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1: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포위되는 것을 보면 곧 멸망이 가까이 온 줄로 알라.
21:21 그때가 되면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가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21:22 이때가 바로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다.
21:23 그날에 임신한 여인들과 젖먹이는 여인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크나큰 재앙이 이 땅을 덮칠 것이며 이 백성들에게 진노가 있을 것이다.
21:24 그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이방 사람들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방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1:25 해와 달과 별들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에 괴로워하며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승천후 AD70년에 예루살렘 멸망 함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1311?svc=cafeapp
예루살렘의 멸망(왕하25:1-30절)
B. C 586년경
https://elimtown.net/bbs/board.php?bo_table=preaching&wr_id=1064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된 BC 586년 예루살렘 성곽 일부 발견
https://www.cts.tv/mission300/detail_mission/246/5381
70년 바벨론 포로, 70년 예루살렘 멸망, 70년 공산주의 붕괴
2020년 8월 31일 | KMADRID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과 안식의 성격이 담겨 있다.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견된 징벌로, 이스라엘의 종교관이 성전중심에서 회당중심으로 바뀌게 했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이 낳은 소련의 공산주의가 70년 만에 붕괴됨으로 오늘의 동구권이 독립할 수 있었다. 선지자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 70년의 의미를 깨달고 크게 통곡했다.(단9:2-3)
70년 바벨론 포로, 징벌과 안식의 기간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을 예언했다.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5:11) 이스라엘(남유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포로귀환 또한 주전 538년, 458년, 445년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보통 바벨론 포로귀환이라고 말할 때에 제 1차 귀환시기인 주전 538년으로 본다. 그것은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귀환하도록 칙령을 내린 해이기 때문이다. 제 1차 포로로 잡혀간 주전 605년부터 주전 538년까지 계산하면 67년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포로기간보다 포로가 된 의미를 중요하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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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선지자들(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미가, 나훔, 스가랴 등)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될 것을 수차례 경고했다. 모든 선지자들은 포로가 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반역한 것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특히 예레미야는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31:32)고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벨론 포로 70년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한 결과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대부분의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역대하 저자와 예레미야는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은 이스라엘에게 내린 형벌이 아닌 “땅의 안식년”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황폐되었던 본토의 땅이 오히려 안식하게 되는 기간(대하36:21)이라고 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은 이스라엘을 풀무 속에 집어넣고 그들의 죄악을 정결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사야는 바벨론포로 70년의 생활은 이스라엘이 노역(복역)기간으로 간주했다.(사40:2) 반면 이스라엘이 70년 포로생활을 마친 것은 복역기간이 끝남으로, 그들의 죄악이 사함 받아 원래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기간)인 동시에 안식과 회복의 기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예견된 징벌이다.
AD 70년 7월, 유대인 달력으로 아브월 8일, 4개월 동안 성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다음날 새벽, 성전을 공격할 것을 전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아브월 9일은 약 650년 전(BC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던 날과 공교롭게도 동일한 날이다. 당시 전쟁에 참가하며 “유대전쟁사”를 남긴 요세푸스는 그 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군대가 성을 포위하는 기간에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고, 아이 엄마가 살기 위해서 애를 잡아먹기도 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성과 성전과 도시는 완전히 불탔고 성전의 기명들은 모조리 약탈당했다. 포로들은 건축하는 노예가 되거나 광산에서 평생 일하다 죽거나 검투사가 되어 싸우다 죽거나 로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맹수의 밥이 되어 죽었다. 이스라엘은 참혹하고도 비참하게 멸망했다.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주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거룩한 성전은 죽음의 터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약 6개월 동안 약 13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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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00년 동안 유대인들은 평화의 땅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는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한 채 지구상 도처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폐망한 예루살렘은 바벨론, 페르시아, 아랍인, 십자군, 무슬림 등에게 수 세기 동안 짓밟히며 피로 얼룩졌다.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파괴는 그들의 종교적 삶의 구심점을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게 했다. 특히 솔로몬 때부터 시작된 성전중심에서 회당중심의 종교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내가 그들 안에서 거주하겠다.”(출25:8)라는 말씀 그대로, 성전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성전 파괴와 함께 제사의식이 중단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제사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루살렘의 폐망은 성전을 중심으로 온갖 사리사욕과 기득권을 행사하던 사두개파와 바리세파 등 종교지도자들의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고, 유대교 안에 형성되었던 여러 종파들 간의 알력들이 사라졌다. 성전의 파괴는 그토록 잔인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횡포와 양의 옷을 입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들”(마7:23)마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주님(성경)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세 번이나 반복하며 경고하셨다.(눅11:50), (마24:1-2), (마23:37-38)“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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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바벨론 포로, 70년 예루살렘 멸망, 70년 공산주의 붕괴, 필연적이다.
