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지애] 07
#1. 인철이네 집 앞 (밤)
춘추와 부하들, 인철과 혁이를 차에서 끌어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타쓰지 : 야, 강인철.
인철 : (잡힌 채로) 내가 너, 볼 일 없다 그랬지? 여기 왜 왔어? 안 꺼져?
춘추와 부하들, 자기네를 완전히 무시하고 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인철과 타쓰지를 번갈아보며 기가 막혀 한다.
춘추, 타쓰지의 차를 보고 속으로 약간 놀란다.
타쓰지 :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인철 : 나 보러 온 게 아니면?
타쓰지 : 그 여자하고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집에 있냐?
춘추 : 쟤, 뭐냐?
인철 :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안 보이냐?
타쓰지 : 보여.
인철 : 너,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 그랬지?
타쓰지 : 니 일에 상관하고 싶은 생각 없어. 난 그 여자만 보면 돼.
춘추 : 이 짜식들이 정말! (다가가며) 야, 너, 뭐야?
타쓰지 : (손으로 춘추의 머리를 치우며) 넌 빠져.
춘추, 머리가 홱 옆으로 밀린다. 이런 치욕이 없다.
일동, 경악하는데.
춘추 : 이 자식이!!!
춘추, 필살의 옆차기로 타쓰지의 턱을 강타하는 것을 시작으로 숨 돌릴 틈 없이 타쓰지를 때리기 시작한다.
타쓰지, 머리가 홱홱 돌아가게 맞지만 그때뿐이다..
춘추, 더 약이 올라 타쓰지를 공격하려는데 벌써 지쳤다.
춘추 : (윗옷을 거칠게 벗어젖히며) 너, 내가 죽이라도 먹었으면 벌써 죽었어. 정부장, 뭐하는 거야?
어이없는 상황에 구경만 하던 춘추의 부하들, 춘추의 고함에 기합을 지르며 타쓰지에게 달려든다.
떼로 달겨드는 춘추파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타쓰지.
보고있던 인철과 혁, 서로 눈짓을 하고 타쓰지를 도와 춘추파와 힘겹게 맞서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닌자들이 타쓰지의 앞을 가로 막는다.
일동, 이건 또 뭐야? 하는 얼굴로 보면
닌자들, 다리찢기, 다리 가슴에 붙이기, 허공에서 한 바퀴돌기 등등 현란한 폼으로 춘추파의 기선을 제압한다.
당황하는 춘추파, 그리고 인철, 혁, 타쓰지.
춘추, 더욱 혈압이 올라 자기도 온갖 폼을 재보다가 닌자들에게 고함을 치며 달려드는 순간
공주 : 웬 소란들이냐?!!!
춘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굳으며 돌아보면
공주, 숙희와 함께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서 있다.
닌자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춘추를 공격하고 춘추일당과 닌자들,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대결을 벌이지만
춘추는 오로지 공주에게 다가오려 애쓴다.
춘추 : 공주 잡아! 야, 뭐해? 공주 잡아야지!
어느틈엔가 싸움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인철과 혁, 공주쪽으로 달려온다.
인철 : 야! 피해! 숙희야! 데리고 도망쳐!
이때 어느새 타쓰지의 차가 공주 앞에 선다.
인철, 앞뒤가릴 새도 없이 공주의 손목을 잡아 타쓰지 차에 밀어 넣고 자신도 타려다가
자리가 없자 공주를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겨우 탄다.
혁, 다급하게 따라 타려고 하지만 자리가 없자 난감해한다.
혁 : 야, 쫌 들어가봐. 무슨 차가 이래?
인철 : 야, 그냥 위로 엎어져!
숙희 : (혁의 뒷덜미를 잡으며) 이리 오세요!
혁, 홱 뒤를 돌아본다.
혁 : 어디?
숙희 : 빨리요!
혁, 인철과 숙희를 번갈아 보다가 에잇! 하며 타쓰지의 차문을 꽝 닫아버리고 숙희를 따라 어디론가 도망친다.
타쓰지의 차, 급하게 출발한다.
춘추 : 저 차! 야! 저 차,
춘추, 타쓰지의 차를 쫓으려고 방심하다가 닌자에게 맞아 쓰러진다.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타쓰지의 차 뒤로 여전히 활극을 벌이고 있는 춘추패와 닌자들이 보인다.
#2. 엄박사네 집 (밤)
바짝 긴장한 혁이, 숙희와 함께 현관에 서 있고
엄박사와 순자, 놀란 얼굴로 보고 있다.
혁 : 안녕하세요. 저는 이 혁이라고 합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순자 : (갑자기 숙희를 두들겨팬다) 이 년이 미쳤어, 미쳤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써부터 연애질이야! 나중에 커서 뭐가 될라구!
숙희 : 엄마, 그게 아니야!
순자 : 너, 이리 와봐! 이리 와봐!
순자, 숙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숙희 : (소리) 아아악! 그게 아니라니까, 내 말 좀 들어봐!
순자 : (소리) 아니긴 뭐가 아니야?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래?
엄, 혁이 앞에서 창피한지 슬쩍 외면하고 혁, 어떻게 해야하나 긴장한 얼굴로 엄을 보는데
순자, 방에서 나와 뭔가를 막 찾는다.
순자 : 이거 어디 갔어?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숙희 : (뛰쳐나오며) 엄마, 그게 아니라니까!
순자, 혁이를 확 밀어버리고 현관구석에 세워져 있던 쇠파이프를 찾아들고
숙희를 멱살을 잡아 방으로 밀고 들어가며 문을 꽝 닫는다. 숙희의 비명소리.
혁 : 저기요, 그게 아니구요.
엄 : (엄숙하게) 자넨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네.
#3. 거리 (밤)
달리는 타쓰지의 차 안.
가운데 끼여 인철의 무릎에 걸터앉은 공주, 내리려고 반항하고 있다.
공주 : 이거 놓아라! 내가 왜 이 자의 신세를 진단 말이냐? 어서 나를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인철 : 아, 가만 좀 있어. 안 그래도 좁아서 불편해 죽겠는데.
타쓰지, 운전을 하며 인철의 무릎에 앉은 공주를 슬쩍 돌아본다.
인철, 몸부림치는 공주를 뒤에서 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타쓰지, 괜히 기분 나쁘다.
