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백목사
자랑스런 나사렛 사람들
마 2: 23, 요 1: 45-49
나는 나사렛교회의 구성원으로 60여년간을 지나온 것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나사렛교회가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쫓는 복음주의에 속하였고 또한 성서의 핵심 교리인 온전한 성결을 강조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선교적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생명력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나사렛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자랑이기도 하다. 나사렛교회란 나사렛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한다.(마 2:23) 예수를 믿고 따르는 나사렛사람들은 예수의 인격을 닮고 그의 가르침과 삶을 본 받아 성실하게 거룩을 추구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창시자 브리지 박사는 나사렛교회를 아침에 솟는 태양으로 비유하였다. 21세기는 아침의 교단인 나사렛교회가 그 주역의 일부분을 담당하리라 믿으면서 자랑스런 나사렛사람들의 공동체를 소개하려고 한다.
1. 나사렛 교회의 역사와 창시자들
미국에서 출발한 나사렛교회
나사렛교회는 1908년10월 8일에 미국 택사스주 파이롯 포인트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 말엽부터 불기 시작한 성결 부흥운동이 마침내 미국 전역에 파급되었고 이 여파로 1)동부에서는 뉴욕을 중심으로 규합한 세력들이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1896,11,12) 를 형성하였다.
2)남부에서는 택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성결교회(1904, 11) 가 조직되었으며
3)서부에서는 로스엔젤스를 중심으로 P. F. 브리지 목사를 지도자로 한 나사렛교회(1895,10)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1907년 10월 10-17일까지 시카고에 모여 우선 동부의 오순절교회 연합회와 서부의 나사렛교회가 통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서적인 성결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의 교단으로 손을 잡고 오순절 나사렛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남부의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의 대의원들은 시종 방청객으로 참석하였다가 이듬해인 1908년 10월8-14일까지 택사스 파이롯 포인트에서 오순절 나사렛교회 대표들과 같이 총회를 열고 대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마침내 나사렛교회는 미국의 전역을 망라한 전국적인 교단으로 그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초창기 나사렛교회는 피니스 F. 브리지(Fhineas F. Bresee), 씨. 비. 저니간(C. B. Jernigan), 씨. 더블류. 루스(C. W. Ruth) 그리고 에이취. 에프. 레이놀스(H. F. Reynolds), 이. 피. 엘리슨(E. P. Ellyson) 목사등이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초창기 지도자들이 함께 갖았던 꿈은 웨슬리주의 전통안에서 믿는 자들의 성결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도모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후 1919년 총회에서는 35개 연회의 청원을 받아드려 교단의 이름을 나사렛교회라고 변경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새로운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교단과 선교단체들 특히 영국과 카나다의 성결교회들이 가입하여 성결교단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었고 현재 전세계 119개 국가에서 강력한 성결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나사렛교회
*일본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결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1905년에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교단이 1908년에 오순절 나사렛교회와 합동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나사렛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나사렛교회의 역사는 미국 나사렛교회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나사렛교회는 1936년 동부연회 조선부에서 오사카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장성옥(張聖玉)목사를 평양 신양리에 파송하여 최초의 나사렛교회를 한국에 설립하였다. 그 후에 서울 영천에 또 하나의 나사렛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성결교회 제3차 총회가 1935년에 분열되자 거기서 이탈한 인사들이 1936년 11월 25-29일까지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 창립총회를 열고 “하나님의 교회 선언문”을 채택하고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 홍파동에 김승일 전도사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교회가 있었는데
이러한 세 개의 성결구룹들이 1948년 4월 사직동에 있는 정남수 목사 댁에서 미국의 나사렛교회에 가입하여 이 땅에 진정한 성결 복음을 전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대한기독교 성교회(聖敎會)의 창립을 선언하였고 그 해 10월에 국제본부 극동담당 감독인 니스 박사가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고 내한하여 필동교회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정식으로 한국 나사렛교회를 인정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의 조직을 보면 이사장에 정남수 목사, 총무에 서재철 목사, 재무에 안형주 목사, 신학교 책임자에 곽재근 목사, 서기에 승학수 목사 등이었다.
