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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5권 / 세기(世紀) 5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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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사실(四郡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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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여름에 조선이 항복하자 그 지역에 낙랑(樂浪) 살펴보건대,
치소(治所)는 조선현(朝鮮縣)이다. ㆍ임둔(臨屯) 살펴보건대,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다. ㆍ현도(玄菟) 살펴보건대, 치소는 옥저성(沃沮城)이며 뒤에 구려(句麗)로 옮겼다. ㆍ진번(眞番) 살펴보건대, 치소는
삽현(霅縣)이다. 등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한서》
○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 6월에 진번군을 혁파하였다. 《상동》
○ 원봉(元鳳) 6년(기원전 75) 정월에 군국(郡國)을 불러 모아 요동과 현도의 성을 옮겨 쌓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바로 새 현도와 구려의 성이다.
○ 한 소제가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붙였다. 현도를 다시 옮겨 구려에 있게 하였다.
단대령(單大領) 이동의 옥저ㆍ예ㆍ맥을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그 뒤에 다시 영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의 7현을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 《후한서》
○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倭人)이 있는데, 1백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해마다 와서 조공을 바치고
알현한다. 《한서》
○ 선제(宣帝) 지절(地節) 4년(기원전 66)에 곽운(霍雲)을 현도 태수에 제수하였는데, 마침 모반한 사실이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상동》
○ 성제(成帝) 초에 오록충종(五鹿充宗)이 석현(石顯)의 당파로 몰려 현도 태수로 좌천되었고 어사
중승(御史中丞) 이가(伊嘉)가 안문 도위(雁門都尉)가 되었는데, 장안(長安)에 “이(伊)가 안(雁)으로 옮기고
녹(鹿)이 도(菟)로 옮겼다.[伊徙雁鹿徙菟]”는 노래가 떠돌았다. 《상동》
○ 낭야 태수(琅邪太宇) 조공(趙貢)이 고과(考課)하면서 불기 영(不其令) 설선(薛宣)을 청렴한 것으로
고과하여 낙랑 도위승(樂浪都尉丞)으로 옮겼는데, 유주 자사(幽州刺史)가 설선을 재주가 뛰어나다고
천거하여 완구 영(宛句令)으로 삼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안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이 유주(幽州)에 속해 있으므로 유주 자사가 천거한 것이다.”
하였다.
○ 동이 영(東暆令) 안사고가 말하기를, “동이는 현의 이름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동이는 처음에 임둔군의 치소(治所)였다가 뒤에 낙랑에 속하였다.
연년(延年)이 부(賦) 7편을 지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한 무제 때 제인(齊人) 연년이 글을 올려 황하(黃河)의 물길을 돌리는 계책에 대해
말하였는데, 혹 그 사람인가? 상고할 수는 없다.
○ 경시(更始) 연간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낙랑 사람 왕조(王調)가 군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서》
○ 광무제 건무(建武) 6년(30)에 낙랑 동부도위관(樂浪東部都尉官)을 폐하고 드디어 영동(領東) 지역을
버렸다.
○ 당초에 왕조(王調)가 낙랑군에 웅거하여 복종하지 않자, 가을에 낙랑 태수 왕준(王遵)을 보내어
공격하였다. 낙랑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살펴보건대, 《후한서》 왕경열전(王景列傳)에는,
“왕경의 아비 왕굉(王閎)이 낙랑군의 삼로(三老)가 되었는데 군의 조리(曹吏)인 양읍(楊邑)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였다.” 하였다.
○ 9월 경자에 낙랑의 대역(大逆) 죄인 가운데 참형(斬刑) 이하를 사면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0년 가을에 동이(東夷)의 한국(韓國) 사람이 백성을 이끌고 낙랑으로 와서 내부하였다. 《상동》
○ 23년 겨울에 고구려가 종족을 이끌고 낙랑으로 와서 복속하였다. 《상동》
○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전권을 휘두르면서 방자하게
굴었는데 탁군(涿郡)의 하급 관리로 있던 최인(崔駰)이 글을 올려 그의 장단점에 대해 자주 지적하였다.
이에 두헌은 그를 멀리하여 최인의 고과(考課)를 높게 매겨 바깥으로 내보내 장잠장(長岑長)이 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장잠현(長岑縣)은 낙랑군에 소속되었다. 최인은 멀리 외지로 나가 뜻을 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드디어 부임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상동》
○ 안제(安帝) 영초(永初) 2년(108) 10월 경인에 현도의 빈민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상동》
○ 5년 3월에 부여의 이(夷)가 낙랑의 성채를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다.
○ 구려 왕 궁(宮)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원초(元初) 5년(118) 6월에 고구려와 예ㆍ맥이 현도에 침입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후한서》 구려열전(句麗列傳)에는 “현도를 침입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하였다.
○ 건광(建光) 원년(121) 정월에 초하룻날 조회에서 황제가 선국(撣國)의 왕이 바친 음악과 환인(幻人)의
재주를 대궐 뜰에서 펼쳐 놓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관람하였다. 그러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진선(陳禪)이
자리를 뜨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제왕의 전정에서는 오랑캐의 재주를 펼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였다.
