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 수오재기(守吾齋記)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29.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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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 - 수오재기(守吾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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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8:54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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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재기(守吾齋記)
요약 「수오재기」는 ‘나를 지키는 집(서재)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4권에 실린 한문 기(記)이고 수필이다.
작가 다산이 큰 형님인 정약현(丁若鉉)께서 서재의 이름으로 써 붙인 현판에 의미에 대해서 쓴 것으로, 사람이 가장 지켜야 할 바는 외물이 아닌 ‘나[吾]’이고, 나(성품)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훈적이고 자성적인 글이며 주 내용은 나[吾]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이다.
작가 | 정약용 (丁若鏞, 1762년 ~ 1836년) |
장르 | 기(記), 수필 |
발생 | 18세기 후반(영조 38년)~19세기 초(헌종 2년) |
작가소개
정약용 초상
작가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집대성과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들 수 있다. 대표적 저술인 일표(一表) 이서(二書), 곧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통해서 경세와 부국강병을 위한 다산의 일생의 사상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행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8년 동안(1801~1818년) 포항 장기를 거쳐 전남 강진에서의 긴 유배 생활을 들 수 있으며, 그의 방대한 저술 또한 유배 중에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다산의 다방면에 걸친 사상과 업적 중에서도 문학사상과 관련해서는 시 정신(詩精神)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시정신의 연원은 시(詩)로써 수기군자(修己君子)의 인격을 도야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인민의 삶이 담긴 현실을 사실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순정문학(醇正文學: 唐·宋의 古文을 존중하는 정통문학)으로 순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산의 시정신은 단순히 여기에 머물지 않은, 곧 수기(修己)를 위한 정서 함양이라는 소승적 시 정신에서 ‘현실폭로에 따른 치인(治人)을 위한 시 정신’으로 옮겨졌음을 볼 수 있다.
작품해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 제14권에 실려 있는 글로 한문 산문의 문체로는 ‘기(記)’이고, 현대 문학적 갈래로는 수필에 해당한다. 제명 「수오재기」는 ‘나를 지키는 집(서재)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문 산문의 문체 분류상 기(記)는 잡기(雜記)와 필기(筆記)로 나뉘며, 이 작품은 잡기에 속한다. 나아가 잡기류는 산천(山川)·누대(樓臺)·대소사(大小事)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 대부분이고, 내용상 다양한 성격을 띠기 마련이어서 서사·의론·우언 형식 등으로 쓰는 소품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기사(記事: 사실을 기록)와 이에 의한 깨달음을 위주로 하며 ‘잊어버림에 대비’하기 위해 쓴다. 『여유당전서』 제14~15권에는 총 62편의 기(記)가 실려 있고, 누대(樓臺)에 대해서 기록한 글이 대부분이다. ‘수오재(齋)’의 ‘재(齋)’는 광의로는 집 또는 가옥을 뜻하나,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서재(書齋)’ 또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학사(學舍)’의 뜻으로 누대(樓臺)나 거실(居室) 등의 이름 밑에 붙여 접사로 쓰인다.
「수오재기」 또한 여기에 속하며 전문 640여 자의 중간 정도의 분량의 글이다.
「수오재기」는 작가 다산이 그의 4형제인 약현(若鉉)·약전(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중, 큰 형님인 약현이 그의 서재에 써서 붙인 ‘수오재’라는 이름에 대하여 깨달은 바를 쓴 것이다. 처음에는 ‘수오(守吾)’ 곧 ‘나를 지킨다’는 서재 이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작가가 벼슬길에서 쫓겨나 유배의 길에 오르자, ‘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은 것을 쓴 글이다.
곧 ‘나’를 ‘두 가지의 나’로 나누는데, 하나는 ‘현상적 나’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 나’가 있다는 것이다. ‘현상적 나’는 ‘외면적 나’로서 상황과 환경과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수시로 변화하는 ‘변화무쌍(變化無雙: 변화가 비길 데 없이 심함)의 나’이고, ‘본질적 나’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지 않는 ‘항구여일(恒久如一: 오래도록 변함없음)의 나’를 말한다. 그리하여 본질적 나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쓴 글이다.
