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과 아산 사이를 잇는 21번 국도의 아산시 배방면 모산 건널목.
현재는 육중한 육교가 설치되어 있어 과거의 그 오밀조밀한 건널목은 사라졌지만 아산 사람으로서 나이 40대를 넘어선 사람이라면, 아니 아산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시 중학생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 교육현장에 있던 선생님들, 시사에 관심이 있는 국민이라면 이 비극의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으리라 여겨진다.
이 건널목에서는 지난 1970년 10월 14일 오후 4시 19분 아산 현충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되돌아가던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들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가 운전기사의 일단정지 불이행으로 인해 장항선 특급열차와 충돌해 46명의 어린 생명들이 이 세상과의 인연을 마친 곳이다.
당시 버스는 열차와 부딪치면서 80여m를 끌려가서야 멈췄으며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어린 희생자들은 불에 타거나 질식해 숨졌고 31명이나 부상을 당했다. 아무리 체구가 작은 어린 중학생이기로서니 버스 한 대에 77명이나 태우고 다니다니 말이 되나?(정원은 65명이었다 함)
오래된 문서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어린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마치고 기분 좋은 마음에 합창으로 노래를 불렀다 한다.
이 노래를 들은 기사(술을 마셨다고 함)가 학생들을 향해 “시끄럽다”고 소리 지르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차창 밖으로 열차가 달려들었다고..
기사가 “어어”하는 순간 일대를 뒤흔드는 “꽝”하는 굉음이 났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됐다는 것이다.
당시 이 사고는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나이 어린 학생들의 수학여행 폐지론이 비등하였으며 그로 인해 여행사들이 줄도산을 맞았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안전 불감증에 걸린 기사의 안일함이 빚은 참사로서 이 사고는 한국의 10대 재해(災害)로 대연호텔 화재 등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 가운데 이 서글픈 역사가 깃든 모산 건널목은 사고 후 정부에 의해 육교가 가설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육교도 이제는 곧 종언을 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29일까지만 해도 이 육교 아래로는 하루에도 수 십 차례의 장항선 열차가 오갔으나 지난 3월 30일 장항선 직선화 및 수도권전철 연장의 일환으로 모산역이 폐지되고 신선로가 개통됨에 따라 이제는 이 건널목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현재 천안역부터 시작해서 장항선 철로가 계속 철거되고 있다.
철로가 철거되면 그 철거 위주로 시설되었던 육교, 교량, 기타 시설도 차례로 철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모산 건널목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휘어진 이 근처의 국도는 직선화 및 확포장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국도는 현재 육교가 설치된 곳으로가 아닌 봉강교 부근에서 모산 우회도로 방향으로 크게 노선이 바뀔 공산이 크다.
따라서 모산 육교도 철거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될 경우 참사에 희생된 어린 영혼들을 위해 설치된 위령탑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위령탑은 현재 육교 아래 철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 1971년 12월 24일 지역 교육계가 세운 이 위령탑은 그간 관리가 전혀 안되어 있어 군데군데 깨진 부분도 있고, 탑 주위로 잡풀이 잔뜩 자라나 있어 존재 자체를 모르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지난 4월 6일 취재차 찾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50대 이상의 주민들조차도 이 위령탑의 위치를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육교 상판 부분이 시작되는 곳, 하단 진입부근, 배방농협앞 소규모공원 안, 철로 변, 심지어는 안 좋은 기억이라고 철거를 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대답도 있었다.
위치를 정확히 지목해준 사람은 뜻밖에도 30대 말의 인근 자동차 수리공장의 종업원이었다.
그 공장에서 철길 건너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자주 보아왔단다.
그가 지목해준 곳으로 가보고서야 ‘아차’하고 혀를 찼다.
기실 현장 취재를 나가서 육교를 중심으로 빙빙 돌면서 무려 두 차례나 그 앞까지 갔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유는 철로 변 울타리와 너무 가까웠던 데다가 키를 넘기는 잡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갈대 같은 잡풀들을 헤치고서야 위령탑의 실체가 드러났다.
높이는 맨 바닥에서 위까지 1.5m남짓 될까? 시멘트로 만든 받침 위에 오석으로 만든 50cm쯤의 비석이 전부였다.
위령탑은 앞면이 기찻길로 향해져 있었다.
앞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위령탑
못다 핀 꽃봉오리 사라진 날
마음은 아프고 천지는 울었네
여기 그들의 넋을 받들고
그 날의 아픔을 새기노라
뒷면 그러니까 육교 밑으로 들어가서 밭 언저리에 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경서중학교 희생자 명단
(46명의 명단이 6줄로 나열되어 있음)
1971년 12월 24일
아산군 중등학교 충무소년대
아산군, 아산군 중등교육회
위령탑 받침부분에는 막걸리 통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빈 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칠 부 쯤 차 있었다.
누군가가 와서 한 잔 따라 탑 주위에 붓고 나머지는 세워둔 모양이다.
많이 상한 것으로 보아 놓아둔지 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은 듯해 대략 일주일 전쯤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장항선 비전철 노선의 신선로로 이전(모산역 폐지. 배방면 장재리 경부고속철도 천안아산역 옆 아산역 개통)되던 날(3월 30일)이었을까?
유가족이었을까, 철도 관계자였을까?
왜 놓고 갔을까?
물론 알 길이 없는 물음들이다.
애초에 그곳에 건널목이 없었다면 없었을 참사, 운전기사의 안전불감증이 없었으면 있지 않아도 되었을 참사, 여러 어른들의 욕심과 무관심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기에 천 갈래, 만 갈래로 추측만 무성할 수밖에 없다.
장항선의 신선로 이전으로 이제 이곳에는 열차의 그 무서운 기적소리와 심장에 절구질을 치는 것 같은 철길 울림이 사라졌다.
죽고서도 그 무서운 철길 옆에 버려졌던 어린 영혼들은 이제야 편안하게 잠에 들까?
한편으로는 늘 지나다니는 길옆에 있어도 무관심으로 허물어져 가던 위령탑인데 이제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곳으로 변해 버리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크다.
모산 건널목의 어린 참사자를 기린 위령탑은 부끄러운 역사를 드러낸 표상이기도 하지만 어른들의 무사안일과, 안전불감증, 그리고 욕심과 무관심을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관계기관에서는 시급히 위령탑의 존치 방안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위 사진> 개나리꽃이 피어 있는 곳이 충돌사고가 벌어진 지점이다.
첫댓글 옛날 이사건으로 염리동 아현동 공덕동은 난리가 아닌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이사건 때문에 중학교 수학여행 금지로 수학여행 못간걸로 기억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