이에 상서 진충(陳忠)이 상주하여 진선이 조정을 비방하였으니 하옥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체포하지 말고 현도후성 장위(玄菟候城障尉)로 살펴보건대, 후성(候城)은 본디 요동군에 속하였는데,
안제(安帝)가 즉위한 다음에 현도에 속하였다. 삼게 하였으며, 또 조서를 내려 감히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경우에는 처자식과 종자(從者)의 이름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두 군의 살펴보건대, 두 군은 현도와 낙랑이다.
태수를 거느리고 고구려와 예, 맥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4월 갑술에 요동의 속국도위(屬國都尉) 방분(龐奮)이 거짓으로 위조한 새서(璽書)를 받고 현도 태수
요광(姚光)을 살해하였다. 요광이 인심을 잃었는데, 요광을 원망하는 자가 거짓으로 새서를 만들어 요광을
꾸짖고 사형을 집행하는 칼을 방분에게 내려 보내었다. 이에 방분이 요광을 참수한 것이다. 황제가 이를
불쌍하게 여겨 방분을 불러올려 죄주고 요광에게는 10만 금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아들을 낭중으로 삼았다.
○ 《책부원귀(册府元龜)》에는 “한 안제(漢安帝) 건광 원년(121)에 요동의 속국도위 방분이 3월 기미에 내린
조서를 받았는데, 그 조서에 ‘유주 자사 풍환(馮煥)과 현도 태수 요광을 죽이라.’ 하였다. 추안(推案)에는
기미에 내린 조서가 없었다. 이에 시어사(侍御史)를 유주목에 보내어 조서를 날조한 간신을 잡게 하였다.” 하였다.
○ 동 11월에 선비(鮮卑)가 현도를 침입하였다.
○ 12월에 고구려ㆍ마한ㆍ예ㆍ맥이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을 보내어서 주군과 힘을 합쳐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연광(延光) 원년(122) 7월에 고구려 왕의 동생 수성(遂成)이 현도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상동》
○ 3년 6월에 선비가 현도를 침입하였다. 《상동》
○ 순제(順帝) 영건(永建) 2년(127) 2월에 요동의 선비(鮮卑) 6천여 기(騎)가 요동과 현도를 침입하였다.
오환 교위(烏桓校尉) 경엽(耿曄)이 변두리 여러 군의 군사와 오환(烏桓)의 군사를 출동시켜 요새를 나가
격파하였는데, 수백 급을 참수하였고 포로와 우마 등을 많이 잡았다. 선비 3만 명이 모두 요동에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 《상동》
○ 양가(陽嘉) 원년(132) 12월 경술에 현도군의 둔전(屯田) 6부(部)를 다시 설치하였다. 《상동》
○ 질제(質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동사(東史)를 살펴보건대,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94년에 요동에
침범하였다고 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질제 본초(本初) 원년(146)이다. 고구려 왕 백고(伯固)가 다시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 영(帶方令)을 살펴보건대, 《군국지(郡國志)》에 서안평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에 속한다고 하였다.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 《상동》
○ 환제 영강(永康) 원년(167)에 부여 왕 부태(夫台)가 현도에 침입하였다.
현도 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였다. 《상동》
○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에 현도 태수 경림(耿臨)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니,
고구려 왕 백고가 항복하고 현도에 예속되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오봉(吳鳳)을 낙랑 태수로 삼았다. 오봉은 진류(陳留) 사람 오우(吳祐)의 아들이다. 오우가 제(齊)의
상(相)으로 있을 때 마융(馬融)이 양기(梁冀)를 위하여 태위(太尉) 이고(李固)를 헐뜯는 장계를 짓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오우가 마융을 꾸짖은 것이 환제 건화(建和) 원년(147)의 일이니, 오봉이 태수가 된 것은
영제(靈帝)와 헌제(獻帝) 때이다.
○ 중평(中平) 6년(189)이다. 처음에 양평(襄平) 사람 공손연(公孫延)이 관원을 피하여 현도에 들어와서
살면서 살펴보건대, 공손연이 현도에 들어와 산 것은 환제 영강(永康) 연간에 있었다. 아들
공손도(公孫度)에게 군리(郡吏)가 되게 하였다. 이 당시에 현도 태수는 공손역(公孫域)으로, 그의 아들
표(豹)가 18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공손도의 어릴 적 이름이 표(豹)이며 또 공손역의 아들과 나이가
같았으므로 공손역이 보고는 가까이하면서 사랑하여 스승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으며, 아내를 구해
주었다. 그 뒤에 유도(有道)로 천거되어 상서랑(尙書郞)에 제수되고, 조금 뒤에 승진하여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같은 군의 서영(徐榮)이 공손도를 천거하여 요동 태수가 되었다.