인철 : (신경질) 움직이지 마, 너. 움직이지 마!
타쓰지 : 아까 그 놈들 누구냐?
인철 : 몰라도 돼.
타쓰지 : 그 놈이 김춘추야?
인철 : 하, 차. 모르는 게 없구만. 근데 그 놈들은 누구냐?
타쓰지 : 나도 몰라.
인철 :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공주 :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도대체 너희들은 어떤 관계냐?
인철 :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 지금?
공주 : 멈춰라! 멈추지 못하겠느냐?
인철 : 아, 시끄러! 세우면 너, 어디 갈 데 있어?
타쓰지 : 갈 데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인철 :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니네 집에 가야지.
공주 : 뭐라구? 우리가 왜 이 자의 집에 간단 말이냐? 세워라!
인철 : (꽥) 움직이지 말라니까!
타쓰지, 미치겠다.
세 사람, 침묵.
공주, 뭔가 골똘히 생각한다.
공주 : 그래! 너에게 그림을 보여주면 되겠구나. (타쓰지에게) 서둘러라.
#4. 호텔 - 타쓰지 거실 (밤)
집사, 문을 열다가 인철과 공주를 보고 흠칫 놀란다.
공주, 집사를 노려보고 인철을 끌고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그림이 걸려 있는 타쓰지의 침실로 들어간다.
집사 : 무슨 일입니까?
타쓰지, 집사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공주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고 집사도 따라 들어간다.
#5. 타쓰지 방 (밤)
벽에 그림이 없다.
공주, 방 여기저기를 뒤져본다.
인철 : 무슨 그림이 있다는 거야?
공주 : (타쓰지에게) 그림을 어디다 감췄느냐!
타쓰지 : (집사를 본다) 어떻게 된 거야?
집사 :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타쓰지 : 왜 나한테 미리 얘기하지 않았지?
집사 : 어머님께서 아셨습니다.
타쓰지 : 알았어. 나가 있어. (침대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감싸쥔다)
집사 : (일어로) 이 자들은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타쓰지 : (갑자기 미친놈처럼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일어로) 나가 있으라 그랬잖아!!!
집사, 타쓰지를 잠시 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 나가고
인철과 공주, 어정쩡하게 서서 머리를 쥐어뜯는 타쓰지를 보는데
타쓰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본다.
타쓰지, 멀쩡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옷장문을 열어 가운을 꺼내 인철에게 던진다.
타쓰지 : 먼저 씻어라.
#6. 욕실 (밤)
인철, 욕조에 거품을 잔뜩 풀어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목욕을 하고 있다.
인철 : 루루루... (새삼 둘러보며) 우와, 도대체 얼마짜리 방인데 이 모양이야? 루루루... (상처에 물이 닿자) 앗, 따거!
인철, 문득 공주와 타쓰지가 궁금해져 욕실 밖으로 귀를 쫑끗 세운다.
#7. 거실 (밤)
타쓰지, 소파에 앉은 공주 앞에 술잔을 내려놓고 공주 앞에 앉는다.
공주 : (우리말로) 김유석이란 이름을 들어봤느냐?
타쓰지 : 처음 듣는 이름인데?
공주 : 그럼, 네 이름이 뭐냐?
타쓰지 : ... 후지와라 타쓰지.
공주 : 후지와라?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로 불쑥) 왜(倭)에서 왔느냐?
타쓰지 : (깜짝 놀란다. 역시 일어로) 왜(倭)? 왜를 어떻게 알지?
공주 : (일어로) 고모님과 오라버니들을 만나러 사신을 따라 가본 적이 있다..
타쓰지 : ... (일어로) 사신? (피식) 우리말은 언제 배웠지?
공주 : (일어로) 남부여의 공주에겐 한족의 말과 왜말은 기본이다.
타쓰지, 웃음이 터진다.
공주 : (기분 나쁘다. 우리말로) 왜 웃느냐?
타쓰지 : 아, 미안. 너무 엄청난 얘기라서.
공주 : 너도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사실만 얘기할 뿐이다.
타쓰지, 공주를 빤히 본다. 그림 속 공주의 모습과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공주도, 타쓰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빤히 본다.
타쓰지 : 니 말을 믿고 싶어.
공주 : ...
타쓰지 : ...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아니, 믿어.
타쓰지, 공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술을 쫙 들이킨다.
공주, 처음으로 자신을 믿는다는 타쓰지의 말과 자신을 보는 눈빛에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욕실문이 벌컥 열리고 가운을 입은 인철이 나온다.
인철, 자기가 나오거나 말거나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묘한 질투의 감정이 생긴다.
이때 집사가 들어온다.
집사 : 두 분이 머무실 방이 준비됐습니다. 따라오시죠.
타쓰지 : 그럴 거 없어. 공주님한테 내 방을 드려.
공주, 인철, 집사, 놀라 타쓰지를 본다.
#8. 다른 호텔 방 (밤)
트윈 룸. 인철과 타쓰지, 각자의 침대 위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
인철 : 공주님? 차!
타쓰지 : 너, 그 여자 좋아하냐?
인철 : 내가 미쳤냐? 미친년을 좋아하게?
타쓰지 : 근데 왜 같이 있어?
인철 : 오갈 데 없이 불쌍한 애라 데리고 있는 거야. 나도 귀찮아 죽겠어.
타쓰지 : 그럼, 내가 데리고 있을까?
인철 : (갑자기 벌떡 일어나 타쓰지를 무섭게 노려본다) 짜식이 말이면 단 줄 알아! 걔가 무슨 물건이야?
타쓰지 : 귀찮다며?
인철 : ... (할 말이 없다) ... 귀찮아도 내 사정이야.
타쓰지 : 잘 생각해봐.
인철 : 뭘 생각해?
타쓰지 : 자자.
타쓰지, 스탠드 불을 끈다.
인철, 타쓰지가 얄밉다. 잠시 노려보다가 이불을 확 뒤집어쓰며 눕지만 잠이 안 온다.
타쓰지 말대로 여기 있는 게 더 나을 것도 같다....
#9. 타쓰지 방
공주, 타쓰지의 침대에서 눈을 뜬다. 아침이다. 모처럼 개운하다.
공주, 창가로 가 빌딩 숲과 자동차들을 내려다본다. 지난 밤 타쓰지의 말이 떠오른다.
