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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제42권 제1호(통권 제54호) 2009. 1~31쪽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통합이론적 접근
김성주
본 연구는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협력과 공동체 구축의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1) 지역공동체를 위한 통합이론적 준거를 논하고, (2)
경험적 사례로서 유럽공동체의 진화과정과 이것이 동북아시아에 주는 함의를 검토한다. 이
어서 필자는 (3) 역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동북아시아의 지역정체성을 살펴보
고, 끝으로 (4) 통합이론적 준거에 근거한 동북아 지역공동체의 모습을 관념적, 기능적 측
면에서 그려보고자 한다.
필자는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이질성 때문에 동북아
공동체 구상의 과정은 상당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 에서 인
적, 물적 교류의 확대를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기능적인 접근을 통한 신뢰구축의 필요성
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문화 스포츠 학문 등 비정치적 영역의 교류를 확대시켜 나가면서
이를 경제교류 영역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각국은 믿음과 신의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의
최종적인 목적은 정치군사안보 공동체의 형성일 것이다.
필자는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실체로서 ASEAN+1 FTA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구상하며 그 전 단계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한국, 중국, 일본 3국
의 FTA를 주장한다. 자본, 기술, 노동의 상호보완성을 통해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구축할 때
3국은 각자에게 윈-윈(win-win)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동북아 정치군사안보 공동체는 양자적(bilateral) 관계 속에서 역내외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충돌하고 있으므로 시기상조이며, 우선 관련국간 군사적 상호신뢰 구축
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 주제어: 지역정체성, 공화제적 지역공동체, 동북아 경제공동체, ASEAN+1 FTA
Ⅰ. 서론: 동북아 공동체의 필요성
21세기 국제사회는 지난 수세기 동안 서구 국가들에 의해 채색된 질서가
하나의 공동체로 이해되는 그러한 세계는 분명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
야 하는 ‘지구촌’ 시대에 발을 딛고 있다. 기술문명의 급속한 신장은 국가 간 상호의존도를 확장시키고, 주권은 궁지로 몰리고, 국가 간 민감성
(sensitive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박경서, 1997:
107-110).
비록 국가가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존속하고는 있지만 초국가적
인 조직과 단체들의 영향력 증대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인적・물적 교류
의 확대, 시공 개념의 축소, 세계사회의 일일생활권화 등으로 국가들의 행위
패턴이 변하고 있다(박경서, 1997: 103-122). 갈등, 대립, 전쟁보다는 화해,
협력, 평화가 국제사회의 중요한 개념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 본
질과 성격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힘의 논리와 정치현실주의가
국가 간 관계에 강력히 작동하고 있으며, 기술문명을 앞세운 서구 강대국의
파상적 공세가 약소국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유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
식산업을 기반으로 한 침투는 高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으며, ‘정보화’는 이
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압도적인 선진 기술력은 다시 문명과 야
만의 이중구조 속으로 국가들을 몰아넣고 있으며 냉엄한 ‘정글의 법칙’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로 국가들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
의시장경제를 통해 약소국들은 강대국들로부터 직접, 간접적으로 가치 문화
적 동질성을 강요받고 있다. 서구적, 특히 미국적 가치와 제도가 무차별적으
로 국경을 넘나들고 있으며, 세계가 보편적 가치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조지프 나이, 2002: 158-164).
기술문명이 인류를 하나의 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소박한 신념을 가
지고 많은 학자들이 자본과 정보기술을 통한 국제사회의 통합과 평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촌 한쪽에는 풍요로움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
고 있다. 하루에 1달러로 살아가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15억의 인구가
이 지구에 살고 있는 한 갈등은 심화되고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클라이브
폰팅, 2007). 또 ‘지구촌’(global village, earth space)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결
여되어 있는 한 국제사회의 갈등은 지속될 것이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국제사회를 공동의 가치와 동질화된 문화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또 다시 우
리 스스로를 갈등으로 얽어맬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과 다자주의적 협력의 가능성
이 제기되고 국제사회에 평화와 정의가 논의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
다. 금융자본주의 시대는 민족국가 신화가 국제사회의 중요한 기제로 작동
하고 제로 섬 게임(zero-sum game)의 논리가 국가 간 행동규범의 원리를 제
공했던 산업화시대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북아시아에서 협력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세계화와 정보화로 ‘하나의 세계’(one world)를 지향하는 움
직임은 동북아시아라고 예외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국제금융, 국
제무역, 국제통상)의 긴밀성으로 인해 세계적, 지역적 차원에서의 국가 간
협력의 필연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는 동북아시아에서 한국, 중국, 일본 3국간의
지역협력과 통합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금융자본주의
의 세계적 확대와 미국 주도의 일방적 세계질서에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대
응하기 위한 방안이 지역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공동체의 진화과정은 동북아시아 지역협력공동체 개발을 위한 중요한
학습효과가 될 수 있다. 제국주의시대의 불관용(인종적, 종교적, 체제적 측
면에서)을 반성하고 관용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one community)로 나아가
고자 하는 유럽 국가들의 脫제국주의적 노력은 최소한 형식상으로는 동북아
시아 국가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륙세력과 해양
세력, 특히 중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동북아시아에서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
과 지역협력의 가능성이 원론적 수준을 넘어 구체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
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협력과 공동체 구
축의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1) 지역공동체를 위한 통
합이론적 준거를 논하고, (2) 경험적 사례로서 유럽공동체의 진화과정과 그
것이 동북아시아에 주는 함의를 검토한다. 다음으로 필자는 (3) 역사적, 문
화적,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동북아시아의 지역정체성을 살펴보고, 끝으로
(4) 통합이론적 준거에 근거한 동북아 지역공동체의 모습을 관념적, 기능적
측면에서 그려보고자 한다.
Ⅱ. 동북아 지역공동체를 위한 통합이론적 논의1)
오늘의 세계는 민족국가를 넘어서 세계국가로의 통합과정에 있다는 다원
주의자들의 입장과 민족국가의 강한 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신중상주의자들
의 입장 등 학자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지만, 지역단위 중심의 다중
심적 블록들의 형성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유럽공동체(EU: the European
Community)나 동남아국가연합(ASEAN: the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등 지역단위 통합체의 활성화는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예이다. 물
론 민족국가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으며, 통합의 수준도 아직
은 높지 않다.
그러나 미・소 중심의 단일중심 블록이 무너지고, 지역 국가들의 정치적
협력과 경제적 통합을 통해 새로운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구축되고 있다. 이
러한 사실은 과학문명의 확산과 국가 간 상호침투효과로 국제관계 특정영역
에서 인류공존이라는 인식이 확산됨을 의미한다. 문제는 국제체제에 내재해
있는 국가 간 종속적 체계를 어떻게 해소하고 통합 수준을 높이느냐 하는
본질적・구조적 측면에 집중되고 있다.
