다른 버전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는 10년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을 지내고 미술품 감정가로 활약하며 많은 책도 저술했다.
호빙에 따르면 판 메이헤런은 이류 화가이고 위작 솜씨도 미술품 감정가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였다. 판 메이헤런의 성공 비결은 전문가의 자만심과 미술품 감정의 허점을 공략한 데 있었다. 전문가들은 판 메이헤런의 사기극에서 그가 바라는 역할을 알아서 해주었다.
Woman Taken In Adultery(간음한 여인), Han van Meegeren, c. 1943, Oil on canvas (?), 96 x 88 cm.
Instituut Collectie Nederland, Asmterdam,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괴링이 속아 넘어간 그림)
판 메이헤런은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알코올·모르핀 중독자인 데다 사기와 속임수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으며 나치에 동조하고 협력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애국적인 영웅으로 둔갑했을까.
판 메이헤런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주를 타고났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만한 창조적 에너지는 갖고 있지 못했다. 1914년 미술학교를 마친 후 아카데미풍 그림으로 그럭저럭 성공했으나 곧 밀려든 아방가르드 물결로 그의 화풍은 시대에 뒤진 것이 되었다.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그는 1930년대 극우 미술단체에 가입해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글을 썼다. 아방가르드 미술 탄압에 나선 나치를 지지하기도 했다.
타락한 판 메이헤런은 한 미술품 복원가와 손잡고 그림을 위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선택한 화가는 네덜란드의 프란스 할스(1581~1666)였다. 조악한 모작이었으나 할스 전문가로 자처하는 호프스테데 더 흐루트라는 수집가를 속일 수 있었다.
간이 커진 두 동업자는 다른 17세기 화가로 범위를 넓혔다. 돈이 굴러 들어왔다. 그러나 아브라함 브레디우스라는 전문가가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는 흐루트가 경매에 내놓은 할스 그림이 위작임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창피당한 흐루트는 조용히 그림을 거둬들였다. 위작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거론되지 않았다. 흐루트는 사기꾼을 찾기보다 자기의 멍청한 실수를 사람들이 잊어주기만 바랐다.
판 메이헤런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앞으로 더 신중하게 사기를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동업자와 헤어진 뒤 다음 위작을 내놓을 때까지 4년 동안 잠복하며 준비했다.
이번에 고른 화가는 페르메이르였다.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로 불리는 17세기 풍속화가로 두 세기 동안 잊혔다가 19세기 중반 재발견되었다. 20세기 들어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희소성이 있어 고가에 거래된다. 초기 그림과 원숙기 사이에 십여 년의 공백이 있는 것도 유리한 점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공백기에 페르메이르가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3~
1610)의 화풍을 익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판 메이헤런이 만든 조잡한 할스가 가짜임을 밝혀낸 브레디우스는 한술 더 떠 카라바조풍의 초기 페르메이르 그림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장담했다. 실제로 그는 페르메이르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공적이 있었다.
브레디우스는 페르메이르의 종교화가 이것 하나뿐일 리 없다고 보고 조만간 다른 작품이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브레디우스는 본의 아니게 판 메이헤런의 사기극을 거들게 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페르메이르에 대한 연구서와 미술 관련 전문서를 독파했다. 네덜란드 미술사학자와 큐레이터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했다. 그리고 1936년 꼬박 1년 만에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완성했다.
The Supper at Emmaus, Han van Meegeren, 1936–1937,Old canvas, relined, 115 x 127 cm.
Museum Boiljmans Van Beuningen, Rotterdam
브레디우스가 페르메이르 진품이라고 처음 판정해준 그림. 브레디우스의 옹호 덕분에 판 메이헤른의 위조 행각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1654~1656년, 158.5x141.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영국 에든버러
(브레디우스가 찾아낸 페르메이르의 그림. 페르메이르 작품 가운데 종교화로는 유일하다.)
브레디우스라면 반드시 페르메이르의 공백기를 메워줄 그림에 반색할 것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할스를 위조할 때와 달리 기존 작품을 본떠 그리는 방식은 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림을 새로 그렸다. 대담한 짓이지만 한번 성공하면 비슷한 그림을 계속 그려 팔 수 있으므로 유리했다.
1937년 판 메이헤런은 이름난 변호사에게 부탁해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브레디우스에게 감정받게 했다. 법률은 잘 알아도 미술은 몰랐던 변호사는 판 메이헤런이 둘러대는 그럴듯한 거짓말에 넘어가 그림을 싸들고 브레디우스를 찾아갔다.
브레디우스는 자기가 전부터 나타나리라 예언한 그림을 눈앞에서 보고 흥분했다. 한때 유능한 미술 전문가였으나 이제 그는 팔십 세가 넘은 고집 센 노인일 뿐이었다. 눈도 거의 안 보이는 상태였으나 자기의 감식안을 자신했다.
지금은 작품의 진위를 감별하는 과학적 수단이 많이 발달했으나 당시만 해도 전문가가 육안으로 보고 한두 가지 기초적인 시험만 통과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브레디우스는 권위 있는 미술 잡지 '벌링턴'에 기고했다. 새로 발견된 페르메이르의 걸작을 격찬하는 글이었다. 그는 이 보물이 국외로 유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주위의 예술 애호가들을 설득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예술 후원자 모임인 렘브란트협회가 그림을 사서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에 기증했다. 브레디우스도 기금을 보탰다.
판 메이헤런은 여덟 점의 페르메이르 위작을 제작했다.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이 두 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한 점을 사고 괴링도 한 점을 가져갔다. 이 탐욕스러운 나치 수괴는 그림값 대신 독일군이 네덜란드에서 빼앗아간 200점의 그림을 주었다.
지난해 여름 필자는 로테르담을 방문했다.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은 호기심 많은 관람객을 위해 '엠마오 집에서의 식사'도 전시하고 있다. 그림 앞에 서니 이걸 진품으로 믿은 전문가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이 엉성한 그림을 처음부터 의심한 비평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옹호자들은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독일로 빠져나가도 좋겠느냐는 애국 논리로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1940년 네덜란드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그림에 대한 한가한 논란은 중단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남프랑스 코트다쥐르로 피난 가서 고급 저택을 구입하고 호화롭게 살았다.
판 메이헤런은 1945년 나치 협력죄로 체포되었다. 페르메이르 그림이라고 여겨진 '간음한 여인'을 괴링에게 팔았다는 죄목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자기가 그림을 위조했다고 자백했다. 중대 범죄인 나치 협력죄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괴링을 속여 독일군 수중에 들어간 수많은 그림도 되찾아왔으니 자기는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언론이 판 메이헤런의 파렴치함을 보도하려는 순간 한발 앞서 미국의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적어 내보냈다. '헤르만 괴링을 속인 남자'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사기꾼은 나치에 저항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대중은 영화 같은 얘기에 열광했다. 다른 언론 매체도 대중의 입맛에 맞춰 잇따라 그를 우상화했다. 판 메이헤런의 위조죄는 희석되었고 나치에 협력한 그의 과거도 지워졌다.
