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人物 李厚洛 커넥션
美國CIA커넥션, 스위스 비밀구좌 등 朴정권유지비의 경리부장 이후락(李厚洛)씨의 비밀을 최초로 실증(實證)한 추적기록
美 CIA에 의해 데뷔한 李厚洛씨는 朴정권유지비가 보관된 스위스 비밀구좌의 관리인이었다, 그의 그늘 속에서 원자로를 알선 커미션 2천만 달러를 받은,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의 대외창구 아이젠버그는 누구인가, 3대 정유재벌 창업주와 사돈이 된 그는 기름 이권의 代父였다, 그는 과연 金大中씨를 살렸는가, 라오스 비행(密行)의 배경은? 최근에 드러난 국내외의 자료로써 벗겨본 [비밀을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의 진면목은 이렇다,
<1985년 12월 월간조선>
제1장 미 CIA 커넥션 朴정권 유지비의 경리담당 朴正熙대통령이 사라지고 없는 지금, 朴정권의 비밀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李厚洛씨다. 그가 관계하거나 연출한 한국 현대사의 대사건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변화시켰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3선개헌, 71년 대통령 선거, 남북회담, 10월 유신, 박동선(朴東宣)공작, 金大中씨 납치사건 등 그의 작품들은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져 난도질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인 李厚洛은 아직 건재하다. 상당한 재산과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지금도 갖고 있다. 朴대통령의 꾀주머니로서 국가경영의 핵심에 참여했던 그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朴정권의 악역담당으로서 그가 저嗤?일 가운데는 실정법에 비추면 범죄가 되고, 도덕률에 비추면 부패와 타락이 되며, 역사에 비추면 부패가 될 부분도 많다. 그는 5·16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5·16보다도 더 후안무치한 유신쿠데타의 기획책임자였다. 그는 朴정권의 기획부장이었을 뿐 아니라 경리부장이었다. 그는 정권유지비의 염출과 관리를 책임졌던 인물이었다. 그 검은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李씨는 다른 실력자들과 함께 이 땅에 유례없는 부패의 구조악을 심어놓았다.
李씨가 가진 영향력의 원천은 朴대통령의 신임,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로 상징되는 정권유지비의 관리, 미국 CIA와의 밀착 관계에서 구축한 미국기반으로 일컬어진다. 李厚洛의 정치적 역할은 많이 알려졌으나, 정보인으로서, 또는 비밀자금관리자로서 그의 진면목은 안개속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요사이 국내외에서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李厚洛씨의 정체를 벗겨 볼 시점이다.
군번 79번 미국중앙정보국(CIA)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李厚洛도 존재하지 않弩?것이다. 李厚洛씨와 CIA의 밀접한 관계는 李씨의 큰 자산이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李씨는 몇번이나 CIA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다.
1924년 경남 울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항공기정비학교의 2년제 하사관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2학년때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임관되지는 않았다. 1946년 국군이 창설될 때 李씨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수개월의 단기교육 뒤 곧 소위로 임관됐다. 이때 익힌 영여실력도 그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의 군번은 79번으로서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고 朴正熙대통령(육사2기) 보다도 앞이었다.
미 군정청이 운영한 이 학교의 입교조건은 일제시대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를 나왔든지 장교급에 상응하는 경력을 가진 자라고 정해져 있었는데 李씨가 어떻게 입교할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다. 李씨가 [정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25때였다. 1951년 榴?대령으로서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임명됐다. 그때 정보국장은 김종평(金宗平)준장(전 서울신문 감사)이었다. 金씨에 따르면 李厚洛차장은 주로 HID업무, 즉 적정(敵情)탐지의 임무를 총괄했었다고 한다. {그때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게 金씨의 기억이다.
李씨는 51∼52년 사이 미국의 별참학교 고등반에 유학, 최초의 미국 경험을 하게 된다. 52년 여름에 귀국하자마자 그는 육군병참감으로 천거됐다. 그때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李鍾贊)중장. 당시 총장 비서실장이었던 안광호(安光鎬)씨(전 이태리 대사·무역진흥공사 사장, 현 동강실업 회장. 예비역준장)에 따르면 李厚洛씨가 병참감으로 발령이 나기 직전 자신이 李총장에게 건의하여 인사기안내용이 뒤바뀌어 병참감에 이호(李澔)준장(전 내무장관·대한적십자사 총재)이 임명됐다고 한다. 서열상 李厚洛씨가 도저히 병참감이 될 수 없었는데도 그런 기안이 올라 와 安실장이 부당함을 진언했었고, 그 뒤로 李씨와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李씨가 병참감이 된 것은 2년 뒤였고, 그가 병참감에서 미국대사관 무관으로 옮겨 2년간의 미국생활을 체험한 뒤 귀국한 것은 1959년이었다.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었던 李厚洛준장은 귀국 뒤 보직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렇게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 선뜻 그를 데려가려는 선배가 없었다.
李준장은 일군이나 만주군 인맥에도 끼지 않았고 그렇다고 독자적인 인맥도 형성하지 못했다. 전투병과도 아니라 군의 주류에선 벗어다 있었다. 李준장이 그때 가장 따랐던 이는 유재흥(劉載興)중장(전 국방장관)이었다. 劉중장은 李준장의 보직문제를, 당시 국방장관 김정렬(金貞烈)씨(전 국방장관·공군참모총장)에게 부탁했다. 金장관은 劉장군의 일본육사 선배일 뿐 아니라 양쪽 집안끼리도 아주 가까왔다.
미 CIA가 정보계에 데뷔시켜 金貞烈장관의 전임인 김용우(金用雨)국방장관 시절 한미 두 나라 국방장관 사이에 비밀협정이 맺어졌다. 양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한국 쪽에서 바라던 바였다. 李承晩정부는 해외정보, 특히 공산권 정보에 어두워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보기관은 육해공군에 설치된 방첩대(CIC)등지 전부였다. 이들 부대는 방첩 및 대(對)북한 관계 정보수집만 했고 해외에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59년 어느 날 미국CIA의 중요간부 한 사람이 金貞烈장관을 방문했다. 그 간부는 한국에 CIA지부를 설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부를 미 8군이나 미 대사관 같은 다른 미국기관과는 독립된 조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CIA요원들에게는 외교관에 대한 것과 꼭 같은 치외법권이 보장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군이나 대사관을 아주 가볍게 보는 태도였다. 그때 李承晩대통령은 미국 정보기관을 대단히 싫어했다. 1952년 발췌 개헌 파동 때 미군정보기관이 李承晩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군을 동원하는 쿠데타 모의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정보기관원들의 철수를 미국측에 요구한 적도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金장관은 CIA서울 지부가 독립기관으로 주재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 대신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를 얻어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렇게 해서 미국 대사관의 고위간부 한 사람이 새로 부임하게 됐는데 그의 이름은 웨인 넬슨이었다. 미남인 넬슨은 물론 CIA 한국 지부장이었다. 넬슨은 부임하자마자 金장관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한미 국방장관끼리 맺어진 정보 교환 협정을 이행하려면 CIA의 상대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군 정보기관은 여러 갈래로 되어 있으므로 통합조정기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金장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3군에서 요원들을 뽑아 국방부 장관 직속 부대를 만들었다. 金장관이 그 부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李厚洛준장이었다. 이 부대의 嚼だ?[중앙정보부]였다. 대외적인 가명으로서 李준장은 [79부대]라 부르도록 했다. 자신의 군번을 딴 것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부대장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 점에서 李씨의 강한 [욕망]을 읽을 수 있겠다.
이 [중앙정보부]란 이름은 5·16뒤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李厚洛씨가 이 부대의 책임자로 된것은 CIA의 추천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정보국 차장, 무관 경력에다가 영어를 잘하고 미국 사정에 밝다는 점에서 李준장의 임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얘기다. 미국CIA와 관계를 트게 된 발단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깊은 관계가 된 뒤에는 양쪽이 아주 굳게 깍지를 끼게 된다. 이 부대에는 미국 CIA요원도 몇 명이 파견 나와서 초창기 업무를 도왔다.
李承晩 특명, 라오스 밀행 창?당시 79부대의 인원은 20여 명이었다. 각 정보부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정리하는 일과 CIA에서 넘겨주는 해외정보를 분류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CIA에서 건네주는 정보를 1주일만 모으면 캐비넷에 가득 찰 정도였다. 李준장은 CIA정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간추려 매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했고, 장관은 그 가운데서 더 중요한 것을 추려서 경무대에 보고했다. 국정 통수권자에게 정보보고가 체계적으로 되기 시작한 효시였다. CIA서울 지부와의 접촉창구로서 李厚洛준장이 그들의 마음에 쏙 들게끔 활동했으리라는 것은 그 뒤의 관계로 미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초대 지부장 넬슨은 지부창립 직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용한 한국인 운전사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넬슨의 어린 아들이 운전사로부터 결핵에 전염돼 폐를 앓는 바람에 한국에 싫증을 느끼고 넬슨이 본국근무를 요망했다고 한다. 넬슨의 후임으로 2대 지부장에 취임한 데 실버씨는 폴란드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 왔다. 그는 슬라브족 출신이란 소문도 있었다. 실
버씨는 李厚洛준장의 장래 후견인이 될 인물이었다. 실버씨는 부임할 때부터 정치공작 전문가란 악명을 갖고 왔다. 자유당 정부에선 그를 경계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실버씨는 한국에서 4·19, 5·16을 만났고, 그 뒤 월남에 현지책임자로 가서 고딘디엠 축출 쿠데타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70년대엔 미국 본부의 핵심간부로 일했다고 한다.
79부대장 李厚洛씨가 재임 중에 한 일 가운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화는 [라오스 미션]이다. 당시 라오스에선 파테트라오 군을 중심으로 한 공산계열이 우익 왕당파인 푸미 노사반의 정부군과 대결하고 있을 때였다. 李承晩대통령은 라오스가 적화되면 고딘디엠의 월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것이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金국방장관을 불러 {라오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리가 도와 줄 일이 없을까}하고 의논한 끝에 李厚洛준장을 라오스로 밀파하기로 했다.
당시 주 월남 대사 최덕신(崔德新)의 주선으로 李준장은 라오스로 燒? 노사반 장군을 만나고 돌아왔다. 평양밀행(密行)이 李씨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무대였다면 라오스 밀행은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 됐다. 서울로 돌아온 李厚洛준장을 데리고 金장관은 경무대로 들어가 李承晩대통령을 만났다. 李준장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그는 {노, 노, 노사반 장군이…}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이것이 李厚洛씨와 李대통령의 첫 만남이 됐다.
李준장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白善燁)합참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버렸다.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李厚洛준장은 매주 두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許政)과도정부 시대를 거쳐 민주당 정권 때까지 계속됐다.
CIA 추천으로 정보실장 취임 4·19 때 데 실버가 지휘하는 미국CIA 서울지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한때 무성했다. 4·19직전 CIA요원 1백50명이 오산을 거쳐 서울로 숨어 들어왔다느니, CIA가 학생들에게 돈을 뿌리며 시위를 충동질했다느니 하는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된 셈이지만 데 실버가 李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한 미국의 매카나기 대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믿는 이들은 많다. 4·19뒤 민주당 정권 때 李厚洛의 후견인 노릇을 톡톡히 한 것도 데 실버였다.
4·19를 계기로 한국의 정보기관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경찰서의 사찰과 직원들은 부정선거 앞잡이라 하여 공민권이 제한돼 공직에서 추방됐고 군 정보기관 요원들도 자유당 권력층과 가깝다하여 눈총을 받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민주당은 일단 정권을 잡자 와해 직전인 정보기관의 기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50년대에는 張勉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당시엔 조폐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張총리의 측근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던 선우종원(鮮于宗源)씨(전 국회사무총장·현 평통자문회의 부의장)는 이렇게 증언한다.
{데 실버가 張총리한테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도록 건의를 했읍니다. 요원의 훈련, 조직 및 운영예산지원 등 여러가지 도움도 약속했읍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달았읍니다. 李厚洛씨를 그 기관장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 이었읍니다. 張총리는 언짢게 생각하는 듯 했읍니다. 李厚洛이를 위해 정보기관을 만드느냐고 말입니다. 총리께서는 나를 보고 李厚洛씨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라고 했어요. 알아보았죠. 그에 대한 평판은 좋다는 쪽과 나쁘다는 쪽으로 딱 갈라져 있더군요.
참모총장을 지낸 어떤 분은 아주 좋지 않게 말하더군요. 저는 여러 얘기를 종합한 끝에 李厚洛씨를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총리께 보고를 드렸죠. 그러나 데 실버가 얼마나 강력하게 권고를 했던지 李厚洛씨가 책임자로 임명되더군요. 당시 정부예산이 동이 나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가 2천만 달러를 급히 얻어와야 할 때였으니 미국측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1961년 초에 발족한 것이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였다. 李厚洛씨는 소장으로 예편한 뒤, 위원회 산하의 중앙정보연구실장으로 취임했다. 기관의 이름이나 조직은 79부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이 위원회는 여러 국가정보기관의 업무를 통괄하는 기능을 위임받았다. 자유당 때 미국이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李承晩대통령에게 요청했을 때, 李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미국 CIA는 이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상대국의 정보기관이 강력해야 그 기관을 통한 영향력 행사도 쉬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격상된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李厚洛실장은 차관대우였다. 그러나 이 기관은 제대로 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5·16을 맞고 말았다.
CIA 간청으로 李씨 석방 지난 78년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 소위원회로 [한미관계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소위원회는 20명의 조사관을 동원, 11개국에서 관련자들과 연 1천5백63회의 인터뷰를 하는 등 약2천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이 보고서를 만들었다. 朴東宣사건 직후에 나온 보고서이므로 한미 관계의 부정적인 면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비밀자료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 보고서 23쪽엔 이런 대목이 있다.
[…(5·16뒤) 중앙정보부는 李厚洛소장이 만든 중앙정보위원회를 흡수했다. 金鍾泌 전 중정부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모씨는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위원회가 미국 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6이 나자 李厚洛은 부패혐의로 체포됐다. 체포의 진짜 이유는 그가 미국 측과 너무 가깝다는 점이었다. 몇 달 뒤 군사ㅁ퓽?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李厚洛을 석방했다. 이 보좌관에 따르면 CIA가 李씨의 석방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李厚洛씨의 석방에 기여를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CIA 한국 지부장 데 실바였다. 실바는 李씨가 구속돼 있을 동안 그의 가족까지도 여러 모로 보살펴 주었고, 金鍾泌 정보부장을 자주 찾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CIA측에선 金정보부장에게 李씨의 이름은 대지 않고 정보 기관의 운영에 꼭 중요한 한 인물이 갇혀 있다는 식으로 말을 둘러대어 암시를 여러 번 주었다고 한다.
金부장이 스스로 李씨를 풀어 주고, 李씨로부터 중앙 정보위원회 등 정보기관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자문을 받도록 CIA가 원격조종을 했다는 것이 李씨 측근에서 나온 이야기다. 金鍾泌 부장과 가까운 쪽에선 데 실바가 李씨를 거명하면서 여러 번 석방을 간청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가까운 金貞烈씨도 朴正熙장군을 찾아가 李씨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전달, 석방과 중용을 부탁했다고 한다.