공손도는 현도의 하급 관리에서 발신하였으므로 요동군에서 무시를 당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관가에
도착하는 즉시 법을 적용해 요동군 내에서 이름난 호족 1백여 가를 주멸하니, 요동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이어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오환을 침에 위엄이 멀리 바다 바깥까지 퍼졌다. 초평(初平)
원년(190)에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군(遼西郡)과 중료군(中遼郡)으로 만든 다음 각각 태수를 두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현들을 거두어 영주 자사(營州刺史)를 둔 다음,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平州牧)이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 헌제 초평 2년(191)에 원소(袁紹)와 한복(韓馥)이 의논하여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추대하여 황제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예전에 낙랑 태수를 지낸 감릉(甘陵) 사람 장기(張岐)를 보내어 그 의논을 가지고
유우에게 가서 즉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자 유우는 큰소리로 장기를 꾸짖으면서
“경은 충신을 욕보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구주춘추(九州春秋)》
○ 살펴보건대, 장기가 낙랑 태수로 있었던 것이 어느 때인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 양무(凉茂)의 자(字)는 백방(伯方)이며, 산양(山陽)의 창읍(昌邑) 사람이다. 태조 때 낙랑 태수가 되었는데,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에 있으면서 양무를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무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삼국지》
○ 부여는 본디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때 부여 왕의 장례에는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미리 현도군에
갖다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가지고 가서 장례 지냈다. 공손연(公孫淵)이 복주(伏誅)되었을 때 현도의 창고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상동》
○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여 철마다 조알하였다.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는 군사를 일으켜 한(韓)을
정벌하였다. 이로부터 왜(倭)와 한이 드디어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상동》
○ 낙랑위(樂浪尉) 중명(仲明)이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화(化)하여 심어(鱘魚)가 되었다.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사람들은 심어의 이름을 위어(尉魚)라고 한다. 《시조수초목충어소(詩鳥獸草木蟲魚疏)》
○ 살펴보건대, 중명은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사이에 살았던 사람인 듯한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원년(233) 12월에 공손연(公孫淵)이, 손권(孫權)이 보낸 사신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의 머리를 참하여 보냈다. 공손연을 대사마 낙랑공(大司馬樂浪公)으로 삼았다. 《삼국지》
○ 처음에 공손연이 오(吳)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신하를 칭하니, 오나라 임금이 태상(太常) 장미(張彌)와
집금오(執金吾) 허안(許晏)을 사신으로 보내었다. 장미와 허안 등이 양평(襄平)에 살펴보건대,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治所)로 공손연이 도읍한 곳이다. 도착하자, 공손연은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먼저
그들이 데리고 온 관리와 군사를 분산시켜 중사(中使)인 진조(秦朝)ㆍ장군(張群)ㆍ두덕(杜德)ㆍ황강(黃疆)
등과 관리 및 군사 60명을 현도에 살펴보건대, 이곳은 현도군의 옛 치소가 아니다. 구금하였다.
현도는 요동의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있으며 태수인 왕찬(王贊)이 거느린 호수가 2백이다. 진조 등을
모두 민가에 가두어 두고는 음식을 받아 먹게 하였다. 40여 일이 지난 뒤 진조와 장군 등이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멀리 와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면서 이곳에 버려져 있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이 군의 형세를 보건대 아주 약하다. 만약에 하루아침에 마음을 합하여 성곽을 불살라 버리고 우두머리를 죽여 국가의 수치를 씻은 다음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찌
구차하게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포로로 잡혀 있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몰래 서로 약속하여 8월 19일 밤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점심 때 군(郡)에 사는
장송(張松)이 이를 고발하자, 왕찬이 곧바로 군사를 모으고 성문을 닫았다. 이에 진조ㆍ장군ㆍ두덕ㆍ황강
등이 모두 성을 뛰어넘어 고구려로 달아났다. 《자치통감》
○ 경초(景初)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하게 하였다. 《삼국지》
○ 살펴보건대, 이때에 두 군이 공손연에게 속해 있어서 요동의 길이 막혔으므로 사마의(司馬懿)로 하여금
공손연을 토벌하게 하고, 몰래 유흔과 선우사를 바닷길로 내보내 두 군을 평정하게 한 것이다.
○ 2년(234) 봄에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을 보내어 공손연을 정벌하게 하였다. 8월에 공손연과 그의
아들 공손수(公孫脩)를 참하여 머리를 낙양에 전하니 요동ㆍ낙랑ㆍ대방ㆍ현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처음
공손도(公孫度)가 중평(中平) 6년(189)에 요동을 점거한 때로부터 공손연에 이르기까지 총 3대로 50년간
유지하다가 멸망하였다.