판 메이헤런은 1년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풀려나 194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자신은 파산 상태로 죽었지만 부인은 남편이 돌려놓은 재산으로 아흔한 살까지 사치스럽게 살았다.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판 메이헤런 - 히틀러 오른팔을 속인 '위작 영웅' / 아시아 경제, 2019. 10. 16.
10. 숨은 그림 찾기: 이카로스의 추락
쟁기질하는 농부·고기잡는 어부의 무관심..허우적거리는 다리·흩어진 깃털로 짐작 가능
인간의 어릭석음·교만 그림에 곳곳에 교훈..'자유에 대한 인간의 열망' 또 다른 해석도
1912년 벨기에 왕립미술관은 런던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낡은 그림을 발견했다. 제작연도도, 서명도 없고 언급된 문헌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번 덧칠이 되어 보존 상태도 나빴다. 하지만 미술사학자들은 이것이 벨기에가 낳은 위대한 화가 대 브뢰헬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추락을 다루고 있다. 1세기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에는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 얘기가 나온다. 다이달로스는 건축가이자 발명가, 예술가였다. 그는 재주가 많은 만큼 질투심도 많았다. 조카이자 제자인 페르딕스가 뛰어난 발명을 하자 그를 성벽에서 밀어 죽여버렸다.
아테네에서 추방된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에게 봉사했다. 왕이 전쟁에 나간 사이 왕비는 황소와 정사를 벌여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복잡한 미로가 얽힌 궁전을 만들게 하고 수치의 증거인 괴물을 그곳에 숨겼다.
영웅 테세우스가 이 괴물을 무찌르러 오자 다이달로스는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비밀을 누설한 데 분개한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 부자를 미궁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는 밀랍과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올라 도망쳤다. 떠나기 전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거나 너무 낮게 날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나는 데 적응이 되자 신이 났다. 아버지의 주의를 잊어버리고 점점 높이 날아올랐다. 태양에 다가가자 밀랍이 녹아내리고 깃털이 흩어졌다. 날개가 망가진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주를 저주하며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었다.
이 그림은 풍경화와 풍속화의 중간쯤 된다. 풍경화에서는 자연 묘사가 우선이므로 인물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해도 미미한 존재로 표현된다. 반면 풍속화에서는 인물의 행동이 중요하고 장소는 무대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림을 보면 우선 광활한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풍경화 같다. 전경으로 눈을 돌리면 쟁기질하는 농부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언덕 기슭에는 양 떼와 목동이 있고, 오른쪽 물가에는 고기 잡는 어부가 있다. 어촌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 같다.
이카로스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오른쪽 범선 아래 허우적거리는 두 다리가 있다. 깃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런데 농부와 어부는 사람이 물에 빠진 걸 알아채지 못한 건지 모르는 척하는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양치기는 오히려 반대편 하늘을 바라본다. 화면에는 안 보이지만 그쪽에는 다이달로스가 날면서 아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화가 마음대로 그려 넣은 게 아니고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얘기를 따랐다.
"물에다 낚싯대를 드리운 어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선 목동, 쟁기를 잡고 선 농부가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신들로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오비디우스의 인물들과 달리 이 그림의 인물들은 다이달로스 부자에게 흥미가 없다. 짐승들도 밭을 갈고, 풀을 뜯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브뢰헬은 풍속화나 종교화의 형식을 빌려 도덕적 교훈을 전달했다. 브뢰헬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란 반드시 어떤 이야기를 포함해야 하며, 그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결론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그림은 사방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졌어도 일을 계속하는 농부와 어부는
"사람이 죽어도 쟁기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플랑드르 속담을 암시한다.
화면 왼쪽 귀퉁이에 있는 밀가루 부대와 칼이 꽂힌 돈주머니도 교훈을 품고 있다.
밀가루 부대는 "바위 위에 뿌린 씨는 자라지 못한다"라는 속담을, 칼이 꽂힌 돈주머니는 "칼과 돈은 현명한 손을 원한다"라는 속담을 뜻한다. 이 속담들은 이카로스의 추락이 상징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자만을 경계한다.
예술사회학자 프랑카스텔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이 그림에서 정치적 의미를 읽었다. 브뢰헬이 살던 시대는 혼란했다. 당시 그가 살던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가톨릭 종주국이었던 스페인과 달리 독일과 가깝고 상인 계층이 많았던 플랑드르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신교에 쏠렸다.
1567년 펠리페 2세는 신교도들을 누르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브뤼셀에 상륙한 스페인 군대는 신교도들을 마구 학살했다. 마흔 살의 브뢰헬도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가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종교의 자유가 금지된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소신을 밝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카로스의 추락', 1560년경(73.5x112㎝, 벨기에 왕립 미술관, 벨기에 브뤼셀)
'이카로스의 추락', 1560년경(73.5x112㎝, 벨기에 왕립 미술관, 벨기에 브뤼셀) Detail
프랑카스텔은 이 그림을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했다. '변신'에서 미노스 왕에게 감금당한 다이달로스는 외친다. "바다를 막고 항구를 봉쇄하여 나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늘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나는 저 하늘로 가리라! 미노스가 모든 것을 다스려도 하늘의 주인은 아니지 않는가!"
프랑카스텔이 해석한 대로 굴종을 강요당하고 신앙의 위기를 겪던 플랑드르 시민 브뢰헬은 다이달로스에게 감정을 이입했을지도 모른다.
화면은 시원스레 사선으로 분할된다. 왼쪽 언덕배기에서는 농부가 쟁기질을 한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펼쳐진다. 수평선에는 태양이 반나마 가라앉고 있다. 바다는 넘어가는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수평선 부근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다. 뾰족한 바위산과 멀리 보이는 항구의 모습은 나폴리와 느낌이 유사하다.
브뢰헬은 젊은 시절 여행했던 나폴리의 모습을 잘 기억했다 이 그림에 써먹었다. 플랑드르적인 요소도 있다. 오비디우스는 배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브뢰헬은 멋진 배를 두 척이나 공들여 그려 넣었다. 꼼꼼하게 그린 범선은 플랑드르 조선업의 수준을 보여준다. 이 배의 선원들 역시 일에 열중하느라 지척에서 일어난 사고에는 무신경하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카로스의 추락을 주시하는 존재가 있다. 고기 잡는 어부 등 뒤에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자고새가 물을 향해 앉아 있다. 아테네 여신은 다이달로스가 성벽에서 밀어버린 조카 페르딕스를 한 마리 새로 변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새를 페르딕스라 불렀다. 다이달로스가 아들의 주검을 땅에 묻고 있을 때 자고새가 밭 가에 내려앉아 재미있어했다. 이로써 이 비극적 이야기의 사이클이 완결된다. 브뢰헬은 이 많은 이야기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해도 좋겠지만 반전이 있다. 1996년 이후 학자들은 이 그림이 진짜 브뢰헬의 것인지 꾸준히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이 작품이 브뢰헬의 다른 작품에 비해 질이 떨어지며, 둘째 브뢰헬은 패널에 유채를 사용했는데 이 그림은 캔버스에 유채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무분별한 덧칠 탓일 수 있지만 두 번째 문제는 확실한 검증이 필요했다. 캔버스에 유채 방식은 패널에 유채보다 후대에 나타난 기술이다. 만일 제작 시기가 후대로 판명되고, 브뢰헬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밝혀진다면 이 작품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문학, 미술을 막론하고 원전 비평은 일차적 중요성을 지닌다. 원전 확립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연구나 비평은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이 발견된 20세기 초에는 위작이나 모작을 알아낼 과학적 수단이 없었다. 명망 있는 미술전문가의 한마디가 철석같은 진리로 둔갑했다. 하지만 20세기 말은 상황이 달랐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라든지, 물감 일부를 떼어내 화학적 분석을 하는 방법이 등장해 있었다.