타쓰지 : 니 말을 믿고 싶어. ... 아니, 믿어.
노크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 집사가 들어온다.
집사 : 일어나셨군요.
#10. 타쓰지 거실
공주, 방에서 나오면 수십 벌의 옷이 쫙 걸린 행거가 거실 가운데 있고
그 옆에 미용실과 의상실에서 나온 세련된 여자들이 기다리고 서 있다.
집사 : (내키지 않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도련님께서 아래층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시겠답니다. 준비 되시는 대로 알려주십시오.
집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얼굴로 확 나가버린다.
공주, 어리둥절하다.
#11. 몽따쥬
반짝이 옷이 벗겨지고 세련된 옷들이 공주에게 입혀진다.
옷, 신발, 머리, 등등이 여러 번에 걸쳐 바뀐다.
공주의 뇌리에 유석이 보냈다며 옷을 갈아입히려던 시녀들이 떠오른다.
#12. 호텔 식당
인철과 타쓰지, 서로 딴 데를 보고 앉아 있다.
잠시 후 집사의 뒤를 따라 공주가 테이블로 다가온다.
두 사람, 완벽하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변신한 공주를 보고 깜짝 놀란다.
타쓰지, 얼른 일어나 의자를 빼주면 공주, 앉는다.
집사, 타쓰지를 흘기고 목례를 하고 돌아간다.
집사, 나가다가 구석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닌자들을 예리하게 살피고 지나간다.
닌자들, 얼굴이 말이 아니다.
인철, 타쓰지의 행동과 달라진 공주의 모습을 보며 더욱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런 자신의 속마음이 열등감처럼 보여질까봐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쓴다.
타쓰지 : 잘 잤어?
공주 : 모처럼 제대로 잠을 잔 거 같구나.
인철 : (공주를 흘긴다)
공주 : (미안해진다)
종업원, 다가와 세 사람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고 돌아간다.
공주, 접시에 놓인 간단한 음식과 나이프와 포크를 신기하게 본다.
타쓰지 : 자, 먹자.
타쓰지, 막 먹기 시작하지만 인철은 타는 속을 감추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과 쥬스같은 음료수만 마셔댄다.
하지만 인철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다.
공주, 타쓰지가 먹는 모습을 빤히 보다가 자기도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본다.
타쓰지, 말없이 일어나 공주의 뒤에 서서 공주의 양손을 잡고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타쓰지 : 자, 이렇게 잡고, 이걸로는 누르고, 이걸로 써는 거야. 쉽지?
공주 : 알았다.
인철, 기가 막힌 얼굴로 본다. 점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그렇게 느껴지는 자신이 더욱 싫은데
타쓰지,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인철의 앞에 카드키를 놓는다.
인철 : 왜?
타쓰지 : 난 출근해야 되니까 갖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집사한테 얘기하고.
타쓰지,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인철, 키를 내려다본다.
#13. 강남컨설팅
춘추, 뒷짐을 지고 창 쪽으로 돌아서 있고
종성을 제외한 부하들, 춘추의 책상 앞에 나란히 서 있다. 닌자들에게 당한 부하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춘추 : (기운 없이) 내가 죽도 제대로 못 먹어서 힘을 못 쓰면 너희들이라도 힘을 써야 될 거 아니냐?
명색이 회장인 내가, 이 나이에, 사사건건 나서서 힘을 써야 되겠냐?
부하들 : 죄송합니다, 회장님.
춘추 : 다 잡은 공주를, 그것도 내 눈 앞에서 놓치다니...
부하들 : 죄송합니다, 회장님!
춘추 : 정부장.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 그 놈들이 누군지 알아봤어?
준하 : (당황한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알아봤습니다만 틀림없이 처음 보는 놈들입니다.
춘추 : ...
준하 : 제 생각엔 땅꼬마 그 놈이 지방에서 불러들인 놈들 같습니다.
노크소리. 춘추와 부하들, 날카롭게 돌아본다.
문이 열리고 종성이 세탁소 비닐이 씌워진 공주옷을 들고 들어온다.
종성 : 드라이 찾아왔는데요.
춘추, 옷만 보고도 눈물이 핑 도는데. 전화벨소리.
준하 : (받는다) 네, 강남컨설팅입니다. ... 여보세요? ... 잠시만요. (춘추에게) 회장님.
춘추 : 누구야?
준하 : 공주일로 상의 드릴 게 있다는데요?
춘추, 눈을 번득인다.
#14. 룸살롱 복도
춘추, 심각한 얼굴로 부하들을 대동하고 긴 복도를 걸어온다.
복도 끝 방문 앞에 타쓰지의 경호원들이 서 있다.
춘추, 문 앞에 서서 경호원들을 노려본다.
#15. 룸
문이 열리고 춘추 안으로 들어온다.
룸 안 쪽에 집사가 혼자 앉아 있다가 일어난다.
집사 : 안녕하십니까. 전화 드렸던 이께다 나오다깝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춘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으면 준하, 얼른 받아들고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는다.
집사 : 앉으시죠.
춘추, 집사를 날카롭게 살펴보며 앉는다.
집사, 춘추가 앉자 마주 앉는다.
춘추 : 이께다 나오다까라면... 야쿠자?
집사 : 아닙니다.
춘추 : 그럼, 뭐야?
집사 : 제가 모시는 분이 저를 보냈습니다.
춘추 :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집사 : 그건 모르셔도 됩니다.
춘추 : 몰라도 돼?
집사 : 전 다만 공주라는 여자분의 일 때문에 왔을 뿐입니다.
춘추 : ... 당신들이 공주를 어떻게 알아?
집사 : 지금 우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춘추 : (기분 나쁘다) 보호?
집사 : 그 여자분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가 모시는 분의 바람입니다.
춘추 : (큰소리로 웃다가 멈추고 살벌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누굴?
집사 : 더 이상 문제가 커지기 전에 이쯤에서 손을 떼시는 게 신상에 좋으실 겁니다.
춘추 : (기가 막혀 웃는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그건 우리가 전문인데?
집사 : 그 여자분께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춘추, 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부셔져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춘추 : 보상? 지금 보상이라 그랬어?
집사 : 흥분하지 마십시오.
