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 기도(a live pray)
우리 옆집, 수십여년 전 집을 짓고 살다가 현재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는 중이다. 신축과 개축의 업무에 관여한 경험이 있어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지 뵐 때마다 짠하다. 해당 구청에 서류상 문제가 오가던 중 문제가 무척 난감한 문제가 제기되어 큰 어려움에 빠지셨다. 집안 식구들 힘과 재량으로 불가항력이라 고심분투하시던 중, 한 분 P 신부님은 하느님을 원망하셨다. “하느님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라고. 힘들어지면 대부분 쉽게 하는 일이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런데 ‘ 어머! 하느님이 하신 일?’ 이 대목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오래전 냉담 중인 한 형제가 밤늦도록 그야말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그 상태에서 겁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다, 오토바이에서 날아 떨어졌다. 사람도 차도 드문 오밤중 지나가던 행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가 여러 날 생사를 오가다 구사 일생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나 한 말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본인은 물론 일가족 네 명이 사이좋게 냉담 중인 처지에 어디다 대고?’ 매사에 지혜롭기 경위 있는 그의 누이가 말했다. “야 이놈아, 하느님이 너보고 술 먹고 운전하라고 하시든?’
그러나 ‘J 신부님’은 본인도 공동체도 달리 해결할 길이 없다 싶어 전달되어온 문자가 적힌 핸드폰을 제대 앞에 갖다 놓고 ”난, 우린, 도리가 없으니 하느님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절박하게 기도하셨다. 다음 날 연락이 왔다. “벌금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라는. 참 신박信泊하다. 나라면 종이에 옮겨쓰고 장식하고 뭔가 포장을 했을 텐데. 저 ‘날 것 기도’( a live pray) 무슨 차이일까?
평소 하느님을 대하는 관계의 척도와 절절함 정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구든 어떤 기도든 ‘날 것 기도’( a live pray)는 하느님을 감전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음을 감지한다.
어떤 자매가 물었다. ”하느님은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아시는(마태 10,30) 전지전능한 분이신데 기도 내용을 궂이 시시콜콜 하지 말고 대강 간단히 해도 되지 않느냐“라고. 안된다고 했다. 대강과 간단함에 숨어있는 위선과 무성의의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절실하고 절절한 기도란 내용이 찬란하고 길거나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자의 구체적, 현실적, 그리고 무엇보다 적나라한 ‘날 것의 진심’이 기본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은 경우에 따라 한 마디도 가능하다. 가령 “아이고!“도 가능하다. 거기에 더 붙이고 싶으면 ”아이고 주님!“ 더 붙이고 싶으면 ”아이고, 아이고 주님“ 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던 정월기 신부님 말씀이 기억난다.
어떤 분이 미국에 가서 부자가 되리란 포부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생활도 직장도 안정되기도 전 가지고 갔던 재산을 다 허비하고 이제 가족이 모두 거리에 나 앉고 굶어 죽게 되었다. 그 형제는 주님만 홀로 계시는 적막한 시간 성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제대 앞에 납작 엎드려 대성 통곡을 했다. 살려달라고 소리 없이 읊조리며. 그의 통곡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은 그에게 명했다. 집집마다 손에 피가 맺히도록 문을 두드려 자신의 일터를 찾아와 달라고 홍보를 해보라고. 그는 정말 그렇게 했고 찾아오는 사람 마다 정성 품은 실력으로 입터넷에 회자되더니 정말 부자가 되었다. 그의 직업은 치기공사였다. 그 경우 ‘날 것 기도’는 하느님께 살려달아고 소리없이 읊조리며 납작 엎드려 울어버린 통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