○ 6월에 왜(倭)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呼)가 보낸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이 대방군으로 와서 천자에게
나아가서 조알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수 유하(劉夏)가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경도(京都)로 호송하였다.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서 여왕에게 말하기를,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린다. 대방 태수 유하가 사신을 보내어 그대가 보낸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市牛利)
및 공물로 바치는 남자 4명과 여자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을 이곳에 도착시켰다. 그대가 있는 곳은 몹시
먼데 이렇게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이는 그대의 충효(忠孝)에서 나온 것인바,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이에 그대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싸서 대방 태수에게 보내 그대에게 전해
주게 한다. 그대는 그대의 종족들을 잘 보살피면서 나에게 순종하기를 힘쓰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원년(240)에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건중교위(建中校尉) 제준(梯儁) 등을
파견하여 조서와 인수(印綬)를 받들고 왜국에 가서 가왜여왕(假倭女王)을 제수하고
금(金)ㆍ백(帛)ㆍ금(錦)ㆍ계(罽)ㆍ도(刀)ㆍ경(鏡)ㆍ채(綵) 등의 물품을 하사하게 하였다. 《상동》
○ 6년에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이 영동(領東)의 예(濊)가 구려에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백제사(百濟史)에서는 “고이왕(古爾王) 13년에 낙랑 태수 유무와 삭방 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두 군이 예(濊)를 정벌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대방을 삭방으로 고치고 궁준을 왕준으로 바꾸었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 7년에 부종사(部從事) 살펴보건대, 바로 낙랑 남부종사(樂浪南部從事)이다.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韓國)을 통솔하였다는 이유로 진한(辰韓)의 8국을 떼어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자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살펴보건대, 한의 경계 지역에 군영을 설치한 것인데, 지금은 어느 곳인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공격하였다. 이에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두 군이 드디어 한을 멸망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방 태수 궁준이 이 싸움에서 죽었는데,
새 태수 왕기(王頎)는 8년에 임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한을 멸망시킨 이 싸움은 의당 7년에 있었을
것이다.
○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침입하자 구려 왕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 태수 왕기를 보내어 추격하였는데, 옥저를 지나 1천여 리까지 추격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8년에 대방 태수 왕기가 임소에 도착하였다. 색조 연사(塞曹椽史) 장정(張政) 등을 보내어 격문으로 왜
여왕 일여(壹與)에게 유시하였다. 이에 일여가 왜 대부(大夫) 솔선중랑장(率善中郞將) 액야구(掖邪拘) 등
20명을 보내어 장정 등이 돌아가는 것을 호송하였으며, 인하여 대(臺)에 나아가 공물을 바쳤다. 《상동》
○ 소제(少帝) 가평(嘉平) 원년(249)에 하후패(夏侯覇)가 살펴보건대, 하후연(夏侯淵)의 아들이다.
조상(曹爽)이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하여 촉(蜀)으로 들어갔는데, 하후연의 예전 공훈으로 하후패의
아들을 사면해서 낙랑군으로 옮겨 가서 살게 하였다. 《상동》
○ 6년(254) 2월에 중서 영(中書令) 이풍(李豐), 광록대부(光祿大夫) 장집(張緝), 황문감(黃門監) 소력(蘇鑠),
영녕 영(永寧令) 악돈(樂敦), 용종복야(冗從僕射) 유현(劉賢) 등이 대장군인 사마경왕(司馬景王)을 죽이고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현(夏侯玄)으로 대장군을 삼고자 모의하였는데,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삼족을
멸하였으며, 그 나머지 친속들은 낙랑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자치통감》
○ 《세설(世說) 주》에는, “이풍(李豐)의 딸은 이름이 완(婉)이고 자(字)가 숙(淑)으로 가충(賈充)의 전
부인인데, 이풍이 죽자 낙랑군으로 이사갔다.”
○ 6월에 유사(有司)가 허윤(許允)이 전에 관물(官物)을 팔아 이익을 차지하였다고 아뢰자,
정위(廷尉)에게 넘겼는데, 낙랑으로 옮겨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삼국지》
○ 고귀향공(高貴鄕公) 감로(甘露) 2년(257)에 현도군 고현현(高顯縣)의 이민(吏民)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현장(縣長) 정희(鄭煕)가 도적들에게 살해되었다. 민왕(民王) 간(簡)이 상여를 메고 돌아오자 4월 계묘에
특별히 조서를 내려 간(簡)을 충의도위(忠義都尉)로 삼았다. 《상동》
○ 후한 말기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 칭하였으며,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문의(公孫文懿)가 요동을 점거하니 동이(東夷) 9종(種)이 모두 복종하여 섬겼다. 위(魏)나라에서
동이 교위(東夷校尉)를 두어 양평(襄平)에 있게 하고, 요동(遼東)ㆍ창려(昌黎)ㆍ현도(玄菟)ㆍ대방(帶方) ㆍ낙랑(樂浪)의 5군을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며, 뒤에 다시 이를 합하여 유주(幽州)로 만들었다.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2년(276) 10월에 창려ㆍ요동ㆍ현도ㆍ대방ㆍ낙랑 등 다섯 군국(郡國)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다. 살펴보건대, 《진서(晉書)》 위관열전(衛瓘列傳)에 말하기를, “위관이 태시(泰始) 7년 8월에
정북대장군 도독유주제군사 유주자사(征北大將軍都督幽州諸軍事幽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진(鎭)에 이르자
유주위 5군을 나누어 평주로 만든 뒤에 겸하여 살폈다.”고 하였고, 무제본기(武帝本紀)에는 말하기를,
“태시 10년 2월에 5군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지리지(地理志)에는 말하기를,
“함풍 2년 10월에 평주를 두었다.” 하여, 서로 맞지 않는다. 지금은 지리지를 따랐다.
○ 12월에 평주 자사 부순(傅詢)이 청렴결백하다는 보고가 있자 조서를 내려 비단 2백 필을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진서》
○ 태강(太康) 2년(281) 8월에 평주 자사를 혁파하고 3년에 한 차례씩 조정에 들어와 아뢰게 하였다.
