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역대급 `역머니무브`
정기예금에만 32.5조 몰려
가계대출 1.2조 하락세 전환
회사채 발행 어려워진 기업들
은행서 빌린 자금 사상 최대
빅스텝에 수신금리 더 오르면
예금 쏠림현상 가속화될 듯
빅스텝 후폭풍
최근 금융시장 변동성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가운데 13일 오전 서울 중구에 있는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업무를 보던 직원이 피곤한 듯 얼굴을 감싸고 있다.
기준금리 3% 시대가 열리면서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몰렸던 뭉칫돈이 은행 정기 예·적금으로 향하는 '역머니무브'가 빨라지고 있다. 자금 조달이 힘들어진 채권시장 대신 은행권 대출을 찾는 기업도 늘고 있다. 미국이 금리 인상 속도전에 나선 가운데 한국은행도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한 만큼 금리 상승세가 본격화하면서 이 같은 시중자금 대이동현상은 가속화할 전망이다.
한국은행이 13일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은 최근 시중자금이 얼마나 빠르게 대규모로 방향을 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9월 말 기준 예금은행 수신잔액은 2245조4000억원으로 한 달 새 36조4000억원이나 급증했다. 정기예금에 32조5000억원이 몰린 결과다. 이는 2002년 1월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월 기준 역대 최대 증가폭이다. 수시 입출식 예금에서는 3조3000억원이 빠져나갔는데, 대부분 정기예금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기예금이 증가한 것은 이자(금리)의 영향이 크다. 정기예금 금리가 연 5%대 진입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가계 자금이 은행권으로 급격히 쏠리고 있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수신상품 담당자는 "올해 6월 들어 정기예금 금리가 연 3%대에 들어서면서 신규 가입이 늘기 시작했는데, 9월 들어 4%대로 올라서자 놀라울 정도로 계좌 개설이 많아졌다"며 "정기예금 금리가 5%를 넘어서면 자금 유입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준금리 상승에 예대금리차 공시 제도 등으로 인해 당분간은 예금 금리가 크게 상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은행에 돈이 몰리는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에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을 높이기 위해 은행사들이 벌인 예금 유치 경쟁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자산운용사에선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자산운용사의 수신은 9월 한 달간 12조4000억원 감소했다. 초단기 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에서만 10조9000억원이 이탈했고, 채권형 펀드도 3조1000억원이 줄었다. 분기 말 국고 여유자금 유출의 영향도 있지만 국내 증시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돈이 빠져나간 것으로 분석된다.
이자 급등세에 가계대출 증가세는 꺾이는 모습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서 이날 발표한 '가계대출 동향'을 보면, 은행과 제2금융권을 포함한 금융권 전체 가계대출은 지난달 1조3000억원 줄었다. 9월 주택담보대출의 증가폭도 2조원으로 8월(2조7000억원)보다 감소했다. 신용대출를 비롯한 기타 대출 역시 3조3000억원이나 급감했다. 가계대출은 은행권에서 1조2000억원, 제2금융권에서 1000억원 각각 감소했다.
다만 가계대출이 본격적인 감소세로 전환했는지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황영웅 한은 금융시장국 시장총괄팀 차장은 "가계대출이 둔화되고 있지만 디레버리징(부채 줄이기)으로 완전 전환 여부는 현재로서 판단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연 7% 안팎인 대출 금리는 연내 8%에 근접할 가능성이 있다.
기업의 자금 조달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회사채 시장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면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은행 문을 두드리는 기업이 늘고 있어서다. 이런 달라진 분위기가 통계에 반영됐다. 기업의 은행 원화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1155조5000억원으로 한 달 새 9조4000억원 급증했다. 증가폭은 9월 기준으로 2009년 6월 통계 집계 이후 가장 컸다. 은행의 기업대출은 9개월 연속 증가세다.
중소기업 대출이 개인사업자 대출 1조8000억원을 포함해 4조7000억원 늘었다. 대기업 대출도 4조7000억원 증가했다. 대기업 대출 증가액은 9월 기준 역대 최대치다. KB국민은행은 "지난달 말 기준 국민은행의 기업 대출은 전년 대비 14조2678억원 늘어난 162조8770억원에 달한다"면서 "자금시장 상황상 당분간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은행 차입으로 자금 조달을 확대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회사채는 전월 대비 6000억원 줄고 순상환으로 전환했다.
한 시중은행 기업여신 담당자는 "지난해에는 대기업 재무 담당자들을 보기 힘들었지만 9월 들어 문의가 크게 늘었다"며 "회사채 발행이 힘들어지고, 환율과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영향으로 기업도 은행 대출을 받는 게 유리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대출 문의는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많지만 불황 속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상환 능력이 충분한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대출을 늘리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