<그림 Ⅰ> 통합의 연속성
고 중 저
공동체 연방 연합체 제국 기타 체제들
규범적
공리적
억압적
출처: 이용필, “기능통합의 제이론과 적용문제,” 민병천 편,『전환기의 통일문제』
(서울: 대왕사, 1990), 16쪽.
이용필교수는 통합의 수준과 관련하여 <그림 Ⅰ>과 같은 도식을 제시하
고 있다. 이 도식에서 볼 수 있듯이, 통합의 수준이 고도에 달할 때 까지는
민족국가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이용필, 1990: 16). 다만 통합을 위한 새
로운 요소들이 추가되면서 새로운 형태로의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통합의
최고수준인 공동체는 공유할 수 있는 공리적・규범적 가치와 효과적인 (억압
적)통제기구를 가지고 있다. 통합모델은 인류 혹은 민족의 발전에 대한 소
박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점진적이고 진화론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러한 진화론적 발전은 사회적 변화의 방향과 제한된 범위의 선택 속에서 일
어나며 기능적・구조적 분석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을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단계로 나누어 동
북아 공동체를 위한 이론적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러나 각 단계의
통합 논의는 현실세계에서는 별개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계적
혹은 동시적 차원에서 상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국가 영역을 넘어 지
역 단위로 통합논의를 확대할 때 우리는 이론적 간극을 더 의식할 수밖에
없다.
1. 문화공동체와 통합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야기된 문화적 단층, 문화적 기준에 의한 계층
간 괴리, 교육수준의 향상에 따른 문화적 모순의 인식, 다양한 문화적 정향
에 따른 상호작용, 보편적 가치기준에서 벗어나는 문화적 불합리성 등은 문
화적 유형의 일관성과 문화적 통합의 주제라 할 수 있다. 문화적 통합은 문
화체계가 사회체계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침투성(interpenetration)의 분화적
속성들을 다루고 있다(Deutsch, 1978: ch. 4; Levine, 1977: 372-373).
문화적 통합은 보다 큰 적응력을 가지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위
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응집과 조화를 통해 상호의존성, 논리적
일관성, 기능적 적합성을 창출하고 이질적 사회체제를 통합을 위한 형태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질과,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부터 높은 것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 속에서의 문화의 구조적 특
징 등 일정한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문화적 통합의
논의는 문화적 독창성과 다원주의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 또한 복합적 문화
들의 통합적 성장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개인적 인격의 발전
을 희생시킬 수 있다. 따라서 필자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문화적 상대성’의
확대와 ‘문화적 절대성’의 최소화를 통한 관용적 문화공동체는 공동체 논의
의 핵심 사항이라 할 수 있다.
2. 사회공동체와 통합
근대국가의 형성과 산업혁명이후 사회의 단편화를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
인 노력 속에서, 사회공동체라는 규범적 또는 기능적 통합논의가 대두되었
다(Angell, 1977: 380). 사회적 통합은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보다 큰 집단 혹
은 사회전체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에서 논의될 수 있다. 문제는 단편화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여하히 통합의 수준으로 수렴해 내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 규범적, 기능적, 그리고 의사소통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첫째,
규범적 통합은 문화체계의 중심적 요소인 공통적 가치들이 사회체계의 구조
적 요소 속에서 제도화되는 경우에 이루어진다. 가장 일반적인 통합은 개개
인들을 규정짓는 사회적 규범에 집중된다. 만일 전체의 부분들이 집합적 규
범과 약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외부로부터의 세력은 집합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사회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규범적 통합은 어렵겠지만, 복합적
사회에서 사회적 규범의 내면화가 사회통합의 중요한 요인임은 주지의 사실
이다.
둘째, 기능적 통합은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전문
화된 부분들이 사회체제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체제
의 각 부문은 각 부문 간 혹은 동일한 전체에 호혜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이
다. 아울러 각 부문들은 전체에 대한 기능적 결과 때문에 순수한 평형을 유
지할 것으로 본다(Merton, 1957: 21-81). 그러나 기능적 통합에 따른 균형이
회의적인 측면을 가질 수도 있다. 굴드너(Alvin W. Gouldner)는 각 부문들의
기능적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통합에 따른 긴장의 증폭가능성을 지적하고 있
다(Gouldner, 1959: 241-270). 즉, 기능적 통합에 따른 각 부분간의 갈등과 불
균형, 그리고 한 부분의 다른 부분에 대한 종속적 관계는 불안정한 상황을
유도해낼 수 있다. 따라서 기능적 통합은 상호의존을 위한 공통적 가치 즉
규범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셋째, 통합을 위한 전제로서 의사소통을 통해 합의를 토출해낼 수 있는
대중매체의 역할이 필요하다. 쉴즈(Edward Shils)는 대중매체는 현대사회의
중심과 주변의 상호간 밀착도를 강화시켜주며 새로운 차원의 합의를 유도해
낸다고 보았다(Shils, 45-46). 쉴즈는 대중사회를 가장 안정되고 질서 있는
사회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합의에 의해 창출된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
나 쉴즈는 대중매체가 지니고 있는 역기능적 효과와 중심・주변 간 갈등의
구조적 문제를 심각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도이치는 커뮤니케이션모델을
통해 공통 언어와 문화에 의한 통합의 정도, 대중매체에 의한 동원
(mobilization)의 정도에 따라 사회적 통합의 수준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규범적 통합과 기계적 통합의 이질적 개념들을 결합시켜주는 수단으로 커뮤
니케이션을 이용한다(Deutsch, 1978: ch. 4). 그러나, 사회적 통합의 필요조건
인 의사소통적 통합이 동일한 의사소통의 망 속에서 모든 단위들에 잘 적용
될 것이라는 가정에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사회적 통합은 규범적, 기능적
그리고 의사소통적 통합의 정도에 따라 여러 요인들의 호혜적 관계 속에서
보다 구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현실적인 실체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3. 경제공동체와 통합
경제적 통합의 논리적 근거는 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능률의 중요성과
소비가치의 극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 통합이 추구하는 주요 관심
사는 능률의 향상과 그에 따른 소비자의 선택범위 확대로 집약된다. 보다
넓은 선택과 보다 인하된 가격은 사회복지의 원자론적 개념을 유도해내고
있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의한 경제적 유추는 협의로 정의된 경제적 합
리성의 논리와 경제적 파급효과(spill over effect)에 따른 국가들의 정치적 적
응이라는 형식적 엄밀성과 깊이 관련된다. 경제적 통합은 보다 큰 이슈인
정치적 목적을 무시하고 소비지향적 욕구의 충족을 선호함으로서 ‘정치의
경제환원주의’를 강조하다. 결국 경제적 통합의 논리는 정치적 목적과 과정
을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효용의 극대성과 가치의 지양성을 추구하는 오류
를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도 크게 관련되는 분배
의 문제, 정치・사회적인 장기적 목적 등이 부차적인 과제로 전환되는 한계
성이 경제적 통합에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부분적・균형론적 경제적 통합
의 분석은 통합의 범위를 보다 넓게 설정하는 정치적 연구에 의해 보완되어
져야 하며 정치적 통합의 잠재적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4. 정치(안보)공동체와 통합
야콥(Philip E. Jacob)은 정치적 통합을 정체감과 자각의식에 있어 강력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실체 내에서 인민들 간의 공동체로 파악하고