춘추 : 나, 김춘추! 가진 게 돈 밖에 없는 사람이야. 어따 대고 보상이야, 지금! 당장 데리고 와. 안 그러면 니들 나한테 다 죽어!
너! 너부터 죽을 줄 알아! (돌아서 나가려는데)
집사 : 얼마 전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셔서 도피생활을 하셨지요?
춘추 : (여유있게) 그 사건은 불기소로 끝났어.
집사 : 그럼, 재수사가 가능한지 한 번 알아봐야겠군요.
춘추와 집사,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16. 강남컨설팅 - 수정
춘추,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부셔져라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춘추 책상 옆 마네킹에 공주의 옷이 예쁘게 걸려 있고 마네킹 얼굴에는 공주의 포스터 사진이 오려져 붙어 있다.
춘추 : (씩씩대다가 뒤따라 들어온 준하에게) 미행 붙였지?
준하 : 예.
춘추 : 어떤 자식들인지 반드시 알아내.
준하 : 예, 회장님.
춘추, 손짓으로 준하를 내보내고 공주의 마네킹 앞으로 가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뭐가 빠졌지? 왜 허전하지?
#17. 마케팅 사무실
직원들, 각자의 자리에서 전화도 받고 광고시안도 확인하며 바쁘게 일하고 있다.
타쓰지와 이대리, 과장이 간이 회의테이블에서 모델 사진을 들여다보며 미팅을 하고 있다.
이대리 : 모델들이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이에요? 이래서 신인들은 쓰기가 참 그렇다니까. 안 그래요, 실장님?
타쓰지 : (호텔에 두고 온 공주와 인철을 생각하고 있다가) 예?
이대리 : 실장님 보시기에 괜찮은 얼굴 있어요?
타쓰지 : 다 예쁜데요, 뭐.
이대리 : (괜히 웃으며) 아으, 이래서 여자는 남자들이 고르면 안된다니까. 고은비씨. 이리 좀 와 봐.
은비 : (지나가다가) 네.
은비, 이대리 옆으로 와 앉는다.
이대리 : 좀 골라봐.
은비 : (모델 사진을 넘겨가며 보는데)
이대리 : 강인철씨 한번 회사로 오라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기획단계부터 같이 회의를 해야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겠어?
은비 : (건성으로 사진을 넘기며 타쓰지의 눈치를 본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감각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지명도가 좀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이대리 : 아니, 왜 또 마음이 바뀐 거야?
은비 : 회사 입장에서는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대리 : 그렇긴 해도 고은비씨가 모험을 하자고 그랬던 거 아냐?
은비 : 제가 너무 의욕이 앞섰어요.
이대리 : (황당하다) 뭐야~?
은비 : (타쓰지에게) 지난번에 실장님이 저희 집에 가져오신 와인 있잖아요,
이대리 : (뭣이? 은비를 째려본다)
은비 : 알고 보니까 굉장히 비싼 거드라구요. 어머니께서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 달라 그러셨어요.
타쓰지 : ... (문득 뭔가가 생각나 전화를 한다. 일어로) 후지와라 타쓰집니다. ... 내 방에 계신 손님들한테
과일하고 마실 것 좀 올려 보내요. 아, 그리고 부족한 게 없는지 물어보고 필요한 게 있다면 다 해주세요. ... 네.
은비 : (궁금해 미치겠다)
이대리와 과장도 정말 종잡을 수 없는 타쓰지의 행동에 기가 막히다.
타쓰지 : (전화를 끊고 다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오늘 먼저 들어갈께요. (일어난다)
이대리 : 아니, 저, 패션쇼는 어떡해요?
타쓰지 : 프레젠테이션 붙이세요. (방으로 들어간다)
은비, 들어가는 타쓰지를 보는데.
이대리 : 고은비씨.
은비 : 네?
이대리 : 지금 실장님 뭐라 그런 거야?
은비 : 사적인 얘기예요.
은비, 일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이대리, 은비가 얄밉다.
이대리 : 고은비씨!
은비 : 네?
이대리 : (째려보며 심호흡을 하다가) 아니야. (자기 자리로 간다)
회의 테이블에 과장만 멀멀하게 남는다.
이때, 타쓰지가 겉옷을 챙겨 입고 다시 방에서 나온다.
타쓰지 : (은비에게) 고은비씨.
은비 : (본다)
타쓰지 : 한 일주일 휴가원 좀 내줘요.
은비 : 네?
타쓰지, 밖으로 나가버린다.
직원들, 황당하다.
#18. 호텔 - 타쓰지 거실
인철, 전화를 하고 있고 공주, 소파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TV를 보며 리모콘을 연신 누르고 있다.
인철 : 거래처가 끊기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김춘추가 뭘 어떡해? ... 아니, 그럼 우리보고 굶어죽으라는 거야, 뭐야?
김춘추, 이 치사한 놈. 공사를 구분을 못하냐? 남의 밥벌이까지 끊어놓으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 공장 가 봤어?
... 뭐? 내 이 자식들을 그냥! ... 알았어. 당분간 그 자식들 눈에 안 띄게 조심하고... 아, 어떡하냐?... 알았어.
내가 수시로 전화할게. (끊는다)
공주 :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온다) 김춘추, 그 자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냐?
인철 : 아, 시끄러! 다, 너 때문이야. 너 땜에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 아냐?
공주 : 내가 뭘 어쨌다는 거냐?
인철 : 아, 증말. 괜히 데려와가지구. ...남의 집에서 뭐하는 짓이야? 이거!
공주, 슬픈 눈으로 인철을 보는데
인철, 공주가 들고 있던 리모콘을 확 빼앗는다.
인철 : 시끄러 죽겠네, 증말. 니가 보면 알아? (텔레비젼을 탁 꺼버린다)
공주 : ...
인철 : 하, 차 머리하구... 옷 입은 꼴하구... 공주병 걸린 애를 아예 공주로 만들어놨어.
딩동.
인철 : (신경질) 누구세요?
소리 : 룸서비습니다.
인철, 공주를 괜히 째려보고 문을 벌컥 연다.
호텔 종업원이 과일과 샴페인, 과자, 초콜릿 등등이 잔뜩 담긴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다.
인철 : (시비조로) 뭐예요?
종업원 : 후지와라상께서 보내셨습니다.
종업원, 거실 중앙에 트레이를 옮겨 놓는다.