2011년 브뤼셀 왕립문화유산연구소는 이 그림이 1600년경에 제작된 것이라고 발표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브뢰헬은 1569년에 사망했으므로 적어도 그가 직접 그렸을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작품 해석은 어찌 되는 것일까? 왕립문화유산연구소는 이 작품이 브뢰헬의 원작을 모방해 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과거에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해석이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이 그림의 원작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 브뢰헬은 이 그림의 원작(만일 그것이 진짜 있었다면) 외에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적이 없다.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치는 수가 있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숨은 그림 찾기: 이카로스의 추락 / 아시아 경제, 2019. 8. 14.
11.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1930년대 파시즘에 반발 공산당 활동…'게르니카'로 反파시즘 입장 표명
'한국에서의 학살' 미국 비판적 시선…실제로는 한국에 대해 아는 바 없어
단순하고 추상적 표현으로 전쟁 묘사…'약자에 대한 핍박' 그린 작품 평가
1969년 6월9일 자 일간 신문들이 전한 소식은 당대 한국 사회의 '빨갱이 알레르기'를 잘 보여준다.
내용인즉슨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가 '피카소'라는 상표가 붙은 크레파스와 그림물감을 제조·판매하는 화학공업회사 대표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는 것, 유명 코미디언 곽규석이 자기가 진행하는 쇼 프로그램에서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찬양하는 듯한 발언으로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것, 어떤 방송 드라마에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자 제작진을 불러다 경위를 조사 중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는 피카소가 빨갱이였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소련 정부로부터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공안 당국의 관점으로는 골수 빨갱이였다. 한국에서 그를 찬양하거나 광고에 이용하는 것은 반공법 위반에 해당했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1951)'도 공산당을 선전하는 그림으로 인식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공산당 선전이라기보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사건으로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의 양민 학살을 꼽거나 1950년 미군이 북한 주민들에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한 사건을 꼽기도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두 사건은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기 전 발생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림이 완성된 후이기 때문이다.
신천군 학살 사건은 1952년 국제 사법단체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미국이 한국전에서 생물병기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1952년 중국이 유엔(UN)에 제소함으로써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1950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 몇몇 생존자에 의해 1990년대에 알려졌으므로 고려할 대상이 못 된다. 이 그림은 특정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일반적 참화를 묘사했다고 봐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합판에 유채·110×210㎝·피카소미술관·프랑스 파리)
그런데 피카소는 어쩌다 공산당원이 돼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1930년대에 파시즘의 위협이 커지자 그 반작용으로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은 급진적으로 변했다.
피카소와 함께 활동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를 비롯해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예술가들이 공산당에 가담하거나 공산주의에 기울었다.
이 시기 공산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외로이 파시즘에 맞선 공화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나치 점령기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핵심 세력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피 흘리는 희생을 치른 공산당은 2차 대전 후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르니카(1937)'를 그려 파시즘에 반대하던 피카소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산당은 피카소의 명성을 선전에 이용했고 피카소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피카소의 예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보면 피카소의 작품은 퇴폐적 형식주의의 산물이었다.
1951년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앙드레 푸즈롱을 당의 공식 화가로 발표하고 그의 전시회 '광산 지역에서'를 대대적으로 띄웠다.
피카소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까짓 애송이보다 내가 훨씬 나은데! 자극받은 피카소는 공산당이 좋아할 만한 정치적 주제를 다루기로 작심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을 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 당시 미국의 대자본가들이 파시스트 진영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한 일을 잊지 않고 있어 미국에 비판적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사진= 연합뉴스]
화면 왼쪽에는 여인네와 아이들이 모여 있고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무기를 겨눈 병사들이 있다. 뒤편에는 포화에 부서진 건물과 찢겨나간 계곡이 보인다. 가녀린 여인들과 건장한 군인들이 대조적이다. 아기를 안고 있거나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는 여인들은 무력하나 생명을 보듬고 있다.
군인들은 에너지가 넘치지만 그 힘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다. 여인들의 얼굴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다. 가운데 있는 어린 소녀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또는 도움을 호소하듯 말간 얼굴로 관객을 마주 보고 있다.
군인들은 여인과 아이들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겨누고 있지만 대오 자체가 무질서하고 혼란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투구 또는 화생방 훈련을 할 때 쓰는 마스크 같은 것이 대신하고 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은 멍청하고 둔한 외계인 같아 보인다.
피카소는 이런 식으로 전쟁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조롱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이 작품을 거부했다. 민중의 이미지가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이지 않은 데다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후의 젊은이들은 늙은 천재 피카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두 해 뒤인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 루이 아라공은 자기가 주간으로 있던 문예지 '레트르 프랑세즈'에 싣기 위해 피카소에게 스탈린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피카소는 위대하신 당 서기장 동지를 캐리커처처럼 묘사했다. 이에 공산당이 발끈하자 아라공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예술이 공산당으로부터 호응받지 못하자 피카소는 공산당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당시 사회적으로도 공산당에 대한 열광이 시들해지고 있었다.
1956년 소련이 자유화 운동에 나선 헝가리를 탱크로 깔아뭉개고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면서 지식인들은 공산당에서 대거 이탈했다. 1960년대 서구 경제가 황금기를 누리고 전후 신세대가 성년에 도달했는데 공산당은 새로운 사회를 따라잡지 못하고 낡은 구호만 반복하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서구에서 공산당의 인기가 날로 시들해지고 1960년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으나 1969년의 한국에는 냉전 논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공공연히 피카소를 추켜세웠다간 잡혀가 경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이란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구원자이자 전후 한국이 거지꼴을 하고 있을 때 경제적으로 원조해준 천사 같은 맹방이었다. 이때 청소년기를 보낸 어르신들이 요즘 광화문 집회에서 성조기를 휘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피카소는 92세까지 장수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게르니카'를 떠올리지만 정작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때 북부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가 겪은 참상을 묘사하고 있다. 가로 777㎝, 세로 349㎝의 거대한 캔버스에 충격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포개지고 뒤엉킨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캔버스에 유채·349×777㎝·레이나소피아미술관·스페인 마드리드)
바로크적 장엄함이 넘치는 '게르니카'와 비교할 때 '한국에서의 학살'은 단순하고 추상적이다. 피카소는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조국 스페인에서 일어난 참상을 묘사할 때와는 태도나 표현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고국에 있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파시스트의 만행에 분노하면서 '게르니카'를 그릴 때와 1951년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 젊은 애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행복한 삶을 누리던 때가 같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지닌 추상적 측면은 공산당으로 하여금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되레 그림의 장점이 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정 역사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핍박을 표현한 작품이 되고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까지 얻게 됐다.
