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국형사
시대적 상황을 침묵으로 일관하려는 고요한 산사의 적막은 늘 그렇듯 예사롭지 않은 예감을
불러일으킨다만 고승들의 체취가 머물었을 산자락에는 수풀의 우거짐만이 덮혀져 이따금
오가는 바람만이 외로이 지나갈 뿐
고요의 숨결인양 나뭇잎만 너플 거리누나 그 옛날 가쁜숨결 몰아쉬며 산등성이를 오르내렸을 고승들의
숨소리가 산자락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귓전에 맴도는 바람소리가 나의 마음으로 날아든다
오직 나라 위한 구국충정으로 산사를 오르내렸을 고승들이 품었을 기개와 절제의 이면을
두텁게 하는 명제는 또 무엇이었을까
산사의 밤하늘 위로 빛나는 오늘밤 저 별빛은 고승들의 눈빛처럼 빛나고 조용한 산사를
휘감았을 고승들의 기개와 절개를 산사를 보듬고 있는 오늘밤 달빛처럼 그 옛날도 그랬을까
산사를 찾을 때마다 고요하지만 느낌이 다른 것은 산세 특유의 향이랄까 나름대로 그
산자락만이 품고 있는 비경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국형사를 다녀 가면서 또 다른 감회와 쓸쓸함이 교차하는 이면에 드리우는 착잡합은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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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형사는 지금으로부터 1,150여 년 전 신라 경순왕 때에 무착조사(無着祖師)께서 창건하셨으며 당시는 고문암(古文庵) 혹은 보문암(普門庵)이라 칭하였다. 국형사로 명명하게 된 것은 조선 숙종(1680) 어명(御命)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것은 조선 태조대왕 때부터 이곳에 만들어진 동악단에서 나라의 산제를 거행해 온 것과 관련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원주목> 조에 보면 산정에 있는 치악산사(雉岳山寺)에 대하여 ‘산정에는 보문당이라는 당이 있어서 춘추로 향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 권 128 <오례(五禮)>조에는 ‘원주에는 명산이 있는데 치악이다.
주의 동쪽에 있으며 춘추로 향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司)이다’라고 하였다. 보문당과 동악단의 명칭에서 보이듯이, 당(堂)과 단(壇)은 신을 받들고 제를 올리는 곳으로, 국형사가 위치한 도량은 풍수의 기운과 산신의 기운이 충만한하곳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국형사의 산신각인 동악단은 조선 태조 때 나라를 켜지는 동악신들을 봉사(奉祀)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단(壇)으로써, 원주, 평창, 정선, 영월, 횡성 등 5개 군수가 모여 매년 제향을 봉행하였다. 이와 같이 치악산제는 마을 단위의 동신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 국토의 동악에서 치러졌던 산제였던 것이다.
(참조;「원주의 역사와 문화 유적」 562쪽, 1997, 江原鄕土文化硏究會) 유서 깊은 전통사찰의 역사와 국태민안(국태민안)을 빌었던 5악제 중에 동악제라는 국가적 제사를 봉사해 왔다는 점은 국형사의 명명(命名)중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역사적 위상과 풍수적 천혜의 위치로 국형사는 오랜 전통 속에 남다른 의미를 지녀오고 있다.
풍수의 선조로 불리는 도선 이후 무학 대사가 왕에게 진언하여 오악단을 세웠다고 한다. 계룡산 신원사에 중악단이 세워졌으며 서악으로는 황해도 구월산에, 남악의 하악단은 지리산에, 북악의 상악단은 묘향산에, 그리고 동악으로는 치악산 국형사에 동악단이 세워졌으니 그 풍수적 자연천혜의 위치에 국형사의 도량이 위치하고 있음이 새삼 주목되는 바이다.
국형사에 전해 내려오는 바 조선 2대 정종의 둘째 희희 공주는 폐병이 들어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이곳 국형사에 와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공주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나는 동악의 신령이다. 네가 정성껏 기도하는 것이 갸륵하니 곧 너의 병이 나을 것이다 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00일 기도 끝나자 공주의 병이 말끔히 나았는데 그때 마신 약수터가 지금도 산신각인동악단 너머에 있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 약수의 효험을 믿고 길어다 먹는다고 한다 정종은 딸의 쾌유에 기뻐하여 절을 크게 지었음은 물론 산신을 모시는 동악단에서 봄가을로 호국대제(護國大祭)를 지내게 하였다는 후담도 전해져 내려온다
솔밭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 존바에즈 / The River In The Pines - Joan Ba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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