종업원 : 더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종업원, 깍듯이 인사하고 나간다.
공주, 과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다가오는데.
인철 : (티껍다) 차! 회사 갔으면 일이나 하지. 보내긴 뭘 보내?
공주, 움찔한다.
인철, 사과를 하나 집어 들어 덥석 베어 먹는다.
인철,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얼음에 재워진 샴페인병을 집어 마개를 따 잔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탁 내려놓는다.
인철, 소파로 가 벌렁 누워 팔등으로 눈을 가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럴까? 나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걸까?
인철,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음악을 틀고 다시 눕는다.
secret garden의 song from a secret garden이나 sona같은 우울하고 감미롭고 몽환적인 음악이 흘러나온다.
공주, 소파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인철을 잠시 보다가
바나나, 파인애플, 메론, 키위, 등등 처음 보는 과일들을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본다.
공주, 샴페인도 잔에 따라 슬쩍 맛을 본다. 맛있다.
공주, 한 입에 쭉 들이키고 다시 따른다.
시간경과
인철,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 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공주, 한 손에 샴페인 병을 들고 씩씩대며 인철을 내려다보고 있다.
공주 :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래두!
잠에서 깬 인철, 공주가 자기를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자 벌떡 일어나 앉는다.
인철 : 왜?
공주 : (취해서 다짜고짜)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
인철 : ...
공주 : 김유석, 그 자도 나를 믿는데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냔 말이다!
인철 : 너, 취했냐?
공주 : 안 취했다!
인철 : 너, 몇 잔이나 마셨어? (공주의 손에서 술병을 확 빼앗아 들여다본다. 비어 있다) 너, 이거 다 마셨어?
공주 : 그래. 맛있어서 다 먹었다. 어쩔래?
인철 : (황당하다) 미쳤어, 미쳤어.
공주 : (배시시 웃는다) 그래도 모처럼 마음이 편안하구나.
인철 : 술 취했으니까 그렇지.
공주 :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든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맛있는 것도 많고...
인철 : ...
공주 : 너도 있고...
인철 : ...
공주 : 내가 여기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아리 ...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날 믿어주기만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네가 알아주기만 한다면...
서 있던 공주, 올려다보고 있던 인철에게 푹 고꾸라진다.
인철, 얼떨결에 공주를 이상한 자세로 안게 된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고 타쓰지가 들어온다.
인철, 그 자세 그대로 타쓰지를 보고
타쓰지, 부둥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무표정하게 본다.
#19. 타쓰지 방
인철, 침대에 누워 있는 공주를 잠시 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20. 다시 거실
인철,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와 겉옷을 집어 들고 창 밖을 보고 있는 타쓰지의 등에 대고.
인철 : 나, 갈께.
타쓰지 : 결정한 거야?
인철 : ... 여기가 마음에 드신댄다. 일어나거든 나, 갔다고 전해줘.
인철, 나가려다가 선다.
인철 : 근데 쟤 하루 종일 누가 붙어 있어줘야 되는데?
타쓰지 : 걱정하지 마.
인철 :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걸 알려주는 거야. 간다.
나갈 것처럼 하다가 다시.
인철 : 그리고 쟤, 원래 술집에 있던 애 아니야. 정신은 오락가락해도 순진한 애다.
타쓰지 : 그래서?
인철 : 그렇다고.
인철, 뭔가 더 말할 것처럼 하다가 확 나가버린다.
타쓰지, 인철이 나간 문을 잠시 보다가 공주가 잠들어 있는 방을 돌아본다.
#21. 인철이네 집 (밤)
인철, 안으로 들어온다.
인철, 불도 켜지 않은 채 옷을 아무데나 홱 집어던지고 공주가 누웠던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다.
인철의 귀에 은비의 말들과 타쓰지의 말, 변신한 공주의 모습과 말들이 들린다.
은비 : 어쩐지 헬스장으로 오라 그럴 때 못 알아듣더라니. 하, 차. 재수가 없을라니까, 정말.
인철 : 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은비 : 뭐? 야? 어디서 별 거지같은 게 정말.
타쓰지 : 그럼, 내가 데리고 있을까? 귀찮다며? 잘 생각해봐.
공주 : (취해서 다짜고짜)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 (배시시 웃는다) 그래도 모처럼 마음이 편안하구나.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든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맛있는 것도 많고...
천장을 보고 있는 인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인철, 누가 보지도 않는데 괜히 팔등으로 눈을 가린다.
#22. 은비네 집 (밤)
은비, TV를 보며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채여사, 커다란 유리볼에 비빔밥을 뻘겋게 하나 가득 비벼 숟가락을 두 개 꽂아 들고 와 은비 옆에 앉는다.
채여사 : 요새 왜 이렇게 배가 고픈지 몰라. 금방 저녁 먹었는데...살찔래나?
너도 좀 먹을래? 겉저리 넣고 비볐더니 꿀맛이다, 얘.
은비 : 살쪄. 안 먹어.
채여사 : (아구 아구 먹는다) 집에 초대한 효과는 좀 있니?
은비 : 몰라.
채여사 : 아니, 아무 효과도 없어?
은비 : (신경질) 없어!
안 먹겠다던 은비, 갑자기 숟가락을 뽑아들고 그릇을 뺏어서 먹기 시작한다.
채여사 : 그날 내가 보니까 너한테 아주 관심이 없는 것 같진 않던데? 관심이 없다면 여기까지 왔겠니?
은비 : (입에 가득 물고)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
채여사 : (다시 밥그릇을 뺏으며) 여자가 있는 거 아닐까?
채여사와 은비, 서로 눈을 마주치는데 어디선가 휴대전화벨이 울린다.
채여사 : (두리번거리며) 뭐야? 어디야? 누구 전화야?
채여사,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는 봉수의 웃옷을 발견하고 전화를 꺼낸다.
채여사 : (발신자번호를 보며) 누구야? 누구지? (받는다) 여보세요. (끊긴다)
채여사, 이상한 얼굴로 전화를 들여다보는데
봉수, 샤워하다말고 머리에 거품을 묻힌 채 타올을 대충 두르고 욕실에서 뛰어나온다.
봉수 : 전화 왔어? 전화 왔지? 응? 아니야?
봉수, 주머니를 뒤지다가 채여사가 자기 전화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빼앗아 다시 욕실로 들어간다.
