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대의 징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을 것
아모 9,11-15; 마태 9,14-17 /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2024.7.6.
최근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멀리는 리승만과 박정희로부터 그 다음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거쳐 가까이는 이명박과 박근혜와 현 대통령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안위와 나라의 안보를 장담한다던 보수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그 장담과는 반대로 안보가 불안해지는가 하면 국력이 쇠퇴하고 국격도 떨어지며 경제 상황까지 무너지는 위기 때문입니다. 하기는 더 먼 옛날에도 지배층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민족과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났던 주체는 백성이었고 민중이었습니다. 조선 왕조 시절에 양반들이 사대주의적 근성으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백성의 눈과 귀를 가리고 나라의 공동선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외적이 출몰하자, 신분상으로 노비로 천시받던 이들마저 목숨을 바쳐서 민족을 구하겠다고 일어서면서 자처했던 이름이 ‘의병(義兵)’이었고,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무후무합니다. 홍익인간이라는 건국 정신 속에 있던 의로움이라는 가치가 한민족의 정신적 혈통 안에 대대로 살아서 내려오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현재는 국회에 현 대통령의 무능함과 무도함에 격노한 국민이 탄핵을 청원하는 숫자가 백만 명에 달했는데 그 이상도 넘어서리라는 예상이 나오는 가운데 이 가치가 우리 사회의 여론을 대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인 아모스 예언서 9장은 아모스가 받은 예언 메시지의 결론도 의로움이 미래를 창조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다시 세우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 넘치리라.”(아모 9,13) 그러니까 의로움의 가치가 창조할 새로운 미래가 새 포도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복음선포 여정을 따라 다니며 감시하던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식도 자주 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지낸다고 비판하는 가운데, 바리사이들처럼 경건하게 살아가던 요한의 제자들까지 와서 그 연유를 묻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렇게 일단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영위하는 생활양식을 변호하신 다음,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ㄷ) 이렇게 독서와 복음에서 모두 공통 비유 언어로 새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독서에서나 복음에서, 새 포도주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뜻합니다. 이 새로움은 의로움과 거룩함입니다. 불의를 의로움으로, 속됨을 거룩함으로 바꾸는 가치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가르치시리라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두 말씀에 모두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 과정에서 가난한 이들이 육체적인 질병이나 장애로부터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일들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자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가 종종 베풀어졌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로 비유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여기서 가난한 이들이 겪고 있던 지옥 같은 고통의 현실이라든지,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이 체험하고 느끼게 된 하느님의 자비라든지 또는 그들이 새로이 발견한 삶의 희망과 행복 등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 채, 그저 먹고 마시는 겉모양만을 보고 율법주의적 경건함의 잣대로 비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아모스와 예수님 사이의 시대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의 예언자적 혜안은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얼마나 고루하고 비루한지를 미리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시골 출신이기는 하지만,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국과 주변 민족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건들, 그러니까 당시로서 시대의 징표들을 숙고할 줄 알던 지식인이자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즉 북이스라엘 왕국을 파멸시키게 될 앗시리아의 위협을 예감하고는 간결한 어조로 이에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그 대비란, 하느님의 최고선을 명실상부하게 떠받드는 경신례를 거행할 것과 또 이 경신례의 정신에 따라서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최고선을 경신례로 드러내는 일과, 또 경신례를 거행하면서 그에 담긴 사회의 공동선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은 종교와 사회의 기본 질서입니다. 경신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의 최고선을 가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또한 그에 따라서 사회의 공동선이 가려지기도 하고 숨겨 지기도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교와 언론, 또 공직자와 지식인들의 진정한 역할이 이것일진대 공동선과 공공의 가치가 가려지고 뒷전에로 물러나는 일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 성지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가한 청년들 및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나, 명동 성당에서 가진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나 공통적으로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진리와 공동선으로 나타나야 할 그 실천에 대해서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아시아 주교들에게는 다른 생각과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대화를 강조하였고, 아시아 청년들에게는 가난하고 외롭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진리와 공동선을 향하는 길에 함께 가는 여정에 대하여 상기시키며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는 모든 한국인이 같은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기를 요청한 것도 특기할만 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들이닥치면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들이닥칠 때 오히려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분단 70년을 넘기고 있는 오늘날, 한류 덕분에 기대감을 높아지는데 실종된 공동선이 나날이 커져가는 역사의 위기 속에서 점차 전 세계적으로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한국인들의 성취가 그러하고, 이와 함께 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또한 그러합니다. 아모스가 예언했던 바 그날이 오고 있는 징표라 볼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새 포도주라는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새 부대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해야 할 소명을 일깨워야 할 때입니다. 보라, 그날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