1956년 폴란드인들은 자유를 외치며 바르샤바 거리에 '한국에서의 학살' 복사본을 내걸었다. 미국을 비난하는 그림이 소련을 비난하는 그림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1973년 피카소는 수천 점의 작품을 남기고 프랑스 남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기가 귀중하게 여겨 팔지 않았거나 '한국에서의 학살'처럼 팔리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이 즈음 프랑스는 예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골치 아픈 상속 다툼을 벌이던 유족들은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이 작품들은 파리 피카소미술관 컬렉션의 중핵이 됐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1.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 아시아 경제, 2019. 9. 11.
12.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19세기 명문장가 고티에·미슐레 미사여구로 신비에 쌓인 팜파탈 이미지 변신
1911년 루브르서 전시중 도둑 맞아 연일 언론 대서특필 '독보적 아이콘' 등극
1960년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등장…수집가 헨리 퓰리처 저서에서 진품 주장
파리가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수도로 부활한 것은 16세기 중반이다. 이전 시대 왕들은 루아르강 계곡의 성(城)에 살았다. 샤를 7세는 쉬농성에, 루이 11세는 앙부아즈성에 살았다. 프랑수아 1세도 퐁텐블로성을 지어 옮겨갈 때까지 앙부아즈성에 살았다. 루아르강 계곡에는 왕이나 귀족, 그들의 애인만 살았던 게 아니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도 살았다.
프랑수아 1세는 왕위에 오르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전투에서 이겼으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압도당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화가ㆍ조각가들을 데려왔다. 이때 왕궁을 꾸미고 다빈치도 초청했다.
다빈치는 능력에 비해 후원자 복이 없었다. 경쟁자 미켈란젤로(1475~1564)는 교황청으로부터 후원받으며 대작을 완성했다. 하지만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몰락한 이후 안정적인 후원자를 찾지 못했다. 프랑수아 1세가 초청했을 때 다빈치는 후원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1516년 프랑스로 건너간 다빈치는 '최고의 화가, 기술자, 왕의 건축가'라는 호칭과 함께 환대받았다.
왕은 그에게 연금을 주고 앙부아즈성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클로뤼세성도 내주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왕은 국정을 돌보랴 정부(情婦)들과 사랑을 나누랴 바빴다.
하지만 짬이 나면 다빈치와 환담을 나누며 뿌듯함도 느꼈다. 다빈치는 1519년 클로뤼세성에서 눈을 감았다.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의 말년을 돌봐준 덕에 프랑스는 모나리자를 얻게 됐다. 모나리자는 1518년 왕실 컬렉션에 포함됐다. 프랑수아 1세가 화가로부터 직접 샀는지 아니면 선물받았는지 구체적인 사항은 기록돼있지 않다. 프랑수아 1세는 그림을 퐁텐블로성에 보관했다.
1690년대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성의 컬렉션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다. 이후 모나리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있었다. 대혁명 직후 혁명정부는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대중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베르사유 궁전에 있던 왕실 컬렉션은 루브르 미술관의 토대가 됐다. 모나리자는 이후 지금까지 루브르에 걸려 있다.
19세기에도 모나리자는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같은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아름다운 정원사'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라파엘로(1483~1520)의 성모자상이 모나리자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빈치의 작품만 놓고 보더라도 '암굴의 성모'가 더 대접받았다.
오늘날 모나리자는 그림이 아니라 아이돌 스타같은 존재다. 루브르를 찾는 연간 1000만명 가운데 25%가 오직 이 그림 하나만 보고 간다.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이 벌어지자 루브르는 2005년 모나리자에 특별히 넓은 전시실을 배당했다. 한꺼번에 450명이 입장할 수 있는 방이다. 모나리자는 이중 방탄유리에 싸여 전시돼있다. 같은 방에 티치아노, 틴토레토의 걸작이 걸려 있고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인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가 웅장함을 뿜어내지만 주의는 그다지 끌지 못한다. 관객은 오로지 모나리자 앞으로 돌진할 따름이다.
루브르의 모나리자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1913년 영국의 미술품 감정가 휴 블레이커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손에 넣었다. 이초상화는 블레이커의 스튜디오가 있던 장소의 이름을 따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모나리자의 신화는 19세기 후반 형성됐다. 지금은 미술비평이 역사학·철학·사회학 등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도 받아들여 정교한 학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미술비평이 처음 태어난 19세기 중반에는 작가나 시인의 인상비평이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시인 테오필 고티에, 낭만주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현란한 글솜씨로 모나리자를 유혹적이고 신비한 여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고티에는 살았을 때 시보다 미술비평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로 중산층의 예술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랏빛으로 그늘진 입술' '스핑크스 같은 여인' 등 그의 미사여구로 모나리자는 신비에 쌓인 팜파탈로 변신했다. 미슐레도 "그림이 나를 집어삼킨다"는 둥 정서적 반응을 과장되게 기술했다.
실증주의 역사가 이폴리트 텐이 이런 식의 작품 해석은 근거 없는 것이며 지나치게 감성적이라고 제동을 걸었지만 소용 없었다. 유혹적인 팜파탈이라는 주제는 독자의 구미에 맞았다. 고티에와 미슐레는 당대의 명문장가였기 때문이다.
통속 소설가들도 가세했다. 이들은 모나리자와 다빈치 사이의 애정 관계를 지어내고 남편을 멋 없는 남자로 만들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시하고 자기의 성공도 과시할 겸 초상화를 주문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모나리자는 날로 유명해졌으나 20세기 초까지도 그 명성이 제한적이었다. 신문과 소설을 읽고 미술관에 드나드는 사람이 대개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이 몰려오고 있었다.
1911년 루브르에 도둑이 들어 모나리자를 훔쳐갔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를 대중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론은 연일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음모론까지 부풀렸다. 대중은 미술관에 찾아와 빈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루브르 앞에서는 행상인들이 복제품과 엽서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나리자는 1913년 말 피렌체에서 발견돼 국민적 환호 속에 돌아왔다. 대중이 문화소비에 뛰어들기 시작할 무렵 벌어진 이 사건으로 모나리자는 경쟁을 불허하는 최고 작품이자 미술의 아이콘이 됐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모나리자의 작품성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경향이 있다. 너무 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도 모나리자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1913년 영국의 미술품 감정가 휴 블레이커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손에 넣었다. 초상화는 블레이커의 스튜디오가 있던 장소의 이름을 따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블레이커는 헨리 퓰리처라는 수집가에게 이 그림을 팔았다.
퓰리처는 1960년 '모나리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저서를 통해 이 그림이 다빈치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퓰리처의 주장을 요약하면 두 벌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빈치가 주문자 조콘도에게 납품한 한 벌과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 프랑스 왕실 컬렉션에 포함된 또 한 벌.