어쨌든 미국 CIA는 李承晩정권 때는 李厚洛씨가 정보기관장으로 데뷔하도록 했고, 張勉정권 때는 그를 격상시켰으며, 5·16 뒤엔 李씨를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출해 주었다. 5·16 쿠데타에서 李厚洛씨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추측의 영역에 속한다. 그 추측은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밖에 없다.
쿠데타가 나자마자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張勉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한국군 수뇌부가 빨리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서 미국대사관 마샬 그린 대사대리도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신속한 반응은 미국 국무성의 허가를 받지 않고 나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국무성은 나중에 이 성명들을 추인했다).
CIA에 反朴正熙 정보 알려? 서울 주재 미국 당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쿠데타 주모자들의 과거 경력에 대한 미국 정부 당국(필자 주:아마도 CIA)의 보고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미 하원 국제 문제 소위원회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 이들 보고에 따르면, 朴正熙장군은 1940년대 중반 육군 장교 시절에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 48년의 여수 반란 사건 때는 정말로 공산주의자였다는 증거도 있었다. 그는 이 혐의로 해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는 약 3백 명에 달하는 공산당 첩자들을 밝혀내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됐다. 여기에는 정일권(丁一權) 등 다른 인물들의 도움이 컸다. 金鍾泌은 대학교 재학 때 좌익학생 운동에 관련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5·16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 문화담당 보좌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에 따르면 쿠데타 참여자들은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의 접촉에는 제한이 많았다고 한다. 장면(張勉)정부는 미국 대사관 내의 주요 간부들―참사관, 정치 담당 영사, 그리고 헨더슨―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 CIA가 5·16을 지원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조사했으나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CIA도 미국대사관과 같이 쿠데타에 반대하고 있었다]
5·16 주체 세력에선 李厚洛씨가 주체세력의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한 정보를 CIA에 알려 주어 미국 당국이 즉각 적으로 쿠데타에 반대하도록 했다는 의심을 가졌고, 그 때문에 그를 체포했다고 한다. 朴正熙장군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미 정보기관이 그 이전에 이미 손에 넣고 있었고 5·16직전에는 張勉정부를 통해 朴소장을 예편시키도록 압력을 넣은 적도 있기 때문에 李씨의 정보만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李씨와 미국CIA서울지부의 친밀한 관계로 미뤄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CIA쪽으로 상당히 흘러들어 갔으리란 추측은 너무나 당연하다. 두 나라 국방장관 협정이 정보교환을 약속하고 있었고 중앙정보위원회의 조직목적이 CIA와의 정보교류였으니까.
容共 쿠데타 아니다 미국 측에선 쿠데타 주모자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도 상당 기간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른 한국군 부대를 동원하여 쿠데타 군을 진압하려는 매그루더의 계획이 尹潽善 당시 대통령의 거부로 좌절된 직후 미국 대사관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에서 {張勉정부의 운명에 대한 한국민들의 냉담과 무관심 때문에 우리의 행동범위는 제한을 받고 있다}고 했다. 쿠데타가 기정사실로 되자 미국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6월 중순 그린 대사대리는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에서 {군사정부 지도자들과의 면담 결과, 그들이 군사통치를 상당히 오랫동안 펼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6월 하순 미국 대사관측은 군사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처가 취해진다면 미국 정부는 우호적으로 협력할 것이며 동결한 2천8백만 달러의 원조자금도 풀겠다고 제의했다.
A, 민주적 정치질서를 회복시키겠다는 정부의 보장
B, 공무원의 수를 4만 명쯤 줄이고 봉급을 올릴 것
C, 부정 부패의 발본색원
D, 군사 정부가 약속한 농촌 고리채 정리와 기타 경제 조치의 실천
군사 정부는 쿠데타 직후 약 40명의 장성들을 체포, 또는 연금했다. 상당수는 친미적인 사람들이었다. 미국 측은 이들의 석방에 노력했고 그들을 미 국방성의 경비부담으로 미국에 유학 보냈다고 미국측 자료는 밝히고 있다. 7월초 사뮤엘 버거 신임 미국대사가 서울에 왔다. 그가 부여받은 사명 중의 하나는 군사정부 지도자의 방미초청이었다. 버거 대사는 7월15일 미 국무장관에게 군사정부 지도자의 용공성 여부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번 군사혁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조종되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았는가의 여부에 대한 첫 평가를 완료했다. 그 결론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2, 여러 가지 상황증거들은 압도적으로, 이번 혁명의 주류가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반공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이 혁명에 참여한 기회주의자들도 있긴 하지만 쿠데타에 참여한 세력의 주된 동기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믿어진다.
A, 군과 3부(府)와 한국인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성행하고 있는 부정부패에 대한 혐오감
B, 정부의 무능력과 정책의 무계획성, 그에 따른 경기 침체, 국민들의 정신적인 방황과 불만
C, 공산주의자들의 상황 이용
4, 공산주의자들이 군사혁명 지도자들이나 민간인 보좌관들 속에 침투해 있고, 중요 직위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일부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와 관련됐던 전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朴正熙 장군은 그런 그룹에 속해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전향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희생물 제1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중장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군사정부안에 있는 몇몇 인물이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비난은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혐의는 상황증거에 반영을 둔 것이거나 개인적인 편견, 또는 감정에 기인한 듯하다.
5, 쿠데타가 능률적으로 추진됐고 정권을 탈취하는 요령에 대한 확고한 지식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개재됐다고 유추해서는 안 된다. 구르셀 장군은 터키에서, 아유브칸은 파키스탄에서 똑같은 거사를 했고, 이번 혁명지도자들도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완벽한 쿠데타 거사를 가능케 한 것은 미국이 한국군에게 그 동안 가르쳐온 군사훈련, 즉 조직·군수·정보에 대한 교육 덕분으로 볼 수도 있다.
6, 소련, 북한, 중공이 이번 혁명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온 것도 이 혁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 것이 아니라는 보강증거가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무한한 위장전술의 능력을 가기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혁명에서 드러난 반공적인 증거가 이처럼 많은 것을 볼 때, 공산주의자의 조종에 의한 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앞서 5·16직후 매그루더 사령관을 맨 먼저 만나 朴正熙 장군의 전력을 변호해 준 것은 당시 공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金貞烈씨였다. 朴장군은 일본육사 선배인 金씨를 형님이라 부르며 가깝게 지낸 편이었다. 朴장군이 여순반란 사건 뒤 숙군 때 체포됐을 때도 金貞烈씨는 채병덕, 丁一權씨 등 일·만군 수뇌 인사들과 함께 朴씨의 구명운동을 벌였었다. 金씨는 미군으로부터는 [마이크 킴]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신뢰를 받고 있었다. 金씨는 5·16 다음날 매그루더를 만났고 朴장군을 반공주의자라고 안심시킨 뒤 金鍾泌씨와의 면담을 주선했었다.
金鍾泌, 李厚洛을 취직시켜 버거 대사의 보고문에서 드러나듯 미국 측은 [일단 안심]은 했기만 경계심은 풀지 않고 있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반공적이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대체로 반미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金鍾泌정보부장은 공공연히 자유당 시절 미국이 취한 경제원조 정책을 비난했다. 朴正熙 장군은 사석에서 꼭 {미국×들}이라고 부를 만큼 생리적으로 미국을 싫어했다. 더구나 친미적인 張都暎 세력이 제거된 뒤에는 군사정부 안에서 친미적인 지렛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사정부 안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 하나는 군사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개발에 미국자본을 대거 끌어들임으로써 경제적인 지렛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61년 가을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있던 李厚洛씨가 원충연(元忠淵) 대령의 후임으로 국가 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된 것은 이런 상황 아래서 였다. 당시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소한 것 같았던 이 인사는 박정희 정권과 한미 관계 및 60∼70년대의 정치 행태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李厚洛씨의 발탁과정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김봉기(金鳳基)씨(전 대한공론사 이사장·유정희의원)일 것이다. 그는 준장급 문관으로 金貞烈 국방장관의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혁명주체들 및 李厚洛씨와는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61년6월초로 기억하는데 미도파 건너편 희 다방에서 우연히 金鍾泌 정보부장과 만났어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李厚洛씨의 석방을 부탁했지요. 金부장은 며칠 있다가 李씨가 나올 꺼라고 해요. 그리고는, 지금 대한공론사 이사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기자 경력이 있는 당신이 좀 맡아주어야겠다면서 언제까지나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합디다. 그때 대한공론사는 정부투자 기업체로서 코리언 리퍼블릭이란 영자신문을 내고 있었죠.
약속한 날에 지금 국제호텔 자리에 있던 정글 바로 이력서를 가지고 나갔죠. 金부장은 안 보이고 한 구석에 누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데 李厚洛씨에요. 아주 풀이 죽은 표정이에요. 반갑게 인사를 했지요. 얼마 안 있어 정보부 서울 분실장 李병희씨가 들어왔어요. 조금 있으니 金鍾泌씨가 나타났죠. 두 사람이 나뿐 아니라 李씨와도 만날 약속을 한 것 같았어요. 저는 풀이 죽은 李씨를 보자 순간적으로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래서 金부장과 따로 앉은 자리에서 대한공론사 이사장은 미국인들과 친면이 깊은 李씨가 적임자라고 그를 추천했어요. 金부장은 李厚洛씨에게는 [월간 다이제스트]란 잡지를 하나 만들어 맡길 계획이라고 해요.
저는 이런 시대에서는 월간지가 될 일이 아니니 내 생각 하지 말고 李厚洛씨에게 대한공론사를 맡기라고 했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신문사 사장이란 직책을 가지면 李씨가 활동하기도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李厚洛씨가 며칠 뒤 대한공론사 이사장 겸 코리언 리퍼블릭의 사장이 되고 저는 코리언 리퍼블릭의 주필 겸 부사장이 됐읍니다}
언론사 사장이 된 李씨는 정부 홍보만 하면 코리언 리퍼블릭을 신문답게 만들어 한국 거주 외국인들이나 미국 대사관측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군사정부를 비판도 하고 객관보도에도 힘써 신문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니 이 신문을 이용, 외국인들에게 군사정부의 입장을 설득시키는 데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대한 공론사의 운영은 金鍾泌부장이 차량, 예산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사장과 부사장 월급은 정보부로부터 지급받아 예산부족을 카버하기도 했다. 李厚洛씨가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이러한 실적이 상당히 기여했으리란 게 중론이다.
그 자가 美 CIA라면서? 李厚洛씨는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 최고회의에 들어갔다. 주체세력도 아니었고, 오히려 반혁명으로 몰린 사람이었다. 반미무드가 지배하는 최고회의에서 그와 같은 친미주의자는 처신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李厚洛씨는 순식간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朴正熙 의장을 홀딱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대변인이란 자리는 최고실력자의 신임정도에 따라 그 비중이 가늠된다.
당시 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부임직후엔 새까만 군 후배가 되는 주체세력 장교들에게 깎듯이 님자를 붙이던 李厚洛씨는 얼마 안가서 선배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더란 것이다. 그 비결은 朴의장의 신임이었고 이 신임 덕분에 옛날의 군 선후배 관계를 되찾았다는 얘기다. 李厚洛씨가 자리를 굳히는 데 미국측도 크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李씨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한미 관계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李厚洛씨가 나서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李씨는 아침에 최고회의(나중에는 청와대)로 출근하기 전에 미국 대사와 아침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런 문제의 해결책을 의논하곤 했다. 朴대통령이 물으면 즉시 그의 입에서 대책이 나올 정도였다. 미국 쪽에선 李씨가 끼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도록 문제를 만들어놓곤 했다. 그렇게 하여 李씨는 미국과 한국의 접촉점에 서게 됐고 그의 비중은 저절로 높아져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李厚洛씨를 서로가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물론 미국이 李厚洛씨를 최고회의 안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이용했다는 물증은 없다. 적어도 미국 CIA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촌스럽게 외국정부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CIA의 공작은 미국을 위해 일해달라고 지령이나 부탁을 하는 식이 아니라, 눈치 안 보고 자연스럽게(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CIA한국지부가 접촉창구로서 한국 국방부 안에 정보기관을 만들도록 요청하면 보직이 없어 놀고 있는 미국통 李厚洛씨가 자연스럽게 그 기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李厚洛씨를 임명한 사람도 CIA와 의논한 일이 아니기만 결과적으로는 CIA의 계획대로 성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지만 李厚洛씨가 朴정권 아래에서 영향력을 키워간 과정을 분석해보면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朴대통령의 입장에서도 李厚洛씨와 같은 인물은 대미(對美) 지렛대로서 필요한 존재였다. 朴정권 시절의 모 공보비서관은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우스개처럼 {李厚洛, 그 자가 미 CIA 앞잡이라면서}라고 내뱉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고 했다. 그런 朴대통령이 李씨를 12년 동안이나 측근에 둔 것은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락(李厚洛)씨는 미국과 朴정권의 균형점이기도 했다. 그런 줄타기를 하는 데 李씨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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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모사드 커넥션
수수께끼 인물 아이젠버그
78년의 미 하원 [한미관계 조사보고서]에는 사울 아이젠버그라는 미스터리의 인물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1962년 2월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스라엘 실업자가 사울 아이젠버그가 일본 기업인과 金鐘泌씨의 면담을 주선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2백28쪽).
[1964년 봄에 사울 아이젠버그는 朴正熙대통령, 장기영(張基榮)부총리 및 다른 고관들과 만나 자신이 5억 달러 규모의 외국차관을 유치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이 방문 때 아이젠버그는 청와대의 몇몇 고관들에게 현금선물을 했다고 한다](2백29쪽).
[李厚洛정보부장 시절 그로부터 특혜를 본 사람은 많다. 朴東宣이 그런 사람이고 아이젠버그도 그렇다고 한다. 주한 미국대사 필립 하비브는 미국 회사들에 대하여 아이젠버그를 조심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는 뇌물을 뿌리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73년 朴正熙대통령은 정부에 지시하여 프로젝트의 차관선을 결정할 때 아이젠버그를 잘 봐주도록 당부했다. 아이젠버그는 1960년대에 미국이 한국의 개발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을 거절했을 때 군사정부에 차관을 알선했었다.
이 때문에 朴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그 지시에 힘입어 캐나다의 캔두(Candu)원자로를 아이젠버그가 한국에 팔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거래에서 아이젠버그는 캐나다측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그 대가로 그는 2천만 달러의 커미션을 캐나다 측으로부터 받았다. 소위원회 조사관이 인터뷰한 한국인 기업가와 미국대사관 직원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이 거래를 조사하여 한전 사장 민충식(閔忠植)과 당시 총리 金鍾泌이 아이젠버그의 커미션에서 돈을 일부 받았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1975년에 사임하게 됐다는 것이다](2백35쪽).
李厚洛과 CIA, 李厚洛과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 李厚洛과 그 인맥 등을 알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듯 아이젠버그는 朴정권 시절의 실력자들과 놀랄 정도의 폭넓은 교분을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李厚洛씨 및 김성곤(金成坤)씨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이 두 사람으로부터 가장 많은 덕을 보았다.