있다(Jacob & Teune, 1964: 4; 이용필, 1990 28p에서 재인용). 정치적 통합은
국가 간 혹은 민족 간 평화적 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중심으로 지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통합에는 정부에 의한 자율적 행동 이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집합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장치와 과정이 필요하
다(Lindberg, 1963).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모델을 원용하여 정치 통합을 주
장하는 학자들은 통합의 본질을 엘리트들 간의 합동적 또는 책임적 의사결
정의 수평적 확대로 가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은 문화적, 사회적, 그리
고 경제적 통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정치적 통합의 문제는 복
합적인 정치・사회적 구조와 규범적・공리적 가치정향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
다. 현실적으로 공유된 가치척도나 체계가 존재하지 않을 때 정치적 통합의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다. 또한 가치의 공유가 존재하더라도 이에 대한 적
절한 제어장치가 무력할 때, 통합의 응집력은 상당 부분 취약할 수밖에 없
다. 아울러, 공유된 가치체계가 국가별 유사성의 집합으로 이해된다면, 구조
적인 상이성을 갖는 국가 간 통합은 상당한 진통이 따른 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Ⅲ. 선행모델로서 유럽공동체와 함의
1. 유럽공동체의 전통과 사상
‘하나의 유럽’을 향한 유럽인의 노력은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종
교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는 유럽인들은 항상 영광된 유럽을 재현하려는 노
력을 경주해왔다. 16세기 중세 천년왕국이 무너지고 세속적 정치체제가 등
장하는 등 유럽사회는 커다란 변혁을 맞이했다. ‘근대성’의 출현으로 인본주
의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문명이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유럽사회는 종교전쟁, 왕위계승전쟁 등 오랜 전화를 겪었고 근대
민족국가의 출현으로 국가 간 알력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혈연을 통해
왕위를 계승했던 왕조체제가 몰락을 하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공화정이 확산
되면서 유럽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혁기를 맞이했기 때문
이다.
산업화와 군사력의 강화를 통해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타 국
가와의 관계를 정립하기위해 근대적 국제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갈등,
분열, 전쟁이 반복되는 와중에서 역설적이게도 유럽인들은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갖기 시작했다. 근대올림픽의 재구성은 유럽의 영광과 그리스・
로마문명에 대한 향수의 다른 표현이었다.
민족국가체제(nation-states system)의 발전과 함께 유럽인들은 “유럽은 하나
다.”라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이창훈, 1992: 262-265). 19세기 프랑스
사상가 생시몽과 푸르동, 대문호 빅토리 위고 등은 ‘유럽건설’을 주창하고
이탈리아 정치가 마치니는 ‘젊은 유럽’ 운동을 전개했다(Parkinson, 1977:
145-146).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3년 오스트리아의 구덴호프 컬러지 백
작은 ‘범유럽운동’을 폈으며, 1929년 프랑스 내각수반 브리앙은 ‘유럽연합
안’을 제기했다.
이러한 하나의 유럽을 건설하려는 발상이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이는 전쟁으로 거의 황폐화한 유
럽 전역을 유럽인 공동의 노력으로 재건해야 한다는 공감대의 확산과 항구
적인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지의 발현이었으며, 또한 전쟁으로 2등 국
가로 전락한 유럽의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력의 복구 의욕을 보여 주는 것이
었다(이창훈, 1992: 262). 이러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정치적 입지와
경제적 이해 때문에 유럽건설 더 나아가 유럽통합에 대한 개별국가들의 입
장 차이와 이견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국가 간 상호작용, 상호침투, 상호의존의 증대는 근대적 국가주권에 기초
해서 작동했던 국제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에 조응하여 국가 간 협동과 협조를 통해 유럽의 안정과
평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유럽인은 경제적 통합과 정치적 통합이라는 두 가
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추락한 정치적 위상을 되찾으려는 유럽인의 노력은 유럽통합 논의로 현실화
하고 EC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49년 유럽의회(정치적 통합), 1952년 유럽방위공동체(군사적 통합) 등의
좌절로 정치적 영역에서의 일사불란한 행동이나 협조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은 우선 프랑스 장 모네의 주도적 역할 하에서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the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를 시발
점으로 경제, 문화부문 등에서 기능적 통합을 시도했다. 1951년에 체결된 파
리조약과 1957년 로마조약에 의거 출범한 EC는 분규와 조정의 과정을 거치
면서 역내시장체제를 통한 협력체를 만들고 단계적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정치적 협력에 대한 명시적 사항이 없어 한계를 갖고 있었다.
1970년대 EC는 첨단산업분야에서 신흥공업국가들의 급신장과 도전으로
역내시장체제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또한 EC는 국제환
경의 급격한 변화와 사회주의권의 약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1986
년 단일유럽의정서를 채택함으로써 EC는 출범한지 30년 만에 정치적 결속
을 포함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유럽인들이 ‘하나의 유럽’을 향한 정치
적 결속의 공감대를 확산하기 시작했다.
2. ‘하나의 유럽’을 위한 제도화: CSCE (OSCE)의 기능적 진화2)
1990년 세계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동서독의 통일이라는 미증유
의 사태를 목도했다. 유럽사회의 대응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1990년 11월 미
국을 포함 34개국 정상이 파리에 모여 4차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를 개최했다. 그 동안
CSCE 참가국들은 헬싱키선언의 의무 이행여부를 확인하는 검토회의를 3차
에 걸쳐 베오그라드, 마드리드, 빈에서 개최했다.
CSCE에 참석한 정상들은 ‘서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을 통해 대결과 분단,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유럽의 해방을 천명하고, 유럽인의 인권과 기본적 자
유존중, 그리고 시장경제를 통한 번영과 사회정의 추구 하에서 국가 간 상
호존중과 협력의 시대를 제창했다(김성주, 1992: 243). 이는 미・소 초강대국
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창출하고 정치・경제적 위상
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유럽인들의 의지와 자구적 노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유럽안보협력에 관한 논의의 동인은 미소관계, 두 초강대국을 축
으로 한 블록 간 혹은 블록 내의 관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정책,
그리고 독일통일이후 유럽국가들 간의 관계 등 총체적인 요인 속에서 밝혀
져야 한다. 유럽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요구와 일관성 있는 노력들이
CSCE발전의 추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지만,3) 미・
소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외적 환경요인 역시 유럽 국가들의 행동반경과 직
접적인 상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CSCE의 맹아는 1970년대 데탕트의 여명기에 미국과 소련의 호응 속에서
탄생했다. 특히, 소련은 여러 해 동안 유럽안보문제에 대한 ‘범유럽적 해결’
을 옹호해 왔다. 1970년대초 복잡하고 지루한 교섭과정을 통해 진행된
CSCE의 절차나 부수사항들은 소련의 의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CSCE
의 형태와 성격 속에서 유럽정치협력(EPC: 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의
틀을 주도한 서유럽국가들의 독창성과 주장이 많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Mottola, 1986).