○ 11월에 선비(鮮卑)가 요서를 침입하였는데, 평주 자사 선우영(鮮于嬰)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혜제(惠帝) 영평(永平) 원년(291)에 여남왕(汝南王) 양(亮)이 동안왕(東安王) 요(繇)가 작상과 주벌을
함부로 한다는 이유로 관직을 면직시키고 집에 있게 하였는데, 패망스러운 말이 있다는 죄를 적용하여
3월에 폐해 대방군으로 옮겼다. 《상동》
○ 영강(永康) 원년(300)에 조왕(趙王) 윤(倫)이 배외(裴頠)의 두 아들 숭(嵩)과 해(該)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동해왕(東海王) 월(越)이 배외의 아버지 배수(裴秀)가 왕실에 공이 있으니 그의 후손을 멸절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여, 목숨을 부지해 대방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상동》
○ 유민(庾珉)이 시중(侍中)으로서 장잠남(長岑男)에 봉해졌다. 《상동》
○ 살펴보건대, 장잠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대방군에 속하였다.
○ 유요(劉曜)가 약관의 나이 때 낙양(洛陽)에서 놀다가 어떤 일에 연관되어 주벌당하게 되었는데,
조순(曹恂)과 함께 유수(劉綏)에게로 도망갔다. 이에 유수가 서궤(書櫃)에다가 넣어 왕충(王忠)에게 보내니,
왕충이 다시 조선(朝鮮)으로 살펴보건대, 조선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지금의
평양부(平壤府)이다. 보내었다. 몇 해가 지난 뒤에 기근이 들자 성명을 바꾸고는 현의 군졸이 되었다.
이때 최악(崔岳)이 조선 영(朝鮮令)으로 있었는데, 그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곡절을 물으니, 유요가
머리를 조아려 자수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였다. 그러자 최악이 말하기를,
“경은 최원숭(崔元嵩)이 손빈석(孫賓碩)만 못하다고 여기는가. 어찌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지금 조칙을 내려
경을 체포하라고 다그치고 있으니, 백성들 사이에 있으면서는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다. 이 조선현은 몹시
궁벽하고 외지니 형세상 능히 서로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인수(印綬)를
풀어놓고서 경과 함께 떠나 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이미 집안이 쇠미하여 걸리적거리는 형제도 없고,
또 박복하여 아들도 없다. 경은 나의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아라.
대장부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새나 짐승이 와서 살려 주기를 바라도 구해 주려 하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군자가 어려움에 빠진 경우에 있어서랴.”
하면서, 옷을 대 주고 책을 구해 주었다. 이에 유요가 드디어 최악에게 물어서 의심나고 막힌 것을
환히 통하니, 은혜와 보살핌이 몹시 후하였다. 최악이 조용히 유요에게 이르기를,
“유생(劉生)은 자품과 기국이 뛰어나서 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한 인재이다. 천하에 혹시 조금이라도
소동이 있을 경우에는 영웅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은 바로 경일 것이다.”
하였다. 유요가 사면을 받아 돌아왔다. 뒤에 대흥(大興) 원년에 황제의 자리에 참칭하여 오른 뒤 여러
신하들과 동당(東堂)에서 잔치하다가 말이 평생 겪은 일에 미치자, 저절로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글을 내려 이르기를,
“증(贈) 대사도(大司徒) 열민공(烈愍公) 최악은 한창(漢昌 전조(前趙) 유요(劉曜)의 연호임) 초년에 비록
증직하기는 하였으나 예장(禮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지금 최악을 추증하여 사지절 시중
대사도(使持節侍中大司徒) 요동공(遼東公)으로 삼는다.”
하였다. 《상동》
○ 민제(愍帝) 건흥(建興) 원년(313)이다. 영양 태수(榮陽太守) 배의(裴嶷)는 하동(河東)의 문희(聞喜)
사람으로 사예교위(司隷校尉) 배창(裴昶)의 아들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형 배무(裴武)로 하여금 먼저
현도 태수가 되게 하고 자신은 창려 태수(昌黎太守)가 되어 나갔다. 군에 도착하여서 얼마 지난 뒤에
배무는 죽고 배의는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다. 배의는 배무의 아들 배개(裴開)와 더불어 상여를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요서에 이르러 길이 막히자 배개와 함께 모용외(慕容廆)에게 투항하여
요동상(遼東相)이 되었다. 그 뒤에 다시 낙랑 태수가 되었다. 《상동》
○ 4월에 요동의 장통(張統)이 낙랑과 대방 두 군에 웅거하여 고구려 왕 을불리(乙弗利)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에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이 을불(乙弗)이라 하였다. 서로 공격하였는데, 몇 해 동안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낙랑왕 모용준(慕容遵)이 장통을 달래니, 장통이 백성 1천여 호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살펴보건대, 유성(柳城)에다가 교치(僑治)를 두었다.
장통으로 태수를 삼고 모용준으로 참군사(參軍事)를 삼았다. 《자치통감》
○ 원제(元帝) 건무(建武) 원년(317)에 모용외의 세자 모용황(慕容皝)을 관군장군
좌현왕(冠軍將軍左賢王)으로 삼고 망평후(望平侯)를 봉하였다. 《진서》
○ 살펴보건대, 망평(望平)은 본디 요동에 속하였는데 진나라 때 와서는 현도에 소속되었다.