아이젠버그는 그의 역할 만큼은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활동중 상당부분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관련돼 있는 등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이젠버그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은 李厚洛씨의 행동반경이나 정보의 세계에서 그가 점하는 좌표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디 아민 속여 첩보기 운영
지난 78년9월11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에는 런던발로 이런 요지의 기사가 실렸다. [신비에 쌓인 이스라엘 상인과 모사드는 이디 아민의 우간다에 두 대의 보잉707기를 팔았다. 이 비행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은 리비아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비행기는 우간다와 유럽을 오가며 화물을 수송하는 데 매주 서너 차례 리비아의 벵가지 공항에 재급유를 받기 위해 착륙한다. 이때 이 비행기에 탄 항법사가 모사드로 첩보를 올리고 그 첩보는 영국 및 미국 정보기관에까지 돌려지고 있다. 이 비행기가 우간다에 팔려 간 경위는 이렇다.
사울 아이젠버그라는 이스라엘 기업인은 텔 아비브에 아시아 하우스라는 호화빌딩을 갖고 있다. 이 빌딩에 본부를 가진 아타스코(Atasco)란 회사는 이스라엘 국방성이 투자한 비행기 판매 및 정비 회사다. 아이젠버그는 73년 중동전쟁 뒤 이 회사를 인수, 경영하고 있다. 아이젠버그는 미국의 항공사 펜암으로부터 17대의 중고여객기를 구입, 도색을 새로 하고 객실 내부시설을 뜯어고쳐 여러 나라로 팔고 있다.
1916년에 그는 707 한 대를 스위스 추리히에 있는 한 회사로 팔았다. 이 추리히 회사는 이 707을 우간다에 다시 팔았다. 이 추리히 회사는 모사드와 베테랑 정보요원이 경영하고 있는 위장회사다.
1년 뒤 아이젠버그는 또 한 대의 707을 뉴욕의 로네어 회사에 팔았다. 로네어는 이 비행기를 다시 우간다 항공사에 빌어 주었다. 그런데 로네어는 뉴욕 39가에 있는 아이젠버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는 회사다. 이디 아민은 집권한 뒤 대부분의 조종사들을 죽였다. 우간다 항공사는 두 대의 707을 움직이기 위해 조종사를 외국에서 구해야 하게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종 인력 공급 회사 아브테크(Avtec)에 의뢰, 조종사들을 공급받게 됐다. 그런데 이 아브테크는 모사드가 운영하는 추리히 회사의 하청회사임이 확실하다. 아브테크가 공급한 승무원 가운데 이스라엘 첩자가 끼여 있는 것이다]
6·25뒤 한국에 진출, 치부
이디 아민은 76년의 엔테베 기습작전으로 이스라엘에 의해 위신이 무참히 짓밟혔던 독재자다. 유태인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는 아민을 복잡한 국제거래의 미로에 빠뜨려 이스라엘을 위한 첩보수집에 이용한 사울 아이젠버그는 지금도 서울에 지점을 유지하고 있다. 중구 저동 쌍룡빌딩 15층에 있는 아이젠버그(주) 서울지점이 그것이다. 이 지점은 지난 54년에 설립됐다. 서울에 와있는 가장 오랜 외국회사 중의 하나다.
15년 전 아이젠버그는 절친한 金成坤씨로 부터 5백 평에 이르는 15, 16층을 약 1백만 달러를 주고 99년간 임내했다(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금지되있으므로). 아이젠버그는 대부분의 사무실을 세주고 지금은 약 1백 평의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다. 직원이 10여 명 밖에 되지 않고 영업실적도 옛날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건물임대료 수입이 한달에 3천만 원쯤 되어 걱정없다는 것이 송승엽(宋昇燁)이사의 말이다.
아이젠버그와 한국, 그리고 李厚洛씨 등과의 관계를 알려면 먼저 그의 이력서를 들추어 봐야 한다. 그는 1920년에 독일 뮌헨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2차대전이 나기 직전에 그는 나치의 압박을 피해 스위스로 갔다. 그는 로테르담, 상해를 떠돌다가 도오꾜에 와서 정착했다. 여기서 그는 오스트리아 남편과 일본인 아내 사이에서 난 처녀와 결혼했다. 2차 대전을 일본에서 보낸 아이젠버그는 일본 패전 뒤의 혼란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프라이팬, 욕조, 화덕 등을 수입, 판매하여 최초의 1백만 달러를 벌었다. 일본의 중공업이 부흥하자 철광석 수입으로 한몫을 잡았다. 해운회사도 차렸다. 그는 20대 후반에 벌써 남미의 파나마로 진출했다. 유령회사를 만들기 좋게 되어 있는 이 나라에다가 아이젠버그 주식회사의 본부를 두었다.
그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6·25동란 때였다. 그는 분쟁지역을 찾아 다니면서 2차대전 때 남은 무기의 판매로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에 무기를 판 것 같지는 않다. 아이젠버그의 활동무대는 지구 그 자체이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이스라엘에 집이 있는데도 오스트리아 여권을 갖고 다녔다. 아마도 다중국적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경무대를 수시로 방문, 李承晩대통령을 자주 만났다. 발전소나 비료공자, 제철공장 등의 설립에 에이젠트로 관여하여 설비수입과 차관알선에서 커미션 등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가 수입을 알선한 상품이나 시설에는 {폭리다}는 비난이 자주 따라다녔다.
스카니아 바비스라는 대형버스를 북유럽에서 수입했을 때도 국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수입 알선한 인천제철의 보일러가 터져 말썽이 나기도 했다. 자유당 실력자들과의 유착으로 반도 호텔 안에 있던 아이젠버그 지점은 날로 번창해 갔다. 직원들은 술집에서 아이젠버그 상호가 찍힌 명함만 내밀어도 외상 술을 마실 수 있었다.
한국의 중요시설 도입에 간여
1950년에 아이젠버그는 이스라엘 국적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긴밀하게 협조하며 해외에서 번 돈을 이스라엘로 가져가 기부하기 시작했다. 해외지사의 직원 중에는 현지에서 이스라엘 대사관의 무관으로 일한 경력의 소유자가 많다고 한다. 60년대에 아이젠버그는 이스라엘 자파 지방의 병원건립에 1천만 이스라엘 파운드를 기증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이스라엘 정부에선 그를 적극 지원하게 됐다. 지난 68년 의회는 [아이젠버그 법]이란 이상한 특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아이젠버그가 해외에서 번 돈에 대해서는 향후 30년 동안 면세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아이젠버그의 해외 영업활동이 철저하게 이스라엘 국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모사드뿐 아니라 CIA와도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미국에서는 신무기개발에 관계, 한국의 친구들에게 자기 회사가 개발한 탱크를 자랑하기도 했다. CIA뿐 아니라 공산국가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과도 선을 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랍의 실력자들과도 파이프라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월남 패망 때 탈출하지 못하고 사이공에 붙들려 있었던 李대용 공사 등을 귀국시키는 데 아이젠버그가 중재자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제3공화국 시절 아이젠버그는 주로 턴키 베이스의 큼직한 공장건설의 알선을 맡았다. 60∼70년대에 그가 대리인이 되어 시공회사와 공사차관을 끌어들여 성사시킨 프로젝트는 거창하고 화려하다. EMD 방식의 전화교환 설비(수입선 서독 시멘스)와 호남비료 공장을 비롯, 영월화력 2호기(외자 1천6백만 달러) 부산화력 3, 4호기(서독 시멘스 건설, 외자차관 7천8백여만 달러) 영남화력 1, 2호기(40만kW, 차관선 서독 AEG사, 외자 약3천6백만 달러) 동해화력 1, 2, 3호기(66만kW) 동양시멘트 공장, 한일시멘트 공장, 인천화전, 일신제강, 쌍룡시멘트, 고려시멘트, 유니온 셀로판 등등. 아이젠버그의 특기는 차관선을 잘 끌어온다는 점이었다.
그가 여러 은행들을 끌어모아 콘소시엄을 만드는 재주는 비상한데, 유태인 금융가들이 그를 밀고 있는 것 같다. 60년대 초 거의 미국에 차관선을 의존하고 있던 공화당 정권으로서는 서독, 프랑스 등 유럽의 상업차관을 물고 들어오는 아이젠버그가 고맙게 여겨졌을 법도 하다. 차관의 조건은 나쁜 편이었다.
아이젠버그를 [악질 고리 대금 업자]로 매도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높은 금리 때문이다. 아이젠버그의 수입원은 이런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뒤 시설을 판 쪽으로부터 받는 커미션이었다. 한 건이 수억에서 수천만 달러짜리 큰 공사였으므로 커미션도 {어마어마했다. 한전 관계 설비의 경우 커미션은 보통 계약가의 5%였다.
李厚洛 등 한국의 실력자들이 비호
아이젠버그가 전문으로 한 발전소나 기간산업 설비의 계약에는 朴정권과 실력자들이 거의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당시 아이젠버그가 특히 가깝게 사귄 인물로는 金成坤 공화당 재경위원장, 申현확씨[(전 총리), 李厚洛씨, 장기영(張基榮) 부총리, 閔忠植씨(전 한전 사장·청와대 수석 경제 비서관), 金종희 한국화약그룹 회장 등이었다. 이들이 아이젠버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아이젠버그의 전성시대는 60년대 말 이었다. 그때는 서울 지사 직원들이 약 60명이나 됐고 한 해 매출고가 수억 달러를 기록했다.
아이젠버그는 그러나 한국엔 한해에 두서너 번 정도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는 아이젠버그의 활동무대가 전세계로 확대되어 수십 군데의 지점망을 갖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울 지사의 한국인 직원들은 그를 [코끼리]란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1m86cm 쯤의 큰 키를 가진 그를 처음 대하면 우선 압도돼 버린다고 한다. 이야기를 해보면 그의 부드러운 매너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인 점은 분명한데, 지사의 한국인 직원들에 따르면 직원처우에도 너그러워 그들의 요구 사항은 거의 다 들어 준다고 한다. 큰 프로젝트가 성사가 되면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푼다는 아이젠버그다. 그는 자기, 토기, 그림, 목기 등 한국의 골동품을 좋아해 많이 사 가져갔다.
60년대 말 아이젠버그는 국회의원들을 텔아비브에 있는 자기 저택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집에 갔던 당시 장준하(張俊河)의원(사상계 발행인)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박물관을 차려도 될 만한 양과 질의 한국 골동품들이 집을 꽉 메우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요새와 같은 텔 아비브의 저택 이외에도 도오꾜, 런던, 추리히에 고급 맨션을 갖고 있다.
한국 몇몇 고관들이 도오꾜에 가면 그의 맨션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의 실력자들을 추리히로 초대하여 금품공세로 회유했다느니,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 이용법을 실력가들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아이젠버그라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아직은 확인이 안 되는 이야기다. 70년대 말부터 그는 사무실을 겸한 전용기 보잉707을 타고 세계를 누비고 있다.
캐나다 원자로 수입에 활약
아이젠버그가 한국에서 이룩한 최후의 대작은 월성 원자력 3호기 공사였다. 1973년 4월 캐나다 원자력 공사(AECL)의 론 그레이 사장이 한국에 왔다. 그는 청와대, 상공부, 과기처, 한전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는 캐나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가압중수형(加壓重水型) 원자로(일명 CANDU)의 장점을 소개하고 월성에 세워질 60만kW 짜리 원자력 3호기 건설계획에 참여할 뜻을 나타냈다. 미국의 웨스팅 하우스가 선점(先占)한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시장에 도전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캐나다의 시도는 무모한 것 같았다. 가압중수형이 농축 우라늄 대신 천연 우라늄을 연료로 쓴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일부 국가에서만 가동이 되고 있어 그 경제성과 신뢰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못한 데다가 웨스팅 하우스가 미국정부를 앞세워 캐나다와의 협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나다측은 이미 그 5년 전부터 사울 아이젠버그를 통해 한국과 접촉해 왔음을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캐나다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젠버그는 68넌 말 홀연히 캐나다 원자력 공사의 본부가 있는 오타와에 나타났다. 그는 그레이 사장에게 중수형 원자로를 한국에 팔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레이는 반신반의했으나 아이젠버그에게 상담의 추진을 맡겼다. 다음해 한국 관리들과 캐나다측 실무진의 회의가 주선됐으나 한국측에 의해 취소 됐다. 미국측의 압력 때문이라고 했다.
그 뒤 한동안 이 프로젝트는 잊혀졌다. 1972년 아이젠버그가 다시 그레이 사장을 찾아와 본격 추진을 다짐했다. 이해 11월 아이젠버그는 캐나다 원자력 공사와 독점적인 대리인 계약을 맺었다. 커미션 액수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했다. 그레이사장이 한국에 나타난 것은 그 다섯 달 뒤였다. 캐나다와의 교섭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73년 6월에 중수로 조사단이 캐나다를 다녀왔다. 10월에 캐나다 측이 기술 사양서 초안을 제출했다. 이 단계에서 민충식(閔忠植)씨가 한전사장에 임명됐다. 정부 안에선 캐나다 원자로 구입에 반대하는 소리도 높았다. 閔사장의 임명은 이런 반대론을 꺾고 원자로 구입을 빨리 추진하라는 朴대통령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朴대통령이 캐나다 원자로 도입을 결심하게 된 데는 핵개발과 미국회사에 대한 견제의 목적이 있었다.
11월에 한전은 마침내 중수로를 채택키로 결정, 구매 의향서를 캐나다로 보냈다. 그뒤 오타와에서 閔사장, 그레이, 아이젠버그 등 3자가 모여 가격 협상을 벌였다. 몇 년을 끄는 게 보통인 원자로 도입선의 교섭이 전광석화로 결말이 난 것은 아이젠버그의 비상한 수완 덕분이었다. 73년 당시 핵개발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한국에서는 원자로의 도입 문제에서 李厚洛씨가 그 직책상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朴東宣 사건에서도 드러났듯 미국으로부터의 쌀 수입과 같은 대외적인 이권에 그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국무총리 金鍾泌씨나 閔忠植 한전 사장은 아이젠버그와 오랜 교분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의 지원 등으로 아이젠버그가 손에 넣은 계약은 외자 6억7천9백만 달러, 내자 2천8백22억 원 규모의 공사비가 걸린 대작이었다.
아이젠버그는 단순히 거래의 중개만 한 것이 아니었다. 캐나다 유럽 등에 있는 30여개의 은행들을 끌어 모아 한국에 대한 원자로 구입 차관단을 구성, 돈줄까지 끌어다 댔다. 그가 한국에 잘 먹힐 수 있었던 깃은 이런 자금 동원력과 메이커에 대한 정확한 정보 때문이기도 했다.
2천만 달러의 커미션 받아
이 거래의 진짜 재미는 커미션을 둘러싼 스캔들이었다. 캐나다 의회의 보고에 따르던 캐나다 원자력 공사 그레이 사장과 아이젠버그가 커미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원자로 도입계약이 서명된 74년 12월25일 직후부터였다. 아이젠버그는 4천만 달러의 커미션을 요구했다. 그레이 사장은 깜짝 놀라 깎으려고 했다. 결국 커미션은 2천만 달러로 낙착이 됐다.