CSCE를 주도한 서유럽국가들은 “CSCE가 미・소 초강대국의 노력 없이는
효과적으로 운용될 수 없으나 두 국가가 유럽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
다.”(Birnbaum & Peters, 1990: 306)라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이러한 주장은
동유럽 및 중립 국가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지난 15여 년 간
CSCE 발전을 위한 다자간 교섭과정 중 미・소 역할에서도 잘 드러났다. 미・
소간의 대립 혹은 긴장완화국면, 두 초강대국의 유럽지역에 대한 특수한 목
적과 정책 등은 유럽 국가들의 국내외 정치에 제한요인 혹은 유도요인으로
작용했으며 동서유럽간의 관계발전과 CSCE협상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
쳐왔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래 미국이 국가안보와 이익을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를 기본 틀로 서유럽국가들과의
결속을 유지해온 반면 소련은 집단적인 '전유럽안보체제'(Pan-European
Security System)를 위한 개념화를 추구하고 이를 서유럽국가와 접목시키고
자 노력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단결과 서유럽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 소련의
의도는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 Warsaw Treaty Organization)로 대
변되는 군사적 긴장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성취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
고 있었다. 1960년대 말 소련은 미국과 캐나다를 유럽안보회의의 참가국으
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방향전환은 유럽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현상유지를
바탕으로 한 서유럽국가들과의 화해를 위한 ‘서방정책’(West Politik)의 재정
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Birnbaum & Peters, 1990: 307). 1970년 8월 소련은
현재의 국경선확인을 포함한 서독과의 쌍무조약을 전제로 동유럽 국가들과
의 단결을 강화했다. 동시에 소련은 서유럽 및 비동맹 중립 국가들의 동서
진영을 넘어선 자유로운 민간교류와 정보제공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무역
및 경제교류, 과학기술협력의 계기를 만들었다.
1975년 CSCE에 대한 최종법안 심의 과정에서 소련의 기본적인 목적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관심은 자본과 기술이전을
포함한 동서간의 경제교류의 확대와 증진을 CSCE 조항에 구체화시키는 것
이었다. 소련과 서유럽국가들 간의 미래지향적이고 역동적인 노력에도 불구
하고 국제체제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는 CSCE 메커니즘의 재조정 내
지는 축소를 가져왔다. 아직은 미・소를 축으로 한 대립구조가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서유럽국가간의 이해가 조정되지 못한 상태였
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의 전략목표와 의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유
럽국가들은 안보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협의과정에서 소련이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정치, 군사, 경제
적 대립을 지양하고 CSCE체제의 기본정신을 지지하며 인권문제와 인적 교
류 등을 집행・감독할 수 있는 CSCE의 기능을 수용함으로써(Maresca, 1985:
201), 소련의 의도에 대한 서유럽국가들의 우려는 점차 감소되었다. 소련은
1970년대 이래 악화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CSCE를 서유럽국가들과의 협력과 유럽의 군사적 긴장완화 및 군비통제를
위한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간주했다.
한편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매우 신중했다. 서유럽국가들의 소련에 대
한 우호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소련의 의도가 유럽의 중립화와 자
신의 영향력 약화에 있다(김성주, 1990: 123)고 판단했다. 특히, 레이건행정
부의 등장과 함께 미・소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새로운 냉전체제가 나타나면
서 CSCE 발전에 관한 논의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CSCE가 서유럽국가들의 단합을 저해하며 이 지역의 안보를 크게
위협할 것으로 간주했다. CSCE에 대한 행정부 내의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
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인권문제 등 소수 집단의 관심을 반영하는 원론적인
원칙만을 제시하면서, 서유럽국가들과 소련과의 밀착을 소련에 대한 양보로
규정했다. 헨리 키신저는 CSCE를 유럽인에게는 매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유럽에서의 군축협상, 비유럽지역에서의 소련의 영향력 감소
등을 위한 교환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Maresca, 1985: 45). 미
국의 반응은 NATO에 대한 입장, 유럽배치 재래식무기 감축회담(CFE:
Conventional Armed Forces in Europe) 등에서 잘 표현되고 있었다(Dean,
1990: 313-324).
서유럽국가들은 인도적 차원과 동서관계의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CSCE에
커다란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다. 유럽인들은 40여 년 간 구조화된 냉전체제
로부터 탈피하여 유럽문화에 뿌리를 둔 동질성의 회복과 인적, 물적 교류에
토대를 둔 공동발전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빈회의(Vienna,
1814. 9)이래 유럽인들이 보여준 역사적 사례(Europe Concert, Locarno조약
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서유럽국가들 간
에 논의되고 있는 ECSC, EEC(the European Economic Community), EPU(the
European Parliamentary Union) 등은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을 내포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별국가들의 상이한 시각차와 국내의 제도적 차별성
은 ‘하나의 유럽’을 위해 자신의 국가권력을 어느 선까지 위임 혹은 양보하
느냐 그리고 수직적 국내 위계구조를 수평적 유럽통합구조와 어떻게 조화시
키느냐 하는 미묘한 문제들과 맞물려 있었다.
CSCE 논의는 35개국4)이 동서 간 긴장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헬싱키에서
대표 간 예비회담(1972. 11)을 개최하고 정상 간 헬싱키 최종합의서(1975. 8)
를 채택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헬싱키 최종합의서는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가 참가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지은 동・서화해의 평화조약이며,
CSCE의 기본정신과 원칙들을 담고 있었다. 또한 同 합의서는 국가 간 합의
에 의한 조약으로 국제조약은 아니지만 정치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
서진영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국제적 안보협력 문서였다. 이는 세 분야
(basket)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 바스켓은 유럽의 안보문제에 관한 모든 문
제를, 제2 바스켓은 경제・과학・기술・환경 분야에서의 협력문제를, 그리고 제
3 바스켓은 인도주의적 접촉, 정보의 자유로운 전파, 교육・문화의 교류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안전보장과 신뢰구축을 위해 (1) 주권평등 및
상호존중, (2) 무력위협 및 사용 억제, (3) 국경불가침, (4) 영토보전, (5) 분
쟁의 평화적 해결, (6) 내정 불간섭, (7) 인권 및 기본적 자유 존중, (8) 모든
민족의 평등권과 자율권 존중, (9) 국가 간 협력 증진, 그리고 (10) 국제법상
모든 의무 이행 등 10대 원칙을 규율했다. 이는 동・서 유럽 간 군비통제조
치를 진전시킬 정치적 신뢰구축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러한
논의는 헬싱키, 스톡홀름, 그리고 빈의 신뢰구축체제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
로 발전되었다. 유럽인들은 세력균형에 의한 안정적 현상을 타파하지 않고
제도화를 수단으로 하나의 유럽을 성숙시켜 갔다. CSCE는 1995년 1월 1일
부터 OSCE(th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으로 개칭
되었다.
