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김현희
사람의 손으로 단단한 성벽을 허물어보겠다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 성벽을
주먹으로 쳐대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종종
단단한 성벽보다 더 굳건한
사람들이 만든 울타리를 경험한다
사람들이 울타리를 지키고 서 있기도 하고
싸리나무로 된 울타리가 성벽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져 울타리 문을 밀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늘 궁금했다
그들만의 세계가
어떤 명함을 가지고 있든
결국 사람이 뒤집어쓴 허울이지만
그 허울이 벽을 세우기도 하고
강을 만들기도 한다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
각자의 템포 대로
숨 쉬어야
호흡이 고르다는 것을
벽을 친 사람이
혹시 나였던가
벽에게 묻는다
연필을 깎다가
김현희
파도치는 억겁의 세월
저미며 깎으며 살아온
지난한 삶
모난 자갈돌이 세찬 파도에 부딪쳐
몽돌이 되는 것처럼
한 꺼풀 한 꺼풀 인생을 깎는다
한 꺼풀 한 꺼풀 인생이 깎인다
깎이고 깎다 보면
심지 굳은 삶
한 사람을 품기에도 벅찬 가슴
그저 뭉툭하게만 살려고
온 세상을 다 품으려 했던가
깎이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다고
깎이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던가
쓱
김현희
어떤 놈은 마누라 잘 만나
사십 대에 자진 사직하여
오십 대 말인 지금
건물주 되어
골프채 휘두르며
전국 유람 한다는데
나는 겨우
냉커피 한잔
쓱
내밀고는 생색을 냈으니
말 못 하고 살아온
등 굽은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귀뚜리도 잠들었을 즈음
쓱
눈길 한 번 보내본다
단단한 바람
김현희
바람의 강도가 단단할수록
짙푸른 강물은 크나큰 포물선을 그린다
잠잠하던 바람
잔잔하던 강물
익숙한 손길이 맞짱을 뜨는 날엔
바람의 노래
강물의 노래의 톤이 높아진다
단단한 바람을 깨부수고
눈물을 씻으며 했던 작별은
참으로 서글프다
어쩌면 사소한
아주 사소한
세상 쓰잘머리 없는 연민을 깨부수어주기를
바라는 바람
단단한 바람이 분다
가벼워질 수 있다면
김현희
영혼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오늘 밤 수많은 참새들을
꿈속으로 불러와
덜어내어도 좋을
눈금의 무게만큼
참새의 부리에게 내어 주리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텅 비어 동공으로 남아
허탈감을 안겨줄 때까지
온전히 혼자가 되어 보리
지극히 주관적인
김현희
어떤 친구는 욕심 없는 모습이 시인 박재삼을 닮았고
어떤 친구는 고뇌가 가득한 얼굴이 기형도를 닮았고
그러나
딱히 누굴 닮았다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친구를
묘사하려니 난감하다
말이 많으니 개그맨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성질이 급한 듯 말이 빠르니 만담가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유속이 빠른 계곡의 물줄기라고 하면 딱 어울릴 것 같다
잔잔한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조용히
명상에 잠길 것 같은 사람은 아니다
호언장담을 잘하니
자존감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침묵도 잠수도 잘하는 것이 내성적인 것 같기도 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감히 누구누구는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냥 지극히 주관적인
심중소회를 적어본다
저기 저 로댕
김현희
벚나무 그늘에 앉아
수많은 꽃별들로 반짝이던
봄의 서곡을 반추하는
조각상
버찌를 쪼아대는 비둘기와
운동화 바닥에 눌어붙은
봄의 잔해를 떼어내느라 허리를 굽힌
초로의 여인을 본다
표정이 없는 얼굴
그늘이 사라진 얼굴
크산티페가 스쳐가고
테레사 수녀가 지나간다
너는
한여름
누군가에게 한 번쯤 그늘이 되어 보았는가
라는 물음을 새긴 얼굴들
햇볕이 돌아앉은 빈 의자에
떨어진 검은 별들과
턱 괴고 앉아
봄의 주검을 셈하는
저기 저 로댕
담장 위의 장미
은하
가시는
줄기의 일부분일 뿐인데
가시 꽃이라는 선입견으로
날 바라보지 마
아름다움과 향기를 겸비한
난 장미야
나도
기댈 곳이 필요해
다시 6월
김현희
허점투성이인 사람이
탈탈 털어내는 허무가
나른한 오후를 가득 채우는
6월의 분기점엔 이정표가 없다
한마디 한 마디 뱉어내는 굵직한 고독을
담아낼 빈 통 하나쯤 있으면 좋으련만
냉정한 6월의 하늘은 높고도 파랗다
난해한 6월의 방정식에 갇혀버린 도시는
호흡곤란 상태다
너도 나도 뱉어낸
허무와 고독을 리콜 해야 한다
진취적인 시를 써야 하고
즐거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계절을 잃고도 탄식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버린
표정의 자유는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까.