이 커미션에 대한 청구서가 아이젠버그로부터 캐나다 원자력 공사에 날아온 것은 76년 1월이었다. 그때 그레이 사장은 물러난 뒤였다. 로스 캄프벨 회장은 커미션이 아무래도 너무 비싼 것 같아 캐나다 정부에 처분을 의뢰했다. 정부의 지시에 따라 캄프벨 회장은 텔 아비브로 날아가 아이젠버그를 만났다. 커미션을 더 깎아달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원자로를 아르헨티나에 팔았을 때는 이태리 대리인에게 2백50만 달러의 커미션만 주었던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캐나다측의 간청에 따라 커미션을 1천8백40만 달러로 깎아주었다. 그러면서 반대 급부를 하나 받아 냈다. 앞으로 캐나다가 한국에 원자로를 계속 팔 때에는 자신을 대리인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각서를 받아낸 것이다. 캠프벨은 커미션에 대한 아이젠버그의 계산서를 받아 가지고 갔다. 문제가 된 것은 이 계산서였다. 이것은 아이젠버그가 원자로 알선 업무로 해서 쓴 경비 내역이 아니라 엉뚱한 방계회사의 청구서였다. 이것이 캐나다의회의 국정 감사에서 들통이 났던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경리장부의 열람을 요구한 캐나다 의회 감사반의 제의를 거절했다.
캐나다 언론에선 이 과도한 커미션의 일부가 한국 관리들의 매수용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 고관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캐나다 의회 보고서가 金鍾泌 총리와 閔忠植 사장에게 혐의를 둔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지금 에너지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원자로의 도입이 잘된 선택이라는 의견이다.
이스라엘 위해 돈벌이
캐나다 원자로 거래 때문에 아이젠버그는 한국 안에서도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 의회 조사반이 한국에 와서 관계자들을 만나는 등 국내외로 시끄러워졌다. 朴대통령이 대노하여 그의 추방을 명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는 과장이다. 원자로 거래 이후 아이젠버그의 한국내 활동이 눈에 띄게 시들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의 비호 세력이었던 李厚洛, 金成坤씨가 정치 중심부에서 물러나 끈이 끊어졌다. 아이젠버그의 스타일은 걸찍한 정치인과 잘 어울리지 매끈한 경제 각료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둘째, 한국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정부나 상사가 이제는 아이젠버그와 같은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차관을 끌어 오거나 메이커측과 협상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이젠버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는 말을 실천이나 하듯 넓직한 한국 지점 사무실을 유지하며, 서서히 빛을 잃고 있다. 한때 1년 매상고가 억불 대를 헤아리던 회사가 지금은 억원 대로 축소돼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지난 80년4월에 정부로부터 받은 금탑산업훈장 증서가 걸려있다. 아이젠버그는 지금 세계 40개국에 지점망을 갖고 있으며, 연간 10억 달러의 매상고를 올리고 있다. 현지법인등 방계회사도 수십개나 된다. 전부 무역회사다.
세계에서 가장 발이 넓은 국제 브로커로 꼽히는 그는 요즘 중공에 주력, 8개 도시에 지사를 두고 있다. 중공 고위층과 가장 자주 접촉하는 서양 실업인이란 평이다. 그는 또 남미에 힘을 쏟고 있다. 아이젠버그식의 사업은 후진국가나 개발도상국에 맞다고 한다. 어수룩한 구석이 있는 나라, 권력과 금력이 밀착되는 나라에서 그는 활개를 칠 수 있는 모양이다.
아이젠버그를 잘 아는 어느 한국인은 {상인에게 폭리를 봤다고 욕하는 것은 학생들을 공부 잘한다고 꾸짖는 것과도 같다. 아이젠버그는 비록 돈을 더럽게 벌지라도 그 돈은 조국을 위해 바친다는 뚜렷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를 욕할 게 아니라 그에게 놀아난 우리의 실력자들을 나무라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아이젠버그와 결탁한 공직자들 때문에 국민 경제가 피해를 보았다. 아이젠버그가 뇌물을 뿌렸다면 그 몇 배의 바가지를 우리에게 씌웠을 것이다. 커미션 때문에 불리한 차관, 부실한 시설을 도입 안 했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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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스위스은행 비밀구좌
스위스은행 비밀구좌의 주인
1965년 2월10일 朴正熙대통령의 대구사범 동창인 서정귀(徐廷貴)씨(자유당 시절 재무부 정무차관)가 부산 영도에 있던 흥국산업(주)이란 석유 판매회사를 인수, 흥국상사로 이름을 고쳤다. 3월 이 회사는 대한 석유공사의 벙커C유를 인수, 판매하기로 하는 공급계약을 맺었다. 이 회사는 삽시간에 전국 판매망을 조직, 벙커C유 판매로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기구 확장과 시설 투자비를 마련하기 위해 徐씨는 67년7월 50만 달러를 받고 주식 25%를 미국 걸프사에 팔았다. 걸프사로부터 1백51만1천 달러의 차관도 얻었다.
68년엔 흥국상사가 유공의 경질유 제품까지 독점적으로 팔 수 있게끔 되어 더욱 번성하게 됐다. 徐延貴씨는 한편 李厚洛 비서실장의 지원 아래에서 럭키재벌에 호남정유란 엄청난 이권이 떨어지도록 공작하는 데 성공, 69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호남정유의 대주주(뒤에 사장)가 됐다.
경쟁관계에 있는 두 정유회사에 양다리를 걸친 것이었다. 이 어정쩡한 상태는 오래 갈 수 없었다. 걸프사는 흥국상사의 주식 25%를 추가로 인수하기로 하고 흥국 徐사장과 교섭에 들어갔다. 이즘의 상황이 78년의 [미 하원 한미 관계 보고서]의 부록(8백40∼41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식 인수 대금을 2백만 달러에 합의한 직후 李厚洛은 걸프와 한국 주재 대표인 힐 보닌에게 연락, 관계자회의를 요청했다. 이 회의에는 李厚洛, 徐廷貴, 보닌, 그리고 몇 주주들이 참석했다. 李厚洛은 絶씬?양해를 얻은 다음 주식 인수 대금 2백만 달러 가운데 20만 달러를 朴대통령의 미국 방문 경비로 건네줄 것을 요청했다. 보닌은 이 제의를 (피츠버그 본사에 있는 한국 투자 담당자) HI 굿맨에게 전달했고, 굿맨은 ED 로니에게 보고했다. 로니는 20만 달러의 송금을 李厚洛이 제안한 방법대로 하도록 승인했다.
1969년 8월 21일 피츠버그의 걸프 본부는 20만 달러를 전신환으로 추리히에 있는 스위츨란드 유니언 은행에 송금했다. 수취인은 徐廷貴였고, 구좌번호는 625,965,60D였다. 1969년 12월에 이 구좌에서 19만 9천7백50달러가 인출됐다. 이 돈은 李厚洛이 徐廷貴를 대신하여 서명함으로써 인출해 간 것 같다] 여기서 흥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스위츨란드 유니언 은행은 徐廷貴씨 명의의 구좌 명세서(Statements for the account)를 정화섭(Wha Sup Chung)이란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이 명세서는 69년9월2일자로서 은행이 입금 사퓽?통지하는 내용이다. 왜 徐씨나 李厚洛씨가 아니라 정화섭이란 인물에게 연락이 갔는가? 정화섭이란 누구인가.
사위가 비밀자금 관리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도 여기에 의문을 갖고 입금자인 걸프를 통해서 이 은행에 徐廷貴 구좌에 대한 상세한 정보의 제출을 요청했다. 78년6인15일 스위츨란드 유니언 은행은 [예금주가 사망했을 경우인 정당하게 상속인이 된 자만이 예금주의 구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답신, 자료제공을 거절했다. 스위스는 예금주에 대한 비밀유지를 법으로 정해놓고 있으므로 그런 답신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위원회는 이 정화섭이 누구인지는 쉽게 밝혀냈다. 그는 李厚洛씨의 외동딸(38)의 남편이다. 정씨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장인인 李씨는 70년12일에 정보 무경험자인 鄭씨를 국제문제담당 국장으로 앉혔다. 재임말기엔 朴대통령으로부터 지적을 당해 사위를 물러나게 했다.
미 하원 국제문제소위원회 조사관이 인터뷰한 李씨의 둘째 아들 이동훈(李東勳)씨(한국화약 김종희.金鍾喜 회장의 사?는 鄭화섭씨가 장인을 위해 돈을 관리한 적이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鄭화섭씨가 지금 로스앤젤레스 교포사회에서 화제의 초점이 되고 있다. 鄭씨는 한미 플라자라는 6백50만 달러짜리 상가빌딩을 시내 요지에 갖고 있었다.
교포들은 이 건물이 李厚洛씨가 해외로 내돌린 돈으로 세워진 것이라 주장, 입주반대운동을 벌였다. 청년들이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교포들의 이런 움직임에 견디지 못했던지 鄭씨는 얼마 전 이 건물을 다른 교포에게 팔아 넘겼다. 로스앤젤레스에는 李厚洛씨가 투자하고 있다는 은행도 있고, 호텔도 있다. 李厚洛씨의 자금관리자였다는 사위니 만큼 그런 소문이 생길 만도 하겠다. 李厚洛씨와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 문제는 좀 더 알아봐야 할 과제다.
검은 돈은 스위스로
흥국상사 주식 매입에 따른 에피소드는 李厚洛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걸프로 하여금 흥국 주식의 25%를 2백만 달러에 사도록 힘을 넣은 것은 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미하원 보고서뿐 아니라 유공에 근무했던 간부들이 이를 시인하고 있다. 이 매입 가격은 당시의 적정가격보다는 약 3배, 1년 전의 매입 가격보다는 약 4배 비싼 것이었다. 그는 徐廷貴씨와 주주들에게 횡재를 안겨 준 거래를 주선해 놓고 20만 달러의 커미션(?)을 대통령 여비 명목으로 떼어갔다. 그 돈의 인수는 해외에서 스위스 은행을 통해서 이뤄졌다.
외환관리법을 위반한 것은 물론이다. 스위스 은행 등 외국은행을 이용한 이런 [검은 돈] 관리방식은 李厚洛씨뿐만 아니라 金成坤 徐廷貴 金炯旭 씨 등 제3공화국 실력자들의 행동패턴이었다(金炯旭은 朴東宣이 급히 필요하다고 하니까 서울 암시장에서 10만 달러를 바꿔 건네주기도 했었다). 스위스 은행들은 세계의 검은 돈이 몰리는 집합장소다. 철저하게 예금주를 보호하는 대신 싼 예금 금리를 적용, 금리차로 큰 수입을 올리는 것이 이 나라다. 미 하원 국제소위원회 보고서는 스위스 은행 구좌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1970년에 청와대의 한 고위관리는 李厚洛 金成坤 金炯旭이 각기 1억 달러쯤의 개인재산을 모았다고 주장했다. 소위원회의 증언에서 金炯旭은 金成坤이 끌어모은 정치자금 가운데 75만 달러를 자신의 개인용도로 가져가 썼다고 말했다. 그는 또 金成坤이 朴대통령 부처, 丁一權 李厚洛 등에게도 사용(私用)자금을 대주었다고 했다. 朴대통령에게 바쳐진 자금에 관아여 본 소위원회가 볼 때 李厚洛은 이 자금을 모아 가지고 스위스의 은행구좌에 대통령용이란 명목으로 입금했을 가능성이 있다.
李厚洛과 다른 인물들도 朴대통령에게 돈을 바쳤는데 대통령은 청와대의 대통령 책상 뒤에 있는 캐비넷에 그것을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스위스 은행구좌의 실재(實在)는 은행기록, 李厚洛의 아들 李東勳의 증언, 청와대의 朴대통령 측근들에 의해 입증됐다. 李東勳은 소위원회 조사관에게 스위스 은행에 있는 돈은 대통령을 위한 정부자금이라고 했다. 그는 또 李厚洛이 그 자금을 관리하였으나 그것이 李厚洛의 개인용도는 아니라고 했다.
李東勳은 또 그가 일본에서 아버지의 돈으로 2백만 달러의 예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있있다고 증언했다. 朴대통령이 비밀자금을 필요로 했던 이유에 대해 李東勳은 지지자들에게 돈을 주고 정적들을 매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미국정부의 어느 보고에 따르면 거의 모든 야당 국회의원들이 돈을 받았다고 한 한국실업인이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실업인은 대통령이 군부의 배신을 두려워한 나머지 70년대에 들어와서는 더 많은 돈을 육군의 핵심 지휘관들에게 주고 있다고 한다]
3대 석유재벌 창업주와 사돈간
朴대통령이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李東勳씨가 대통령이나 아버지에게 불리한 이런 증언을 왜 했는지 수수께끼다. 李東勳씨는 청문회에 소환된 증인은 아니었?소위원회 조사관의 인터뷰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 李東勳씨는 미국에 있었던 것 같은데 미국 의회쪽의 압력이 거세었던지, 아버지가 그 정도 쯤 이야기해도 좋다고 협조를 양해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미국의회 조사관이 李씨의 약점을 잡고 달려들었는지…
李東勳씨(37)는 李厚洛씨의 둘째 아들로 한국화약그룹 고 金종희 회장의 사위다. 큰 아들 李동진씨(38)는 고 徐廷貴씨의 사위다. 유공,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등 3대 정유공장을 가진 재벌의 창업주들과 사돈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세 사돈과 세 정유공장은 李厚洛씨의 엄호를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진출한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 등 미국의 세 국제석유자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장본인이 李씨였다. 그 지원의 대가로 朴정권은 정치자금을 걸프와 칼텍스로부터 거두어 들였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은 매상고를 올리고 가장 많은 이익을 거두고 가장 오만하게 소비자 위에서 군림했던 것이 세 석유회사였다. 이 황금송아지의 보호자가 바로 李厚洛씨였다. 석유와 李厚洛씨의 깎지낌으로 해서 덕 본 것은 李씨와 朴정권, 그리고 미국 석유업자들이었다. 멍든 것은 우리 국민이었고, 우리 정치였다. 그 부패의 구조를 해부해 볼 때다.
1975년 5월16일 미국 상원 다국적기업조사 소위원회가 마련한 청문회에서 걸프 석유회사 봅 도시 사장은 이런 증언을 했다.
클라크 상원의원 : 민주공화당은 그 선거(주:67년 선거를 뜻함)에서 겨우 51%의 득표로 이겼읍니다. 당신들의 정치헌금이 그런 표차를 만들어 공화당을 이기게 한 것으로 보는데,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도시 : 통계적으로는 의원의 말씀이 맞다고 인정합니다.
걸프헌금으로 대통령 당선?
이 짤막한 문답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 석유회사의 불법한 정치헌금이 한국의 정권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걸프사장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李厚洛 金成坤씨 등이 끌어 모은 정치자금은 정권유지비로 쓰였다. 거기에 석유회사가 기여했다면 반대급부가 없을 수 없었다. 도시 사장은 상원 청문회에서 {우리 회사는 정치헌금의 대가로 아무 것도 받지 않았읍니다. 사업을 자유롭게 계속 할 수 있는 권리를 빼고는 말입니다}고 답했다.
국제석유자본에 있어서 [사업을 자유롭게 계속할 권리]보다 더 좋은 반대급부가 어디에 있을까. 도시 사장의 실토에서 석유회사에 의한 불법적인 정치헌금이 야기하는 가장 큰 두 가지 병폐가 드러난다. 첫째는 국내의 민주정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고, 둘째는 국민경제의 이권을 미국 석유회사에게 팔아 넘긴 점이다.