3. 소결론: OSCE가 동북아시아에 주는 함의
하나의 체제(OSCE) 밑에 안보(NATO)와 경제(EU)의 두개 구조를 갖춘 유
럽 국가들은 각국의 상대적 이득 때문에 군사력의 증대를 가져올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었다. 유럽 국가들은 경제, 사회, 문화적인 동질
화를 시도하면서 갈등을 최소하고 공동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비록 쉽
지는 않았지만 유럽인들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단일통화정책(유로화), 무역・
통상정책, 이민정책 등 諸분야에서 효과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군사・안보문제에서는 각국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강한 배타성
을 가진 주권은 국가보위의 마지막 보루이며, 군사・안보적 측면에 국가주권
의 양허문제는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상이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내적, 외적 동인(pull or
push factors)을 통해 상호협력과 이해를 촉진시켰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외
적 동인인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체제를 ‘하나의 유럽’이라는 효과적인 방
법을 통해 극복해 나가고자 했다. 특히 데탕트시기에 이를 적극 활용했으며
소련 역시 이를 통해 유럽 국가와의 신뢰를 구축했다. 미국 역시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소련과의 전략적 선택과 타협을 위해 유럽인들의 움직임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둘째, 내적 동인으로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역사적 경험을 지적
할 필요가 있다. 양차 세계대전을 자신들의 영토위에서 경험한 유럽인들은
유럽의 평화와 안정에 깊은 집착을 보였다. 또 다시 유럽이 세계의 전장으
로 변할 경우 그들이 떠안을 치명적인 상황은 더 이상 유럽인들에게는 용인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안보적 위협 하에서 유럽 국가들은 공동안보 혹은 집
단안보를 통해 다자적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셋째, 또 다른 내적 동인으로 유럽인들은 미・소 틈바구니에서 정치・경제
적으로 2등 국가로 전락한 자신들의 명예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공
동 대처하고자 했다. ‘하나의 유럽’ 개념은 기독교 문명에 기초한 문화적 뿌
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역외 경제권
과의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넷째, 유럽 공동체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역
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들 수 있다. 1930년대 독일이 ‘대경제권’의 주창을 통
해 주변 국가에 무역과 금융을 의존하도록 강요한 최악의 지역주의는 급기
야 전쟁이라는 선택을 강제했다.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진솔하게 사과하고
이의 재발 방지를 약속한 독일의 자세는 주변국들, 특히 프랑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는 유럽의 안정과 통합
을 위한 초석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100%로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을 필요
로 하고 있다. 강력한 기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현재의 금
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유럽 국가들의 보호주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반대 시위, 보호무역 요구,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의 흐름을 제한하는 금융 국수주의가 그것이다.5)
그러나 ‘이상적인’ 통합체를 향한 유럽인의 열정과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중요한 유럽 국가들의 내적 동인이 화해와 협
력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지역통합을 위해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북아시아는, 유럽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
나, ‘유럽으로부터 교훈’을 유용하게 활용해야 한다.
Ⅳ. 동북아의 지역정체성(regional identity):
동질성과 이질성
1. 역사적 요인
동북아시아에서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안고 있는 ‘역사적 단층과 단절’
은 단순히 정리될 문제가 아니며 그 뿌리는 매우 깊다. 동북아시아의 궤적
에서 나타나는 3국의 역사적 족적은 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
다. 여기에서는 근・현대 국제관계사 속에서 동아시아 3국의 역사적 편린만
을 추적하기로 한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동아시아는 대륙세력인
중국을 중심으로 하나의 지역정치 질서를 구축하고 이의 안정적 관리를 유
지해 왔다. 해양세력인 일본의 부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이며 그 이전의 일
본은 매우 제한된 범위 속에서 주변부의 역할에 머물렀다. 통일신라이후 한
국은 중화 조공질서 하에서 중국의 문명을 일본에 전달하고 일정한 영향력
을 행사하는 대륙과 해양의 교량자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중화문명과 조공질서라는 두 축을 중심으
로 지역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 근간에는 유교라
는 상부구조적 가치가 문화로 도색되어 지배 권력과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제(mechanism)로 작동했다.
기술문명의 전이과정에서 한국, 중국, 일본 3국은 협력과 갈등으로 점철된
수평적, 수직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반도는 이 과정에서 징검다리 혹은 완
충지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륙 문화는 한국의 역대 왕조를 통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부분적으로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
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이래 개혁, 개방정책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내세우며 근대화와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박사명, 2006: 275-299).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자원과 노동력의
부족은 일본의 팽창을 자극했으며 이를 위해 일본 지도자들은 외부로 눈을
돌렸다.
아시아대륙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은 중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아시아
국제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
동아시아지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이를 뒷받침해줄 확실한 대상으
로 대만, 한국, 만주 등을 선택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행위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서
구 식민제국주의의 고리를 끊고 동아시아를 구출해줄 해방자로 일본을 바라
보았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위를 답습하는 일본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 대만, 중국, 동남아시아지역 등에서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이들 국가들을 착취하고 유린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이 지
역 맹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군림하고자 했다.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
일본의 태도는 ‘동아시아의 정체성과 공동체’를 통한 ‘지역의 공동번영과 평
화’와는 거리가 멀었다(박사명, 2006: 275-299).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국가에 무역과 금융을 의존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과정에
서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 만행과 과오는 이 지역 국가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직도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으며
역사적 단층과 단절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독일이 전범국가로서 자신이 저
지른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사죄하면서 독일통일과 유럽
통합을 이끌어낸 경우와는 너무도 현저한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동북아시아 3국은 아직도 과거사 문제 등 20세기 제국주의시
대의 역사적 질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적 족쇄는 동북아시아를
억누르고 있다. 또한 지역 패권과 안보문제, 도서 영유권 분쟁(북방도서, 독
도, 조어도) 등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로 상대국에 대한 불신의 벽은 지
금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통일연구원, 2009: 38).
