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김덕화 목사님께서 신문 지상 등에 기고하신 글이나 인터뷰 내용들을 모아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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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현 기자 shkang@chtoday.co.kr
저쪽 언덕으로부터 중대장인 듯 한 사람이 달빛에 권총을 번쩍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총을 받아 들고 보더니 “국군놈이 여기서 총에
맞은 것이 분명하니 이 일대를 철저히 토벌해서 잡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인민군들이 예, 예, 응답하며 주위의 작은 소나무나 풀포기들을
빈틈없이 뒤지며 산 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조금만 뒤를 돌아 보았더라도 나는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일 총맞은
곳에서 산쪽으로 앞으로 나아가 숨었더라도 발견 되어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아슬 아슬했던 스릴(Thrill)의 장면을 회상 할 때면
몸서리를 치게 된다. “인간의 목숨은 백지 한장 차이라”는 말을 심감하게 된다. 잠시 후,산 너머에 인민군들의 인원 파악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복숭아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동안 어디선가 멀지 않은 곳에서 “쿠르르! 쿠르르!” 하는 이상한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처음에는 크게 들리더니 차차 그 소리가 작게 들리다가 잠시후에는 끊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어디든지 숨어야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했다. 사람은 다급하게 되면 앞을 내다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른다. 나는 나무 가지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감각이 없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며 숨겨 줄만한 동지의 집들을 몇 집 찾아 들어갔으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총격전이 있었던 직후였으므로 놀란 그들은 한결 같이 눈도 뜨지 않고 죽은듯이 무언의 거부를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숨으려 했던
생각을 포기하고 산을 넘어 배를 타야 하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그때 만일 누가 나를 숨겨 주었더라도 나는 약조차 자우로 살 수 없는
적지에서 치료도 받지 못한채 죽었으니라.
오사카의 밥퍼’ 이병호 선교사·김덕화 목사
[출처] 국민일보 2008.12.30 17:43
마음
덥히고 영혼 채우는 한그릇 국밥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지난 18일, 일본 오사카 세이조구 니시나리 지역의 유니온교회 안. 행색이 남루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160여명이
성탄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니시나리 지역은 오사카뿐 아니라 일본 전체에서도 유명한 홈리스(노숙인) 밀집지역이다. 이곳에 일용직
노무자, 행려자까지 2만5000여명이 모여 산다. 최근 이곳에 가면 먹이고 재워준다는 소문이 돌아 3만여명으로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
중심부에 자리잡은 유니온교회를 담임하는 이병호(57) 선교사와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을 지낸 김덕화(73) 목사는 매일 오후 6시 이들을
대상으로 무료급식 '밥퍼사랑'을 펼친다.
교회에 모인 노숙인들은 1시간 정도 찬양과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인근 다른 급식소와 틀린
점이다. 손벽을 치며 찬양하고 메시지에 '아멘'으로도 화답하는 이들은 설교가 끝나면 질서정연하게 배식을 받아 음식을 나누고 자신들이 설거지까지
깨끗이 한 후 헤어진다. 국밥 형태로 한 그릇씩 나눠지는 이 식사가 하루의 유일한 양식인 이들도 적지 않다. 종교단체나 타 교회에서 실시하는
무료급식은 보통 주 1∼2회 뿐이나 이곳은 매일 식사를 제공한다.
"식사 때문에 할 수 없이 드리는 예배지만 이 중 20∼30%는
3개월 정도가 지나면 정신을 차리고 노숙생활을 청산합니다. 이 중에서 주님을 뜨겁게 만나 삶이 변화되고 신학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여럿됩니다."
부흥사였던 이 선교사는 일본부흥운동에 남다른 사명을 갖고 활동했던 고 신현균 목사를 따라 이곳에 왔다가 8년전
일본선교사로 아예 자원한 케이스다. 그리고 4년전부터 '오사카 밥퍼사랑'을 펼치고 있다.
이 선교사는 "적지않게 소요되는 쌀값과
부식비를 한국교회 부흥회를 다니며 받는 사례비와 일부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며 "노숙인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가운데 일본선교에 대한 강한 비전과 소망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대부분
정신적 충격이나 사업실패 등으로 인해 가출했으며 전직이 화려했던 이들이 많습니다. 상담을 통한 기도와 격려가 이뤄지면 놀라운 치유가 일어납니다.