[1971년 대통령선거 무렵에 미국회사들은 직접, 간접으로 8백50만 달러를 공화당에 헌금했던 것 같다. 걸프는 3백만 달러를 냈고 칼텍스는 4백만 달러를 합작상대(호남정유)에게 차관이나 원유 중개료 선불의 형식으로 빌려줌으로써 정치헌금을 가능하도록 했다. 다른 세 미국회사의 에이젠트는 대통령 선거 3주 전에 1백50만 달러의 커미션을 받아갔는데 이 돈도 공화당으로 간 것 같다. 미국회사의 헌금이 투표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계산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정치자금과 함깨 생각해볼 때 이 돈이 朴대통령의 金大中에 대한 승리 마진 8%를 만들어 냈을 가능성은 있다](미 하원 한·미관계 보고서 2백42쪽).
칼텍스는 [1970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徐廷貴씨의 호남정유로부터 8백만 달러의 원유 중개료를 스위스 은행의 구좌에 입금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칼텍스는 [스위스 은행에 입금시킨 이 돈의 수취인이나 돈의 용도에 대해선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소위원회에 답했다.
소위원회는 그러나 [호남정유가 소속된 럭키그룹이 공화당에 대한 정치헌금후보회사 명단에 들어 있음]을 지적, [스위스 은행구좌로 들어간 8백만 달러 가운데 일부가 공화당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칼텍스측에선 [이런 자금지원으로 해서 사업상 이득을 보았다]고 소위원회 조사팀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장사꾼의 속성인 것이다.
李厚洛, 걸프에 1백만 달러 요구
군사정부는 5·16뒤 민족자본에 의한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1962년에 정부보유 달러가 바닥나 공사비도 제대로 못줄 지경에 이르러 외국회사와 합작을 하게 됐다. 이때 등장한 것이 걸프였다. 걸프는 2천5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울산정유공장을 지었다. 석유공사의 주식 25%를 소유하게 됐다. 걸프의 한국 상륙을 적극지원 한 것은 미국정부였다. 미국의 해외보험공사는 걸프의 한국내 투자분을 보험으로 커버해주었다.
주한 미군은 울산정유 가동까지는 한국에 대한 기름공급을 독점, 李承晩 정권에 대해 경제적인 압력을 넣기 위해 지난 54년엔 두 달 동안 기름을 끊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국이 민족자본의 정유공장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걸프 ?미국계 메이저와 합작하는 편이 미국의 영향력 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걸프의 한국 상륙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은 걸프의 극동조정관 허버트 굿맨이란 국무성관료 출신의 대머리 신사였다.
뒤에 걸프계열 회사의 사장자리까지 승진했던 그는 李厚洛씨와의 창구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 대학, 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걸프가 가진 여러 이권들을 朴정권내의 파벌에 적당히 분배하는 데도 깊게 관여했다. 걸프의 상륙에 때맞춰 AID는 석탄 개발 차관를 끊었다. 1963년의 장성탄광에 대한 차관 9백만 달러가 마지막이었다. AID는 그 뒤로 석유화학 공업부문에 차관을 많이 제공한다. 미국의 이해관계에서 보면 걸프가 등장한 마당에 석유와 경쟁이 되는 석탄을 지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울산정유의 가동과 거의 동시에 한국정부는 유일한 민족적 에너지원인 석탄을 외면, 주유종탄 정책으로 전환했다. 공무원들이 구멍가게를 돌아다니며 연탄을 못쓰게 한 뒤 기름을 쓰겠다는 각서를 받아가고 강원도 탄광촌에선 광부들이 석유화형식을 벌이기도 했다. 울산 정유공장의 증설과 또 다른 미국계 메이지 칼텍스의 상륙을 허용하는 등 우리정부는 이들이 달릴 길을 열심히 닦아 주었다. 69년에 유니언 오일이 경인에너지와 합작하여 세번째로 한국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에 대한 원유공급은 미국의 세 회사가 독점하는 바 됐다.
석유 같은 고도의 전략물자 공급을 어느 나라가 독점한다는 것은 일단 유사시엔 대단한 정치적 지렛대가 된다는 것은 세계사의 교훈이다. 칼텍스와 유니언 오일의 합작선 선정은 제3공화국 사상 최대의 이권이었다. 호남정유와 한국화약 그룹이 그 이권을 따기까지는 李厚洛씨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두 회사의 사장과 회장이 그뒤 모두 그의 사돈이 됐던 것이다.
한국정부와의 밀월 무드 속에서 걸프는 67년 선거 한 해 전에 공화당에 1백만 달러를 정치헌금했다. 도시 사장은 상원 청문회에서 [헌금요구를 거절할 경우 보복을 당할 것 같아서 돈을 냈다]고 했지만 이것은 엄살이다. 당시 한국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걸프의 굿맨은 1975년에 이런 증언을 하고 있다.
{66년에 나는 李厚洛비서실장으로부터 1백만 달러를 현금으로 스위스 은행에 넣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국 국무성은 그때 한국정부에게 선거운동을 미국식에 따라 사적인 정치기부금을 모아 치르도록 제의했고, 미국 회사를 포함한 여러 기업체로부터 기부금을 거둘 것도 건의했었다. 이에 따라 걸프도 기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는 존슨 대통령 시절로서 월남에 파병한 한국은 미국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공화당에 대한 미국회사의 정치헌금을 국무성이 오히려 권유할 정도로 말이다.
걸프가 李厚洛씨를 통한 정치헌금 등의 대가로 어떤 반대급부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태발전을 거시적으로 볼 때 李厚洛씨를 중심으로 한 朴정권 핵심이 걸프(나중에는 칼텍스, 유니언 오일도 포함하여)를 극진히 감싸고 돈 흔적이 여러 군데서 드러나고 있다. 그 흔적이란 걸프의 폭리와 불평 등 계약을 용인해준 점이다.
걸프, 진해화학 경영 장악
공화당 정권은 정부가 결정하는 기름 값을 높게 책정, 유공이 저절로 떼돈을 벌게 했다. 65년의 국내 기름 가격을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일본과 비교해 보자. 휘발유의 공장도 가격은 일본이 배럴당 3.3달러인데 한국은 4.4달러, 등유는 일본이 3.5달러인데 한국은 4.5달러, 경유는 일본이 3.97달러, 한국은 4.6달러, 중유는 일본이 2.78달러, 한국은 3.03달러였다. 일본보다도 최고 30%까지 비싼 것이 유공의 기름이었다. 정유공장이 세워진 그 혜택을 적어도 한국 소비자들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가격 부문 이외에도 디젤화 정책의 폐지, 휘발유세 낮춤 따위의 기름 소비 장려 시책으로 초창기의 유공을 적극 밀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공이 처음부터 어마 무지한 이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은 걸프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음에 틀림없었다. 울산정유 가동직후인 64년6월19일 걸프는 큼직한 투자를 결행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한 충주 비료(주)와 진해 비료 공장 건설 및 운영을 위한 기본 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기본 협정을 토대로 양쪽은 근 1년간 협상을 계속, 65년6월18일에 국회의 승인을 거쳐 주식 인수 계약 등 일곱 가지 세부 계약을 맺었다.
진해 비료 공장에의 걸프 투자는 그 뒤의 한국내 걸프 사업 활동이나 국제 석유 자본의 행동 양식 및 미국 정부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선례 또는 실마리가 되므로 자세히 밝혀 볼 만하다. 유공에 25%의 주식 투자를 했던 걸프는 진해 화학에는 1천50만 달러를 출자, 50%의 주식을 인수했다. 동률 투자의 경우 경영권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은 걸프측이 휘어잡는 바 되었다. 경영권 장악은 교묘한 방법으로 꾸며졌다. 회사를 楮되求?최고 의결 기관인 이사회는 이사 8명으로 구성하고 한국쪽 4명 걸프쪽 4명으로 한다.
한국쪽 이사 4명 중 한 사람은 대표이사 겸 사장이 되며 나머지 세명은 모두 상임 임원이 된다. 언뜻 보면 한국측에 유리한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기교였다. 미국측 이사 4명 중 한 명은 부사장, 또 한 명은 상임 임원이 된다. 이사회의 의장은 한국인 사장이 되는 게 원칙인데도 여기서는 미국인 부사장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이사회의 의장은 투표가 가부동수로 나타날 때 결정권을 가지므로 이것은 사실상 걸프측이 이사회를 지배하고 따라서 진해 화학의 경영권을 장악함을 뜻했다. 한국인 사장은 형식상 회사를 대표할 뿐 법률상 실권은 이사회 의장을 겸한 걸프측 부사장이 틀어잡게 된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경영권 장악은 한국인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들이 재치있는 화장술을 썼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경영권 장악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걸프가 주식 투자액의 1백50%를 뽑아 미국으로 송금할 때까지 그렇게 한다는 단서였다. 걸프측은 또 협상 과정에서 이익 보장 조항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걸프의 이사회 장악에 이어 두번째로 나타난 묘책이 우선주였다. 진해화학은 액면가 천 원짜리 주식 6백만주를 발행했다. 그 가운데 3백만 주는 우선주로서 걸프의 독차지가 됐고 나머지는 보통주로서 한국측 지분이 되었다. 이 우선주에 대한 특별 우대는 매년 2백만 달러를 상한으로 하여 이익 배당에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곧 이익이 생기면 2백만 달러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걸프쪽에 배당한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걸프측에게 해마다 20%의 이익률을 보장해 주는 것을 뜻했다.
세번째 이익보장책으로 걸프는 진해화학에 대한 나프사 인광석 유황 염화칼카리 따위의 원료 공급권을 독점하게 됐다. 이것은 유공에 대한 원유 공급 독점과 같은 원리로 [팔아서 벌고 (공장을)돌려서 버는] 메이저의 생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밖에도 진해 화학의 운명은 [사기업체에 적용되는 상법상의 관례에 따르며 정부 관리 기업체가 아니다]고 못박음으로써 걸프는 이 공장을 정부의 영향권에서도 빼돌려 사실상 걸프의 계열 기업화하는 데 성공했다. 걸프의 과감한 투자와 경영권 장악을 도와 준 것은 미국의 한국 원조기관 AID였다.
처음에 정부는 진해 비료의 건설비 모두를 AID차관으로 때우려 했다. 그러나 AID에선 {미국 대회사의 대(對)한국투자를 고무하기 위하여 미국 대회사의 참여를 조건으로 AID차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진해 화학 10년사]). 이 정책에 따라 유공에의 직접 투자로 한국에 대한 기득권을 갖고 있던 걸프가 등장한 것이었다.
노회한 걸프에 이용당해
이외에도 李厚洛씨와 徐廷貴씨의 연출로 69년에 흥국상사의 徐씨 소유 주식을 걸프가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사주면서 경영권을 장악한 것이 특혜로 지적돼야 한다. 이 거래로 국내 석유시장의 최대 유통구조가 사실상 외국회사로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1년 뒤엔 드디어 걸프가 유공의 주식 25%를 추가 인수, 울산정유의 경영권까지 장악했다. 유공은 정부투자기업체에서 상법상의 회사로 바뀌어졌다.
이같은 종속적 운영상태는 걸프가 철수할 때까지 10년 동안 계속됨으로써 한국의 석유산업은 한 걸음 후퇴했던 것이다. 걸프가 진해화학, 흥국상사, 유공 등 어마어마한 이익을 내는 세 회사의 경영권을 잡도록 용인하고 응원한 것이 朴정권이었다.
걸프에게 그런 특혜를 준 직후(1979년) 朴정권은 金成坤씨를 앞세워 걸프에 정치헌금을 요구하고 나섰다. 봅 도시 사장은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그 문제(주:정치헌금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 갔읍니다. 金成坤씨가 저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읍니다. 그는 내가 평생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다루기 힘든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날처럼 제가 모욕을 당한 일은 처음 이었읍니다. 그는 완전히 거칠고 깐깐한 자금모집책이었읍니다. 그는 1천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결국 3백만 달러로 낙착이 되었읍니다. 그 돈은 걸프본사의 자금에서 지출된 것이지만 일단 바하마에 있는 바하마 탐사(주) 회사로 돌려져 그 회사 장부에는 바하마 탐사(주)의 경비로 기록됐다가 한국으로 건네졌읍니다}
도시는 자신의 헌금결정은 {헌금이 회사에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고 거듭 밝혔다. 도시가 위협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金成坤씨를 만났다는 증언은 66년의 헌금에 대한 설명처럼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사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헌금을 했다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국제석유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다. 그들이 손해볼 지출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헌금 요구가 오기 직전에 우리 정부는 이윤이나 매상고에서 국내 최대의 기업인 유공경영권을 걸프에 넘겨줬고, 유통망을 장악한 흥국상사의 경영권도 건네주었지 않은가.
국가 안보에 사활적인 중대성을 지닌 석유의 판매 조직이 미국인 손에 넘어간 것은 수도물 공급을 외국인이 전담하도록 한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이런 이권을 얻은 걸프가 푼돈 같은 정치헌금을 아깝게 생각했을까.
요사이 드러나기 시작한 비공개 자료를 보면 걸프측의 노회한 대응과 李厚洛씨측의 순진한 태도가 퍽 대조적이다. 걸프는 정치헌금을 할 때마다 그 수십 배나 되는 이권을 챙겼다. 걸프에 대한 정부의 특혜는 그들이 정치헌금을 한 66년과 70년 전후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걸프는 李厚洛씨만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1972년6월엔 金鍾泌총리에게 접근, 초대형 유조선의 이권을 미끼로 던졌다.
국민경제를 판 사람들
굿맨이 걸프의 경영층 수뇌부에 보고한 6월28일자 전문에는 걸프의 계산이 잘 드러나 있다. 걸프는 신조된 초대형 유조선을 한국측에 빌려주어 그 배와 장기운송계약을 맺고 울산정유에 들어오는 원유를 나르게 할 계획이었다. 걸프의 운임은 매우 높았고 한국측이 배를 비는 데 필요로 하는 경비는 걸프가 다 빌려주는 게 관례였으므로 이 이권만 얻으면 자기 돈 한푼 안 들이고 떼돈을 벌게 된다.
지난 66년 걸프는 5만3천t급 유조선 네 척을 이런 방법으로 한국측에 빌려주었다. 이 이권을 얻은 박건석(朴健碩)씨는 박동선(朴東宣)씨의 친형인데, 이 네척의 용선으로 범양전용선을 설립, 국내 최대의 선사(船社)로 키웠던 것이다.
걸프는 수퍼탱커 이권이란 미끼를 金鍾泌총리에게 던졌다. [金총리는 한국측 선주로 鄭태성씨를 추천했다]고 걸프 내부 전문은 밝히고 있다. 굿맨은 이 전문에서 {鄭씨는 간판일 뿐이고, 그의 역할은 배의 운영에서 생기는 이익이 공화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다}고 간파했다. 굿맨은 또 {金총리의 영향력으로 유공에 접근하려던 다른 회사를 배제시켰고, 이번 거래로 우리의 한국내 경영이 직면한 다른 문제들이 잘 풀리고 있다}고 했다.
이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조선 이권이란 약을 쓴 듯한 인상을 풍긴다.
굿맨은 또 이 거래에 관계된 인물들이 한국 정치 판도에서 영향력을 잃었을 때와 보장책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계약갱신 약관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이 약관에 따라 유공이 한국인 선주측(별볼일이 없어진 인물)에 운임단가의 인하를 통보하면 그 선주는 이익이 안 생길 것]이 뻔한 유조선을 되돌려주고 손을 털고 말 것이라고 굿맨은 보고했다.