이러한 역사적 단층과 현실적 이해문제를 극복하고 동북아시아지역에서
한, 중, 일 3국간 협력과 통합의 과정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지나 온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2. 문화적 요인
문화적 가치의 공유는 지역의 협력과 통합을 논의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
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문화적 가치는 그 자체 하나의 독립적 요인으로 간
주할 수 없고 역사, 종교, 언어 등 복합적 요인들이 용해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는 근・현대 정치체제와 국경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상당
히 많은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문화적 전이와 발전과정에
서 한국, 중국, 일본이 공유한 유교적 가치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문물이 이 지역에 유입되면서 동북아시아 3국은 상이
한 발전과정과 문화・종교적 상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한국을 거
쳐 일본으로 전파된 유교문화는 중국, 한국, 일본의 사회질서와 지배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지렛대로 작동하면서 충(忠), 효(孝), 혹은 화(和, harmony)
의 개념을 발전시켰다(Rozman, 1991: 111-154). 또한 수평적이고 유연한 유
가적 개념들이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차용되었다. 한국
이나 일본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수세기를 걸쳐 오면서 서로 다른 정치 문
화적 상이성으로 진화했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3국은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
은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했다. 불교, 이슬람교, 도교, 조로아스터교 등 종교
적 관용정책은 이른 바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방 야만인 혹은 외부세계를 적
절히 통제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당나라시대에는
이러한 경향이 최고조에 달했다. 당나라는 ‘전략적 관용’을 통해 제국의 면
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에이미 추아, 2007: 108-143). 이 시대 엄청난 양의
다양한 인적, 물적 교류는 이를 반증하는 좋은 예이다.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종교적 다양성이 크게 용인되지 못했다.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한국은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
적, 종교적 배타성을 보였다. 대륙으로부터 침략을 자주 당한 한국은 관용과
포용보다는 민족적 순결주의와 혈통주의를 바탕으로 한 폐쇄적인 정체성을
보였다. 외부로부터 종교가 유입될 때에도 한국은 심한 진통을 겪었다. 불
교, 천주교 등 외래종교의 도입 초기는 심한 탄압과 참혹한 학살을 동반했
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풍향은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근・현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남북한 분단, 한국전쟁 등
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은 극대화되었으며 폐쇄적
경향은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문화는 아직도 상
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수용하는 포용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문화
시대 세계적 차원에서 인적, 물적 교류가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걸맞은 행동규범이나 국가정책이 낮은 수준에 있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메이지 유신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섬’이라는 환경에 따른 독특하고 폐
쇄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면서 지방
분권적 체제를 유지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볼모통치술은 에도시대
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지방분권적 소군체제는 수평적(소군 간),
수직적(소군-사무라이 간) 인적 구조와 지역단위 정치, 경제체제를 형성했다.
13 소군의 지원 하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한 메이지천황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 했으며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개방정책을 취했
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은 폐쇄정책의 한계를 느꼈다. 일본은 대륙
으로의 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서구 열강과 함께 동아시아의 맹주로서
역할을 자임했다.
중국, 한국 등으로부터 대륙문화를 유입한 일본은 자신 만의 독특한 문화
를 만들어 내고 ‘일본식’ 불교, 유교 등을 구축했다. 과거 막부체제하에서
천주교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일본식 환경을 가미한 불교식 형태로 그 명맥
을 유지했다(폴 글린, 2005: 50-63).
이상 언급한 것처럼, 동북아시아 3국은 종교, 문화적 측면에서 동질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음에도 각국의 정치, 사회 환경 속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 위
기관리체제 하에서 동아시아 발전의 하나의 준거로서 논쟁이 되었던 ‘유교
적 가치’도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3국을 엮을 수 있는 객관적 보편성을 검
증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한국, 중국, 일본을 아우를 하나의 공동체적 문화
가치를 형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3. 정치경제 체제적 요인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조 후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 자본주의를 해체하
고 한국에 왜곡된 주변부 자본주의를 이식시켰다.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이
는 한국의 경제체제를 틀 지우고 매판자본주의의 성격을 띠면서 한국사회
諸영역에 깊숙이 침투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최전선에 위치하면서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부존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국은 수입대체산업을 통
한 경제정책을 버리고 외부의존 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전형적인 농업국가에
서 수출지향국가로 전향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신장시켰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한국군부세력은 국가
주도 경제개발정책을 통해 국가근대화와 산업화를 꾀하였다. 정권의 정통성
(legitimacy)을 경제적 효율성(efficiency)과 효과성(effectiveness)에 둔 박정희
군사정권은 강력한 국가통제하의 경제개발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적 이념은 한국사회와 정치 제반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인의 생활방식을 규제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일본은 미군정하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경제체제를 도입했다. 미국의 전후 복구지원으로 일본경
제는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전쟁 특수로 급신장했다. 일본은 국가와 기
업의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내수시장을 견실히 했
다.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선진화한 일본은 1970년대 자국의 산업을 강화
하기 위해 보호주의(protectionism) 정책을 취했다.
냉전시대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최후의 보루로 간주했으며 반대급부로
무임승차자(free-rider)로서 일본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세계화시대 일본도
개혁을 통해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자유주의 시장논리에 부응하는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1949년 공산화 이래 중국은 국가계획경제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재고하고
농업생산성에 기반을 둔 산업발전을 도모하고자 노력했다. 인민공사 등 집
산정책(collectivism)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하는 듯 보였으나 효율성
의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대약진 운동(Great Leaf Forward,
1955-59년)이나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 1966-69년)은 이념(red)과 기
술(expert)의 대립을 통한 정치권력 게임을 노정했다.
1978년 중국은 개혁・개방과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발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지난 30년간 중국은 공산당 일당정치를 고수하고 사회주의시장경
제를 주창하며 급속한 경제신장을 달성했다. 거의 자본주의화 했음에도 불
구하고 중국은 아직도 공유제개념을 유지하고 있으며 국가가 강력한 개발정
책을 주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산업발전 정도에서 한국, 중국, 일본은 현저한 수준 차이를
보이고 있다. 3국은 경제체제의 성격과 산업화의 수준 정도에 따라 경제정
책과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을 택하고 있다(통일연구원, 2009: 53). 이에 따라
경제정책의 방법과 접근 태도에서 상이성을 보이고 있다.
4. 소결론
위의 논의를 축약하면, 동북아시아 3국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일견 많은
유사성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나 현대사에 들어와 서로 다른 길을 걸
음으로써 역사적 단절성, 문화적 독특성, 정치경제체제 상이성을 보이고 있
다. 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공동체적 사회로 진화하는 작업은 혁명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우선 동북아시아는 공동체라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환경 속에서
상호간 역학관계가 발전되어 왔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동북아시아는 집
단적 공동체의 개념에 매우 취약한 역학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외적 동인에
의해 지역 구조가 종속당하면서 양자적 관계가 형성되고 아직도 이러한 구
조가 해체되지 못하고 있다. 한・미, 미・일, 조・중, 조・러 관계 등 양자적 관
계는 이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들이다.
둘째, 동북아시아 국가들, 특히 일본은 자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진솔하
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강
변하고 있다. 중국 역시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혈안이
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중・일 간 협력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셋째, 동북아지역에는 분단, 영토분쟁 등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중・
대만의 양안문제는 화해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뇌관으로 남아있다.
러・일간 북방도서 문제, 독도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 중・일간 조어
도 분쟁, 중・베트남 간 스프틀리군도분쟁 등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충돌 가
능성도 항존 하고 있다.