이런 주장이 나오자 사람들은 정작 모나리자의 실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신비한 미소가 어떻고, 스푸마토 기법(회화에서 색과 색 사이 경계선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하는 기술적 방법)이 어떻고 하는 얘기만 무성했던 것이다.
모나리자를 최초로 언급한 문헌은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1550년 초판 출간)'이다. 바사리는 다빈치보다 한 세대 후에 살았던 인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 200명의 간단한 전기와 작품 활동을 정리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에서 모나리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빈치는 조콘도를 위해 그의 처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4년 이상 고심하면서 그렸지만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은 현재 프랑스 프랑수아 왕의 소장품이며 퐁텐블로에 있다."
19세기까지 사람들은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까지 썼으면 무난했을 텐데 바사리는 설명을 덧붙였다.
"속눈썹은 섬세하기가 비길 데 없으며" "눈썹의 털은 여기는 빽빽하게, 저기는 좀 성기게" 표현돼 있어 너무나 자연스럽다 등등. 그런데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없다.
이탈리아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19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도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에게 눈썹이 없다니 이상하다"고 불만을 토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바사리는 모나리자를 보기는 했던 걸까. 아니면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주장한 퓰리처의 말대로 또 다른 모나리자가 존재하는 걸까.
퓰리처는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진위 논쟁의 결말조차 못 보고 1979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림은 자취를 감췄다. 모나리자는 모방작과 복제화가 엄청 많았던 그림이라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2008년 익명의 스위스 사업가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를 손에 넣었다.
그는 이 그림이 진품임을 증명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이윽고 2012년 스위스 취리히의 모나리자재단 이름으로 그림을 공개함과 동시에 이 그림은 다빈치가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실린 저서도 출간했다.
이후 전문가들이 이 떡밥에 달려들었다. 결론은 다빈치의 진품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반질반질한 모나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난들 어찌하랴.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 아시아 경제, 2019. 11. 20.
13.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진리·권력을 묻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시대를 앞서 간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거의 언제나 물의를 일으키고 몰이해에 부딪혔다. 하지만 마네를 싫어한 사람들도 그의 사물 묘사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를 혹평했던 비평가들은 '풀밭 위의 점심' 속의 벗어 놓은 드레스나 소풍 바구니, '올랭피아' 속의 꽃다발에 감탄했다. 마네가 그린 정물화 속 모란꽃은 가까이서 보면 뭉개진 물감일 뿐이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방금 정원에서 꺾어온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1879년 마네의 건강이 악화했다. 매독으로 신경마비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파리 근교 뫼동에서 온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고생만 하고 1년 뒤 파리로 돌아왔다.
마네의 건강은 대작을 그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거나 작은 정물화를 그리며 소일했다. 초기에 그렸던 복잡한 정물화가 아니라 접시 위의 레몬 한 알, 사과 한 알 같은 단순한 정물화였다.
'아스파라거스 다발'도 이 시기에 그린 정물화로 소품이지만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작품이다. 흰 바닥에 초록색 잎이 깔려 있고, 가는 버들가지로 묶은 아스파라거스 다발이 놓여 있다. 배경은 밤색으로 밋밋하게 칠해져 있다.
에두아르 마네 '아스파라거스 다발', 1880년, 46x55㎝,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독일 쾰른
왼쪽에서 비쳐든 빛으로 아스파라거스 뿌리 부분이 하얗다. 머리 부분은 다소 어두운 연보랏빛을 띠고 있다. 푸른 잎과 연보랏빛 끄트머리는 아스파라거스를 흰 바닥과 구별해주며 싱싱한 느낌까지 부여한다.
마네는 물감을 팔레트에서 혼합하지 않고 직접 캔버스에 칠했다. 아스파라거스의 몸통은 얼핏 보면 연노랑이지만 자세히 보면 연두, 분홍, 보라 같은 색이 섞여 있다. 연보랏빛 머리 부분도 빨강, 파랑, 초록, 노랑이 섞여 있다.
이 즈음 인상주의에 빠져 있던 수집가 샤를 에프뤼시(1849~1905)가 마네의 아틀리에에 들렀다가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봤다. 에프뤼시는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대계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우크라이나 남서부 오데사에서 곡물 사업으로 재산을 일군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유럽 곳곳에 사업체를 갖고 있었다.
에프뤼시는 물려 받은 재산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잡지 발행과 예술 연구로 소일했다. 파리 최상급 사교계에 드나들던 그는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스완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네가 그림 값으로 800프랑을 불렀다. 그러자 한량 에프뤼시는 통 크게 1000프랑짜리 수표를 써주고 갔다. 세련된 마네가 그대로 있을 리 만무했다. 마네는 작은 캔버스에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를 잽싸게 그려 메모와 함께 에프뤼시에게 보냈다. "당신이 가져간 다발에서 이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 1880년, 16x21㎝,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파리
두 그림은 색채와 기법이 판이하다. 아스파라거스 다발은 밝은 색채를 다양하게 활용해 인상주의 정통 기법으로 그려졌다. 한편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는 단색으로 명암만 부각해 빠르게 그려졌다. 우연히 떨어진 것처럼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가 테이블 모서리에 걸쳐 있다.
이런 사연을 생각하면 두 그림이 나란히 전시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두 그림은 현재 헤어져 하나가 독일 쾰른에, 다른 하나는 파리에 있다.
1890년대에 에프뤼시는 상징주의로 관심을 옮겼다. 그가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처분한 것은 1900년쯤이다. 이 작품은 독일로 건너가 파란만장한 여정을 시작한다.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의 이력은 비교적 단순하다. 에프뤼시가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 조카딸에게 상속돼 1905년 미술시장에 나
왔다.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는 결국 미술상 두 군데를 거쳐 파리 오르세미술관의 컬렉션이 됐다.
아스파라거스 다발은 파리의 미술상을 거쳐 독일로 건너갔다. 1903년 베를린의 미술상 파울 카시러(1871~
1926)는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분리파(Secession·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회화, 건축, 공예 운동) 전시회에 내걸었다.
이 그림을 산 이는 베를린 분리파 의장인 인상주의 화가 막스 리베르만(1847~1935)이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유대인인 리베르만은 수집품들을 이전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시회에 대여한다는 핑계로 작품 14점을 쿤스트하우스 취리히로 보냈다.
작품들 가운데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도 포함돼있었다.
리베르만은 나치의 압력으로 모든 직을 내놓고 은거하다 1935년 별세했다. 독일 최고의 화가로 존경받았던 그는 베를린 미술계를 좌지우지했던 거물이었으나 나치의 감시 속에 장례식이 초라하게 거행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리베르만의 집과 컬렉션이 몰수됐다. 부인은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자 음독자살을 택했다. 그의 딸 케네는 1938년 남편·딸과 함께 독일을 탈출했다.