여기서 보듯 걸프는 한국측에 앞뒤로 쐐기를 박아 손해를 조금도 안 보게 해 놓았다. 李厚洛씨가 선심을 쓰는척하면서 석유회사로부터 이왕 정치헌금을 받으려면 몇억 달러를 뜯어냈어야 차라리 옳았다. 국제석유자본의 생리나 석유산업에 무지한 李厚洛씨 등은 촌지 정도의 정지자금을 받아내고선 엄청난 이권을 걸프에 넘겨주었고, 그 몇년 뒤에는 탄로가 나 국가망신을 시켰던 것이다.
뇌물장부 공개한 걸프
걸프가 한국 관리들에 대한 변칙 지출에 대해 얼마나 치밀했던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또 있다. 이른바 회색기금(Gray Fund)이란 것이다. 걸프는 이 비밀장부를 미국상원에 제출, 한국을 우습게 만들었다. 도시는 이 자금의 배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한국의 은행들은 예금액에 대한 추가금리 조로 예금주에게 웃돈를 주는데, 이 돈은 그들의 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받는 이도 장부기재를 하지 않도록 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직원들은 이 자금의 쓰임새를 비정규 장부에 빠짐없이 기재했다.
이 기금은 때때로 한국경찰관 등에게 지급됐다. 이 경찰관은 비번 때 우리의 시설을 보호해주곤 했던 것이다} 이 회색장부에 따르면 경찰뿐 아니라 총리실, 상공부, 재무부, 국세청, 경제기획원, 세관 등 여러 기관 공무원들에게 수시로 뇌물이 건네진 것으로 드러나 있다. 장부에는 지출명세가 암호로 표기됐는데, 예컨대 총리실은 2, 상공부는 3으로 되어 있다. 1회당 뇌물액수는 1백∼3천 달러 정도이고 주무부서인 상공부에게 준 돈이 가장 많다.
73년9월18일 상공부 3천5백 달러, 9월31일 상공부 1천 달러, 74년6월3일 국세청 25만 원, 4일 경제기획원 20만 원, 상공부 20만 원, 6월14일 국세청 10만 원 등등….
李厚洛씨 같은 국가지도층이 수백만 달러씩 뜯어가는 판에 그 아래 공무원들이 이 정도의 촌지를 챙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풍토였을지도 모른다. 일부 공직자들의 눈에는 걸프 등 외국 석유 회사가 이권과 돈다발이 주렁주렁 열리는 황금의 거목으로 비쳐졌다. 걸프를 그토록 영악하고 교활하게 만든 것은 한국의 부패풍토였다고 걸프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걸프가 뇌물장부를 자세히 기록, 보존한 것은 주주들에 대한 의무감에서였던지, 문제가 생겼을 때의, 호신용이었던지, 우리 관리들에 대한 협박용이었던지 알 수가 없다.
투자액의 14배 거둔 걸프
한국산업은행에서 1966년에 펴낸 [한국의 산업]에서 유공의 경영분석을 맡은 李대근씨는 65년에 매출액 순이익률 20%, 총자본 이익률 20%란 기적적인 이익을 남긴 유공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런 고 이익률은 정상적인 경쟁시장 가격 형성에 의한 경영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에…정부의 판매가격이 그만큼 높게 책정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65년도의 이익금을 기준하면 걸프사는 겨우 개산(槪算)이 나오는데 이는 합작투자의 철저한 이익채취성을 재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준다. 더우기 제2, 제3 정유의 건설조건도 외국석유회사와의 합작투자로 낙찰될 가능성이 농후한 차제에 앞으로 우리나라 정유산업이 극복해야 할 제1과제는 국민경제의 원동력이라고 할 에너지 산업이 외국회사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비극을 연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책은행의 보고서치고는 상당히 솔직하게 문제점을 표현하고 있다. [이윤채취성]이란 어색한 낱말은 이윤착취성이란 본뜻을 순화한 표현 같기도 하다. 이 보고서의 우려는 그 뒤 현실로 적중했다. 여기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국내의 모 연구기관이 걸프가 한국에서 얼마나 돈벌이를 했는가를 추산한 적이 있다. 걸프의 내부자료를 많이 참고로 했었다.
지난 80년 걸프가 철수할 때까지의 17년간 그들은 2천9백69만7천 달러를 유공에 투자, 1억1천9백55만9천 달러를 본국으로 과실 송금했다는 것은 이미 공표된 자료에 실려 있다. 이것은 걸프가 정유공장을 돌려서 낸 수익일 뿐이다. 걸프가 유공에 원유를 팔아 남긴 순수익은 얼마인가. 이것은 비밀인데, 이 연구기관은 7억8천4백75만 배럴을 팔아 약2억3천7백만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추정했다. 이 원유의 수송에서도 걸프는 약4천6백만 달러를 남겼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걸프는 투자액의 약14배인 4억2백67만5천 달러를 남긴 것으로 집계됐다. 걸프의 해외투자사상 일찌기 이런 노다지는 없었다고 한다. 한국 프로젝트에 관계했던 리, 굿맨, 핀리 등 간부들은 이런 성공에 힘입어 나중에 사장급으로 승진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생리인 기업에게 왜 그렇게 많이 벌었느냐고 따지고 드는 것은 바보짓이다. 오히려 우리쪽으로 돌려 {왜 그렇게 많이 벌어가도록 했느냐}고 물어야 마땅하다.
불평등 계약의 정체
朴정권 때 야당과 언론은 입이 닳도록 석유회사의 폭리와 불평등 계약 문제를 들고나왔다. 이 문제의 핵심은 걸프가 유공에 파는 원유의 단가 계약이다. 이 계약서는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본 기자가 알아낸 63년6월25일 한국정부와 걸프가 서명한 기본협정의 도입 원유가격 산정 기준은 이렇다. 즉, 계산기준은 중동의 공시가격으로 하되 쿠웨이트 중질유는 배럴당 20센트, 이란 경질유는 22센트씩, 즉 API 비중이 1도씩 높아질 때마다 2센트씩 할인액을 높여 공시가격에서 깎아준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시장가격이 공시가격보다 10∼20%쯤 쌌다. 따라서 공시가격을 기준한 단가협정부터가 우리에게 불평등했다. 한국은 상당기간 동안 동종의 원유라도 일본보다도 평균 10%이상 비싸게 도입했다. 문제는 미국 석유회사의 폭리를 시정하려는 노력이 정부차원에서 진지하게 나오지 않았다는 점치다. 1973년 오일 쇼크 직후 걸프는 한국전력 산하의 화력발전소에 대한 벙커C유 공급을 줄인 적이 있었다.
한전 閔忠植사장은 현물시장에서 벙커C유를 긴급도입, 발전소에 공급했다. 걸프측에선 독점공급 계약을 위반했다고 한전에 항의했고, 한전은 걸프가 기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값 오르기를 기다려 내주지 않고 있다고 맞섰다. 이것이 걸프에 대한 한국측의 거의 유일한 반격이었을 뿐이다.
걸프 등 미국계 석유회사에 대한 견제를 어렵게 한 사람으로서 李厚洛 徐廷貴씨 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혼맥과 검은 돈으로 석유재벌과 굳게 유착돼 있었던 李厚洛씨가 그들의 수문장 역할을 충실히 해냈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석유회사의 폭리구조를 몰라서 아무 손을 쓰지 못했다는 변명은 말이 안된다.
66년에 벌써 한국 산업은행의 젊은 직원이 정확한 경고를 할 정도로 그것은 공지의 사실이었지 않은가. 걸프가 벌어간 떼돈은 모두 우리나라의 소비자들 호주머니에서 나간 것이지 李厚洛씨의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에서 지출된 것은 아니다. 미국석유회사에 대한 李厚洛씨의 역할은 [미국이익의 옹호자]란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은 5·16직후 민족주의적인 군사정권을 미국의 영향권 안에 붙들어 두는 방법으로서,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에 적극 참여, 미국자본을 대거 상륙시키는 정책을 수립, 추진해왔다. 이런 일이 잘 되려면 한국정부의 권력 핵심부에 친미주의자가 있어야 했다. 미국의 이익 중 가장 덩치가 큰 미국계 석유회사의 대부(代父)로서 李厚洛씨가 수행한 역할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미국 석유회사와 권력층이 유착함으로써 국민경제가 희생됐을 뿐 아니라 미국 석유회사로부터 받아낸 자금은 우리의 정치 문화를 굴절, 왜곡, 황폐화시키는 데 이용됐다. 검은 황금은 검은 돈을 낳고, 검은 돈은 검은 표밭을 가꾸었던 것이다.
제4장 朴東宣의 재기용과 미국쌀 커미션의 분배
수출입쿼터, 은행 대출에도 간여
1974년 봄 미국의 대통령 보좌관 존 니데커가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 그는 한국의 관리로부터 봉투를 하나 받았다. 그는 예감이 이상했다. 뜯지도 않고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에게 맡겨버렸다. 그해 5월6일 하비브 미국대사는 모 실장에게 봉투를 돌려주면서 항의를 했다. 그 봉투 속에는 1백 달러짜리 지폐 1백 장이 들어 있었다([한미관계 보고서] 1백50쪽).
70년대 한미관계에 암울한 그림자를 던졌던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본질은 한국의 뇌물정치풍토를 미국에 그대로 적용하려다가 들통이 났다는 점이다. 李厚洛씨 등이 만들어놓은 [검은 돈의 정치문화]를 미국으로 수출하려다가 제동이 걸렸다는 얘기다. 70년대에 접어들면 경제이권과 정치자금을 맞바꾸는 것이 완전히 관습으로 정착됐다. 정계 실력자들은 가치관이 전혀 다른 미국에서도 그 버릇이 통용되리라고 생각할 만큼 판단력을 잃고 있었다.
[한미 관계 보고서]는 60년대와 파워센터에는 네 명이 있었다고 봤다. 김종필(金鍾泌) 김성곤(金成坤) 김형욱(金炯旭) 이후락(李厚洛), 朴대통령은 李厚洛씨 등 세 사람을 이용, 金鍾泌공화당 의장과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했다가 나중에는 李厚洛씨 편에 가세, 金씨를 무력화시켰다. 모 자동차 회사의 이권문제로 李실장과 金의장이 대립했을 때도 대통령은 李씨편에 섰다. 金의장의 거세에 앞서 그의 돈줄이 먼저 차단됐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정치자금을 관장하게 됐는데 그 기능은 약간씩 달랐다는 것이다.
金成坤공화당재정위원장은 수표, 金炯旭은 현금을 모으고 李厚洛비서실장은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를 설치, 기금을 관리하게 됐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3선개헌안의 국민투표 직전 공화당의 압력에 못이겨 李厚洛, 金炯旭 두 사람을 물러나게 했다. 朴대통령은 그 직후 측근에게 이런 실토를 했다고 한다.
{요사이 李厚洛이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와 친한 줄 알았던 사람들도 나를 찾아와서 그의 부패상을 고자질하고 있다. 사실은 李厚洛이가 그만둘 때 메모를 가지고 와서 나를 위해 내가 모르게 한 일이라면서 돈 관계를 보고 했다. 이 돈을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기에 그냥 갖고 있으라고 했었다}
李厚洛씨가 계속 관리하기로 한 것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한미관계보고서]는 그 비밀구좌의 돈을 [정부자금](Government Fund)이라고 표현했는데, 李厚洛씨 개인의 것이 아니라 朴대통령을 위한 공적(公的)인 성격의 비밀자금이란 의미로 썼다. 이 보고서는 李厚洛씨가 70년 말에 중앙정보부장이 된 뒤에는 비서실장 시절보다도 더 권세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李厚洛 부장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은행에 압력을 넣음으로써 특정기업체에 불법적인 대출을 하도록 했다. 여기서 생긴 돈은 조직의 예산보충 및 고위부하의 용돈으로 쓰였다. 본 소위원회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李씨가 73년말에 해임된 직후 한국의 은행가에선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다. 李厚洛씨는 73년말에 수출입에도 간여했다. 신진자동차, 대한농산 등은 李厚洛씨의 비호를 받는 업체들 중의 대표격이라고 한다. 섬유 수출 쿼터를 조종함으로써도 많은 자금을 얻었다. 李厚洛은 부장 재임중에 {블랙 백}(Black bag)작전도 했다. 국제환전상인 디크회사로 하여금 검은 가방에 외화를 넣어 청와대로 운반하는 작업이었다]
정실인사 잦아
[李厚洛의 5인방]으로 불린 기업인이 있었다. 신진그룹의 김창원(金昌源), 대연각 호텔의 소유주인 극동건설의 김용산(金用山), 대한농산의 박용학(朴龍學), 한국화약의 김종희(金鍾喜), 서정귀(徐廷貴)씨가 그들이었다. 李厚洛씨의 행실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노골적인 정실인사다.
[한미관계보고서]에 따르면 [李厚洛은 사돈인 金鍾喜, 그의 동생 金鍾植씨, 그리고 한국화약과 그의 휘하조직을 동원하여 정보부에서 물러난 사위 정화섭씨를 남 캘리포니아 교민회 회장에 앉히는 공작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밀려난 교민회장은 반체제 인사였다는 것이다. 李씨의 친구들은 李씨에 대해 {부탁을 잘 들어주고 신의를 잘 지키며 되고 안 되고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좋게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을 뒤집어 놓으면 李씨가 이권청탁을 잘 받아주고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사람이란 얘기가 된다.
朴東宣씨를 데뷔시킨 것은 金炯旭이었다. 미국 의회에서 그는 자세한 증언을 했다. 지난 67년 金炯旭은 金현철 주미대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朴대통령의 친척을 사칭하는 朴東宣이란 젊은이가 한국으로 가면 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朴씨는 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정보부에 연행됐다. 朴대통령의 친척을 사칭했다는 것은 朴씨면 다 친척이라고 생각한 미국인들의 오해임이 밝혀졌다.
朴씨를 풀어준 며칠 뒤 丁一權국무총리가 金형욱을 식사에 초대, 동석한 朴씨를 유망한 청년이라고 소개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이 金炯旭과 朴東宣의 첫 만남이었다. 朴東宣씨는 한국에 올 때마다 金을 찾아가 많은 부탁을 했다. 워싱턴의 사교 클럽인 조지타운 클럽의 인수, 10만 달러의 외화밀반출 등을 지원한 것이 金炯旭이었다.
68년에 丁一權총리는 저녁식사에 金을 초대했다. 朴東宣과 함께 친한파로 이름난 공화당 하원의원 리차드 한나가 거기에 있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한나는 한국이 자기 출신주의 쌀을 많이 사 주도록 힘써달라고 부탁한 뒤 朴東宣씨를 쌀 거래의 중개인으로 지명해주면 거기서 생긴 커미션으로 하원에서 친한 로비를 위해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金炯旭은 다음날 조달청장에게 朴씨를 소개했다. 즉석에서 조달청장은 朴씨의 청탁을 들어주었다. 이권의 커미션을 로비자금에 쓴다는 사고방식은 이권에서 정치자금을 뜯어온 金炯旭의 생리엔 딱 들어맞는 공식이었을 것이다.