채여사, 너무너무 이상하다.
은비, 타쓰지에게 어떤 여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시계를 본다. 여덟시다.
은비,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핸드백을 들고 밖으로 튀어나간다.
채 : 얘, 어디 가니?
은비 : 나 좀 나갔다 올게.
#23. 사무실 (밤)
은비, 아무도 없는 캄캄한 사무실에 불을 켜고 뛰어들어와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급하게 한 아름 쓸어 모은다.
#24. 호텔 앞 (밤)
은비의 차가 끼익 선다.
은비, 조수석에서 있던 서류들을 챙겨들고 결의를 다지며 내린다.
#25. 타쓰지 방 (밤)
타쓰지, 술잔을 들고 서서 자고 있는 공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타쓰지 : (일어로) 정말 닮았어.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지?
현관벨소리.
타쓰지, 문을 닫고 나간다.
공주,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인다.
#26. 타쓰지 방문 앞 (밤)
타쓰지, 문을 열면 은비가 서 있다.
타쓰지 : 이 밤에 무슨 일이지?
은비 : (숨을 헐떡이며 속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무적으로 말하려 애쓴다) 아까 급하게 나가셔서 결제를 못 받았는데요,
일주일 동안 자리 비우실거면 미리 싸인을 좀 받아둬야 할 게 있어서요.
타쓰지 : (은비가 안고 있는 서류뭉치들을 보다가) 줘요.
은비 : 좀 많은데요?
타쓰지 : (방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문에서 비켜선다) 들어와요, 그럼.
타쓰지, 은비를 테이블로 안내한다.
은비, 테이블로 가는 동안 방안을 구석구석 둘러본다.
타쓰지, 테이블에 앉아 고급스러워 보이는 만년필을 꺼내든다.
은비, 타쓰지 앞에 서류들을 내려놓다가 와르르 흩어뜨린다.
은비 : 어머, 죄송해요.
은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서류들을 순서와 종류대로 분류해가며 천천히 챙겨 일어난다.
타쓰지, 말없이 은비가 내미는 서류에 일일이 싸인을 해 넘겨준다.
타쓰지가 싸인을 하는 동안 은비, 거실 안을 꼼꼼히 둘러보지만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은비의 눈에 침실 방문이 들어온다. 저 방에 있나?
타쓰지 : 됐어요?
은비 : 네? 아, 다 하셨어요?
타쓰지 : (일어나며)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해서 어떡하지?
은비 : 괜찮습니다. 근데 일주일 동안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나 보죠?
타쓰지 : (씩 웃고 문으로 가며) 일주일 뒤에 봅시다.
타쓰지, 문을 열어준다.
은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문을 나서려는데
침실 문이 딸깍 열리고 공주가 머리를 감싸 쥐고 나온다.
타쓰지와 은비, 돌아본다.
역시 여자였어. 은비의 눈가가 바르르 떨린다.
타쓰지 : (은비에게) 잘 가요.
은비 : 안녕히 계세요.
은비, 밖으로 나간다.
공주, 타쓰지가 누군가를 배웅하는 기미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지만 타쓰지, 이미 방문을 닫았다.
타쓰지 : 술 좀 깼어?
공주 : 방금 나간 자가 누구냐?
타쓰지 : (홈바로 가며) 아무도 아니야.
공주 : (두리번거린다) 아리는 어디 있느냐?
타쓰지 : (잔에 얼음을 채우며) 아리라니? 인철이 말하는 거야?
공주 : (불안해진다) 그래!
타쓰지 : (술을 따라 마신다) 갔어.
공주 : 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타쓰지 :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타쓰지, 소파에 가 앉으면 공주, 불안한 얼굴로 타쓰지의 앞에 앉는다.
타쓰지 : 배 안 고파? 저녁도 안 먹고 잤는데.
공주 : 난 가겠다. 날 그 자한테 데려다다오.
타쓰지 : (술잔을 든 채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쭉 펴고 기대앉으며 미소를 머금고)
인철이한테는 언제든지 데려다 줄 수 있어. 그 전에 니가 살던 남부여에 대해서 얘기해줄래?
공주, 놀란 눈으로 타쓰지를 본다.
#27. 인철이네 집 - 수정
눈물이 얼룩진 채 잠을 자던 인철, 눈을 번쩍 뜬다.
인철, 집안의 동정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벌떡 일어나 이방 저방 욕실까지 둘러본다. 없다. 공주가 없다.
인철. 두고 온 주제에 찾아 헤메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밤새 돌아오지 않은 공주가 괘씸하기도 하다.
인철 : 차, 아무리 두고 왔다고 안 와? 짜식한테 데려다 달라 그러면 될 거 아냐. 짜식이 안 데려다 주겠다 그랬나?
이때 현관벨 딩동.
인철, 입이 찢어진다. 현관벨 거푸 울린다.
인철 : 나간다. 나가!
인철, 신나서 문을 여는데 춘추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인철 : (실망, 깜짝) 아니, 새벽같이 웬일이세요?
춘추, 인철을 거칠게 밀어버리고 안으로 들어온다.
춘추, 싸늘하게 집안을 둘러보고 이방 저방 들여다본다.
인철, 또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긴장한다.
춘추 : (날카롭게) 여기서 둘이 산 거야?
인철 : ...
춘추 : (질투에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둘이 살았단 말이지?
인철 : ...
춘추, 욕실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문고리를 만져본다.
춘추 : 욕실문도 고장났잖아!!! 이것들이! 니들 여기서 무슨 짓 한 거야?
인철 : (바짝 긴장하여) 아무 짓도 안했는데요.
춘추, 다시 싸늘하게 둘러보고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본다.
춘추 : 너, 그 놈하고 어떤 사이야?
인철 : 어떤 놈이요?
춘추 : 그날 그 건방진 놈 말이야!
인철 : 초등학교 동창인데요.
춘추 : 동창? ... 뭐하는 놈이야?
인철 : 잠깐만요.
인철, 타쓰지의 명함을 막 찾아 춘추에게 준다.
인철 : 이런 놈인데요.
명함을 받아든 춘추, 한 면은 영어, 한 면은 한자로 되어 있자 발끈한다.
춘추 : 너, 나, 초등학교 중퇴라고 놀리는 거냐?
인철 : 중퇴세요? 전, 몰랐는데요.
