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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제 정희왕후 貞熹王后)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이다.
1418년(태종 18) 홍주군아(郡衙)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수봉되었다가 이후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는
거사 때 모의가 새어나가 손석손(孫碩孫) 등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用兵)을 결행하게 하였다.
1455년(세조 1)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다.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1471년(성종 2) 원숙휘신혜의신헌(元淑徽愼惠懿神憲)을 가상하였다.
세조가 죽자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었다.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德宗: 예종의 형)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 뒤의 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런데 성종의 즉위는 예종이 죽은 바로 그날 이루어졌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어렸고,
또 성종에게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는데도 바로 그 날 즉위한 것은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성종이 즉위할 때의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정희왕후가 7년 동안이나 섭정하였다.
1483년 3월 30일 온양에 있다가 행궁에서 죽으니 수가 66세였다.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자성흠인경덕선렬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
(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神惠懿神憲貞熹王后)이다.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큰오빠 윤사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휘(繼輝). 윤척(尹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윤승례(尹承禮)이다.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윤번(尹璠 또는 尹磻)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문화(李文和)의 딸이다.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오빠이다.
1426년(세종 8) 문음으로 중부녹사(中部錄事)가 되고,
세자익위사우위솔(世子翊衛司右衛率)·사헌부감찰·형조좌랑·호조좌랑·한성부판관·형조정랑 등을 거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내고 이어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1455년(세조 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다.
그 뒤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인수부윤(仁壽府尹)·공조참판·중추원부사·중추원사·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고,
1464년 우찬성에 올라 이어 좌찬성·지중추부사를 거쳐 1468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가 되었다.
이 해 예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이듬해 판중추부사,
1470년(성종 1)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작은 오빠 윤사윤
1436년 (세종 18) 친시문과에 장원하여
1438년 우정언이 되고, 1442년 좌헌납, 1446년 장령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당시에 수양대군을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우사간대부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의 즉위에 가담, 협력하여
그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형조참의에 승진, 이어 파성군(坡城君)에 봉하여졌다.
1458년 공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성품이 검소하고 인색하여 재물을 모아 거부가 되었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동생
1455년(세조 1)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으로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 출사하였고,
이어 정랑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의정부전리(議政府典吏)를 마음대로 문책한 탓으로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등용되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으며, 중추원사·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옹립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73년 대사헌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훈척대신(勳戚大臣)으로 총병(摠兵)의 직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천단하였다고 탄핵되었다. 147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483년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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