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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친구들이야기 스크랩 명성산 산행(2/2)-궁예왕 전설
다람 추천 0 조회 22 05.12.26 12: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성산 산행(2/2) - 궁예왕의 전설    -- 1편에 이어서 --

 

 억새밭 풍경에 취해서 팔각정 중턱에까지 오르니 샘물이 하나 있다. 샘물 옆에는 팻말이 하나 있는데 "궁예약수터"라 적혀 있었다.

이 약수는 궁예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 눈물처럼 샘 솟는다고 하는데 정말 눈물처럼 조금씩 흘러 내리고 있었다. 궁예의 한이 얼마나 컸기에 천년의 세월을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는가!

 

  명성산은 후삼국시대에 궁예에 대한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고 한다. 비운의 왕, 궁예의 전설을 따라 명성산의 전설을 들어 보자.

 

  명성산은 한자로 울명(鳴) 소리성(聲) 자를 붙여서 명성산이라 했는데 일명 울음산이라고도 한다. 이는 궁예가 신하들과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이 산에서 통곡하였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궁예가 왕건에게 쫒겨 이 곳까지 와서 크게 울었다하여  "울음산"이라고 불리다가 명성산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운의 왕 "궁예"

 

  궁예의 출생에 대해 역사는 신라 헌안왕의 서손이거나 경문왕의 서손, 즉 후궁의 아들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왕의 명을 받은 내시에 의해 궐 밖으로 던져졌는데, 다행히 궁녀가 궁예를 받아서 몰래 키웠다고 한다. 바로 이때 궁녀가 실수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을 잃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출생은 물론 그 후 성장까지 궁예는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열 살 무렵, 궁예는 '세달사'라는 사찰로 들어가면서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당시 사회는 부패한 신라 사회에 대한 불만이 고조돼 있던 시기였다. 궁예는 양길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장수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특히 지금의 강릉 지방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떨친다. 신라에 반대하는 호족 세력이 궁예의 지지 세력이었다. 궁예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삼국사기에서도 궁예의 모습을 전장에서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궁예가 영토정복에 나선지 3년만인 896년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연호가 아닌 자주적인 연호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궁예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마진에서 태봉으로 다시 바꾸고, 연호를 네 번이나 바꾼 변덕스런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서로 다른 지방 호족 세력을 규합해 나라를 세운 궁예의 정치적 고뇌가 숨어 있었다고 학자들은 해석한다.

 

  918년 여름, 보리 이삭이 막 패기 시작할 무렵 평강의 한 농가.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농민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역사는 그가 바로 궁예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의 몰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궁예의 치욕스러운 종말.

 

그러나 철원에 전해지는 전설은 이 대목에서도 사료와 다르다. 대부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민중들은 궁예를 그렇게 나쁜 왕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궁예의 인격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은 단연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죽였다는 역사의 기록이다. 아내가 부정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아내는 물론 아들까지 죽인 비정한 아버지, 궁예.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아내와 아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번에도 역사적인 기록과 전설은 그 원인이 다르다. 궁예의 부인이 구미호라서 왕건의 사주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왕건과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궁예는 정치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왕건 세력과의 대립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궁예는 부인 강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학계에서는 지배적이다.

 

  기록을 보면, 궁예에게는 후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궁예의 후손이라는 이들이 있다.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가 그들이다. 궁예가 폭군으로 알려지면서 한때는 족보에서 궁예의 이름이 지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와는 다른 궁예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궁예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다. 역사의 승자, 왕건의 눈으로 본 궁예의 역사, 기록된 역사는 대부분 승자의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궁예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왕건의 눈으로 본 궁예만을 후대에 남겼다.

 

  그러나 궁예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나라를 세우고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며 신권과 정권을 모두 가진 전제 군주가 된 궁예와, 현실 개혁을 원하는 호족 세력을 규합하면서 지도력을 과시했던 또 다른 궁예가 그것이다.

