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전달(delivery)에 대해 상세히 알아봤으므로, 이제 설교를 함에 이어 목소리와 발음(articulation)에 관한 문제를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 다루어 보는 것이 좋겠다. 설교를 함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표현의 수단은 결국 인간의 목소리이다. 설교자들은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각(thought)의 움직임에 대해 스스로가 주시하고 있음을 나타내게 되고, 그러한 생각의 움직임을 생기게 하는 문맥의 전후 관계에 그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뚜렷이 가리킴과 동시에, 또한 그들과 그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대한 요구에 응함으로써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복음의 인격화를 그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설교하는 모든 순간에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러한 순간은 설교자들에 따라 특이하게 부여된다. 물론, 목소리와 발음에 관한 속시원한 토론은 여기서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특수한 개인의 목소리나 발음의 결점, 그리고 이에 대한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에 관한 것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은 숙달된 전문가의 지도 아래 해야 하는 일이다. 내친 걸음에, 그러한 밀도 높은 종류의 작업도 우리들의 신학교에서 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하는 바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목소리를 내는 방법과, 설교자의 내부에서 쉼없이 일어나고 있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 더 절실한 현안 문제이다. 들으면서 연설하는 자들이, 목소리와 발음의 연구를 위해 힘써야 할 세 가지 목표가 있다:'반응'(responsiveness), '음색의 깨끗함'(clarity), 그리고 '다양성'(variety)이 그것이다.
목소리 반응의 향상(Developing Vocal Responsiveness)에 대해 살펴보자. 첫 단계에서 필수적으로 인식해야만 사실이 있는데, 만약 우리의 목소리가 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려면, 그 목소리는 반응을 일르킬 만한 어떤 것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믿든 안 믿든, 분명한 사실을 때때로 간과하고 있다. 설교자들은 음성이 지루하고, 죽은 듯하고, 또 먼지처럼 물기 없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그 음성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로써 비롯된 설교하는 순간과, 그 말이 그들에게 전해져 오는 순간이 결코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청중들 자신의 사상의 움직임을 듣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상은 무기력하고 이동성이 없어져 결국은 생명력이 없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설교 가운데 넌지시 암시된 인간 생활의 상황들 속으로 공감하여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설사 그러한 설교가 구체적인 명사와 활동적인 동사, 그리고 일화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추상적이며 비인격적이고 적절하지 못한 설교로 들릴 것이다.
만약에 설교자들이 자신에게, 그리고 청중들에 대한 신으로서의 자격(God's Claim)이 설교에서 어떤 알맞은 응답을 얻지 못했을 때, 설교는 결과적으로 무사안일한 것으로 들린다. 즉, 어떤 장난꾸러기가 신의 요구를 설교한 것처럼, 감명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는 정말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설교는 청중들에게 별 의미없는 모습만을 보여줌으로 해서 설교의 순간은 분위기와 어떤 목적 의식이 결여된다. 결국 말하자면, 어떤 시간에 어떤 설교자들이 그리고 몇 안 되는 설교자들이 항상 음성적으로 청중에게 도달하지 못함으로 해서 그들을 사로잡지 못해, 활기있는 대화를 서로 나누어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설교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위해 목소리를 크게 하는 기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은 밀도없이 말한다. 그들의 음성은 지쳐 졸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따라 청중들은 설교를 듣고 있으면서도 다만 그것을 우연히 듣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즉, 청중들은 설교를 자신들의 직접적이며 결정적인 문제로 듣지 않는 것이다.
동기없이, 응답없는 방법으로 말하는 가능성에서 당신을 구해내는 것, 즉 설교하는 어투의 원칙을 이 책의 처음에서 토론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음성의 기법과 발음에 관한 문제이다. 음성의 기법은 생각의 기법에 대응하여 발전된다. 왜냐하면, 음성의 반응은 적절한 마음의 요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음성의 반응(혹은, '민감'[responsiveness])에 또 하나 기여할 수 있는 요소는, 연설이란 것이 전체적, 신체적 행위란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연설은 오로지 마음만의 행위, 그리고 음성 메카니즘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인간의 전 신체를 동반한다. 어떤 운동경기에서든지 참가자의 모든 신체는 경기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농구 경기에서 심판이 경고를 내리는 순간, 경기장 내의 모든 선수들은 각 위치에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다른 선수들 뿐 아니라, 주심, 공, 그리고 중앙에서 볼을 향해 점프하는 선수들을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근육은 이완되어 있지만, 근육은 탄력성을 유지한 채, 충격으로 진동할 것이다. 마음, 팔, 다리, 손, 발은 모두 긴장해서 주심의 다음 결정(split-second decision)을 주시할 것이다. 만약에 어떤 특정한 선수가 이와같이 되지 않는다면, 보통 그 선수는 조만간에 코치에게 지적을 당해 "야, 경기에 열중해!"하는 코치의 고함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공연하는 예술가들도-악기를 다루든, 성악가든-그들의 존재를 모두 바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만 봐도 그것이 진실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든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공연하는 음악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 중의 누구도 방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두가 음악속에 흡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음악을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긴장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편안하다. 다만 그들은 쉬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의 집중은 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러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진 않는다. 물론, 설교자가 운동 선수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연단에 서 있는 연주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연설투와 대화체 스타일의 비교 토의에서, 연설투가 설교하는 데 있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설교하는 순간에 마음과 음성뿐 아니라, 온 몸으로 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반드시 응해야 한다. 만약에 남자, 혹은 여자 설교자가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청중들이 설교자의 몸이 말하고 있는 것-혹은, 그와 같이 하지 않음으로 해서 말하지 못한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말들은 입에서 나오자마자 창문 밖으로 그냥 흘러 나가고 만다.