'밥퍼 선교'야 말로 선교 불모지 일본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 선교사에게 금년 6월부터
김덕화 목사가 공동목회를 하기로 해 여간 든든하지 않다. 김 목사는 감리교단 일본선교사로 1972년에 파송받아 고베동경교회에서 2005년
은퇴하기까지 33년을 일본선교에 헌신해 왔다. 이제 그 남은 힘을 유니온교회 '밥퍼 사역'에 나눠주고자 나선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늘 이런 노숙인 구호사역을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퇴 후에 하도록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눈빛을 통해 이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어요. 이들 중에서 몇 명이라도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 목사는"일본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복음이 없기에 심한 우울증 환자가 많고 삶의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노숙인처럼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에게
복음이 제일 먼저 찾아가야 하며 이렇게 먼저 심겨진 복음은 놀라운 방법으로 계속 퍼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니온교회는
일본그리스도교회연합(총회장 오쿠야마 미노루 목사) 소속이다. 또 산하 신학대학인 유니온쉐퍼드신학대학대학원 일본분교를 이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일본 목회자 100여명이 공부 중이며 올해 제1회 목사안수식을 갖기도 했다. 또 일본목회자 연수 및 자질향상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이 선교사는 "1000명의 일본목사를 바르게 깨우고 살려 이를 통해 1000개의 일본교회가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유니온교회의
목표"라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반드시 주님이 이루실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공무원 출신으로 이곳에 흘러
들어온 하루야마(61)씨는 현재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밥퍼에서 만난 예수님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다"며 "앞으로 노숙인들을 복음으로
깨우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옆에서 돕겠다"고 말했다.
한일의원연맹 일본회장인 도이 류이치 중의원이 얼마전
이곳을 방문, "김 목사님과 이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사역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 부르신 것으로 믿는다"며 "일본인도 하지 못하는 일을 복음과 함께
전하는 두 분에게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덕화 목사는 "복음화율 0.7%에 불과한 일본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더 사랑하고 감싸
안아야 할 나라이자 최고의 선교지"라고 말했다. 이병호 선교사는 "말씀으로 변화돼 예수를 믿겠다는 노숙인들에게 이제부터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사입힌 뒤 세례를 주겠다"고 새해 계획을 밝혔다.
김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노숙인들이 교회에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섰다. 주걱과
국자를 든 이 선교사와 김 목사가 밥과 국을 푸짐하게 퍼주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국밥 한그릇에 노숙인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사카=글·사진 김무정 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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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화 목사 특별기고] 일본선교, 주님이 함께하신 생명의 행진| 일본소식
일본 선교지 오까야마(岡山)교회의 태동
오까야마 (岡山)에는 감리교회의 최기석목사님이 배치되어 오게 되었다. 최목사님을 단기선교사로 맞이하기 전에 오까야마(岡山)에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한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세계제2차대전이 1945년8월15일에 일본의 소화(昭和)천황이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미국연합군의 승리로 종전이 되었다. 일본의 통치아래 36년동안 나라의 주권을 잃고 있던 우리나라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해방의 기쁜소식은 일본땅에 강제노동으로 끌려와서 살고 있던 237만의 재일동포들에게는 더없는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그들은 탄광이나 각종 작업현장에서 자유없는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 했는지 알수 없다. 그러므로 해방의 기쁨을 안고 모두들 고국으로 돌아가는 때에 이재호(李在好)집사와 그의 가족은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돌아갈수는 없어서 가더라도 천천히 조국의 형편을 알아보고 가리라는 생각에서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해방후 1년만에(1946년) 와께(和気)에서 岡山 현재의 東岡山로 이사를 해서 생활의 기반을 잡게 되었다. 그처럼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저앉은 동포의 수는 70만명으로 추산 되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며 믿음안에서 자라온 이집사는 한국교회가 없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일본교회인 고낭교회(岡南教会)에 가족과 함께 출석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① 믿는 자들의 만남 해방 후 3년 경에 김원치 목사(西成教会担任牧師)는 무고천 교회(武庫川教会)의 안금년 집사님으로부터 오까야마사이다이지(岡山西大寺) 근처에 예수 믿는 한국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어느날 김원치 목사는 전영복 목사(日本牧師)와 유석준 장로와 합께 주소도 모른채 오까야마 (岡山)에 있는 믿는 한 가정을 찾아나섰다. 사이다이지역(西大寺駅)에서 내려서 방향도 없이 가다가 한국 부인인 듯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여기 한국사람으로 예수 믿는 집이 어딘지 아십니까?”그때 그 부인은 “바로 저의 집입니다. 웬일이십니까?” 그 부인이 바로 이재호 집사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날 일행은 이집사댁으로 안내되어 감격적인 가정예배를 드렸으며 미리 알고 준비한 것처럼 예비되어 있던 떡을 함께 나누었다. 그때 이 집사는 조총련연맹에 속해 있던 때라 방안의 벽에는 예수님의 사진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일행은 놀랐던 것이다.이때로부터 총회와의 연락이 계속되는 가운데 오까야마교회의 개척의 꿈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1957년 가을 오까야마거류민단의 사무국장으로 있던 김차업(金次業)씨는 이재호 집사가 예수 믿는 분임을 알고 자기딸도 일본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집사는 당장에 그의 집을 찾아가 김차업씨의 따님 가네후지에이(金藤榮)자매와 그의 어머니 구점득(具点得)씨를 반갑게 만났던 것이다. 