그 후에 한국 동란이 일어났고 많은 교회가 소실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이 와중에 영천교회 담임목사인 승학수 목사 가족이 폭격으로 화를 입는 불상사가 일어 났다. 정남수 목사는 미국과 카나다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한국 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많은 구제품과 선교 자금을 모금하여 어려운 교역자들과 교인들을 도왔고 파괴된 교회당을 재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4년 5월에 국제본부에서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로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 오은수)를 파송하였고 서울 사직동에 건물을 매입하여 교단본부와 선교사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1954년 9월 14일에 그 자리에서 23명의 학생으로 한국 나사렛신학원을 개강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하여 사역자 양성에 들어 갔다. 그것이 오늘의 나사렛대학교의 전신이다.
그리고 교단은 1955년 5월에 영천교회에서 11개의 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개회함으로 한국에 있어서 정식 교단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초대 감독에 박기서 목사, 총무에 조문경 목사, 재무에 김종수 목사가 취임하였다.
현재의 교세는 5개 연회에 250여 개교회 그리고 4만여명의 신도들이 나사렛사람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필리핀, 카자크스탄, 타일랜드, 일본, 이태리, 오스트라리아에 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
나사렛교회를 창설한 두 주역
나사렛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는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역을 언급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미국에서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피니스 F. 브리지(Phineas F. Bresee) 박사와 한국에 나사렛교회를 창립한 정남수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열렬한 성결 부흥사라는 점과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가라는 점과 교단을 창립하였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국제 나사렛교회의 창시자로 또 한 사람은 한국 나사렛교회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브리지 박사(1838-1917)
그는 1838년 뉴욕 프랭클린에서 태어났고 17세에 아이오와로 이사하여 2년 뒤에 감리교 시골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 후 25년간 이 지역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으며 감리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광산업에 손을 댄 것이 실패하여 목회를 그만두고 1883년 칼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우연히 몇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고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목회하던 중 그는 성결운동의 지도자였던 왓슨(George D. Watson)과 맥도날드(William McDonald)의 성결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확실한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성결운동의 일원으로서 전국성결연합회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캘리포니아 지역의 성결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런 브리지의 열정적인 성결운동은 감독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브리지는 빚더미에 쌓인 조그만 시골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몇 차례의 이런 부당한 파송을 받게 된 브리지는 결국 1894년에 감리교회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잠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브니엘선교회(Peniel Mission)에서 일하다가 의사이자 목사였으며 남가주대학교의 전직 총장인 위드니 박사(Dr. J. P. Widney)와 함께 1895년에 로스엔젤스에 나사렛교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이 브리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나사렛교회가 남부지역, 동부지역의 성결단체와 연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의 나사렛교회를 형성하고 1908년에 초대 감독에 레이놀드 목사, 엘리슨 목사와 함께 선출되었다.
브리지가 지도하는 나사렛교회는 기존의 감리교회에서 성결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자 성결을 재강조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초기 감리교회가 가졌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다. 19세기 말의 미국 사회는 도시화된 사회였고 따라서 수많은 도시 빈민문제가 발생하였다. 브리지 박사의 나사렛교회는 특별히 이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나사렛이라는 말 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성결파 단체들은 그들의 분리 이유에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집회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원, 양로원, 긴급구조대 같은 것을 운영하였다. 즉 성결의 강조는 사회 개혁운동과 함께 나갔던 것이다. 브리지 감독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명을 다하고 1917년 월 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긴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을 마감하였다.
정남수 목사 (1895-1965)
그는 1895년 11월 9일에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정용훈씨의 3남1여 중 막내로 태어 났다. 1907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다음 해에 안창호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도산선생이 일경에 피검되어 경성에 압송됨에 따라 상경하여 옥중에 있는 도산의 사식차입과 외부의 독립운동가 들과의 영락을 담당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0년 도산이 석방과 함께 미국 방명 길에 오르자 그와 동행하여 중국 청도와 러시아의 모스코바와 영국을 경유하여 미국 뉴욕을 거쳐 로스엔젤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1913년 흥사단이 창립되자 그 창립 단원이 되었고 그 후 독립자금 모금과 도산선생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25년에 에즈베리신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각처 천막부흥회에서 설교, 한국의 빌리 썬데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26년에 감리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스탠리 죤스 박사의 권유와 천막전도집회에서의 원조 약속을 받고 귀국하였다.
