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
세종의 위업 살리려 나는 살았고 세종의 유훈 지키려 그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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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 |
신숙주(申叔舟·1417~75)와 성삼문(成三問·1418~56)은 세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집현전에서 ‘신흥강국 조선’의 꿈을 현실로 옮긴 당대 최고의 엘리트 학자였다. 두 사람에게 세종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영원한 주군’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으로 가족보다 더 가깝던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신숙주는 부귀영화의 길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길로 갈라선다. 신숙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옛 동무 성삼문을 보며 회상에 젖는다. |
“네가 어떻게 그 말씀을 잊을 수 있단 말이냐!” 두 손이 오랏줄에 묶인 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성삼문이 나를 쏘아보며 던진 한마디였다. 시뻘건 쇳조각이 배꼽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상태에서도 그는 태연히 “다시 달구어 오라, 나으리(세조)의 형벌이 참 독하다”며 독기를 부렸다. 그의 허벅지는 쇠꼬챙이로 뚫린 지 오래고, 팔도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도승지로서 주상(세조) 앞에 입시한 내게 그가 던진 말은 내 가슴을 깊숙이 뚫고 들어왔다. “옛날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숙직할 때 영릉(英陵, 세종)께서 원손(元孫, 단종)을 안고 뜰을 거닐며 말씀하지 않으셨더냐. ‘내가 죽은 뒤라도 너희들은 이 아이를 잘 돌보라’는 그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거늘, 네가 이토록 악할 줄 미처 몰랐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396) “도승지는 뒤편으로 피하라.” 곤혹한 처지의 나를 구해주려는 주상의 배려였다(‘연려실기술’).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의 호)에게 따져묻고 싶었다. 세종의 ‘잘 돌보라’는 말씀이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지를. 오히려 당신 사후에, 또는 적어도 2년이 겨우 지난 뒤 문종께서 훙(薨)하셨을 때, 사직을 보존할 수 있는 분에게 왕위를 돌렸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세종께서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임금과 세자에게 유고가 있을 시 반드시 왕자가 섭정하라”(세종실록 32년 1월18일조, 이하 ‘32/1/18’ 형태로 표기)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문종께서 승하하셨을 때 김종서 등은 ‘유훈’을 어기고 왕자, 곧 수양대군이 아닌 혜빈 양씨(楊氏, 세종의 후궁. 나중에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됨)를 내세우지 않았던가(문종실록 2/5/14). 그 후 단종조에 이르러 수양께서 섭정하게 되셨지만, 처음 잘못 끼운 단추는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켰다. 박팽년(朴彭年). 그는 나와 동갑내기(1417년생)로 평소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녀 주위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25세 때(세종 24년, 1442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박팽년과 나, 그리고 한 살 연하의 성삼문이 왕명을 받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할 때, 우리는 틈만 나면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성삼문이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면,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소냐”(‘추강집’)라고 받는 식이었다. |
무엇을 향한 절개인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선비의 절개와 지조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향한 절개요 지조냐가 더욱 중요했다. 태조 임금이 세우시고, 태종과 세종대왕에 이르러 기초가 닦인 이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얹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사한 환관들이 힘을 얻고 더벅머리 선비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형국. 즉 “뱀을 손으로 움켜쥐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은 위태로운 형세”(신숙주, ‘제고화병십이절’)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세종께서 물려주신 “팔진도(八陣圖, 유비와 제갈량이 이룩한 위업)”를 계승해야 했다.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 위험한 때 당하여 명 받잡고 자기 한 몸 잊었네 /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니 /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신숙주, ‘제갈량’) 그 점에서 나의 조부 신포시(申包翅)의 판단은 옳았다. 조부께서는 끝내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성삼문의 조상 성인보와 다른 길을 택하셨다. 당신은 고려가 망했을 때 잠시 은거했지만 세종의 정치를 보고 다시 출사하셨다. 이미 고려왕조보다 더 뛰어난 왕조가 탄생했는데, 굳이 왕(王)씨 가문에 절의를 지킨다는 것은 ‘독야청청하다’는 허명을 위한 일일 뿐이다. 특히나 매우 높은 수준의 위민(爲民)정치를 베푸는 군주가 나타났지 않았는가. 적어도 내가 배운 “인을 베푸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해야 하는” 군자는 특정 왕조나 군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모름지기 참된 군자는 “얼음 깨고 펄펄 뛰는 잉어를 얻는” 것과 같은 기상을 지니고, “나라의 안태(安泰)”를 우선시하며 “성은(聖恩)의 시절을 위해 마음을 다 바치는” 충성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신숙주, ‘보한재집’ 권12; 권9). 기상과 충성으로 말하자면 사실 김종서 대감만한 인물도 없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7년 동안의 함길도 근무에서 보듯이 성은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김종서 대감은 특히 6진(鎭)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의 지시를 받아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낼 방략”을 입안한 것에서 보듯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조선 건국기의 북방 방위전략은 수비 위주의 ‘주진군(主鎭軍)체제’에서 공격과 수비를 병행할 수 있는 ‘익군(翼軍)체제’로의 전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세종임금 때 만들어진 새로운 방략은-나중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익군체제에 공격편제를 더욱 강화해 ‘적을 제압해 승리를 거두는(制勝)’ 공세적인 방략체제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김구진 외 ‘제승방략의 북방방어체제’ 1999, p.15). 