밤으로의 긴 여로
김현희
달은 차면 기울고 기울었다 다시 차는데
텅 빈 마음에선 바람소리만 요란하다
비 온 뒤 죽순처럼 청승은 자꾸만 솟구치고
나의 마음은 섣달 그믐밤처럼 난감하다
좋은 사람을 생각해도
재미있는 프로를 보아도
심장은 착 가라앉아 나대지 않는다
도대체 웃지 않는 박제된 얼굴이 거울 속을 떠다닌다
어디선가 처량한 밤새 소리 들린다
새소리 바람소리 뜬눈으로 왜곡하는 밤
이 밤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처절하다
고척교 다리 밑엔 누더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보내는 두 남자가 있다
얼굴을 마주한 적 없지만 그들의 마음이
텅 비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한다
주변을 맴도는 비둘기의 깃털만큼의 억압도 견디지 못하는
온전한 자유의 몸짓이리라
청승과 처량만 치솟는 밤
안방을 차지하고 누웠어도 풍찬노숙만 못한
끈질긴 심연
밤의 노래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깜빡, 어쩌나
김현희
사랑하는 사람의 속살을 헤집듯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말이 없어도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껄껄껄 웃으려는지
막 눈물을 쏟으려는 순간인지 안다면
말하지 않아도
함께 웃거나
가볍게 어깨를 토닥거리거나 하겠지요
자분자분 돌담길 거닐 듯 가다가도
예기치 않는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요
말끔하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가
소낙비 맞기도 하는 게 인생이지요
인연의 고리가 아무리 튼튼하여도
사람의 마음을 투명 유리컵 들여다보듯
다 알 수는 없지요
살다 보면
깜빡 놓치고 나서
아차 하는 일 많지요
그래서 사람으로 머무르는가 봐요
신이 못 되고.
