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돌아 본 졸업 반세기
이현재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50년 절친 L이 카톡을 보내왔다. 모교 졸업 50주년을 기념하는 추억담을 모집하고 있으니 글 한 편 보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해외로 떠난 지 20년이 넘는 친구를 여전히 잊지 않고 배려하는 마음이 고맙다.
고교 1학년 때 담임은 영어를 가르쳤던 H 선생님이다. H 선생님과는 나중에 사돈이 된 인연이 있다. 큰형과 H 선생님의 여동생이 나중에 결혼을 한것이다. 또한 1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영광스럽게도 내가 쓴 글이 학교 게시판에 전시되어 우쭐했던 기억도 난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학급 성적에 관심이 많아서 당시 키 순서대로 앉았던 관례를 깨고 성적순으로 자리 배치를 했다. 1등과 꼴찌가 짝꿍이 되어 창가 맨 앞자리에, 2등과 두 번째 꼴찌가 그 옆자리에 앉는 식이었다. 이렇게 앉혀 놓고 서로의 공부를 봐주도록 배려했다.
당시에 급우들의 나이는 많게는 6살까지 차이가 났던 걸로 기억한다. 6.25 전 후의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제때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한 탓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대부분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틀린다. 호적상으론 1952년생인데 실제는 1951년생인 경우가 가장 많고 1951년생인데 실제 나이는 1946년생인 친구도 있었다. 그때 나는 내성적이고 말이 별로 없어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로 통했다. 소위 범생이 스타일이라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간 적은 몇 번 있다. 단체 관람 영화는 괜찮지만, 개인 관람은 엄격히 금지하던 때라 교외지도 나온 타 학교 교사들을 피해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뮤지컬 영화와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그리고 왕우 주연의 홍콩 무협 영화 '외팔이' 시리즈 등이 당시 인기 영화였다. 어떤 친구는 '돌아온 외팔이'를 하루에 세 번 보기도 했다고 한다.
90년대 중반인 어느 날 퇴근길에 종로 교보문고 빌딩에 큼지막하게 내걸린 플래카드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고한 그대, 떠나라! 낯선 곳으로......"
20여 년간 한 직장에 근무하며 회의감과 권태감이 슬슬 몰려오던 시기였다. 정규 퇴직금의 세 배에 달하는 두둑한 명예 퇴직금도 유혹적이었다. 장고 끝에 사직서를 내고 수령한 퇴직금 전액을 은행 주에 투자했다. 운 좋게도 2주 만에 천만 원의 수익을 내었다. 당시 소나타가 천만 원대였다. 이 돈으로 차를 바꿀까, 여행을 할까 고민하다가 아내와 유럽 여행을 하기로 했다. 석굴암, 불국사 등만 보아온 내게 엄청난 규모의 유럽 유적들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좁은 한반도에서만 평생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은 오래 하지만, 일단 결정되면 행동은 빠르게 하는 나는 하와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를 매년 돌아가며 답사했다. 그리고 1997년 8월 19일 캐나다로 이민을 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건 죄가 아니지만
지금 화목하지 않은 건 당신의 잘못이다. /빌. 게이츠
캐나다 교포들은 우스갯소리로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캐나다는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캐나다는 공기가 깨끗하고 병원비가 공짜이며, 노후에 자격이 되는 모든 가구당 2,000 - 2,500불 정도의 연금을 평생 지급한다. 돈이 없어 굶어 죽거나 병원비가 부족해 치료받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유흥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고, 생활 사이클이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무 심심하다. 한국은 놀거리, 먹거리가 풍부하고 밤 문화가 발달했지만, 캐나다는 해가 지면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술도 지정된 장소에서만 마실 수 있다. 이민 후 빌 게이츠의 말처럼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매년 가족 여행을 했다. 비즈니스 할 때는 문을 닫고도 여행을 했다. LA, 라스베이거스, 오레곤 코스트 등 미 서부와 로키, 벤프 등 캐나다 전 지역, 알래스카 크루즈까지 많이도 돌아다녔다. 비록 자녀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원은 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만큼은 누구보다도 풍부하게 해주고 싶었다.
모교 졸업 후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니 감회가 새롭다. 50년 세월이면 사람에게는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다. 그보다 20년의 세월이 더해져 학교 친구들 모두 70대가 되었다. 젊은 말은 앞만 보고 달리지만 늙은 말은 길을 알고 달린다. 나이 들면 명심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는 것이다. 다시 올 수 없는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다. 이 나이가 되어 조용히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친구를 나는 가졌는가? 그런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 적은 있는가?
첫댓글 대한극장으로 단체관람하러, 수유리, 서오능 등으로 소풍 가느라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 매달려가도 좋기만 했던 시절이 그립네요.
저희 반에도 네살 많은 형이 옆반 친동생과 입학을 했던 시절이었네요.
47년생 친구가 있었는데
작은형보다 1살 위인거예요.
근데 친구 형이니까 그냥 저도 형이라고 하더라구요 ㅎㅎ..
여고 때, 친구와 사복을 입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맘 졸이며 본 기억이...추억을 소환한 수필, 재밌게 읽었습니다.
벤허, 십계도 그때 보았죠.
어린 마음에 외국영화는 왜 이리 길고 종교적인 색채만 있나...했던 생각이..^^
이번 주(3/17)조선일보에 발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