믿는 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본땅에서 더우기 같은 동족으로 믿는자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수 없었다. 그 때로 부터 매 주일마다 김차업씨댁에서의 예배가 시작 되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오까야마(岡山)에 한국교회가 세워지기를 소원하며 기도하였다. 뜻있는 곳에 길이 열리고 기도하는 곳에 주님의 인도하심은 함께 하는 것이였다. 구점득 성도댁에서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난 어느날 50대의 낯선분 한 분이 예배드리는 곳에 찾아왔다. 영접하는 이재호 집사에게 “한국양반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예배 드린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예, 잘 오셨습니다. 여기서 예배드립니다. 누구신지 어서 들어 오십시오.”그가 바로 임춘발(林春發)집사였다. 그는 이재호 집사와 함께 오까야마교회를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두 기둥처럼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다. 새 믿음의 가족을 맞이한 그 날의 예배는 더욱 화기에 찼다. 임춘발 집사는 1958년8월에 효고켄(兵庫県)가미고리 라는 곳으로부터 오까야마로 온(全)가족과 함께 이사오게 되여 지금의 호깐쵸(奉還町)에 정착하여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 집사도 역시 고향에서부터 일찌기 교회에 인도되여 믿었으며 한때는 어려운 때에 교회의 사랑을 받고 힘을 얻게 된 경험도 있다고 하였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바 되어 어디를 가든지 먼저 교회를 찾아 나갔으며 계속 믿음을 지켜왔다는 것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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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화 목사 기고] 일본에 부족한 한 가지는(3)| 일본소식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십자가 사랑 알아야”
성경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십시오. 옛 사람은 사라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는 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간수들이 그의 동료들을 굶주리게 하고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며 간수들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니 잔혹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미움이 불쌍히 여기는 자애(慈愛)로 변화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만일 내가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선교사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일본 땅에 와서 전하고 싶습니다. 그는 그의 기도대로 신학교에 들어가 재학 중에 결혼하고 1948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일본에 와서 현재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 소책자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소책자를 다 읽고 난 후지다 대장은 성경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더욱이 고붸루선교사 부부와 그의 딸 마가렛이 원수와 같은 일본 군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정성을 다해 봉사하는 일을 가능케 한 것이 성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성경을 구입하여 읽어가는 가운데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 기도하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눅23:34)’ 후지다 대장은 ‘아. 알았다 이것이었구나.’ 그리고 고붸루선교사 부부가 최후의 순간에 무엇을 기도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즉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 지금 일본 군인들이 나와 제 아내를 죽이려고 일본도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기도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딸 마가렛도 영감으로 전달되었으리라고 믿어졌습니다. 그 순간 어둠처럼 번쩍하는 섬광처럼 성령이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저들’속에는 자기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과 ‘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처럼 ‘자신이 47년의 긴 세월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게 살아온 것이 아니었던가?’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전쟁은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정의의 전쟁으로 적을 많이 죽인 사람이 충신으로 훈장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후지다 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을 접함으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본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본에서 한국의 순수한 애정드라마 ‘겨울연가(冬のソナタ)’가 어떻게 한류의 붐(Sensation)을 일으키게 되었을까요. 어떤 일본의 중년 여성은 TV 인터뷰에서 고백하기를 “만일 ‘겨울 연가’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죽고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고 메마른 이 세상에서 삶을 계속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쓸쓸하고 고독해서 살아야 할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었는데 겨울연가와의 만남은 나에게 살 보람과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라고 눈물을 머금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대변하고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본은 참된 유일신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며 그 사랑을 각자의 삶에 적용해서 살지 못하는 부족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실제로 사랑할 때까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줄 사랑은 생각하지 않고 받을 사랑만 생각하니 불평불만이 끝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곧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친 본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대로 사랑을 수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눅17:10)’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교만의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받기를 원하나 곳곳마다 사랑이 없어 탄식소리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민에게 전합시다. 할렐루야!