1927년에 동경음악전문하교 출신의 김경숙 양과 결혼하였고 성결교회 장막전도대 대장으로 한국에서는 최초로 6천명 수용의 천막과 트럭 그리고 7인조 악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를 비롯해서 만주 일대에 선풍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교회사학자 민경배 교수는 그를 가리켜 한국 부흥운동사에 있어서 제3기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셩결교회 최고 이사와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임명되어 교단 발전에 기여하였고 부흥전도집회로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월간지 “성화”를 발간하였으며 설교집을 2권 발행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반일 친미주의자로 지목되어 트럭과 천막 악기등이 압수 당하고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룬 후에 석방되었으나 심한 고문으로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고통으로 지났다.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되자 그의 활동무대가 다시 열리게 되었으니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에즈베리신학교 동창들이 요인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는 나사렛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에 순수한 성결단체인 나사렛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를 보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옛 동지들인 하나님의 교회 지도자들과 당시 영천에 있던 나사렛교회 그리고 홍파동의 독립교회를 합쳐 1948년 봄에 성교회(聖敎會)를 창설하였고 그 해 10월에 내한한 극동 담당 니스 감독에 의해 정식 나사렛교회로 공인을 받았다. 그 후에 6. 25사변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교회 재건과 구호품 수집에 주력하였고 1952년에 귀국하여 교회 재건과 교역자들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는 국제본부에 신학교 설립을 위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한편 재단 설립을 서두르며 교단의 모양 갖추기에 주력하였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오은수 목사 내외가 1954년 5월에 입국하자 그는 자기의 임무가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그 해 8울 20일에 미국으로 건너가 은퇴를 선언하였다. 1965년 7월8일 불덩어리 부흥사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정남수 목사가 심장질환으로 소천하니 향년 70세였고 유족으로는 부인과 3남 1녀를 남겼다.
정남수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시작하여 열렬한 성결 부흥사로 한국의 뭇 심령들을 일깨우고 마지막에 나사렛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의 그의 임무를 마친 위대한 지도자이다.
2. 나사렛교회의 현황과 특색
나사렛교회의 현재 상황
현재 나사렛교회는 세계적인 국제교회로서 가장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졌으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성결교회로 인정을 받고 있다. 현 교세는 정회원수가 1백20만명이며 1년에 약 9만명의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고 교회수는 11,857개이고 119개 국가에 선교를 하고 있다. 59개의 고등 교육기관에 약 3만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 있고 100개의 구호기관과 700개의 선한 이웃 교회가 있다. 1년에 헌금액이 1997년을 기준으로 $586,908,906으로 집계되어 있다.
나사렛교회는 21세기를 맞아 아침의 교단답게 나사렛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예배와 전도와 교육 그리고 봉사에 힘을 기우려 나갈 것이다.
참고로 1908년 창립총회 당시의 교세를 보면 교회수 288개, 정회원수 10,414명, 1907년의 총 헌금 수입액은 $106, 087이었다.
나사렛교회의 자랑스런 특징들
1. 예 배
나사렛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며 어떤 틀에 짜인 의식과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잔치답게 감사와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를 선호한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풍성한 꼴로서의 영감있는 설교가 강단을 통해서 선포되고 그리고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경험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간증하는 일과 제단 초청으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특색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게 할 뿐더러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세상으로 파송되는 결단을 갖게 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아래서 응답되는 인간의 결단이 조화를 이루는 일이야 말로 예배의 진수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인 예배라고 믿는다.
2. 나사렛교회가 힘 쓴 일들
미국에서 나사렛교회가 출발하면서 힘 쓴 일들은 대개 네 가지로 손꼽을 수 있다. 선교와 교육과 출판 그리고 봉사(구호) 사업이다. 이 네 가지는 자동차의 네 바퀴처럼 앞으로 전진하는 교회를 더 참되게 하여 어둠이 짙은 세상을 비추며 부폐한 사회를 정화하는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였다.