 

  궁예는 악인, 애꾸눈 왕,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 폭군. 이는 궁예를 이야기할 때 붙는 수식어다. 사실 궁예는 우리에게 역대 왕 가운데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는 한 사람이다. 역사에는 아내와 두 아들까지 무참하게 죽이고, 걸핏하면 신하들을 잔인하게 죽인 왕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궁예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서서히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운 왕이었고, 혈연 중심의 신라 골품제를 업무 위주의 관직 제도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궁예의 부정적인 부분만이 부각된 것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궁예의 또 다른 얼굴은 없을까.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쫓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울음산',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잔모텡이',

궁예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등

철원의 자연이나 지명에는 이렇게 궁예와 관계가 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이 왕건에게 쫓겨 도망가는 궁예의 최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위 궁예에 대한 글은 ‘역사 스페셜’ 구성작가 나은희님의 글에서 발체>

 

  그러나, 승자의 역사는 궁예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궁예는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호화 사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점점 교만해져서 거칠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에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 에서 백성에게 피살당하는 불운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 이제 궁예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접어 두고 산을 내려가자. 팔각정이 있는 능선에서 산정호수를 내려다보니 가히 절경이었다. 북으로는 이북의 먼 산들이 첩첩이 굽이쳐 있고, 동으로는 백운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자인사로 곧바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경사가 매우 급하고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현기증을 느낄정도 였다.

나무계단과 돌계단이 가파라서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려 왔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에 어떤 젊은 여자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어기적 어지적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대단히 불편해 보이지만 신발이 주인을 잘못 만나 더 고생스러워 보였다.

 

준비없이 산에 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혼자만 고생하면 되는데 미끄러져 발이 삐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굴러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구조대원 등에 업혀서 내려 올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종종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왜 남까지 피해를 주는가 말이다.

무언가 한마디 핀잔이라도 주려고 하던 차에 동행하던 친구가 그 여자를 보더니

 "그 등산 신발 좋아 보이는데요. 그런거 어디 가면 살수 있어요?"

라고 한마디 던졌다.

 

열마디 핀잔보다 한마디 농담이 더 통쾌하게 느껴지는 순간 이었다.

 

자인사에 당도 했다.

큰 약수가 있는데 물을 한잔 마시고 돌아서니 경내의 규모에 비해서 턱없이 커 보이는 석불상이 나를 향해 까르르 웃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까르르 웃어 주었다.

 

              
자인사(慈仁寺)는 궁예왕이 서기901년 송악( 松 岳: 개성 ) 에도읍( 都 邑)을 정했다가  5년후(서기905년)에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칭(稱)하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개칭한 후 그의 휘하 부장이었던 왕건 (877-943)을 시켜 후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왕건은 이곳에서 산제(山祭)를 지내고 꿈에 현몽을 받아 승전했고, 이를 인연으로 훗날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 밀리고 쫓겨 지금의 명성산성(약4-5Km전방에 산성이 현존함)에 진을 쳤을 때, 이곳 커다란 바위에다 제사상을 차리고 자주 기도를 올리던 ‘터’라 하여 ‘잿터’ 라 불렀다고 한다.

 

뒷산을 명성산이라 한것도, 구만동 이라는 고을 이름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재를 올리고 기원하던 ‘터’ 라하여 ‘잿터’ 요,

궁예왕의 군사나 식솔들의 울음소리가 끊일 줄 몰랐다하여 명성산이요,

하염없이 철원 쪽을바라보며 눈물 흘리며 시름에 잠긴궁예왕 에게 충신들이 “이제 그만 들어가십시오, 그만하십시오” 했다 하여 그만이 구만으로 불려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태조에 재위하자 이곳에 조그만 암자를 세우니, 그의 시호를 따서 절 이름을 신성암이라 명명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나 300여년이 지난 후 산불에 의해 소실되자 층열왕 3년(1227년)에 다시 재건하고 암자 이름을 왕건의 자호를 본따서 약천암이라 했다. ( 전통사찰풍수기 : 향토연구가 이우영記 )

 

그 뒤 거란침입과 몽고침략, 6.25 사변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는 동안에 남북의 길목이 되어 전쟁터가 되었으며,  혈전 이였던 관계로 정확한 문헌과 역사적 기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오로지 민가의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와 성터만 남아 있음이 가슴 아픈 현실이며 절의 형체는 간 곳 없고 절터만 남아 있음이 안타까운 노릇이다. 민가에서는 예로부터 이곳을‘ 잿터밭 ’이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산행일 : 200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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