○ 평주(平州)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모용외를 자사로 삼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진서》에는 평주를 설치한 것이 무제 함녕 2년(276)이고 모용외가 자사에 제수된 것은
원제 태흥(太興) 3년(320)이니, 이곳에서 처음으로 설치했다는 것은 동진(東晉) 이후에 처음으로 설치한
것을 말한다.
○ 태흥 4년(321) 12월에 모용외를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 거기장군 평주목(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
將軍平州牧)으로 삼고 요동공(遼東公)을 봉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아서 관사(官司)를 갖추고 평주의
수재(守宰)를 두게 하였다. 모용외가 이에 요속을 갖추어 두고 한수(韓壽)를 별가(別駕)로 삼았으며,
모용한(慕容翰)을 옮겨 요동을 지키게 하고, 모용인(慕容仁)에게 평곽(平郭)을 지키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에, 고구려의 건안성(建安城)은 옛날의 평곽현(平郭縣)이라고 하였다. 모용한은 백성들을 잘
안집시켜 위엄과 은혜가 있었으며, 모용인 역시 버금갔다. 《자치통감》
○ 고은(高隱)이 진(晉)나라 때 현도 태수가 되었는데, 제 고조(齊高祖) 환(歡)의 6대조이다.
《남제서(南齊書)》
○ 살펴보건대, 고은은 본디 발해(渤海)의 수(蓚) 사람으로 영가(永嘉) 연간의 난리 때 조카인 첨(瞻)과 함께
북쪽의 유주(幽州)로 옮겨 갔다가 얼마 뒤에 최비(崔毖)에 의지하여 요동으로 갔다. 그러니 고은이 태수가
된 것은 대흥 연간이었다.
○ 명제(明帝) 태령(太寧) 3년(325)에 모용외의 세자인 모용황에게 평북장군(平北將軍)을 제수하고,
조선공(朝鮮公)으로 올려 봉하였다. 《진서》
○ 성제(成帝) 함화(咸和) 8년(333) 5월에 요동무선공(遼東武宣公) 모용외가 졸하였다. 세자 모용황이
평북장군 행평주자사(平北將軍行平州刺史)로서 부내(部內)를 통섭하면서 낭중 영(郞中令) 고후(高詡)를
현도 태수로, 대방 태수 왕탄(王誕)을 우장사(右長史)로, 황보진(皇甫眞)을 평주 별가(平州別駕)로 삼았다. 《자치통감》
○ 11월에 모용황이 그의 동생인 모용인(慕容仁)과 서로 공격하였다. 양평 영(襄平令) 왕빙(王氷)과
장군(將軍) 손기(孫機)가 요동을 들어 반란하였다. 그러자 현도 태수 고후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돌아갔다. 《진서》
○ 9년 8월에 황제가 알자(謁者)를 보내어 모용황을 진동대장군 평주자사(鎭東大將軍平州刺史)로 삼고
지절(持節)과 승제(承制)와 봉배(封拜)는 일체 모용외의 고사(故事)대로 하였다. 《자치통감》
○ 함강(咸康) 4년(338)에 조왕(趙王) 호(虎)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였다. 연왕(燕王) 모용황이 두려운 기색을
보이자, 현도 태수인 하간(河間) 사람 유패(劉佩)가 “사태가 급하니 신이 나가 싸우겠습니다.” 하고는
이어 결사대 수백 기를 거느리고 조왕의 군사에게 쳐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적군이 모두 무너졌다.
적병을 참획하고서 돌아왔다. 《상동》
○ 목제(穆帝) 영화(永和) 8년(352)에 연왕 모용준(慕容儁)이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용도(龍都)에다가
유대(留臺)를 건립한 다음 현도 태수 을일(乙逸)을 상서(尙書)로 삼고는 유대의 사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게
하였다. 《상동》
○ 9년(353)에 왕희지(王羲之)가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하였는데, 시를 짓지 못하여 벌주(罰酒) 석 잔을
마신 자가 모두 16인이었다. 장잠 영(長岑令) 화기(華耆)는 살펴보건대, 화기가 장잠 영이 된 것은
영화(永和) 이전의 일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운곡잡기(雲谷雜記)》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5년(380) 3월에 진(秦)의 유주 자사 부락(苻洛)이 자칭 대도독(大都督)이라고
하였다. 진왕(秦王)이 현도 태수 길패(吉貝)를 좌장사(左長史)로 삼고, 사신을 나누어 보내어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 8월에 진왕 견(堅)이 유주를 나누어 평주를 두고 석월(石越)로 평주 자사로 삼고 용성(龍城)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함녕 2년에 유주의 현도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는데,
모용씨(慕容氏)가 이를 도로 합하여 유주로 만들었다가, 진(秦)의 부견(苻堅)이 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나누어
평주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 10년 윤5월에 연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왕(帶方王) 좌(佐)에게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자 대방왕 좌가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에게
패하였다. 고구려가 드디어 요동과 현도를 함락하였다.