강성현 기자 shkang@ch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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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강성현 기자 shkang@chtoday.co.kr
▲‘일·한 합동기도회’ 참석자들이 둘째날 일정까지 무사히 마치고 기념 촬영을 했다. ⓒ강성현
기자 |
기도회에서는 시미즈 목사의 사회와 개회 말씀에 이어 일·한교역자리더연수회 일본측 후지이 목사가 기도를, 한국측 오창학 목사가 인사를,
재일대한기독교회 관서지방회 회장 조영철 목사가 성경 봉독을, 관서지방회 성가대연합회가 찬양을 했다.
메시지는 후쿠시마제일침례교회
사토 아키라 목사가 ‘고난을 기뻐한다(벧전 4:12-13)’는 제목으로 전했다. 이날도 사토 아키라 목사는 동일본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교회
성도들과 지내온 3개월의 여정을 전하고,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보호하며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
사토 아키라 목사가 섬겨온 후쿠시마제일침례교회는 원전 5km 이내의 유일한 교회로 인구 1만명의 작은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200여명의 성도들이 모일 정도로 지역사회와 함께해온 교회였다. 하지만 지진과 쓰나미에 이은 원전 사고로 교회로 돌아갈 수 없게 돼, 성도 6-70여명은 사토 아키라 목사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피난 생활을 감당해 왔다.
사토 아키라 목사는 당시 상황을 ‘서바이벌’이라 표현했다. 실상은 뉴스가 전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고 참혹했다. 삼시 세 끼 6-70여명의 대식구를 먹여야만 하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한 전쟁을 해온 것이다. 그에게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한 달과도 같았다. ‘선진국인 일본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하는 생각이 밀려오기도 했고, ‘오직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밖에 없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생활을 견뎌왔다.
하지만 이번 고난을 통해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바로 교회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토 아키라 목사는 “지진 이후 매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함께하는 성도들로 인해 24시간 교회가 되었다”며 “‘교회가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토 아키라 목사와 성도들은 3월 31일부터 동경 오쿠타마에 독일선교사가 개척한 복음의 집 캠프장에 머무르고 있다. 모두가 친인척이 있고 피난 갈 곳이 있지만 ‘마음의 고향인 교회를 떠날 수 없다’며 이곳저곳을 떠돌고 피난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사토 아키라 목사는 하나님이 후쿠시마제일침례교회를 이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교회로 선택했고, 동북지방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차
있다. 작은 시골교회에 불과하던 교회가 이제는 전 세계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고,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후원을 받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기도회에는 한국과 일본의 리더들이 대거 참석했다. 왼쪽부터 림인식 일한선교협력회 총재, 김덕화 재일대한기독교회
증경총회장, 정연원 재일대한기독교회 증경총회장, 사토 아키라 목사, 김무사 재일대한기독교회 부총회장, 박용수 재일대한기독교회 교토교회 담임.
ⓒ강성현 기자 |
피해지 사진을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다. 소개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교회 정연원 목사가 피해지 사진을 소개하고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헌금 전달식도 가졌다. 전달은 일·한선교협력회 총재 림인식 목사가 일·한선교협력회 일본측 시라이 목사에게 전달했으며, 행사 당일에 모금된 헌금도 전액을 전달했다. 모든 행사는 일한선교협력회 시라이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