이들은 스위스에 들러 리베르만의 수집품을 찾아 미국으로 가져갔다. 케네는 1952년, 남편은 1955년 세상을 떠났다. 리베르만의 수집품은 외손녀 마리아 화이트의 소유가 됐다.
한스 하케 '마네 프로젝트 74', 1974년, 각 패널 80x52㎝, 마네 복제본 83x93㎝,
루드비히 미술관, 독일 쾰른
1967년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후원단체가 화이트로부터 136만달러에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사들였다. 그림은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발라프리하르츠에 걸리게 됐다.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잘된 결말 같다. 리베르만의 컬렉션 대부분이 나치에 압수돼 뿔뿔이 흩어졌으나 아스파라거스 다발은 외손녀가 갖고 있다 독지가들에 의해 독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후원단체를 만든 헤르만 요제프 압스(1901~1994)가 누구인지 알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압스는 나치 정권 아래서 도이체방크 은행장을 역임하면서 경제정책도 주도했다. 도이체방크는 탈취한 유대인 금융자본으로 몸집을 불리고 유대인 기업 강제 인수합병에도 힘을 행사했다.
압스는 유대인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기업들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기업은 2차대전 중 유대인·슬라브인 등을 강제노동에 투입했다. 압스는 종전 직후 전범으로 체포됐다. 그러나 석 달 만에 영국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나치 정권의 경제 상황을 꿰고 있는 인물이라 쓸모가 많았던 것이다.
압스는 영국 점령지역의 재정 자문관을 거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콘라트 아데나우어 서독 총리의 측근으로 재정 문제를 외교로 해결하는 데 탁월했다. 전후 서독 경제의 재건에 공헌해 '독일 경제 기적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1955년 도이체방크 은행장에 올랐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여러 대기업의 이사를 지냈으며 세계은행(WB) 총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970년 쾰른의 한 출판사에서 압스의 나치 전력을 폭로한 동독 역사학자의 저서가 출간됐다. 압스는 저자와 출판사를 고소했다. 우파 판사들이 지배하는 법정은 압스의 손을 들어줬다. 출판사는 허위 사실 유포죄로 벌금 2만마르크를 선고받았다. 책은 배포 금지됐다.
그러나 역사 은폐·왜곡에 반대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1974년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은 개관 150주년 기념으로 전시회 '프로젝트 74'를 기획했다.
전시회에 초대된 독일 태생의 아티스트 한스 하케는 '마네 프로젝트 74'라는 설치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글이 인쇄된 종이를 끼운 10개의 액자로 이뤄져 있다. 각 종이에는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소장했던 수집가들, 이 그림을 거래했던 미술상들의 전기와 사회경제적 지위, 작품 가격 등이 기록돼 있다. 물론 압스의 이력을 적은 종이도 포함돼있다.
전후 서독은 경제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부끄러운 과거를 쉬쉬하고 기억에서 지우려 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진보적인 예술가·지식인들이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서독 사회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케는 원래 발라프리하르츠에 소장된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이젤에 얹어 10개의 액자와 함께 전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도를 알게 된 미술관장이 이에 반대했다. 재계·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한 데다 미술관에 엄청난 도움도 주는 압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케는 결국 쾰른의 한 사설 갤러리에서 작품을 공개했다. 마네의 원본은 사용할 수 없었기에 복제품으로 대신했다.
마네 프로젝트 74는 질문한다. 예술이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우리가 명화 앞에서 무조건 감탄만 해도 되는지,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힘 있는 자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진리의 편에 설 것인지.
압스는 예술 후원자로 부유하고 우아하게 살다 1994년 90세로 생을 마감했다. 조형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하케의 작품은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발점이었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진리·권력을 묻다/ 아시아 경제, 2020. 1. 11.
14.메디치家의 명품 컬렉션…르네상스를 화폭에 담다
1772년 여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샬롯 왕비는 독일 태생의 영국 화가 요한 조파니(1733~1810)에게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미술관의 트리부나를 그려오라고 명했다. 트리부나는 우피치미술관 맨 위층에 있는 팔각형의 방이다.
수천 개의 진주조개 껍데기로 돔 천장을 장식하고 벽은 붉은 벨벳 천으로 덮어 매우 호사로웠다. 여기에는 고대 메달과 소형 조각, 보석, 진기한 광물 등이 전시돼 있었다. 조파니는 1779년에야 완성된 그림을 갖고 돌아왔다.
조파니는 화가의 재량권으로 우피치미술관과 피티궁전에 있는 메디치 컬렉션 가운데 걸작을 골라 트리부나로 모아놓았다. 바닥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중심으로 '메디치의 비너스' '칼 가는 사람' 같은 고대 조각이 있다.
벽에는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한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와 귀도 레니 같은 볼로냐화파 화가들의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한스 홀바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도 보인다.
조파니는 관람객도 그려 넣었다. 그랜드 투어 중인 영국 신사들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 18세기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는 몇 달씩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게 유행이었다. 우피치미술관 관람은 필수 코스였다.
조파니의 그림은 1780년 아카데미에 공개돼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조지 3세 부부는 썩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조파니는 영국 왕실의 돈으로 7년이나 이탈리아에 체류했다.
이런 그가 그곳에서 오스트리아 황제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소문에 조지 3세는 언짢아했다.
샬럿 왕비는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이 그림에 삽입된 데 불쾌감을 드러냈다.
조지 3세 부부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바가 없고 트리부나의 정확한 묘사에만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일반에 처음 공개된 우피치미술관은 유럽 전역의 부러움을 샀다.
유럽 군주들은 이에 자극받아 너나 할 것 없이 컬렉션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메디치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6세기 중반부터다. 15세기 메디치 통치자들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정중히 대접했다. 하지만 그림이나 조각보다 서적, 고대 주화, 보석에 더 관심이 많았다. 메디치가(家) 최초의 권력자인 '위대한 코시모(코시모 데 메디치ㆍ1389~1464)'는 필사본을 모으는 데 힘썼다.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도 고대 주화와 보석, 희귀본 수집에 몰두했다. 보석보다 가격이 훨씬 낮던 그림은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소년 미켈란젤로의 자질을 일찍이 알아본 인물로 유명하다. 로렌초는 예술가 지원 기금으로 보석, 꽃병, 고대 조각상을 구매했다.