○ 11월에 모용농(慕容農)이 고구려로 진격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수복하였다.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지절 도독유평이주제군사 유주목(持節都督幽平二州諸軍事幽州牧)으로 삼고 용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평주자사 대방왕(平州刺史帶方王) 좌를 평곽(平郭)으로 옮겨 지키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우문릉(宇文陵)이 연나라에서 벼슬하니 모용씨가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제수하고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하였다. 주 문제(周文帝)의 4대조이다. 《후주서(後周書)》
○ 위 태무제(魏太武帝) 연화(延和) 원년(432) 8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 하다라(賀多羅)에게 조서를 내려
풍문통(馮文通)과 대방 태수 모용현(慕容玄)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후고(猴固)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았다.
○ 9월에 요동ㆍ낙랑ㆍ대방ㆍ현도군의 백성 3만 호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이상 모두
후위서》
○ 살펴보건대, 《위서》 풍문통열전(馮文通列傳)에는, “세조가 풍문통을 토벌하자 풍문통과 요동ㆍ낙랑ㆍ 대방ㆍ현도군이 모두 항복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진(晉) 건흥(建興) 이후로 고구려가 이미 낙랑을 획득하였고 또 현도를 함락하였으며,
백제 역시 대방의 영토를 차츰차츰 소유하였다. 이로부터 중국에서 다시는 군과 태수를 두지 못하고
낙랑과 대방의 왕공(王公)의 호를 모두 고구려나 백제의 여러 왕들에게 가하였으며, 백제 역시 스스로
대방 태수나 조선 태수 등을 두었다. 모용씨 및 후위(後魏)ㆍ북제(北齊)가 봉작(封爵)된 이름은 모두
교치(僑治)로 인해 봉작을 받은 것이지, 한(漢)이나 위(魏)에서 차지하였던 옛 땅에 봉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 연(燕)의 낙랑왕 공손도(公孫度), 낙랑왕 온(溫), 낙랑왕 혜(惠), 낙랑위왕(樂浪威王) 주(宙), 낙랑왕
모용회(慕容會), 풍발(馮跋)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 후위(後魏)의 대방공(帶方公) 상희(常喜), 조선후(朝鮮侯)
상태(常泰), 낙랑왕 만수(萬壽), 낙랑강왕(樂浪康王) 악평(樂平), 낙랑왕 장명(長命), 낙랑왕 충(忠), 낙랑공
왕진(王珍), 현조(顯祖)의 딸 낙랑장공주(樂浪長公主), 북제(北齊)의 황자(皇子)인 낙랑왕 인약(仁約) 등은
모두 교치(僑治)를 둔 이후에 봉작받은 것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모용씨(慕容氏)의 낙랑 태수 배의(裴嶷)ㆍ국팽(鞫彭)ㆍ유선(游鱓), 조선 영(朝鮮令)
손영(孫永), 후위(後魏)의 낙랑 태수 조외(趙隗)는 모두 교치를 둔 이후에 봉작받은 것이다.
[주-D001] 사군사실(四郡史實) :
이 한사군의 위치 및 강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여러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낙랑군에 대해서는 대체로 평안남도의 대부분과 황해도 일부 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치소(治所)는 지금의 평양(平壤)이라는 설과 토성리(土城里)라는 설이 있다.
임둔군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에 근거를 둔 지금의 대관령 이동의 강릉(江陵) 일대로 비정하는 설,
양와(養窩) 이세귀(李世龜)의 설에 근거한 대관령 동서의 지역으로 보는 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근거한 경기 서부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근거한 강원도와
경기도에 걸쳐 있었다고 하는 설, 일본 백조고길(白鳥庫吉)의 함경도 남부와 강원도에 비정하는 설,
이병도(李丙燾)의 철령(鐵嶺) 이북 단천(端川) 이남에 있었다고 하는 동북 해안설 등이 있다.
현도군에 대해서는, 《위지》 동옥저전(東沃沮傳)에 근거를 둔 함경도 방면에 비정하는 설,
《수경주(水經註)》에 근거를 둔 남만주 혼하(渾河) 상류 방면으로 비정하는 설, 청말(淸末)의 학자인
양수경(楊守敬)에 의한 옥저 및 고구려설, 이병도에 의한 창해군(蒼海郡)이 설치되었던 예맥(濊貊)의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진번군에 대해서는, 압록강 이북에 있었다고 하는 진번재북설(眞番在北說)과 이남에 있었다고 하는
진번재남설(眞番在南說)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진번재북설에는 요동설(遼東說), 현도설(玄菟說), 숙신설(肅愼說)이 있다. 요동설에는 《사기》
조선전(朝鮮傳)에 근거한 번한설(番汗說), 이세귀의 답씨설(沓氏說)이 있다. 현도설에는 응소(應邵)ㆍ 유득공(柳得恭)ㆍ한진서(韓鎭書) 등의 압록강 상류 및 동가강 전 유역을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고구려설과 정약용에 의한 서개마설(西蓋馬說)이 있다.
숙신설은 안정복이 주장한 것이다.