朴東宣씨는 그러나 70년말부터 중개인 역할을 못하게 됐다. [한미관계보고서]는 [朴씨의 후견인인 丁一權이 朴씨로부터 받은 수십만 달러의 커미션을 공화당에 주지 않고 가졌기 때문이란 루머가 있었다]고 했다. 미 의회의 다른 보고서는 당시의 주미대사 김동조(金東祚)씨가 朴東宣씨의 로비활동이 국익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보고를 여러 번 올렸다고 지적했다. 돈줄이 끊어져버린 朴東宣씨는 다시 한국에 가서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이던 金炯旭을 만났다. 金炯旭은 그 7년뒤 미국 하원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내 집으로 찾아와 李厚洛씨와 朴鐘圭씨가 커미션 문제로 의견 충돌을 빚고 있다고 말했읍니다. 자기에게 지불되어야 할 커미션을 朴씨가 가져가버렸다는 거였어요. 그는 미 하원의원 약20명과 명단이 적힌 쪽지를 내보이면서 이들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데 커미션을 빼앗겨 지불을 못하고 있다고 했읍니다. 이 하원의원들은 자기들이 받을 돈을 알고 있는데 그 돈이 청와대로 갔다면 청와대를 불신하게 될 것이라면서 저에게 문제해결을 부탁했어요}
金炯旭의 중재로 朴東宣씨는 문제의 커미션 19만 달러를 찾게 됐다. 그는 자신의 보좌역을 스위스로 보내 朴鐘圭씨의 보좌관이 관리하고 있던 비밀구좌에서 자신의 구좌로 송금이 되도록 조치했다.
朴東宣 재기용, 커미션 나눠
당시 실력자들은 스위스 은행의 구좌를 사금고처럼 이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은 또 쌀 수입에 따른 커미션의 분배를 놓고 실력자들 사이에 암투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71년에 朴東宣씨는 쌀 수입의 중개인 자격을 다시 얻으려고 애썼다. 6, 7월에는 친면이 있는 상하원의원들에게 부탁하여 朴대통령과 李厚洛부장에게 14통의 편지를 쓰게 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입을 모아 朴東宣씨의 유능한 의회 로비활동을 칭송했다. 朴씨는 또 방한하는 한나 의원 등 친한파 인사들에게 부탁하여 李厚洛씨를 직접 만나 朴씨의 복직(?)을 청탁하도록 만들었다. 이들 친한파 의원들은 朴씨로부터 몇 만 달러씩의 헌금을 계속 받아온 이들이었다.
72년3월9일 미 하원의 아시아 태평양문제 소위원회 코넬리어스 갤러거 위원장은 李厚洛부장에게 묘한 편지를 보냈다. 그 요지는 [우리가 지난번(갤러거의 방한 때)에 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아 동료의원들이 불편해 하고 있읍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의 입장이 아주 난처합니다. 귀하께서 휴가를 내어 워싱턴을 방문해 주실 수 없을까요]란 것이었다.
이 편지에 기록된 [약속]이란 朴東宣씨를 쌀 무역 중개인으로 재지명하는 것과 그에 따라 갤러거 의원과 친한 하원의원들에게 정치 헌금을 나눠주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미 의회조사보고서는 결론지었다. 이때쯤 되면 미 하원의 부패한 의원들이 노골적으로 한국을 향해 손을 벌리곤 했다. 부패에는 국경도 없는 것이다. 갤러거의 항의편지가 날아간 11일뒤 한국조달청은 미국의 쌀 수입업자들에게 공문을 보내 한국에 쌀을 수출할 때는 朴東宣씨를 대리인으로 써야 한다고 통보함으로써 朴씨의 재등장을 확인했다.
때를 맞춰 金東祚주미대사에게는 朴東宣씨의 로비활동에 간여하지 말하는 대통령 특명이 전달됐다. 미국 정부가 의회조사반에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朴씨의 재등장은 李厚洛부장의 힘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1972년 李厚洛은 쌀 수입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1971넌 선거 때문에 자금이 부족해졌고, 그래서 李厚洛은 쌀 거래를 관할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농무성은 수입자가 수출업자의 대리인을 지명하는 것은 공정거래에 위배된다고 朴씨를 비토하여, 공식적으로는 朴씨가 대리인 노릇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출업자로부터 커미션은 계속 받았다.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朴씨는 李厚洛씨의 비호를 받던 대한농산이 워싱턴의 은행에 갖고 있던 구좌를 이용했다. 미국 정부측에선 이 구좌를 통해 1백 70만∼2백만 달러가 李씨쪽으로 흘러갔으리라 추정했다.
[지하철 리베이트]의 행방
1971년에 지하철 건설 입찰이 있었다. 미쓰비시 등 일본의 상사연합에게 낙찰됐다. [일본 회사들은 일본 국내가격보다 두 배나 비싸게 한국에 차량을 팔아 약 19억 엔을 남겼고 이 가운데 9억7천만 엔을 金成坤씨에게 커미션 및 리베이트 명목으로 지불했다]는 것이 일본상사측의 자백이었다. 그런데 일본상사 측은 커미션의 일부인 2백50만 달러를 뉴욕의 金씨 구좌로 송금했다고 했는데, 송금시기가 묘하다.
즉, 71년 10월의 항명파동으로 공직에서 추방된 뒤인 72, 73년에 송금된 것으로 되어 있다. 과연 李厚洛씨나 朴대통령이 실각한 金씨에게 그런 선심을 베풀었을까. 金炯旭은 미국에서 그 돈은 李厚洛씨한테 간 것이지 金成坤씨에게 간 것이 아닌 데, 말썽이 되자 일본상사들이 그때(76년)는 이미 고인이 된 金씨에게 모든것을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발설하고 다녔다.
제5장 金大中 납치지휘와 美CIA의 반격
李厚洛, [납치는 대통령의 지령]
金大中씨는 지난 83년 1월 워싱턴에서 일본 아사히 신문과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납치사건을 누가 지령했느냐 하는, 이 사건 최대의 수수께끼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그는
①朴대통령을 비롯한 복수의 정부 고관이 합의하여 지령을 했고
②실행은 李厚洛이 총지휘했다고 말했다. 金씨는 10·26뒤인 80년 봄에 [범행에 가담한 복수의 책임자]로부터 그와 같은 고백을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金씨의 회견내용을 읽으면 [책임자의 고백]이 朴대통령 직접 지령설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책임자라면 우선 李厚洛씨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金씨는 지난 2월 귀국 후 국내기자들에게 {李厚洛씨의 고백을 직접 들은 바는 없으나 10·26뒤에 중간에서 어떤 사람이 그의 변명을 전달해 주었다}고 했다. 金씨는 이 [전달자]의 이름도 밝혔다. 이 [전달자]가 金씨가 말한 [朴대통령 지령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임은 확실하다. 기자는 이 [전달자]를 만났다. 그는 저명인사에 속하는 사람이다. 두 번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李厚洛씨와 동향이다. 그는 익명을 조건으로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나는 李厚洛 金大中씨 두 사람과 각각 별도로 오랜 친교가 있다.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의 李厚洛씨에게 金씨를 처음 소개해준 것도 나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이 사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 곽상훈(郭尙勳)선생에게는 朴대통령을 만나는 기회에 한번 물어봐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郭옹은 어느 날 대통령에게 [납치는 임자가 시킨 것이라는 말들이 있는데 사실이냐]는 내용의 질문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이를 부인했는데, 郭옹이 다른 이름을 대며 [그러면 이 사람이 한 것이냐]고 캐물으니까 싱긋 웃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10·26뒤 나는 李厚洛씨를 만났다. 지금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지 앉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물어 보았다. 그의 해명은 대강 이랬다.
[金大中씨가 朴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개시한 지 얼마 안된 어느 날 사석에서 대통령은 불쾌한 어조로 金씨를 없애라는 뜻의 욕설을 했다. 나는 농담으로 넘겨버렸다. 그 얼마 뒤 朴대통령은 청와대로 날 부르더니 정색을 하고 이 문제를 金鍾泌씨와도 이야기한 것이라며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金씨를 죽였을 경우, 그 책임이 언젠가는 나한테 올 것이라는 걸 모를 만큼 내가 바보는 아니지 않는가. 결국 나는 납치를 해서 한국에 그를 데려다 놓는 선으로 대통령의 명령을 소화하여 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애당초부터 납치였지 제거 지시가 아니었다]
金씨가 말했듯 배 위에서 바다로 던져지기 직전에 비행기가 와서 생명을 건지게 됐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비행기는 가지 않았다.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럴 기회는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얼마든지 있었다. 그를 붙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며칠이나 되지 않았는가. 오히려 나는 金씨가 부산 근교에 상륙했을 때 의사를 보내 건강을 보살피게 했었다.
이 사건 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넌, 金大中이한테 가 붙어!]란 힐난도 들었다. 나는 李厚洛씨의 이 말을 80년 봄에 金씨에게 전해주었다. 金씨는 李厚洛씨가 金씨의 목숨을 살렸다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李厚洛씨는 자신의 해명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므로 증거는 없다고 봐야겠다. 다만 수 십년간 李씨와 사귀어 온 나로서는 그가 시키지도 않은 납치를 스스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너무나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의 변명
朴대통령은 李厚洛씨의 이런 변명을 예상했음인지 [자신의 입장]을 11년전에 이미 기록해 두었다. 그것은 미국의 유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의 기사다. 그는 지난 74년12월7일 2백여 개 신문에 동시에 실리고 있는 그의 칼럼에 [내가 확인한 金大中 납치사건]을 썼다. 이 기사는 당시의 상황으로선 [이례적으로] 국내 언론에도 일제히 보도 됐다.
그 전에 앤더슨씨는 청와대를 방문, 임방현(林芳鉉) 대변인도 배석한 자리에서 朴대통령을 면담, 취재했었다. 조선일보(74년 12월8일자)에 실린 잭 앤더슨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전략)나는 드디어 朴대통령에게 金씨의 납치사건에 관해 말했다. 朴대통령은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인상에 냉철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특성을 잃고 감정이 폭발하여 내 질문에 답변했다. 그는 말하기를 이전에는 그 자신이 이 논쟁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래서 金大中씨 납치사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중하게 {나는 하나님께 맹세코 내가 이 추악한 사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朴대통령 측근 소식통들은 朴대통령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사건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소식통들은 그 자신이 정치적 암살의 표적이기도 한 朴대통령이 정치폭력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납치사건에 관해 한국정부내의 관직에 있는 증인과 관직을 안가진 증인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신직수(申稙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익명을 요구하는 여야 지도자들과도 이야기했다. 나는 강경파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닌, 자기 독자적으로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朴대통령에게 이 사건에 대한 나의 결론을 이야기했다. 朴대통령은 李厚洛씨에게 납치사건의 책임을 지워 즉각 해임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朴대통령이 납치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경우였다. 이 기사는 국내에서 [金大中 납치로 인해 한국 지도자는 어려움을 당해 왔다] 등의 제목으로 보도됐다. 잭 앤더슨 기사 내용 그대로 朴대통령을 감싸고 李厚洛씨 쪽에 책임을 돌리는 제목이었다. 앞서 걱정한 [李厚洛의 변명]은 朴대통령의 그런 해명에 대한 [반격]의 성격도 갖고 있다.
李厚洛씨는 {나는 朴正熙교 신봉자}라고 눈물 흘린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런 반격을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두 사람의 그런 갈등은 납치사건의 성격 뿐만 아니라, 베일에 가려진 朴正熙 李厚洛관계와 한·미·일 관계의 핵심을 푸는 중요한 힌트이기도 하다.
槿惠,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朴대통령의 큰딸 박근혜(朴槿惠)씨는 10·26뒤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金大中 납치사건이 난 다음날 아침 어머니, 동생, 나, 그리고 아버님과 식사를 하는데, 아버님은 그 신문기사를 보시더니 신문을 내려 놓으시면서 [왜 이런 짓을 하지!]라고 화를 내셨다} 金鍾泌씨도 10·26뒤 공화당 간부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사건 직후에 청와대로 갔더니 각하께선 대노해 계셨다. [李厚洛, 이 자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있다]고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李厚洛씨가 10·26뒤 친구에게 {朴대통령이 이 문제는 鍾泌이와도 이야기가 된 것이다}고 했다는 말과 전후사정을 종합해 보면, 사건의 책임을 둘러싼 李厚洛 金鍾泌씨의 암투를 엿볼 수 있다.
金大中사건으로 李厚洛씨가 실각한 뒤 부터 당시 국무총리이던 金씨의 파워는 급속히 강화돼 75년 말 그가 사임할 때까지의 2년간은 [역대 총리중 가장 강력한 정치 총리]란 평을 들었다. 金大中 사건의 책임소재에 있어서만은 朴대통령과 金鍾泌씨가 같은 편에서 李厚洛씨에 대처했음이 확실하다.
朴대통령과 金鍾泌씨 및 그 인척 외에도 그때 청와대에서 대통령 측근에서 일했던 고위층 사람들의 거의가 {朴대통령이 납치나 살해를 지령할 분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납치사건과 관련, 직접 朴대통령으로부터 李厚洛씨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남에겐 춘풍처럼 대하고, 자신에겐 추상처럼 대하라]는 좌우명을 가졌고 그 자신이 1·21사태 등 살해의 위험에 몇 번이나 노출됐던 朴대통령은 결코 정적을 죽일 비정한 인간이 아니란 것이다.
김재권(金在權.본명 김기완.金基完) 전 공사도 10·26직후 일본기자와 만나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나와 대통령이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李厚洛씨 쪽을 편드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당사자인 金大中씨도 朴대통령의 직접 지령설을 믿고 있다. 그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朴正熙씨를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는 그분의 행동이 저에 대한 열등감에서 나온 것이라 해요. 저 때문에 여러번 고초를 겪었거든요. 군복 벗고 공화당에 입당할 때 저는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전역 날짜와 입당날짜의 시차를 문제삼았는데, 그 때문에 법까지 개정하지 않았읍니까. 한일회담 때도 저는 사꾸라 소리를 들어가면서 까지도, 회담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고 조약의 항목을 일일이 지적, 대안을 제시하며 반론을 했는데, 이게 사실 더 아픈 거지요}
[朴대통령 직접 지령설]을 지지한 또한 사람은 金炯旭이었다. 그는 77년 6월22일 미국 하원 국제기구 소위원회에 나와 증언하는 중에서 {朴대통령 자신의 허가 없이 이런 중요한 계획이 실천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들을 소개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金在權공사는 납치계획이 실시되면 국제적인 말썽으로 비화될 것이라고 판단, 서울에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대로 실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지상명령이란 것이었다. 李澔 당시 주일대사도 뒤늦게 이 계획을 알고 金공사에게 중지를 권고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金炯旭이 말한 상당부분의 자료는 金在權공사와의 대화에서 수집한 것이며, 이 金공사가 몇년 전엔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나와 朴대통령이다}고 말했으니 그의 [대통령 지령설]도 논리 구조가 엉성함을 알 수 있다. 그가 수집한 사건관계 정보라는 것도 과거 자기 부하였던 일선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것이므로 대통령과 정보부장 수준에서 일어난 일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살린 것도 나다
李厚洛씨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납치]가 李씨의 완전한 단독 결정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朴대통령의 명시적 지시]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는 태도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朴대통령이 명시적으로 납치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외에 있어서의 金大中발언을 들먹이며 밑의 사람들에게 뭣들 하고 있느냐고 계속해서 심리적 부담을 주면 그런 꾀라도 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朴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런 분위기를 만든 책임은 있다}고 말한다. 朴대통령이 李厚洛씨에게 수시로 역정을 냈다면 눈치 빠르고 [알아서 하는데는] 귀재인 李厚洛은 납치란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란 추리다. 그러나 10·26뒤 李厚洛씨가 했다는 변명은 朴대통령이 [납치]가 아니라 [제거]를 지시한 것으로 되어있다. {金大中을 납치한 것도 나지만 살린 것도 나다}는 식의 답변이다.