1991년 12월 25일 오후 7시 정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2억 8000만 소련인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소련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정국상황에 따라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마칩니다.” 고르바초프 연설이 끝나자마자, 당일 저녁 7시 35분경에 크렘린에 게양된 붉은 소련 국기는 3색의 러시아 국기로 교체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1922년 12월 30일 시작된 일인 독제체제 소련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70주년을 앞둔 1991년 12월 25일 저녁 7시에 붕괴되었다. 이후 소련의 공화국은 15개 나라로 독립하였다. 1921년 2차 혁명으로 소련 다음으로 세워진 몽골 공산주의 또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1991년, 70년 만에 공산주의체제를 종식하였다. 몽골은 소련이 해체된 후 1992년의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를 사실상 폐기하였고, 대신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여 국민이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소련과 몽골의 공산주의는 모두 70여년에서 종말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인독재와 공유재산제도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 나아가 소유욕을 항구적으로 억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련과 몽골의 공산주의의 폐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 공산주의 체제로 바뀐 것에 고무된 중국지도층과 지식인들은 집권 국민당과 8년의 투쟁을 거치면서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소련과 몽골 공산주의와 차별화 했다. 특히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 인민의 불만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다. 그 결과 중국은 경제개방을 통해 일인독제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지만 소련의 공산주의는 붕괴되었다. 중국 공산주의 입장에서 경제개방이 특효약이 된 셈이다. 그러나 경제개방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산주의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었다. 홍콩 사태가 보여주듯이 중국의 GDP가 올라갈수록 중국 공산주의는 위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2020년 중국은 공산당 수립 7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렀지만 소련 공산주의가 70년 만에 붕괴되었다는 사실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주의가 과연 71년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미국의 하버드대 왕유화 교수는 중국을 지배한 49개 왕조의 역사를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국 왕조의 평균수명이 70년이다.”
https://madridsarang.com/2020/08/31/70%EB%85%84-%EB%B0%94%EB%B2%A8%EB%A1%A0-%ED%8F%AC%EB%A1%9C-70%EB%85%84-%EC%98%88%EB%A3%A8%EC%82%B4%EB%A0%98-%EB%A9%B8%EB%A7%9D-70%EB%85%84-%EA%B3%B5%EC%82%B0%EC%A3%BC%EC%9D%98-%EB%B6%95%EA%B4%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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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 1 예루살렘의 멸망 (AD 70년 경) ①
2021-07-02 크리스찬타임스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 개선식(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촛대가 보인다)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첫 번째 유대 독립 전쟁(66-74년)에 관해 보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사람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38-100년 이후?)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유력한 제사장 가문 출신이며 하스몬 왕가와도 친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의뢰에 따라“유대전쟁기”(Bellum Judaicum)를 저술하였다. 물론 이 작품이 로마인의 시각을 좇는 일종의 선전문학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나, 요세푸스는 전쟁 초기에 갈릴리 지방의 군지휘자로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보도는 신빙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은 당시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주후 66년 4·5월에 예루살렘 성전 금고를 약탈함으로써 시작되고, 이내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해방운동으로 확산된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 엘르아살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드리던 제사를 중지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한 예배로 인하여 유대교는 로마제국에서 인정받는 300여 종교들 중에서 공식 인정받는 종교중 하나로 된다). 이것은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가 로마 통치자와 공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중대사건이고,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결정적인 봉기의 순간을 뜻한다. 먼저 예루살렘의 유대인 내부에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이른바 평화주의자들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및 헤롯당원들이 하나가 되어 열심당원들과 각축전을 벌이나, 결국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로마군에 공격을 가한다. 반란군들은 여러 성곽뿐만 아니라 시 문서보관실에 침입하여 빚 문서들을 불사른다. 이로써 수많은 빚진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부자들에게 항거하도록 부추겼다고 요세푸스는 보도한다. 여기에서 유대전쟁에 담겨 있는 사회적 동인도 엿볼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 수비를 위해 로마군이 지키던 안토니아 요새와 헤롯 왕궁이 열심당원들의 수중에 넘어간다. 또한 메나헴이 열심당원들에게 가세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더욱 고무된다. 요세푸스는 메나헴이 “마치 왕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보도한다. 메나헴과 관련된 메시아 기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메나헴은 헤롯 왕궁의 통치권을 넘겨 받는다. 아그립바 왕의 수비대는 항복을 하고, 로마 군대는 주변 성곽으로 후퇴한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살해되고, 살려 주겠다는 조건에 항복한 로마군대도 무참히 살해된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살해로 인해 열심당원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대제사장의 아들 엘르아살은 메나헴과 갈라선다. 어느 날 메나헴이 보석으로 치장된 왕의 옷차림을 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성전 예배에 들어서자, 엘르아살의 한 추종자가 그를 살해한다. 메나헴의 추종자들은 마사다로 퇴각한다. 그동안 로마는 시리아의 행정장관 갈루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12군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벳 호론 근처에서 유대인들의 매복 공격에 말려들어 철저히 괴멸된 상태에서 시리아로 퇴각한다.