춘추 : (준하에게 명함을 준다) 읽어봐.
준하 : (받아들고) 후지와라 타쓰지. 역시 일본놈입니다.
춘추 : 후지와라 타쓰지?
춘추, 눈빛을 날카롭게 빛낸다.
인철 : 저... 그런데, 장사는 계속 하면 안될까요?
춘추, 바르르 떨다가 인철의 배를 힘껏 갈긴다.
인철 : (무릎을 꿇는다) 욱!
춘추 :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죽고 싶으면 다시 해! 가자!
춘추, 부하들과 나간다.
인철, 무릎을 꿇은 채 힘겹게 숨을 쉬다가 비통한 울음같은 웃음을 웃는다.
#28. 옷공장
공장이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다.
혁,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고 인철,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있다.
혁,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자기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가위, 줄자, 재단칼, 패턴 등등을 어루만지다가
가방에 넣으며 눈물을 흘리는 혁.
혁 : (울먹이며)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가 있냐? 이제 막 내 디자인이 먹히기 시작했는데,
업소 언니들이 내 디자인의 진가를 이제야 비로소 알아주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쏟아져 말을 잇지 못한다)
내가 널 만난게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실력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어쩌다 내가 너 같은 놈을 만나서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인철 : (웅크린채) 고만해라. 지겹지도 않냐? 똑같은 레파토리?
혁 : 뭐, 이 자식아! 니가 나한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야? 내가 그 날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알아?
나, 점집 사위될 뻔 했어. 춘추한테 맞은데, 니네 옆 집 아줌마한테 쇠파이프로 또 맞고,
인철 :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아, 증말. 말 많네. 내가 책임지면 될 거 아냐?
혁 : 니가 무슨 수로? 너같은 날건달이 무슨 수로 책임을 져?
인철 : 너, 패션쇼 한 번 해볼래?
혁 : ... 뭔 쇼? 너, 돌았구나?
인철 : (곰곰 생각하며 혼잣말처럼) 못할 거 뭐 있어? 니 말마따나 너도 의상 제대로 전공한 놈이고,
나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혁, 챙기던 가방으로 인철을 한 대 후려친다.
혁 : 에라이! 나, 간다.
인철 : 너, 지금 가면 평생 후회할 거야.
혁 : 두 번 다시 안 속아.
인철 : (혁의 팔을 붙잡는다)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속아 봐.
혁,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마음이 약해진다.
#29. 회사 복도
인철, 씩씩한 걸음으로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며 복도를 걸어와 마케팅실 앞에 선다.
인철,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한다.
#30. 마케팅 사무실
인철, 문을 열고 들어가 사무실을 짝 둘러보다가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직원들 중에 은비와 눈이 딱 마주친다.
인철, 가슴이 철렁하지만 내색 않고 똑바로 쳐다본다.
이때 이대리, 반색을 하고 달려온다.
이대리 : 어머! 이게 누구야? 어머,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강이 웬일이세요? 연락받으셨어요?
인철 : 네?
이대리 : 이 쪽으로 앉으세요.
이대리, 인철을 테이블에 안내해 앉히고 자기도 마주 앉는다.
이대리 : (다른 여직원에게 콧소리로) 자기! 여기 커피 두 잔만.
여직원, 째려보고 커피를 타러 간다.
은비,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비웃으며 하던 일을 계속 하는데.
이대리 : 고은비씨! 뭐해? 이리 와봐.
은비 : 제가 지금 좀 바쁜데요.
인철 : (은비를 빤히 본다)
이대리 : (난감하다) 아니 근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오셨어요? 프레젠테이션 한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실장님한테 연락 받으셨나 보죠?
인철 : 프레젠테이션이요?
이대리 : 그거 때문에 오신 거 아니에요?
인철 : 그 친구 어디 있어요?
이대리 : 안 나오셨는데? 지금 휴가중이세요.
인철 : (눈이 홱 뒤집힌다) 휴가요? 이 자식이 진짜! 하, 참, 나. 이것들이 웃겨.
이대리 : 네?
은비,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인철 : 고은비씨.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은비 : (슥 보고) 할 얘기 없는데요.
인철 : (픽 웃는다) 난 있는데.
이대리와 직원들, 무슨 일인가하여 이상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본다.
은비, 기가 막히다.
인철 : 여기서 할까요, 아니면 나가서 할까?
은비 : (미치겠다. 직원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애써 웃으며) 그럼, 나가죠.
은비, 밖으로 확 나가버린다.
인철 : (웃으며 이대리에게)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직원들에게) 수고들 하세요.
인철, 은비의 뒤를 따라 나간다.
이대리 : (넋이 나갔다) 어머, 터프하기까지... (이를 악물며) 고은비..., 고단수네?
#31. 휴게실
은비, 팔짱을 끼고 창 밖을 보고 서 있고 인철, 뒤에 다가와 선다.
은비 : 미리 말해 두겠는데 우리 사촌오빠가 사법연수원에 있어. 우리 외삼촌은 의정부에서 형사반장 하시고.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인철 : (기가 막히다) 고은비씨! 내가 당신한테 피해준 거 있어?
은비 : ...
인철 : 사람을 왜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그 사람 사는 데하고 그 사람하고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어떤 미친 자식이 그따위 광고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고은비씨도 그런 속물이야?
은비 : 속물이라니? 말조심해. 사기꾼 주제에.
인철 : 사기꾼? 내가 너한테 사기 친 적 있냐? 순전히 니 필요에 의해서 날 그렇게 만든 거 아니야?
은비 : (노려본다)
인철 : 관두자. 내가 너 같은 저질 속물하고 얘기해봐야 인간성만 버리지.
은비 : 너, 말 다했어?
인철 :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간다.
인철, 부들부들 떠는 은비를 뒤로 하고 폼나게 돌아서서 복도를 따라 몇 걸음 걷다가
문득 타쓰지가 휴가라던 말이 생각난다.
인철 : 휴가라고? 타쓰지, 이 자식!
인철,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마구 뛴다.
#32. 호텔 현관
인철,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내가 여기까지 왜 왔지?
인철, 다시 돌아 나가려다가 전화를 꺼내 전화를 한다.
소리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인철, 전화를 확 끊어버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대다가
호텔 구내전화기 쪽으로 가 잠시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객실번호를 누른다.
