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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당대의 금석문들에서도 전혀 언급이 없는 혁거세가
고려 중기의 묘지명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묘지명을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일단 박경산은 1158년에 사망했다.
이 연대를 기억하면서 의문점과 관련된 박경산의 형인 박경인의 묘지명도 살펴봐야 한다.
장간공(章簡公) 묘지
청령(淸寧) 3년 정유년(문종 11, 1057)에 태어나다.
공의 이름은 경인(景仁)이고, 성은 박씨(朴氏)이며, 자는 영유(令裕)이다.
선조는 북경도위(北京都尉) 박적오(朴赤烏)인데,
신라 때에 죽주(竹州)에 들어와 찰산후(察山侯)가 되었고,
또한 평주(平州)에 들어가 십곡성(十谷城) 등 13성을 설치하고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였다.
그 뒤 자손이 번창하여,
우리 대조(大祖, 太祖)가 통합(統合)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후손이 끊어지지 않았다. (후략)
- 원문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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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그의 형, 박경인의 묘지명에서는 조상으로 혁거세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고 있다.
박경인의 사망 연도는 1122년이다.
굳이 형제의 사망 연도를 언급한 이유는 삼국사기 때문이다.
김부식과 사관들이 삼국사기를 완성한 해는 1145년이다.
즉, 삼국사기가 완성되기 이전에 죽은 형의 묘지명에는 혁거세의 이름이 없고,
삼국사기가 완성된 후에 죽은 동생의 묘지명에는 혁거세가 언급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① 김부식과 사관들이 혁거세라는 인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 죽은 박경인은 혁거세의 존재를 몰랐다.
② 혁거세의 존재가 묻혔다가 삼국사기 덕분에 그의 존재가 다시 드러나면서, 뒤늦게서야 묘지명에 거론하게 되었다.
③ 애초에 알고는 있었는데 묘지명 제작 과정에서 누락되었다.
이게 끝이다.
고대 국가들의 1차 사료가 전부 날아가버린 한국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더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없다.
구 삼국사라도 남아 있었다면, 신라 시조들의 전승 과정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출처]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언급된 금석문|작성자 잉어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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