전문의 내용은 크게 네 개의 단락([1]~[4])으로 나뉜다. 기(起)에 해당하는 첫째 단락[1]에서는 의문의 제기로부터 시작하는데, 큰 형님의 서재의 이름인 ‘수오(守吾)’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그 의문의 내용은 이 세상의 사물 중에서 나에게 나[吾]만큼 꼭 붙어 있는 것이 없는데, ‘나[吾]를 지킨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 승(承)에 해당하는 둘째 단락[2]에서는 유배 중에 홀로 지내면서 ‘나[吾]를 지킨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바 깨달은 내용을 쓰고 있다. 먼저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수는 없고, 오직 나[吾]만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양한 외물(外物)들 - 밭, 집, 꽃나무와 과일나무, 책, 옷과 식량 등- 을 들어, 지키지 않아도 지켜지거나, 지켜도 지킬 수 없거나, 또는 지킬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나[吾], 곧 성품(性品)’만은 달아나기를 잘해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어서 ‘실과 끈, 빗장과 걸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나[吾]’는 다름 아닌 ‘성품’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셋째 단락[3]인 전(轉)에서는 자신의 지난 22년간의 과거 행적을 돌아보면서 나[吾]를 잃어버린 결과로 유배에 오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회고적(回顧的)이고 자성적(自省的) 태도로 쓰고 있다. 10년간의 과거급제에 대한 열망, 이어 12년 동안 벼슬살이, 그러다가 유배 길에 오르게 된 것 등을 들고 있다. 이 모두가 여우나 도깨비에 홀린 것이거나, 바다귀신이 불러서 그랬다는 것이니, 모두 나[吾]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에 대비되는 큰 형님께서는 ‘나를 지켰기[守吾]’ 때문에 편안하고 단정하게 ‘수오재(守吾齋)’에 계신다는 것이다. 곧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를 통해서 그 의미를 재확인해주고 있다.
넷째 단락[4] 결(結)에서는 성현 맹자의 말씀을 들어 ‘수오’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이 글을 쓰게 된 까닭을 밝히고 있다. 교훈적이고 자성적 성격이 강한 글이며, 주제는 나[吾]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이다.
작품전문
[1] 수오재(守吾齋)라는 것은 큰 형님이 그 거실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의심하며 말하기를,
“사물이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吾]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비록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
라고 하였다.
[2] 내가 장기(長鬐)로 귀양 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정밀하게 생각해 보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스스로 말하기를,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수는 없고, 오직 나[吾]만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것이 없다. 나의 정원의 꽃과 과실나무 등 여러 나무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가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나의 책을 훔쳐 없애버릴 자가 있는가? 성현(聖賢)의 경전(經典)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물이나 불과 같은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나의 옷과 식량을 도둑질하여 나를 군색하게 하겠는가? 지금 대저 천하의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의 곡식은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한두 개를 훔쳐가더라도,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모두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즉 천하의 만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이른바 나[吾]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과 작록(爵祿: 벼슬)으로 유인하면 가버리고, 위엄(威嚴)과 재화(災禍)가 겁을 주면 가버리며,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소리만 들려도 가버리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빨의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가버린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모르니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吾]같은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잡아매고 빗장과 걸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3] 나는 나[吾]를 잘못 간직했다가 나[吾]를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에는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명예가 좋게 보여서 과거 공부에 빠진 것이 10년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지가 바뀌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烏帽]을 쓰고 비단도포를 입고 미친 듯이 대낮에 큰길을 뛰어다녔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12년이었다. 또 처지가 바뀌어(유배의 몸이 되어) 한강(漢江)을 건너고 조령(鳥嶺)을 넘어, 친척들과 멀어지고 분묘(墳墓: 조상의 先塋)를 버리고 곧바로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첫 유배지인 포항의 長鬐)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나[吾]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을 죽이면서, 내 발뒤꿈치가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내가 나[吾]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가 끌어서 온 것인가? 또는 해신(海神)이 불러서 온 것인가? 그대의 집과 고향은 모두 초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라고 했다. 그러나 끝끝내 나[吾]라는 것은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마치 얽매인 것이 있어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끝내 붙잡아서 함께 머물렀다. 이때 나의 둘째 형님 좌랑공(佐郞公)도 그의 나[吾]를 잃고 나를 따라 남해(南海)로 왔으니, 역시 나[吾]를 붙잡아서 그곳(유배지)에 머물렀다. 오직나의 큰 형님만은 그 나[吾]를 잃지 않고 편안하고 단정하게 수오재(守吾齋)에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지키는 것이 있어 나[吾]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형님께서 그의 거실에 이름붙인 까닭일 것이다.
큰형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이라고 자(字)를 지어주셨으니, 나는 오로지 나의 태현[吾]을 지키고자, 이것으로써 나의 거실에 이름을 붙였다.”
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핑계 대는 말씀이다.
[4] 맹자(孟子)가 이르되,
“지킴은 무엇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크다.”
라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진실하다.
드디어 내 스스로 말한 것으로써 큰형님께 보이고 수오재의 기(記)로 삼는다.
* ([1]~[4] : 역자 부기)
작품 속의 명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