1439년(세종21) 7월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응할 방략을 자세히 갖추어 보고하라”(21/7/21)는 세종임금의 하명이 있었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 대감과 김 대감의 종사관(從事官)이던 나는 6진의 지리·지형을 자세히 조사한 끝에 그곳에 적합한 방략을 고안해 올렸다. 그것은 종래의 열진방어(列鎭防禦) 태세 외에 6진 대군분(大軍分)과 3고을 분군(三邑分軍)이라는 공격전술이 추가된 것이었다. 6진 대군분(大軍分) 편제는 큰 강(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 지역을 공격할 때 사용되는 작전 지침이었다. 3고을 분군 편제는 정벌군이 만주에 투입되었을 때 전방의 정벌군을 계속 지원하거나 다른 오랑캐들이 후방지역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전 지침이었다. 무엇보다 이 체제는 거미줄처럼 세밀한 연락망, 파수(把守), 복병 등을 통해 적진의 변화를 알리는 봉화체제를 그 생명으로 하고 있었다. 파저강 토벌에서 보듯이, 유사시에 조정에 긴급 연락하여 정벌군이 출동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친(至親)과 자제라 하더라도 이 방략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로 하라”(19/3/11). 세종임금의 특별 전지에서 보듯, 이 제승방략은 중대한 국가기밀이었다. 만약 이 기밀이 새나갈 경우 국가안보는 물론이고 자칫 왕실의 안녕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뒤의 ‘이징옥의 난’처럼 국가기밀의 누설은 곧바로 나라의 안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幾而不密殆). 내가 보기에도 수비와 공격을 유연하게 전개하는 이 방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1460년(세조6) 7월 오랑캐 낭볼칸(浪兒罕)이 침입해왔을 때 주상께서는 나를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하면서 이 방략을 내려주셨다. |
당시 나는 대군분 편제에 따라 함길도의 토착군사 1만2800명을 동원했다. 거기에 강원도 등지의 군사까지 합세했다. 보병과 기병 다수로 구성된 혼합군사 체제는 비록 짧은 시간에 편성되었음에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세조실록 6/9/11). 내가 무장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김종서 대감의 덕분이었다. 즉 김 대감은 6진을 개척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 나와 함께 북변(北邊)의 정황을 세밀히 조사해 세종임금께 보고하곤 했다. 그 보고서를 만들 때 김 대감이 빠르게 구술(口述)하면 내가 붓을 잡고 즉시 받아 적곤 했다. 김 대감은 그 글을 보고서 “내 문장도 실로 자부하는 바이지만, 그대의 글재주 또한 쉽게 얻기 어려운 문장”이라고 감탄하곤 하셨다(‘연려실기술’ 권3, 세종조고사본말). 이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충일한 김종서 대감이야말로 내가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문종 임금이 즉위한 다음부터 우리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었다. 선택한 주군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신수찬!” 운명을 바꾼 부름
“신수찬(申修撰)!” 낯익은 목소리였다(‘수찬’은 사서를 편찬하던 홍문관의 벼슬 이름). 고개를 돌려보니 수양대군께서 빙긋이 웃고 계셨다. 말에서 내려 읍(揖)을 하자, “어찌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오지도 않느냐”고 말씀하셨다. 마침 정수충과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수양은 내게 한잔을 권하면서 대뜸 “사람이 죽지 않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사직(社稷)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물으셨다(단종실록 0/8/10). ‘사직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말씀, 근래 수양께서 애용하는 표현이었다. 문종께서 훙서(薨逝)하신 후 황보인·김종서·정분이 의정부를 독차지하고, 시문에 뛰어난 안평대군에게 선비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 때문인지 수양대군은 자신과 함께 ‘사직을 위해 죽을’ 동지를 규합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선택의 때가 왔음을 느꼈다. 세종임금께서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문종실록 1/8/5)이라고 칭찬하신 때문인지, 이미 양측에서 여러 차례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세력’의 최고 실력자로부터 ‘함께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직접적 제의를 받은 적은 없었다. 약간 뜸을 들인 다음 나는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장부로 태어나 아녀자(兒女子)의 수중(手中)에서 편히 죽는다면 그것 역시 세상물정 모르는(在家不知) 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일생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의 선택이 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열세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사람의 생애에는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인 ‘명(命)’이 있다(태어나고 죽는 일 등). 하지만 불확실하지만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운(運)’의 제비를 나는 뽑아든 것이다. 이럴 땐 내가 ‘역사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대군께서는 선뜻 “그러면 중국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셨다(단종실록 0/8/10).
“안평은 적수가 못돼”
수양대군이 ‘중국행’을 결단한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집현전 교리 권람과 같은 사람은 극구 반대했다. 중국에 있는 사이 안평대군 세력이 선수(先手)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안평이 나의 적수가 못 되고, 황보인·김종서 또한 호걸이 아니니 (내가 중국에 가 있는 사이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임금(단종)만 보호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단종실록 0/9/10) 수양대군의 말이었다. 수양은 또한 나름의 대책을 세워놓았다. 즉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함께 데려간 것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이처럼 호기로운 결정은 인사권을 쥐고 흔들며 갖가지 구설에 오른 김종서 대감과 대조되었다. 이 때문에 인심을 많이 얻었다. 안평대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길창군 권근의 손자 권람은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는 수양께서 “나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라고 칭했던 한명회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세력규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평소 “수양대군이 비록 제세(濟世)의 재능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은 세력이 없어서 필부와 같다”(단종실록 0/7/28)고 본 한명회는 수양을 만난 다음부터 갖은 계책을 내놓았다. 한명회는 특히 무인(武人)과 장사(壯士)를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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