李厚洛씨의 변명과 朴대통령의 변명 사이엔 타협의 여지가 없다. 李厚洛씨의 말이 진실이라면 朴대통령은 사석에서 가족들에까지도 연극을 하는 2중인격자가 돼야 한다. 朴대통령의 변명이 진실이라면 李씨는 모든 책임을 죽은 상전에게 돌리는 기회주의자가 되고 만다. 李씨 직속부하였던 모 정치인은 金大中사건 직후 {죽였더라면 뒷 탈이 없었을텐데}라고 했더니 李부장이 역정을 내면서 {사람 죽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하고 호통을 치더라고 했다.
이 사건의 지령 문제와 진짜 배경, 그리고 金大中씨의 목숨이 구해진 사정 등에 대해서는 金씨 자신도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10여 년간 일본 기자들은 金씨만 알고 있을 것 같은 그 무엇을 들으려고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金씨의 미국행 이후엔 [그 무엇이란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李厚洛의 퇴장과 미 CIA
미국 하원 국제문제 소위원회가 입수한 1973년 8월17일자 미 국무성의 비망록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요지).
[(전략)우리는 이 문제를 우리 CIA와 의논하고 있다. 미 CIA는 또 李厚洛중앙정보부장과의 관계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다. 미 CIA는 한국 국내의 안정과 관련하여, 李厚洛을 겨냥한(Against) 어떤 행동을 실천에 옮길 것을 생각중이다]
이때는 金大中씨가 서울로 생환한 지 1주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다. CIA가 李厚洛씨를 겨냥한 행동, 즉 그의 제거를 이렇게 빨리 결정했다면 그들은 金씨 납치사건의 주모자가 李厚洛씨라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李씨가 金씨 납치에 대해 CIA에게 정말로 미리 알려 金大中씨를 살렸다면 CIA가 그런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한미관계 보고서는 [미국측이 朴鍾圭경호실장을 통해 朴대통령에게 李厚洛씨의 행동에 대한 불만과 李씨의 그런 행동이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임을 통보했다]고 쓰고 있다. 李씨는 73년 12월3일 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됐다. 정보의 세계에 그를 데뷔시켰던 미국 CIA가 그의 퇴장을 유도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李씨가 저질러 온 부작용이 CIA가 감싸주기에는 너무 컸던지, 李씨를 비호해온 미국 CIA 인맥이 미국 내의 정치 상황 때문에 약화됐던지, 아니면 朴대통령이 7·4성명 뒤 인기가 높아가는 李씨가 거북했던지, 李씨는 권력핵심으로부터 영원히 밀려나게 됐다.
李씨와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은 그가 1970년 12월부터 미국에 대한 공작을 책임지면서부터였다. 그것은 FBI, CIA 등 미국의 정보·수사기관과 마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다. 미국 CIA의 기본입장은 국민적 지지기반이 약한 인물과는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金大中사건 이후 李厚洛씨는 국민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고 朴대통령과도 거북한 관계로 변했다. CIA가 보기에는 그가 이용가치가 없는 존재로 약화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당시 닉슨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개인감정에서 朴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감정의 유래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2년 전인 1966년에 닉슨이 한 시민의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받은 수모라고 한다. 그때 우리 외무부는 과장급을 공항으로 마중보냈고 朴대통령은 닉슨씨를 접견만 하고 식사대접도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반공연맹이사장이던 金貞烈씨는 닉슨과 예부터 안면이 있었는데, 자기 사무실을 방문한 그와 1시간 동안이나 한담을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정부가 닉슨의 스케쥴에 등한했었다고 한다. 닉슨은 대통령이 된 뒤 방미한 朴대통령을 같은 방법으로 푸대접했고, 한국 지도층에 대해서는 끝까지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정권의 책임자가 그런 감정을 가지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현상이다.
李厚洛씨는 해임된 16일 뒤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빠져나가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서 영국으로 날아간 李씨는 미국 입국 비자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여기에도 미국 CIA의 작용이 있었던 것 같다. 李씨는 카리브해의 휴양지 바하마에 머물렀다.
스위스 비밀구좌는 어디로?
그는 바하마에 머물면서 朴대통령의 어떤 보장을 요구했음이 확실하다. 미의회 보고서는 [그의 사돈인 金鍾喜씨가 朴대통령의 사자(使者)로 와서 그를 안심시켰고, 그래서 70일만에 李씨가 귀국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李씨가 朴대통령을 상대로 협상을 할 만한 자료는 많았을 것이다. 그가 관리해 온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 그만이 알고 있는 수많은 비밀들이 정보꾼 李厚洛씨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한미관계보고서]는 金炯旭이 미국으로 빼돌린 돈을 1천5백만∼2천만 달러로 추산했다. 李厚洛씨는 金炯旭보다 훨씬 오래 훨씬 많은 [떡]을 만졌다. 그가 묻힌 [떡고물](부정축재)은 미화로 환산, 약 1천만 달러(정부발표)로 발표되었다. 이 수치만 본다면 그는 金炯旭보다는 덜 모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가 관리하던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가 朴대통령 이후 어떻게 됐는지를 밝혀내야 정확한 축재 액수가 알려지겠는데 그것은 또 한 편의 기사를 필요로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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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2017년 12월 11일
단독 인터뷰 |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DJ 청와대 지시받고 6개 은행 동원해 3000억 조성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2차장을 지낸 김은성(72)씨가 2차장 재직 시인 2001년 신건 국정원장(2015년 작고)의 지시로 6개 시중 은행을 동원해 3000억원을 조성했다고 폭로했다. 김씨는 “당시 신 원장으로부터 ‘3000억원 조성은 청와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고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는 “3000억원의 용처와 전달 경로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씨는 최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주간조선과 몇 차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직접 관여한 3000억원 조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들이 특수활동비 유용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김대중 정권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내부 핵심 담당자에 의해 폭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대중 정권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현대그룹을 동원해 4억5000만달러를 조성,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한에 송금한 바 있다. 후임 노무현 정권은 이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특검 수사를 벌여 관련자들을 처벌했었다.
김은성씨가 폭로한 ‘3000억원 조성’은 앞서의 대북 송금보다 1년 후의 일로서,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김씨는 “2001년 상반기 어느날 신건 국정원장이 청와대 주례보고를 하고 오후 3시 반에서 4시쯤 카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시중 은행을 통해 3000억원을 준비하라. 청와대 회의를 통해 결론이 났다’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당시 신 원장의 전화를 받은 시간이 “은행 마감이 임박한 시점이었다”며 “그래서 국정원 ○○단장에게 (3000억원을 조성하라고)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초 국정원은 3000억원을 시중 은행 한 곳을 통해서 조성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은행 한 곳에서 그 같은 거액을 마련하는 게 여의치 않자 6개 은행 분산 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김씨의 증언이다. “모 은행장이 ‘1개 은행에서 한꺼번에 3000억원을 마련하는 건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단장이 전화로 내게 보고했다. 그래서 ‘청와대 지시’라고 강조했더니 그 은행장이 500억원씩 6개 은행에서 대출하는 방법을 주선해줬다. 결국 6개 시중 은행에서 500억원씩 3000억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은성 차장은 6개 은행을 통한 3000억원 조성을 승인한 후 신건 원장과 따로 만나 사후 보고를 했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이다. “국정원으로 돌아온 신건 원장이 ‘어떻게 됐냐’고 묻길래 ‘6개 은행에서 분산대출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누가 찾아간다면서요?’라고 물어보니 신건 원장이 ‘청와대에서 알아서 하겠지. 우린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신건 원장은 당시 ‘청와대 실세인 ○○○씨와도 얘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며칠 후 신건 원장과의 대화 속에 등장한 청와대 실세 ○○○씨와도 직접 만났다고 했다. “청와대가 거액을 조성하는 게 수상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리려고 만남을 청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씨는 청와대 ○○○씨와 서울 광화문 인근 식당에서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회고했다. “내가 ○○○씨한테 ‘정권 후반기에 은행에서 그런 거금을 빼면 정치문제가 된다. 6개 은행이 관련되어 있어 보안유지가 어렵다. 은행장 이하 본부 담당자들도 국정원의 요청으로 대출이 됐다는 걸 알 것이다. 자칫하면 정권이 넘어간다’고 따졌다. 그러자 ○○○씨가 ‘나만 한 게 아니다’라고 말해, 내가 ‘그럼 대통령님도 아시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부분에 대해 김씨는 “대통령 몰래 3000억원을 조성했다면 자기들 맘대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고 대통령이 안다고 할 수도 없으니, 난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대통령이 알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못하던 ○○○씨에게 “‘나는 원장 지시를 받고 ‘3000억원을 조성하라’고 ○○단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휘계통하에 일을 처리한 거니 나와 연관시키지 말라. 감옥엘 가려거든 댁들이나 가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검찰이 ‘돈을 국정원 차장이 직접 마련했다’고 하고 청와대가 싹 빠지면 꼼짝없이 내가 엮인다. 그래서 나는 지시를 받고 지휘계통을 통해 돈을 조성했음을 청와대 실세 ○○○씨에게 강조한 것이다. 용처 또한 물어보면 괜히 엮일까봐 묻지 않았다.”
3000억원 조성에 대한 김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청와대 지시라고 해도 어떻게 시중 은행 6곳에서 용도가 확실치 않은 500억원이라는 거액을 회계상 ‘흔적’ 없이 마련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3000억원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했는지도 의문이다. 이에 대해 김씨는 3000억원의 보관 방법과 용처에 대해서는 “모른다”면서도 “정부가 하는 건데 ‘자국’이 남겠나. 은행대로 다 재주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시중 은행에서 대출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맡아온 한 간부 직원은 “쉽지 않지만 방법은 있다”며 이런 말을 했다.
“국정원이라 하더라도 500억원 정도의 거액 대출은 반드시 내역이 남는다. 따라서 정상을 가장한 ‘불법 대출’ 형식을 띠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정원이 일종의 회사(페이퍼컴퍼니)를 만든 뒤, 시중 은행들이 그 회사에 대출해주는 방식을 썼을 수 있다. 대출이 단번에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고, 그에 따른 시간이 꽤나 소요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출이라면 담보가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국가기관, 그것도 정보기관에 담보를 요구할 금융기관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시중 은행 직원은 “2000~2001년경 성행했던 이른바 공적자금이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추정도 했다. 당시 예금보험공사 등 정부기관이 공적자금을 집행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지만 은행에 지급된 공적자금이 국정원 페이퍼컴퍼니에 대출된 후 은행이 이를 손실처리해버리면 추심할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는 설명이다.
3000억원은 어디로 갔나?
그러면 김대중 정부는 3000억원을 어디다 쓴 것일까. 김대중 정권이 3000억원 조성 1년 전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4억5000만달러를 조성한 사실을 떠올리면 3000억원 역시 대북 프로젝트와 관련된 돈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 김대중 정부 말 산업은행 총재를 지냈던 엄낙용씨는 올해 초 발간한 회고록에서 ‘2002년경 정부가 S그룹이 대북사업에 참여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는 취지의 내용을 S그룹 임원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엄낙용 전 총재가 S그룹 임원으로부터 이 같은 얘기를 들은 시점 역시 김대중 정부 말기다. 시기상 3000억원이 북한에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3000억원 조성 주장에 대해서는 김은성씨 외의 관계자 모두가 입을 닫고 있는 상태다. 김은성씨가 신건 원장 지시를 받고 조성 지시를 내렸다는 당시 ○○단장 김모씨, 김은성씨가 자금 조성 지시 후 만났던 청와대 실세 ○○○씨 등에게 김은성씨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이메일 등을 통해 물었으나 기사 마감 시점인 12월 7일 현재까지 일주일이 넘도록 회신이 없는 상태다. 김은성씨의 기억에 남아 있는 6개 시중 은행 중 한 곳의 당시 은행장에게도 이메일을 보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3000억원 조성에 대해 알고 있을 법한 당시 국정원 간부들과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3000억원 조성 주장을 방증하는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국회에서는 김대중 정부 비자금 조성과 관련된 야당의 질의가 있었고, 김은성씨를 포함해 여기에 관련된 인물들도 대체로 일치한다. 구체적으로 2007년 10월 18일 김정훈 당시 한나라당 의원(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미국 비자금 사건 관련해 가지고 신건 전 원장,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 김○○ 국정원 직원, 김○○ 전 외환은행장, 이○○ 전 신한은행장을 증인으로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날치기 하면서 싹 다 삭제를 해버렸어요.”(국정원 직원과 전직 은행장 이름은 주간조선이 익명처리한 것임.)
당시 질의 배경에 대해 김정훈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워낙 시점이 오래됐고, (김 의원이) 초선일 때라 정확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고 전했다. 같은 시기 한나라당 정무위 간사로 국회 업무를 총괄했던 이계경 전 의원도 ‘김대중 비자금’과 관련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한나라당 관계자는 “뚜렷한 정황이 있었기에 당 차원에서 그들을 증인 신청했던 게 아니겠냐”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 비자금이라는 것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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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18년 5월 23일
단독]“DJ비자금, 美에 13억달러” 최종흡 前국정원차장 진술
“동부 6억 달러•서부 7억 달러”
檢 “합당한 정보 못찾아” 종결
최종흡 전 국가정보원 3차장이 검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계좌에 13억여 달러가 분산 예치돼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23일 사정당국 관계자 등에 따르면 최 전 차장은 최근 조사에서 “미 본토에 김 전 대통령 친지와 측근 등 명의로 총 13억5000만 달러(1조4600억여 원)가 분산 예치돼 있다는 구체적 증거가 있다”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이미 “비자금 실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뒤,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비자금 의혹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국정원 대북공작금을 사용한 혐의(국고손실 등)를 적용해 최 전 차장을 비롯한 국정원 관계자들을 재판에 넘긴 상태다.
최 전 차장 등은 “김 전 대통령의 해외 자산이 미국 동부지역 은행에 6억여 달러•서부지역 은행에 7억여 달러로 분산 예치돼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가 북한과의 협력 사업에 투자될 예정이었다는 첩보에 따라 국정원이 진상 파악에 나섰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국정원 내부망에 이 같은 내용의 전문보고가 거듭 올라오자 최 전 차장은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게 재가를 받은 뒤 수개월간 추적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최 전 차장은 당시 국정원 전문보고를 증거로 제출해줄 것을 요청하고, 관련 해외 정보원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검찰이 별도로 비자금 진실 여부 조사에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해 “국정원이 입수한 첩보를 바탕으로 파고들었지만, 내부적으로도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합당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의 삼남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은 “국정원 직원이 수사과정에서 둘러댄 얘기에 대해 코멘트할 가치가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김대중 비자금’ 의혹은 20여 년 전 처음 제기된 이후 매번 정국을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 돼왔으나 법정에서 진실이 인정된 적은 없다. 1997년 15대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당시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 총재가 670억 원대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폭로한 뒤 검찰에 고발했지만, 검찰은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무혐의 또는 불입건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