A. 선교= 초창기 교회는 교단 설립과 동시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나사렛교회가
공식으로 창설된 1908년에 이미 일본과 인도와 아프리카와 남미등에 선교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교회마다 선교회가 조직되어 전 교인 선교사화를 꾀하며 “내가 가든지 남을 보내든지”라는 정신으로 선교사역에 힘을 경주하였다. 개교회 마다 조직되어 있는 세계선교회(NWMS)의 목적은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에 대해 교육하고, 선교에 헌신할 청소년들을 격려하며, 선교기금을 확보하여 선교사업을 돕는 일이다. 선교사는 직업선교사, 특수선교사, 단기선교사 또는 자원선교사로 구분한다. 요즘은 많은 교회에서 선교지 답사와 증거와 봉사팀(Work and Witness Team)을 만들어 직접 선교를 체험하게 하는 일이 많다. 나사렛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옥합성금” 운동은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금으로 선교지에 부동산 구입과 교회당, 학교, 병원, 선교사 주택, 목사관 건축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간에 참으로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현재 선교사의 수는 600명이 넘는다.
B. 교육= 교단 창립자들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한 선각자들
이었다. 사역자 양성을 위한 성서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일반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들을 설립하였다. 현재 미국에 있는 대학들의 창립연대가 교단의 창립일자와 거의 비슷한 것은 볼 수 있는데 이는 교회를 세우면서 동시에 대학을 세웠다는 뜻이 된다. 나사렛교회는 현재 미국에 1개의 신학대학원과 성서대학 그리고 8개의 인문 대학교가 있고 각 나라마다 신학대학과 기타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전 세계에 나사렛 고등교육기관으로 59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어떤 나라에는 간호대학과 교육대학이 설립되어 그 지역에 봉사할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들을 관리 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제본부에 일명 IBOE로 알려진 국제 교육위원회(International Board Of Education)가 있으며 개교회의 주일학교를 통한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장년들의 교육을 총괄하는 주일학교국이 있으며 모든 성도들의 전도와 청지기 훈련과 제자교육을 위해서 교회성장국이 있다. 교육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여는 대문과 같다.
c. 출판= 1908년에 교단이 발족하면서 본부 안에 인쇄시설을 갖춘 나사렛출판사
를 설립하여 기관지와 전도지 그리고 각종 교재와 신학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하
였다. 인쇄물을 통한 복음전파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늘의 나사렛교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나사렛출판사의 공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나사렛출판사는 미
국에서 종교출판사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출판사로 발전하였고 미
조리 주에서 제2종 우편물을 제일 많이 발송하는 기관이 되었으며 직원의 수만
해도 200명이 훨씬 넘는다. 나사렛출판사 산하에 초교파적인 출판물을 취급하는
비콘힐출판사와 음악 전문의 릴리출판사 그리고 교재 출판을 전담하는 워드액션출판사가 있다. 그리고 수종의 잡지를 간행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형제 교단들인 웨슬레교회, 자유감리교회, 복음형제교회, 형제 그리스도의 교회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몇 해 전부터 구세군에서 본 교단의 주일학교 교재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출판사의 수입은 세계선교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D. 봉사(구호)=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참된 경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결의 강조는 이웃 사랑과 사회 개혁적인 차원에서 봉사사업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웨슬리가 그랬고 브리지가 이면을 강조하였다.
나사렛교회의 초창기 봉사사업은 교회 설립에 주력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 자리를 잡으면서 교회 마다 구호사역에 힘을 쓰게 되고 교단 안에 구호사역부를 두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계층과 불의의 재난을 당한 곳에 의약품과 식량, 의류, 생활 필수품, 건축자재를 보내고 있다. 한국에 6.25사변이 일어나서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을 때 나사렛교회는 활발하게 구호사업을 전개하여 많은 것으로 우리를 어려움에서 도왔다. 또 얼마 전에는 북한에 두 차례 대표자를 보내 식량과 의약품 등 약 2백만불 어치를 보냈고 금년 말에 다시 구호물자를 보낼 예정이다.
