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랑(鄭太郞) / 사할린 징용자 정봉규(鄭奉奎, 高山奉奎) 씨 유족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제8회 재외동포NGO대회 in Sakhalin>이라는 이름으로, <사할린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에 대해 논의하고, 사할린한인의 역사와 대면하기 위해 한국․일본․중국동포, 그리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38명이 사할린 현장을 찾았다.
참관자들은 사할린 남쪽의 코르사코프부터 남서쪽의 포자르스코예(미즈호 학살 사건. 민간인에 의한 27인 학살 사건), 홈스크, 고르노자보드스크까지. 강제동원이 극심했던 브이코프에서 비포장도로를 7시간을 타고 가야하는 레오니도보(카미시스카 학살 사건. 일본 경찰에 의한 18인 학살 사건), 뽀로나이스크까지.
짧은 일정 동안 아픔의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역사와 대면하고, 진행되고 있는 삶들과 만났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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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찾아 사할린 나이호로탄광에 왔습니다.’ 사할린 징용자 정봉규 씨 아들 정태랑 씨. [사진제공-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
제 아버지(정봉규, 鄭奉奎, 高山奉奎)는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경주 정씨 집안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아버지는 기술이 있어서 집짓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일제시대라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종가집이 있고 선산이 있었기 때문에 근방에 일가친척들이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1940년에 부모님이 결혼을 하셨고 그 다음해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징용으로 사할린 탄광에 끌려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가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향에도 여러 번 다니면서 친척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큰외삼촌(김영구)과 막내외삼촌(김영학) 말씀으로는 아버지께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는데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후에 마을에서 아버지와 함께 끌려간 권영환 씨, 박윤조 씨를 수소문 하다가 그 자제분들과 만났습니다. 본인들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미쓰비시 계열에 나이호로탄광에서 일했다는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고 아버지 소식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권영환 씨는 1990년경 사할린에서 돌아와 영주 귀국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만났다면 아버지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징용 가신 후 어머님은 저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사셨습니다. 그때 막내 이모가 시집을 안 갔기 때문에 함께 살았는데 이모님 말씀으로는 이후에 사할린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오고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편지는 한국전쟁 때 마을이 불타면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사진 한 장이 남아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태어나서 기어다닐 때 끌려갔기 때문에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면 저는 아버지 얼굴도 전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온 후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일을 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 학년 때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을 때라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초상에 쓸 버드나무를 꺾어 오라는 심부름을 하면서도 어떤 의미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처자식을 두고 끌려가신 아버지와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힘겹게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저는 혼자 외가에서 살았습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방에서 자면서 사랑도 많이 받았고 또 외삼촌께서 키워주셨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따돌림도 당하고 외로움을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일찍 자립해서 취업을 하고 스스로 벌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지금은 담담하게 그때 일을 이야기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혼자자라면서 외롭고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버지께서 사할린 어딘가에 살아계실 것 같은 생각에 호적정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돌아가셨는데 제사도 안지내면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기일인 음력 11월에 밥 한 그릇 떠 놓고 함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할린 유족회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서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예전에 중소이산가족 찾기 행사에도 참여하고 2008년에도 사할린에 왔었지만 아버지를 아는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큰 탑이 있는 곳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냈는데 배를 탈 수 없는 조선사람들이 그 옆에 있는 절벽에서 자살을 많이 했다는 말을 듣고 그 절망감이 전해지는 것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의 뼈 한 조각이라도 고국으로 모셔서 어머니와 함께 계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습니다. 돌아가셨다면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러시아 정부나 일본정부, 기업이 자료를 내놓아 유골이라도 수습하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의 기록과 유골을 찾기 위해 활동할 생각입니다.
제 인생, 마지막 과제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것입니다. 자식 된 도리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아픈 가족사를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중에서도 혹시 제 아버지에 대해서나 나이호로탄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꼭 말씀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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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탄광 갱도 앞에서 선 정태랑 씨. [사진제공-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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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탄광 갱도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정태랑 씨. [사진제공-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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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탄광 갱도 앞 헌화. [사진제공-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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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탄광 탈의실 건물. [사진제공-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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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탄광 탈의실 건물 내부. [사진제공-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