신호음이 울리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인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은 느낌으로 그 자리에 굳는다.
#33. 거리
경쾌하게 달리는 타쓰지의 차.
공주, 앞만 보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다.
공주 : 지금 어딜 가는 거냐?
타쓰지 : (앞만 보며) ... 사비성.
공주, 깜짝 놀라 돌아본다.
#34-1. 부여
공주와 타쓰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왕궁터, 군창터, 정림사지 오층탑, 박물관 등등을 둘러본다.
공주, 유적지를 보며, 설명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타쓰지, 그런 공주가 점점 의아하다.
멀리 닌자들이 나무 뒤에 혹은 건물 뒤에 숨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34-2. 왕궁터
공주, 아무 것도 없는 궁터를 둘러보며 자기가 살던 집터, 언니들과 놀던 곳, 무술 수련을 하던 곳 등등을 찾아 헤맨다.
가이드 : 사비성은 삼국 중에서 처음으로 도성의 개념을 도입하여 조성된 왕성입니다. 이전에는 궁궐과 방어성이 따로 있어서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궁궐을 비우고 방어성으로 옮겨 전쟁을 치루는 바람에 궁궐이 쉽게 파괴되었지만
사비성은 부소산성을 방어성으로 하여 바로 그 아래에 궁궐을 짓고 서쪽에서 남쪽으로 띠처럼 흐르는 백마강을
해자로 삼고, 동쪽의 평지와 얕은 구릉지대에 돌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거죠.
공주 : 그래. 제대로 알고 있구나. 그런데 그렇게 허무하게 나라를 빼앗기다니...
공주, 눈물을 펑펑 흘린다.
가이드, 이상하게 본다.
가이드 : 음.. 한 때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면서 해상대제국을 건설했던 백제의 도성으로서 번성기에 사비의 인구는
가구 수가 13만 호나 됐다고 하는데요, 지금 부여의 인구가 불과 3만 명밖에 안 되는 걸 보면
조금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공주 : (울다가 말고) 네 이년! 과장되다니? 정확히 사비의 가구수는 13만 육천오백팔십삼호에
백성들의 수는 무려 팔십만을 헤아렸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다니!
공주, 화난 얼굴로 어디론가 간다.
타쓰지, 얼른 따라간다.
가이드, 울고 싶다.
#34-3. 정림사지 오층탑
공주, 오층탑에 씌여진 소정방의 공적문을 읽어 내려가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부들부들 떤다.
타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공주를 부축해주는데
공주, 눈물을 흘리며 타쓰지에게 기대 서 있다가 뒤늦게 유석으로 착각하고 거칠게 쳐낸다.
타쓰지, 황당하다.
가이드 : 하지만 멸망한 나라의 수도였던 부여는 나라가 망한 순간부터 퇴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지요.
‘동국여지승람’에도 “집들이 부서지고 시체가 풀 우거진 듯 하였다.”라고 쓰여 있듯이
부여는 소정방과 신라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겁니다.
공주 : 소정방! 김춘추! 김유신! 내, 네 놈들의 간을 꺼내 씹어도 시원치 않겠구나.
가이드 : (무섭다. 덜덜 떨며) 아무튼 당군과 신라군은 땅 위에 세워진 모든 건축물과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깡그리 태워 없애버렸습니다.
공주 : (오열한다) 으흐흐흐흐...
가이드 : 당시 백제의 문화 수준은 동아시아에서 (공주의 눈치를 보고) 아니,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신라와 당의 이 야만적인 행위 때문에 우리 민족은 엄청난 문화적 손실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34-4. 계백장군 동상 앞 (박물관)
울다 지친 공주, 체념한 얼굴로 동상을 올려다보고 있다.
가이드 : 그래서 부여는 최근까지도 발전이 더뎠습니다만 반면에 시가 정리는 아주 잘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자랑하는 아스카 문화의 본거지로 백제시대의 부여를 받들면서
이곳에 신궁을 짓기 위해 대규모의 공사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타쓰지, 의아한 얼굴로 가이드를 본다.
가이드 : 아직까지도 그 때 심었던 향나무와 신궁 지을 재목으로 만든 의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백제와 부여를 자기들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침략을 해오는 걸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고대사에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타쓰지 : (비웃으며 일어로) 흥! 말도 안 돼.
공주 :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냐? 일본이 왜의 후손이고 아직까지 천황의 황통이 이어지고 있다면
그 뿌리를 잊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그런데 어찌하여 자꾸만 조상의 나라를 친단 말이냐?
가이드 : (미치겠다)
타쓰지, 씩씩대는 공주를 보며 피식 웃는다.
#35. 길 (밤)
타쓰지의 차 안.
타쓰지, 운전을 하며 공주를 돌아본다.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모르겠다.
공주,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 참을 수 없는 눈물만 하염없이 흐른다.
공주 : (독백) 나라의 운명도 무릇 사람의 그것과 같아, 태어나 자라고 성하다가 쇠하면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무리 하늘의 이치라고는 하나 오늘 천 삼백년 전 남부여의 흔적은 차라리 아니 보는 것만 못하였다.
작은 향로 하나에, 초라한 왕관 하나에, 이 땅 위에 찬란하게 꽃 피웠던 백제 칠백년 사직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바다 건너 화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백제의 기상은 어디로 갔는가? 황해를 내해로 대륙과 왜를 아우르던
우리 남부여의 정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36. 호텔 앞 (밤)
타쓰지의 차가 선다.
타쓰지, 차에서 내려 공주쪽 문을 열어주고 안전벨트를 풀어준다.
공주, 차에서 내리다가 휘청거리자 타쓰지, 공주를 부축한다.
공주, 멍한 얼굴로 타쓰지에게 몸을 맡긴 채 안으로 들어간다.
#37. 호텔 로비 (밤)
인철,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구석의자에 앉아 있다. 배에서는 꼬르륵 꽈르륵 난리가 났다.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끼면서도 차마 떠나질 못하던 인철, 마침내 결심하고 자리를 뜨다가
마침 공주를 부축하고 들어오던 타쓰지를 본다.
인철, 자기도 모르게 눈이 확 뒤집히지만
타쓰지에게 다소곳이 기대 들어오는 공주를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굳는다.
타쓰지와 공주, 인철을 보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다.
인철,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