세계 도처에 재난과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거기에 나사렛의 구호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근자에 소말리아와 피키스탄에서의 활약이 돋보였다. 지금 이러한 구호사업은 국제본부의 구호사역부와 나사렛교회 평신도들이 설립한 마음에서 마음으로(Heart to Heart)라는 자선 단체가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다.
나사렛교회의 역사적 정체성
임승안 목사(나사렛대학교 교수/ 나사렛교회 협동목사)
“나사렛교단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최소 한국의 나사렛교단에 교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두 번쯤은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나사렛 교회 목회자는 물론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자로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 특별히 나사렛교회를 참으로 아끼는 교인들은 “나사렛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라는 질문을 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나사렛교회를 처음 출석한 사람들이 필경 할 수 있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나사렛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목회자와 직분자들과 인도자들은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나사렛교단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는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간단하게 지나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성경은 어떠한 책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사렛교단의 교인이라면 “나사렛교단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매우 중요하며 동시에 이에 대하여서 간단명료하게 답변을 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개인의 구원보다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나사렛교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며,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나사렛교단의 평신도지도자로서 지역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장로님들을 염두에 두고 이 주제를 함께 생각하고자 한다.
I. 사도행전과 첫 5세기의 교회
우리의 장정은 “나사렛교회는 성결의 메시지에 대한 초유의 우주적 사도교회의 일원임을 자인”한다고 서두(19쪽)에서 그 역사적 뿌리를 밝히고 있다.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가 우리 나사렛교단의 역사이며, 특별히 기독교 역사 “초기 5세기 동안의 일련의 초교파적 기독교 신조들을 적절한 신앙의 표현들”로 인정하는 교단이다. 나사렛성결교단은 “사도적인 사역” 다시 말하면, “말씀 선포와 성례의 집행, 그리고 믿음과 행함의 동시적 강조를 통해 사도적인 사역을 육성하고 지속시키며 이웃을 위한 봉사의 삶을 강조”하는 교단이다. 이처럼 나사렛성결교단은 “사도적 교회와의 일치”를 도모하는 교단이며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점”이라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장정에서 언급된 위와 같은 사항들은 나사렛성결교단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뿐만 아니라 오순절의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성결하게 되어 말씀, 성례, 믿음, 그리고 행함을 중시하였었던 ”사도행전“의 교회이며, 초기 5세기의 신조들을 신앙고백으로 삼는 역사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정통성을 전수한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II. 18세기 영국의 웨슬리 부흥운동의 교회
나사렛교회의 교리와 장정은 나사렛교회의 역사적 정체성이 18세기의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 언급하고 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 이 기독교 신앙은 과거의 여러 가지 종교적 흐름 가운데 특히 18세기의 웨슬레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우리 나사렛교인들에게 전해져 왔다.” 대한 기독교 나사렛성결회, 교리와 장정, 19-20, 1997.
이처럼 나사렛교회의 역사적 정체성의 근간적인 요소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이며 아래와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1. 개인 구원과 성결 체험의 교회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개인과 교회와 사회의 성결을 추구하는 메쏘디스트 운동이며, 18세기 영국에서 유혈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교회와 사회 운동이라고 할레비는 평가를 하고 있다. Elie Halevy, The Birth of Methodism in Englan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1.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죄성을 지니고 출생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죄를 지으며 살게 됨으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굳게 믿었다. 웨슬리는 창세기 6장 5절을 본문으로 삼은 설교 “원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시대의 인간들이 기술한 인간의 속성과 얼마나 다르게 표현한 내용인가!” 웨슬리, 잭슨 편집, 전집 6, 설교, “원죄,” 54.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1979.