진번재남설에는, 맥족의 옛 땅이었던 강원도 방면에 비정하는 한백겸(韓百謙)의 맥국설(貊國說), 경기 및
충청남도 북부로 비정하는 양수경의 진번대방설(眞番帶方設), 황해도 재령평야(載寧平野)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자비령(慈悲嶺)에서 남쪽으로 경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비정하는 이병도의 재령평야설이
있으며, 그 이외에도 영산강유역설(榮山江流域說), 동남해안설(東南海岸說), 진국설(辰國說) 등이
있다.《천관우,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48쪽》
[주-D002] 한 무제(漢武帝) …… 설치하였다 :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면서 네 개의 군을 동시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원봉 3년에는 낙랑ㆍ임둔ㆍ진번 세 군만 설치하였고, 현도군은 그다음 해에 설치하였다.
[주-D003] 단대령(單大領) :
단단대령(單單大嶺)을 말한다. 단단대령의 위치에 대하여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으며,《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의 이른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
《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04] 장잠장(長岑長) :
장잠현의 장(長)이다. 장잠현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은 “《성경지(盛京志)》에서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나오는 ‘숭주(崇州)는 본디 한(漢)의 장잠현이었는데, 동경(東京) 동북쪽 1백 50리에 있다.’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이 설은 잘못이다. 장잠이 만일 요 지역에 있다면 뒤에 어떻게 대방에 속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황해도 풍천군(豐川郡)에 비정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28쪽》
[주-D005] 궁(宮) :
고구려 6대 왕인 태조왕(太祖王)의 이름이다.
[주-D006] 선국(撣國) :
한(漢)나라 때 서남쪽에 있었던 오랑캐 나라이다.
[주-D007] 후성(候城) :
안정복은 “후성은 후한 시대에는 현도에 속하였고, 진 때에는 없었다. 지금의 철령현(鐵嶺縣) 남쪽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지금의 본계(本溪) 부근인 듯하다.” 하였다.
《韓國古代史硏究, 159쪽》
[주-D008] 고구려 왕의 동생 수성(遂成) :
원문에는 ‘高句麗王遂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고구려 왕은 태조왕(太祖王)으로,
태조왕의 이름은 궁(宮)이며, 수성은 태조왕의 동생으로 146년에 즉위하여 차대왕(次大王)이 되었다.
원문이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 백고(伯固) :
고구려의 8대 왕인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이다.
[주-D010] 서안평(西安平) :
한나라 때 설치한 서안평현(西安平縣)으로, 고구려가 뒤에 이곳을 차지하여 박작성(泊灼城)이라 하였다.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현(遼陽縣) 동쪽 60리 되는 곳에 안평(安平)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의 서안평 고성(故城)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
[주-D011] 유도(有道) :
한나라 때 천거 과목(薦擧科目)의 하나이다.
[주-D012] 공손연(公孫淵) :
삼국 시대 때 요동 태수로, 공손강(公孫康)의 아들이다. 위(魏)나라에서 관구검(毌邱儉)을 파견해 공손연에게
항복하기를 요구하자, 공손연이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였다. 다음 해 위나라에서 다시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요동을 공격해 공손연을 잡아 죽였다. 이로 인해 요동ㆍ대방ㆍ낙랑ㆍ현도 네 군이
위나라의 판도로 들어갔다.
[주-D013] 둔유현(屯有縣) :
이병도는 “둔유현은 원낙랑(元樂浪)의 남쪽 경계로, 지금의 황해도 북단의 황주(黃州)에 틀림이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49쪽》
[주-D014] 등주(登州) :
춘추전국 시대의 모자국(牟子國)이며, 한나라 때에는 동래군(東萊郡)이었고, 당나라 때에는 등주(登州)라고
불렀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이다.
[주-D015] 매구(買溝)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大武神王條)에, 30년(대무신왕13) 7월에 매구곡 사람 상수(尙須)가
그의 동생 위수(尉須),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고구려에 내투(來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매구를 매구루(買溝漊)ㆍ매구곡과 동일한 지명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 위치는 함경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6] 고귀향공(高貴鄕公) :
삼국 시대 때 위(魏)나라 조모(曹髦)의 봉호(封號)이다. 제왕(齊王) 방(芳)이 폐위된 뒤 영입(迎立)되었으며,
7년 뒤에 사마소(司馬昭)에게 시해당하였다.
[주-D017] 유요(劉曜) :
진(晉)나라 시대에 전조(前趙)의 임금이다. 유연(劉淵)의 아들로 처음에 한의 유총(劉聰)을 섬겨 상국(相國)이
되었다. 얼마 뒤에 황제의 위를 참칭하고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며,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다. 12년간
재위하다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晉書 卷103》
[주-D018] 유성(柳城) :
요령성(遼寧省) 조양(朝陽)이다.
[주-D019] 교치(僑治) :
어느 지역이 망한 뒤 다른 지역에다가 치소(治所)를 두고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0] 휴인(休忍) :
신라 동쪽에 있었던 나라로, 뒤에 백제에 복속되었다. 위치는 미상이다.
[주-D021] 부견(苻堅) :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때 전진(前秦)의 왕으로, 357~385년까지 재위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중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교를 전하였다.
[주-D022] 현조(顯祖) :
후위 헌문제(後魏獻文帝) 척발홍(拓跋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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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098. 해동역사(海東繹史) 제5권 / 세기(世紀) 5|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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