요한 조파니 '우피치의 트리부나', 1777년, 123.5x155㎝(로열 컬렉션, 영국 런던)
요한 조파니 '우피치의 트리부나' Detail, , 1777년, 123.5x155㎝(로열 컬렉션, 영국 런던)
15세기 말 메디치가는 미술품 139점, 서적 수백 권, 무수한 보석, 주화, 카메오(양각으로 조각해 유리 모조 보석과 연체동물 껍질 안에 박아 넣은 단단한 보석 혹은 이런 보석의 모조품), 꽃병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예술품보다 진기한 보물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494년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쫓겨나면서 이 예술품ㆍ보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메디치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300여년간 피렌체를 왕처럼 다스리며 부와 권력도 누렸다. 하지만 그 여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경쟁 세력과 침략할 기회만 엿보는 적대국에 둘러싸여 정권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디치가의 통치 역사는 암살과 음모, 분란과 전쟁으로 점철됐다. 코시모만 해도 투옥과 추방 끝에 권력을 잡았다. 로렌초는 1478년 파치 가문이 보낸 자객에게 동생 줄리아노를 잃었다. 자기도 죽을 뻔했다. 메디치가는 1494년 권력을 잃고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피렌체는 1492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침략에 무릎을 꿇었다. 갓 집권한 20세의 피렌체 통치자는 저자세로 프랑스 왕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로써 피렌체 시민들의 공분을 사고 말았다. 그 결과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쫓겨나 18년 동안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샤를 8세의 군대는 도시를 짓밟고 메디치가의 보석과 보물도 약탈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귀환한 것은 1512년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불만이 여전했고 주변 정세는 어지러웠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는 로마로 쳐들어가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정치적으로 로마와 밀접하게 얽혀 있던 피렌체도 공격 대상이었다. 시민들은 겁에 질려 메디치가에 기댔다. 메디치가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탈환했으나 황제의 눈치만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아뇰로 브론치오 '갑옷을 입은 코시모 1세', 1544~1555년, 117.5x98.5㎝
뉴사우스 웨일즈 미술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537년 17세에 토스카나 대공으로 등극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냉혹하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전임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대공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뜻밖의 수완으로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반란도 제압했다. 혼란에 시달리던 시민들은 평화와 질서를 바랐다.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반긴 것이다.
코시모 1세 치하 30년 사이 피렌체는 안정을 되찾았다. 외세의 영향에서 벗어나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는 15세기 메디치 통치자들이 형식적으로나마 표방하던 민주적 가치를 저버리고 권위주의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피렌체를 보수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그 결과 피렌체는 서서히 몰락해갔다.
코시모 1세는 나름대로 예술을 애호했다. 하지만 그는 예술을 군주의 위세 높이기에 이용했다. 위대한 코시모나 로렌초도 예술의 후광을 이용했다. 그러나 코시모 1세와 달리 예술가를 자기 의도대로 부리진 않았다.
그 결과는 미술사가 말해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많은 별이 빛나던 고전주의는 왜곡과 과도함이 지배하는 매너리즘으로 대체됐다. 우아함과 균형이 사라진 자리에 부자연스러움과 불안함이 밀고 들어왔다. 피렌체는 생기를 잃어갔다. 로마가 예술의 중심지로 우뚝 서고 회화는 베네치아가 주도했다.
외적인 웅장함과 형식에 몰두한 코시모 1세는 우피치미술관 건물을 남겼다. 우피치궁전 설계는 코시모 1세의 가신으로 인생 후반기를 바친 조르조 바사리가 맡았다.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궁은 베키오궁전과 아르노강 사이에 있는 두 개의 긴 건물로 이뤄져 있다. 평행을 이루는 두 건물은 강 쪽에서 짧은 건물로 연결된다. 바사리는 이 부분의 1층을 아치 회랑으로 만들었다.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두 건물 사이의 길쭉한 길 한쪽 끝에 베키오궁이 보이고 반대편 아치 사이로 아르노강 건너편의 푸른 언덕이 보인다. 안마당이라고도,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공간은 건물의 딱딱함을 누그러뜨려 독특한 매력이 돼 있다.
우피치궁은 원래 정부종합청사로 쓰려고 지은 것이다. 코시모 1세에게 집중된 권력은 이런 건물을 필요로 했다. 코시모 1세는 베키오궁과 우피치궁, 강 건너 자신의 주거지인 피티궁을 잇는 공중 복도가 있다면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바사리는 주군의 뜻을 받들어 '바사리 회랑'이라는 유명 구조물로 만들어냈다. 건물 외벽을 따라 지상 10m 높이에 설치된 약 1㎞의 회랑이다. 이로써 코시모 1세는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베키오궁에서 피티궁까지 오갈 수 있었다.
착공 20년 만인 1580년 우피치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코시모 1세도, 바사리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우피치 미술관 창문으로 보이는 바사리 회랑.(미술관 건물에서 나와 베키오 다리 위로 이어지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의 바사리 회랑 (Vasari corridor)
코시모 1세의 뒤를 이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에 의해 1581년 우피치궁의 용도가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1세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가문의 수집품을 이리로 옮겨 전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개인 공간에 있던 컬렉션이 공적 공간으로 옮겨져 미술관 탄생의 시초가 됐다.
코시모 1세 사후 메디치가는 빠르게 쇠락해갔다. 그러나 미술품은 크게 불었다. 기울어가는 가문의 후예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아름다움을 탐닉했다. 일례로 미술품 수집광이던 레오폴도 데 메디치 추기경(1617~1675)은 회화 700여점, 드로잉 1만1000여점을 모았다.
1737년 메디치가의 마지막 남자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메디치가가 갖고 있던 토스카나 대공 지위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당시 남아 있던 메디치가의 직계 후손은 잔 가스토네의 누이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뿐이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그림, 서적, 보석, 가구, 기타 진기한 물건 등 가문의 수집품 전체를 피렌체에 영구 기증했다. 그는 기증 문서에서 "메디치 컬렉션이 나라를 아름답게 하고 공공의 이익과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쓰여야 하며 절대 피렌체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1741년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메디치家의 명품 컬렉션…르네상스를 화폭에 담다/ 아시아 경제, 2020. 3. 4.
15. '수련'에 집착한 모네, 인상주의 꽃피웠다
파리에서 80㎞ 떨어진 지베르니 정착 후 집에 연못 만들고 정원 가꾸기 열중
1890년대 말부터 '수련' 그리기 시작…1909년 전시회 성공으로 명성·富 쌓아
공들였던 오랑주리 전시 못 보고 영면…현재 마르모탕모네 미술관이 새 성지로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층에는 두 개의 커다란 타원형 전시실이 있을 뿐이다. 이 두 전시실은 모네의 대형 패널화 '수련'으로 벽 전체가 덮여 있다. '수련'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든다. 인상주의 사랑이 유난스러운 일본인, 한국인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모네는 1890년대 말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베르니에 정착한 지도 15년이 흘러 있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지만, 1883년 모네가 이사 갔을 때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센강의 지류인 엡트강이 지베르니를 스쳐 가까운 센강으로 흘러든다. 엡트 강가에는 포플러와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고, 센강 건너편 언덕에는 작은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모네를 이곳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지베르니에 이사할 때만 해도 모네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무리해서 집을 옮긴 후 모네는 자기가 사고 친 게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모네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1880년대 말 인상주의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돌아서고, 그림값이 오르면서 모네는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네는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다. 가난할 때도 집을 구하면 마당에 화초부터 심었다. 지베르니에는 원래 손바닥만 한 마당이 딸려 있었으나 모네는 주변 땅을 사들여 정원을 넓혀갔다. 1893년 모네는 앱트 강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시골 사람들 생각에 물길이란 물레방아를 돌리거나,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데 쓰는 것이지 연못에 물을 대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네는 화를 내며 자신의 계획을 고집했다. 지방관청은 이제 대가가 된 모네를 무시하지 못하고 허가를 내주었다. 연못을 만들지 못했다면 '수련'도 없었을 것이다.