그리고, 사실 목소리는 그 자체로는 그렇게 분명하지도 않으며, 강렬하지도 않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기억보다 훨씬 오래 전인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합창반에 있을 때, 어떤 오후의 리허설 시간이었다. 나는 무척 졸음이 와서 몸을 구부리고 있었는데, 이때 나의 노래란 몸의 자세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휘자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휘자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일어서요! 발을 꽉 딛고 일어서서 여러분이 생생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그리고나서 목소리를 내면, 여러분들도 그것을 느끼게 될 거예요! "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고, 그러자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반응적인 목소리는 그러한 육체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일부분인 것이다. 노래 부르는 가수와 마찬가지로, 설교자도 그러하다.
정신적인 집중과 신체의 전체적인 역할보다 특별히 더 설교에 있어서 음성의 반응성(responsiveness)을 효율적으로 높이는 것은, 적당한 호흡이다. 연설 때의 호흡과는 반대로, 일상적인 호흡에는 규칙적인 숨의 들이쉼과 내쉼이 있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즉, 육체의 운동 정도에 관계없이 들숨과 날숨에는 거의 같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말할 때의 숨을 들이키는 순간은 빠르지만, 통상 날숨 때에는 발성을 유지하면서 내뱉는 숨은 연설의 패턴에 적응시키면서 천천히 내쉰다.
그러므로, 문제는 숨을 어떻게 말에 맞게 조절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음성 학자들은, 복벽(abdominal wall)과 늑골 아랫 부분의 근육을 잘 조절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한때는 이 콘트롤에 대해 가슴 윗부분의 활동과 쇄골의 들고 내림을 때때로 거론하곤 했다. 그러나, 가슴 윗부분은 팽창력이 가장 적은 흉부의 공동(thoracic cavity)이다. 결과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 그 부분을 확장시키는 시도는 다른 방법에 의해 허파에 공기를 불어넣는 것만큼 충분한 공기를 허파에 넣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늑골을 늘어뜨리고 어깨를 밑으로 처지게 하면서 날숨을 조절하려던 시도 역시 결코 효과적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조절은 때때로 후두(larynx or voice box)와 성대(vocal folds or bands) 자체의 근육들을 과다하게 긴장시키기도 한다. 그에 대한 결과는 흔히 언급했듯이, 너무 '여유가 없는'(tight)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대해선 발성(phonation), 혹은 소리를 내는 방법에 관해 토론하면서 좀더 언급하기로 한다. 현재로는 상흉부(upper chest), 혹은 쇄골(clavicular)을 사용한 호흡이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복식 호흡은 권장할 만하다. 이 복식 호흡은 자연스런 호흡일 뿐만 아니라, 보통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들숨인 경우엔 횡격막 위에 있는 흉부의 동공과 복부의 동공을 분리시켜 놓는 근육판(floor)이 수축될 때, 복벽(muscular wall)이 이완된다. 반면에, 날숨 때는 횡격막이 이완되면서 복벽의 근육은 약간 긴장된다. 횡격막의 상하 운동 및 긴장 이완은 흉부의 크기를 확대, 축소시키면서 허파로 하여금 공기를 받아들였다가 방출시키게끔 한다. 횡경막과 더불어 복벽의 움직임이 의식적이고 자의적으로 될 때, 연설을 위한 호흡은 가능하게 된다.
조절 여부는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후두부와 거리가 떨어진 조절 장소(locus)는 목소리의 발성에 있어 과도한 긴장의 가능성을 최소화 시킨다. 복벽의 운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의자에 앉아 기대어 두 손으로 배를 살며시 감싸 보라. 숨소리를 들으면서 복부를 이완시키면서 눈으로 지켜보라. 그리고, 숨을 들이키고 내쉬면서, 배의 운동에 따라 손을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리라. 몇 초 후에 숨을 잠깐 멈추었다가 복벽을 의도적으로 이완시키면서 숨을 내쉬어 보라. 특히 이때, 관중들이 '우'(wow)하고 함성을 지를 때처럼, 복부의 아랫부분 근육을 이완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이것을 조용히 하다가 점점 근육을 이완시키는 힘과, 고함소리를 크게 하라. 그리고, 목소리에 무리가 없고, 모음이 찌그러지지(distortion)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크게 소리내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