장미에게
김현희
햇살의 눈초리에 가시를 숨기고
향기만 내뿜는 안양천 공원
각양각색 꽃송이들
붉은 장미는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고 떠난
고사목을 떠오르게 한다
바람이 놀다 가고
구름이 쉬었다 가고
지친 일상을 털어놓아도
향기를 내어주는 장미여
뚝뚝 고개 떨구어도
향기 잃지 않는 장미여
꽃잎에 아로새겨진 사연
모래밭 낙서일지라도
꼭 전해다오
슬픔에게
오늘 아침
김현희
새벽에
넓은 꽃밭을 가득 채운 작약꽃밭 사진을 받았다
꽃 이름이 작약인 줄 뻔히 알면서도
꽃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침이 문을 두드려 홀로 식탁에 앉아
어제 배달되어 온 쌀로 지은 밥과
반찬 두어 가지를 꺼내 밥을 먹었다
출렁이던 잎새들이 집안을 엿보기에
맘껏 들여다보라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햇살이 얼른 들어와 맞은편에 앉아
홀로 앉은 나와 겸상을 했다
고즈넉한 아침
이보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냥
김현희
눕지 마라 장미여
시들지 마라 지금은
남들은 모르는 너의 외로움
실바람만 스쳐가도
기울 수 없는 상처로 질곡의 밤이
길고 길어
웃으면 좋은가보다
웃으면 행복한가 보다
아무리 인연이 깊어도 속내를 다 알 수는 없는 일
속내를 다 드러낼 수는 없는 일
토담 위에 핀 채송화의
앙다문 꽃씨 주머니처럼
감싸고 살자
그냥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마라 장미여
흠뻑 비를 맞아도 향기 잃지 마라
남들은 몰라도 그러려니 살자
그냥
장미화관
김현희
붉은 얼굴로 피었습니다
노란 얼굴로 피었습니다
때론 내 속에 들어왔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꽃이 되었습니다
어깨와 등허리엔 가시를 달고
뒤척일 때마다 신음을 토해내는
오월의 들녘
애간장 녹아 새까맣게 타버린 마음
차마 내보일 수 없어
검은 가면은 쓰지 못하고
이런저런 걱정들이 섞인
혼색으로 흔들렸습니다
등허리에 박힌 가시가 곪아
백수를 눈앞에 두고
저승 문 들어선 늙은 어머니는
장미꽃 화분을 끌어안고 가셨습니다
이젠 공 굴릴 수 없는 시간
가시는 길
국화 대신 장미 화관을 쓰셨습니다.
비가 옵니다
김현희
비가 옵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비가 내립니다
비가 오면
우산이 없어 비료포대를
머리에 쓰고 다녔던 기억
흠뻑 젖은 책보자기 풀러 부뚜막에다
책을 말리던 기억
가마솥 뚜껑에 양말도 말렸고요
딱 하나 있던 우산 펼쳐 큰아들 손에
쥐어주던 어머니의 그 뿌듯한 표정
옛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비에 대한 슬픈 기억들이 무색하게
지금은 식구 셋인데
각양각색 수십 개의 우산이
간택을 기다리며 간절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사랑 그리고 행복
김현희
사람에게 있어
사랑은
사지四肢와도 같은 것
뜻 모를 소리로 미간을
찡그리게 하는 새들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거두지 말아야
행복의 꽃이 핀다
인생의 여로
김현희
인생이라는 바다에
배를 띄우면
알 수 없는 끝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리 험난한 파도를 만나더라도
도중에 정박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비바람 맞으며 파도를 타고
알 수 없는 끝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잠시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는 있겠지만
가득 실은 어려운 문제들
하나둘 바다 속에 던져 넣으며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인생의 바다에 띄운 배는
사나운 풍랑도 이겨내야 한다
오월의 편지
김현희
조용히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람의 소리 들립니다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속살거립니다
여린 잎새에 나뒹구는
새벽이슬에 붙은 설명서엔
누군가 떨구어 놓고 간
눈물방울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한낮의 햇살이 손 내밀면 잎새는
눈물 거두고 속살거리는 바람에게
온몸을 맡기겠지요
천 냥의 궁금증을 침묵으로 지켜내는
푸른 나무들의 묵묵함이 고맙습니다
고요만이 친구가 되어주는
긴긴 겨울밤 호롱불 아래서
내 시린 발을 기우시던 어머니처럼
갈증과 허기를 달래주는
사색의 뜰을 무단횡단하게 하는
오월의 해오름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집니다
무던한 오월입니다
바다로 가서
김현희
석양이 안식을 찾아가는 시간
한낮에 짊어졌던 어깨 위의 짐은
붉은 노을에 실어 다 버려야한다
다 태워야한다
눌어붙은 생각을 버리고
숫자를 더해가는 나이를 버리고
조용히 바다로 가라앉는
둥근 해가 되어야한다
파도 소리를 듣고
갈매기의 노래를 듣고
멀어져가는 고깃배가 한 점이 될 때까지
침묵하는 바다의 심사도 들어보아야 한다
바다로 가서
여름날 저녁엔 바다로 가서
바다가 품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