넷째, 유럽과는 달리 하나의 의제(agenda)에 집중할 행위자 수가 많지 않
다. 소수 개별 국가의 사안별 관심과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고 크게 충돌하
기 때문에 동북아국가들의 역량을 하나의 공동체로 집약할 수 있는 동력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시아는 지역 내적 동인이 외적 동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다는
점에서 아직도 자율적 구조와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공동의 가치와
규범, 다자적 협력 개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발전과정이 필요한 것도 이러
한 연유에서 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이익 더 나아가 지역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역
단위의 공동체 논의와 다자적 틀의 정립이 필요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
실이다. 물론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이 지역을 초토화시킬 때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체적인 방어수단을 심도 있게 논의한 바 있다.
일부 학자들이 유교라는 공동의 가치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국가들을 하
나의 규범 틀에 묶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러한 논의는 아직 합의되거나
검증되지 못했고 미지수로 남아 있다(김영명, 1996). 이제 보다 적극적인 학
자 간 교류와 공동연구를 통해 중국 대륙에서 흘러들어간 문화적 유입과정
들에 대한 역사적 검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정립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공동체 논의를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Ⅴ. 동북아 지역공동체: 관념적, 기능적 접근
1. 관념적 접근: 공화제적 지역공동체
주지하다시피, 국제사회는 지금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대립과 분
열이 지배하던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환경, 기아, 젠더
(gender) 등 지구적 의제들이 나타나고 지역적, 세계적 차원의 협력과 통합
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는 상위정치(high politics)인 안보영역의 쇠퇴와 함께
하위정치(low politics)인 경제영역의 확대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1997년 동
남아발 금융위기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는 상호의존과 협력의 공간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동북아시아 지역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유럽통합의 당위성과 현실성에
서 보았듯이 동북아시아 3국의 공동체적 적응은 이 지역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의 도래와 함께 지배와
피지배라는 ‘수직적 구조’와 양자적 관계(bilateral relationship)만을 경험했던
이 지역 국가들이 ‘하나의 지역’이라는 개념을 통해 상호호혜와 평등의 ‘수
평적 구조’와 다자적 관계(multilateral relationship)를 만들어 가는 작업은 결
코 쉽지 않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동북아시아 지역통합을 위한 제도화의 필요성은 경
제적 상호작용성의 증대에서 발견된다. 경제적 상호작용성이 필연적으로 지
역통합의 제도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유인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 외적요인에서 파생되는 지역화의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지역공동체라는 관념을 통해 하나로 진화하는 것을 구상해볼 수는 있다. 여
기에는 역사 문화적, 인류학적, 종교사회학적 요인들이 구심력을 가지고 동
선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연방제나 유럽연합의 통합과정에서 이러한 단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유럽인들은 그리스・로마문명에서 추출된 문화적 동질성이나 기
독교문화에 바탕을 둔 종교적 동질성을 일체성으로 상승시키면서 ‘하나의
유럽’을 만들어갔다. 미국은 ‘이민자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인종과
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 연방제를 통해 모자이크사회를 수용했다.
동북아시아도 역사 문화적, 인류학적, 종교사회학 공통에너지를 추출하여
이를 공동체적 가치라는 도가니(melting pot)에서 화학적으로 용해하여 엔트
로피를 극대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3국은 수 천 년의 역사 속에
서 문화적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 여 년 동안
서구세계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구 국가들에게 노출되고 침탈됨으로써 판
이한 역사적 경험과 결과를 잉태했다. 중국은 사회주의체제를, 한국은 주변
부 자본주의체제를, 일본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체제를 통해 국가건설을 이
루었다. 현재 동북아 3국은 내용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국
력을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3국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상이성 혹은 상대
성이다. 이러한 상이성 혹은 상대성을 인정할 때 공동체의 논의가 가능하다
는 전제가 동북아시아가 안고 있는 과제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구체적으로
동북아시아를 공동체 틀로 엮을 수 있는 사상적, 관념적 논거를 어디서 추
론할 수 있는가?
칸트(I. Kant)는 공화제의 확산과 이를 기초로 한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강
조하면서 궁극적으로 세계평화의 항구성을 담보할 수 있는 세계공화체제를
주장했다(Kant, 1983). 이와 유사하게 최근 도일(Michael Doyle), 후쿠야마(F.
Fukuyama) 등 민주평화론자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가치
로 한 세계적 차원의 공동체 모습을 주장하고 있다(Doyle, 1983; 프렌시스
후쿠야마, 1992).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제를 수용하는 국가들과의
연대 혹은 연합을 통한 항구평화를 가정하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 제도론자
들은 국제레짐 혹은 국제제도의 제도화 수준을 높이고 이를 통해 국가의 행
위규범을 제어하여 국제사회의 협력과 평화를 강구하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Keohane & Nye, 1989). 물론 정치현실주의자들은 이를 반박하면서 국
가 중심적 배타성과 힘(군사력과 경제력)의 논리를 근거로 한 국가이익의
창출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이상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제도론자 포함)들의 주장이
동북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 적실성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경험적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하나의 준거로서 고려해 볼 수는 있다. 특히 공화
제적 (혹은 사회주의적: 이는 또 다른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의제이기 때
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지역공동체 구상은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항구
적 평화를 위한 하나의 방안이 될 수도 있다.
현 시점에서 중국의 사회주의체제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보다 유연하게 개
방될 필요가 있다. 경제발전은 인권신장과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할 것이
며 다원주의 사회로의 방향성을 요구할 것이다. 시민사회의 확대는 이러한
방향성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며 중국지도자들은 일정 정도 이 부분을 수
용해야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일본에는 이미 시민사회가 충분한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다원주의적 공간
들이 형성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공화제적 공동체의 가치의식을 일정정도
공유하고 있으나, 이를 국가-시민사회의 연계구조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87년 민주화 이래 사회운동세력이 정치사회적 공간을
넓게 이용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도 상당히 커지고 있다. 이는 문제제기와
문제수렴의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동 메커니즘은 공화제적 공동체에 대한 담론을 이슈화하고 수렴하는 용광
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공화제적 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동력을 증대시키고 효과적인 동선을 발견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공화
제적 공동체의 가치이념을 정립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동북아시아’를 구
현하는 관념적 논거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만큼 그 간극이 넓을 것이며
실현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준거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2. 기능적 접근 I: 동북아 시장경제공동체
지금 국제사회는 세계화와 함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하나의 대세로 굳어
지고 있다. 이를 추동하는 요인 중의 하나인 정보화는 국가능력의 표징이
되고 있다. 동북아시아 3국도 어느 국가 못지않게 이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
력을 가지고 있다.