정원에 색깔 맞춰 꽃을 심고, 연못에 수련을 심는 데 열중하던 모네는 어느 날 붓을 들어 연못을 그리기 시작했다. 1897년 여름 모네는 ‘거대한 수련 그림으로 벽 전체를 둘러싼 방’을 구상했다.
훗날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실현될 아이디어가 이때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려면 별도의 작업공간이 필요했다. 모네는 정원 한구석에 있던 오두막을 헐고 천장으로 빛이 들어오는 작업실과 창고, 거실과 침실을 갖춘 별도의 스튜디오를 짓기 시작했다. 1899년 스튜디오가 완성되었다.
클로드 모네 '수련', 모네가 '수련'을 그리기 시작할 때의 작품이다
1897년, 73x100㎝,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프랑스 파리.
1900년 예순 살이 된 모네는 뒤랑 뤼엘 화랑에서 첫 번째 '수련' 전시회를 열었다. 12점의 수련이 전시되었다. 1901년에는 연못 확장 공사를 하느라고 수련을 그리지 못했다. 1903년 연못은 다시 수련으로 가득 찼고 모네는 그림에 달려들었다. 1909년에 열린 '수련'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뒀다.
1860년대에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모네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인상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모네는 붓 하나로 명성과 부를 쌓아 올렸다. 수련이 활짝 핀 지베르니의 정원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우울한 말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1년 부인 알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알리스는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화가와 부유한 후원자의 아내로 만나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루고 30년 이상을 함께 살아왔다.
모네는 슬픔에 빠져 한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1914년에는 지병을 앓던 맏아들 장이 세상을 떠났다. 바깥세상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죽고 있었다. 전쟁은 지베르니 턱밑까지 와있었다.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과 알리스의 아들 장 피에르 오슈데는 입대했고, 지베르니에는 야전병원이 들어섰다.
일흔이 넘은 모네는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수십 년 동안 야외에서 그림으로 그리며 직사광선 아래 눈을 혹사한 결과였다. 하지만 모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 그리는 일뿐이었다.
1914년 모네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수련' 연작에 착수했다. 수십 개의 캔버스가 쌓여갔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선포되었다. 다음 날 모네는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 동안 죽은 넋을 위로하고, 평화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대형 '수련'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편지였다.
클레망소는 모네와 젊은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진보적인 언론인으로 프랑스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 애썼으며 1917년 수상직에 오른 터였다.
모네는 연작을 그릴 때면 여러 캔버스를 동시에 시작해 전체적으로 색조와 분위기를 맞춰가며 완성했다. 모네가 작품과 씨름하는 동안 클레망소는 전시 공간을 물색했다. 처음에는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로댕 미술관이 물망에 올랐다.
오랑주리 안을 제시한 사람은 클레망소였다. 오랑주리는 튈르리 궁전의 온실이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잡다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클레망소는 틈틈이 지베르니로 찾아가 쇠약해진 모네를 격려하는 한편 해당 부처와 협의해 오랑주리를 전시 공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모네는 자신의 '수련'이 미술관에 걸린 것을 보지 못하고 1926년 12월 눈을 감았다. 다음 해 클레망소가 참석한 가운데 오랑주리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두 개의 타원형 전시실은 8점의 '수련'으로 둘러쳐졌다. 높이 2미터, 8점을 모두 연결하면 폭이 91미터에 달했다.
오랑주리 '수련' 전시실
제1 전시실 네 개의 패널은 각각 ‘물에 비친 구름’, ‘아침’, ‘녹색 그림자’, ‘일몰’을 묘사하고 있다.
제2 전시실 네 개의 패널은 물가의 버드나무와 연못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이 커다란 그림 앞에 서면 하늘과 물, 빛 속에 풍덩 빠져든 느낌을 갖게 된다.
모네의 예술 인생을 결산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수련'은 인상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모네는 말년에 풍경을 관찰해 재현하는 인상주의 방식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대신 그의 관심은 색채 자체와 색의 조화로 옮겨갔다. '수련'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후기로 갈수록 표현 대상이 무엇인지는 덜 중요해지고, 빛과 대기가 만들어내는 색채의 변화, 분위기가 더 중요해짐을 알 수 있다.
종국에는 연못임을 나타내는 지시적 요소는 아예 사라지고 빛의 반사, 물의 투명함, 거기 비친 하늘, 어른거리는 그림자만 남는다. 추상화가 칸딘스키가 모네의 후기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오랑주리 미술관의 북적거리는 현재 모습과는 달리 개관 당시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말 사람들의 관심은 추상, 큐비즘, 초현실주의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에 쏠려 있었다. 인상주의는 한물간 사조로 취급되어 잊혀가고 있었다.
오랑주리가 인기 있는 미술관이 된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다. 전후 세계 미술관들이 인상주의 기획전을 열고, 연구서가 나오고, 미술시장에서 인상주의 작품이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오랑주리는 관람객으로 붐비게 되었다.
모네가 43년을 살았던 지베르니는 둘째 아들 미셸에게 상속되었다. 모네의 의붓딸이자 며느리인 블랑슈 오슈데가 지베르니를 관리했다. 알리스의 딸인 블랑슈는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모네의 아낌을 받았다.
자라서 모네의 맏아들 장과 결혼했다. 1914년 장이 죽은 후에도 모네 옆을 지키며 지베르니를 관리했다.
1947년 블랑슈가 세상을 떠나자 지베르니는 잡초가 무성해졌다.
지베르니, 모네의 집
미셸은 1966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없었던 미셸은 아버지의 작품과 컬렉션, 지베르니를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써놓은 상태였다. 아카데미는 지베르니를 보수하고 관리할 자금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
1970년대 말 미국 부호들이 기금을 조성해 지베르니는 복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80년 일반에 공개되었고 오늘날 연간 50만 명이 찾는 명소다.
모네가 그린 '수련'들 대부분은 현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1914년부터 1926년까지 125점의 '수련'을 그렸다. 그중 8점을 국가에 기증해 오랑주리 미술관이 탄생했다. 나머지는 미셸에게 상속되었다.
위에 말했듯이 모네가 죽었을 때 인상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관람객이 없어 텅 비었고, 미셸은 상속받은 수많은 '수련'을 팔 수도 없었다.
'수련'을 기증받은 아카데미는 마르모탕을 전시 공간으로 택했다. 미술관이 너무 좁았으므로 정원을 파서 지하에 새 전시실을 만들었다. 1970년 마르모탕 미술관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했다.
오늘날 모네를 위한 또 하나의 성지가 되었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수련'에 집착한 모네, 인상주의 꽃피웠다/ 아시아 경제, 2020. 5. 8.
[출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Ⅱ- ▣판 메이헤런-위작 사기▣이카로스의 추락▣피카소-한국전쟁▣다빈치-두 벌의 모나리자▣마네-아스파라거스 다발▣메디치家 명품 컬렉션▣수련에 집착한 모네|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