이 승리로 인해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유대인들도 전쟁에 급속히 빨려 들었고, 반란군은 로마에 대한 승리에 들뜨게 된다. 이제 대제사장과 바리새파가 주동이 되어 곧 밀려올 로마군의 대반격에 대비하여 반란군을 조직적으로 규합한다. 그리하여 각 지방으로 지휘관들을 보내게 되는데, 유대 역사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세푸스를 갈릴리 지방의 지휘관으로 파송한다. 네로 황제는 용장 베스파시안을 파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한다. 베스파시안은 아들 티투스와 함께 67년 초에 대략 6만 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세 군단(제5, 제10, 제15군단)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갈릴리로 진격한다. 47일간 갈릴리를 고수하던 요세푸스는 결국 로마군의 기세에 눌려 67년 6~7월에 항복한다.
이때 요세푸스와 함께 갈릴리를 지키던 열심당의 지도자 기샬라의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탈출하고, 요세푸스는 로마로 전향하여 살아남는다. 요세푸스의 보도에 따르면, 자신이 살아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베스파시안이 로마 황제가 되리라는 자기의 예언이 적중한 것으로 돌린다. AD 67년 말 갈릴리 지방 전체가 로마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로마군은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인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에 처해 있었다. 갈릴리에서 탈출한 기샬라의 요한을 중심으로 열심당의 극단주의파가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친 로마적이며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예루살렘 지배층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제사장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대제사장을 세운다. 그 사이에 베스파시안은 베레아와 인근 유대지방의 중심 지역을 점령한다.
그 무렵 네로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68년 6월 9일),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일단 전쟁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한다. 유대 반란군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지 못하고 새로운 내전에 휩싸인다. 기샬라의 요한이 성전 지역을 장악한 반면, 또 다른 과격한 열심당 지도자인 시몬 바르가 예루살렘의 나머지 지역과 이두메 지역을 지배한다. 과격한 두 유대 지도자들이 격렬한 내전을 벌이는 동안,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떠나 동부 요르단 지방에 있는 페트라로 피신 한다. AD 69년 7월 1일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던 베스파시안이 이집트 주둔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고, 로마 제국 동부 지역도 그를 황제로 인정한다.
제국의 판도를 쥔 베스파시안은 70년에 아들 티투스를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낸다. 티투스는 네 개의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서로 다투던 세력들은 내전을 멈추고 로마군의 공격에 함께 격렬히 대항한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을 아사시킬 목적으로 도시 주변에 돌벽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식량유입을 철저히 봉쇄한다. 당시 절박한 상황을 예수님이 예언한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 하리니...”(개역 한글판, 눅 19:43-44). 안토니아 요새가 AD 70년 7월 말에 점령되고, 성전에서 날마다 드리던 제사가 8월 6일로 중단되며, 마침내 7월 말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어 불에 탄다. 9월 초에 예루살렘 전역이 로마군에 장악되면서 수많은 거주민들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 가고 도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로써 제2 성전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세 개의 요새 (헤로데이온, 마케루스, 마사다)에 모여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투스는 이곳의 점령을 유대 지방의 총독 루킬리우스 바수스에게 맡기고 로마로 돌아가서 아버지 베스파시안과 함께 전쟁 승리의 축제를 연다. 헤로데이온과 마케루스는 곧장 항복하였으나,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인 마사다는 열심당 지휘자인 엘레아살 벤 야이르를 주축으로 하여 격렬히 저항한다. AD 74년 4월에 새 총독 플라비우스가 마사다 서편에 토성을 쌓고 공성망치로 공략하자,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알고 유대 반란군 모두가 자결을 함으로써 마침내 점령되고 만다.<계속>
http://www.kctusa.org/news/articleView.html?idxno=16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