동북아 3국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통해 성장 동력을 확
보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경제의 지역화’를 통해 상호간 이해와 협력을 증
진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은 자본과 기술, 노동력, 자원 등에서 상호호환성과 보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동남아발 금융위기로 IMF의 혹독한 위기관리체제를 경험한 아시
아 국가들은 역내 국가 간 협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990년대 말 아
시아 외환위기 이후 역내 국가들이 안정적인 자금 흐름을 확보하고 역외 금
융의존도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아시아채권시장협약’(AMBI: Asia Bond
Market Initiative)과 IMF 구제금융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독자적인 역내
유동성 공급장치인 ‘치앙마이협약’(CMI: Chiang Mai Initiative)을 창설하고
도입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이나 EU 같은 경제 블록의 형성과 경제통합을 논의하고 있다. 지
금 ASEAN과 동북아시아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
을 의미하는 ASEAN+1 FTA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05년 7월 중국・ASEAN FTA 상품협정 발효, 2007년 6월 한국・ASEAN
FTA 상품협정 발효, 2008년 4월 일본・ASEAN EPA 채택과 비준 중이다. 또
한 ASEAN과 호주・뉴질랜드 간 ASEAN・CER(Closer Economic Relations:
1983년 체결된 호주・뉴질랜드 간 무역협정) FTA가 곧 서명될 예정이다.
이는 ASEAN이 매개가 되어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경제통합체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을 반영한다. 그러나 양자 간 관계를 넘어 동아시아라는 광역
단위의 경제통합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이나 방안은 제시
되지 못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의 역동성은 13억 노동력의 중국, 거대자본과 기술
의 일본, 이를 매개하는 한국 등에서 나오고 있다. 한・미 FTA나 한・EU
FTA가 분명히 한국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총교역중 동아시아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지역 국가 간 비효율적인 교역 장벽을 걷어
내는 경제통합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아시아는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갈등 등으로 많은 난관을 안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일
본의 주도권 다툼은 역내 국가 간 실질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걸림
돌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처럼, 동북아에서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
들을 통해 인적, 물적 교류의 확대에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하나씩 제거하
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벽을 낮추어 자본, 상품, 노
동의 통행을 좀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한・중 FTA, 한・일 FTA, 중・일 FTA를 체결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미국 발 금융위기로 야기된 달러유동성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
안으로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출연・운영하는 금융체제를 의제화하고 있
는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한・중・일 3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공
동으로 대처하기로 논의하고 외환유동성 위기에 대비하여 통화스와프에 합
의 한바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북아시아는 하나의 거대 경제공동체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갈 필요가 있다.
3. 기능적 접근 II: 정치군사안보 공동체
동북아시아에서 정치군사안보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아직은 생소하다. 아
직도 냉전의 잔해들이 폭발력을 가지고 동력을 형성하고 있으며(남북한 대
립, 중・대만 간 양안문제) 국가 간 신뢰성이 회복되지 못하고(과거사문제,
영토분쟁 등으로)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군사 안보적
으로 각축을 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갈등 잠재성과 폭발성은 쉽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환경이 동북아지역 정치안보 공동체
를 논의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군사안보 공동체의 논의는 고도의 외교력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국가
주권의 양허와 같은 매우 민감한 문제들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
가 이래 국가안보는 곧 바로 군사력과 연결되고 이는 배타적 국가주권에 속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국가주권의 배타성을 근거로 각국은 군사력을 강화
하고 이를 성역화 했다.
문제는 현대국제사회에서 군사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국가안보의
여러 요소 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안보의 개념을
포괄적 안보라는 맥락에서 군사영역을 넘어 경제, 외교, 문화, 인간, 기아,
환경, 질병, 마약 등 諸영역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안보의 개념을 군사적인
요소에 국한했을 경우 보다 명쾌했던 국가안위가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장되
면서 정치안보 공동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구갑우, 2008: 36).
이제 안보는 일국 혹은 양자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다자적 차원에서 논
의될 문제로 보인다. 동북아시아는 지역패권을 두고 중국, 일본 등 관련국들
이 군비증강 경쟁을 하고 있다. 지난 냉전시대 정착된 한・미, 미・일, 조・중,
조・러 등 양자 간 관계가 아직도 이 지역 군사안보 역학관계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자간 안보공동체 혹은 집단안전보장 장치를 만드
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군사안보 공동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은
군사적 상호신뢰성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상호간 다양한 형태의 인적・물적
교류와 理解 증진을 필요로 한다. 군사훈련 사전 통보 및 상호 참관, 군사
정보 및 기술지원 등 군사부문의 교류 확대는 정치군사안보 공동체의 구체
화를 위한 사전 단계들이다. 다음 단계로 지역 단위 수준에 맞는 군축논의
를 위한 제도화가 필요하다. 관련국들은 정치군사안보 공동체를 위한 로드
맵을 만들고 단계적 혹은 동시적 접근을 통해 문제해결 중심의 자세를 견지
해야 한다.
정치군사안보 공동체의 구축은 매우 힘든 과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
직도 유럽 국가들은 유럽공동체를 만들었으나 정치군사적 맥락에서 국가주
권의 위임문제를 유보하고 있다. 동북아시아는 유럽보다 더 험난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는 지역통합과 지역공동체를 위한 먼 미래의 지향점이다. 다
시 말해, 서두르지 않고 상호간 신뢰와 믿음을 쌓아갈 때 정치군사안보 공
동체의 모습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Ⅵ. 결론: 동북아시아 지역공동체와 시민연대
동북아시아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많은 이질성을 안고 있
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이념적인 극한상황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아직도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은 분단 상태로 대립하고 있다. 지역
강대국들은 지역패권을 놓고 내적, 외적인 동력을 유지하면서 대응하고 있
다. 동북아시아가 원심력과 구심력이 충돌하고 있는 현장임을 입증하는 셈
이다.
이러한 동북아의 환경은 공동체 논의를 무망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정치
군사안보 공동체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듯하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북한핵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진행 중인 6자회담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그 실체
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경제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미국 발 금융위기로 야기된 세계경제 위기가 동북
아시아 지역협력과 경제공동체의 가능성을 추동하고 있다.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지역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
이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공동대응
은 미국, 유럽 주도의 세계경제질서를 양분 혹은 삼분하면서 다중심적 경제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이 지역 국가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윈-
윈게임(win-win game)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동북아시아지역은 유럽이나 미국처럼 공동체를 위한 축적된 경험
과 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활발히 논
의되고 있는 ASEAN+1 FTA는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1
FTA(한・중・일 FTA)는 ASEAN+1 FTA의 핵이며 세계경제에 커다란 영향력
을 미칠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또한 상호간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편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한 지역공동체 논의에도 관심을 가
질 필요가 있다. 행위자의 증가와 이들 간 상호작용성이 국가라는 영역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도 이제 다문화 개념을 이해해야할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적인 교류와 이동은 문화, 스포츠, 학문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 등 諸영역
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연대와 실천은
환경, 젠더, 기아 등 특정 영역에서 국가를 넘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
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
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는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
의 건강성을 유지해 주는 원리와 같다. 제국의 흥망, 성쇠가 종교 문화적 상
대성에 대한 관용과 불관용에서 기인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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