인간의 행복은 그러한 죄성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두 번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성결의 가르침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웨슬리, 잭슨 편집, 전집 5, 설교, “성서적 그리스도교,” 37.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1979.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은혜는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계시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이러한 측면에서 철저하게 개인성결운동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의 죄는 자범죄와 원죄가 있으며,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믿는 순간에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죄 용서의 면에 있어서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과 함께 하고 있지만 죄성의 문제가 이 세상에서도 해결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그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성경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웨슬리의 개인 성결은 구약의 시편 51편이나 신약의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성결에 관련된 모든 역사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웨슬리가 강조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교회 역사적인 측면에서 철저히 펠라기우스와는 다르며 어거스틴적이라고 볼 수 있다, Henry Bettenson ed.,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73.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는 점을 일평생 설교하였으며,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는 핍박을 받았고 다른 한편 그의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다. Wesley,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Kansas: Beacon Hill Press of Kansas City, 1965.
2. 교회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교회의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운동이었음을 1744년부터 1789년에 있었던 메쏘디스트 연회록에 기록된 질의 응답형 진술에서 나타난 웨슬리의 답변에서 볼 수 있다: “메쏘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설교자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을 때 우리가 믿는 바를 어떻게 이성적으로 대답을 할 것인가? 어느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기 위함이 아니고, 나라 특별히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며, 전국에 성서적 거룩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웨슬리, 잭슨 편집, 전집 8, “연회록,” 299.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of Kansas City, 1979.
18세기의 영국 교회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웨슬리 연구가 헨리 랙은 18세기 영국의 90%가 영국교회의 회원이었으며 사회적이고 법적인 특권을 누리었다고 말한다. Henry Rack, The Reasonable Enthusiast,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89, 10.
특별히 성직자들은 교육과 의료의 특혜를 누리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적 지도자들로 대접을 받고 있었고, 교회 감독은 의원의 번열에 있었다. Ibid., 10.
그러나 그들의 영적 훈련은 쇠락하였다고 랙은 결론을 짓는다. Ibid., 11.
교회 역사가들로부터 18세기의 영국 교회는 “흑암의 평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Ibid., 11.
영국교회의 예배와 절기 행사는 의미가 없었으며, 교회당은 쇠약하였고, 성만찬은 행하여지고 있지만 영적인 의미를 상실한 가운데 형식화 되었다.성직자들은 타성적으로 교회를 섬기었고 세속적 생활을 하였으며 자연히 영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 공동기도서의 기도생활과 정기적인 성만찬 집례가 영국교회의 주요한 종교적 행위이었다.
웨슬리는 이성과 과학에 근거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제반적인 문제점들을 지적을 하면서 특별히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통렬하게 책망을 하면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설교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글들을 통하여 날카롭게 지적을 하였다. 조오지 셀, 존 웨슬리의 재발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웨슬리는 특별히 영국교회가 당시에 세 가지 신학적 사상으로 인하여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웨슬리는 영국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교회의 부흥운동을 위하여 일평생을 헌신하였다. 첫 번째로 18세기 영국 교회는 이신론적 신학에 휩싸여서 창조주 하나님은 믿고 있었지만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는 인본주의적 신앙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영국교회는 로마 천주교회의 고교회주의 신학 중심이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으며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야한다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를 경시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영국교회는 윌리암 로와 같은 신비주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가르침을 경시하고 인간의 행위에 의한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비성서적인 이신론과 경직된 고교회주의와 위험한 신비주의 가르침 가운데 있는 영국교회가 영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음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도를 강하게 가르치었다. 예를 들자면 웨슬리는 1744년 8월 24일 오전 10시에 성 바돌로메 일에 옥스퍼드 대학교 부속 성 마리아 성당에서 옥스퍼드 교수로서 7번째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이 설교가 그의 옥스퍼드대학교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다. 웨슬리는 당시의 영국교회가 명목상의 기독교이며 마귀의 기독교이고 저속한 미신이며, 허식에 불과한 기독교라는 공격을 신랄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Ibid., "최후의 옥스퍼드 설교,“ 31-46.
웨슬리의 가슴이 영국교회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그러한 웨슬리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영국교회의 부패상을 간과할 수 없었다. 웨슬리, 잭슨 편집, 전집, 5,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37-52.
이로 인하여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메쏘디스트 운동을 통하여 영국교회의 신자들을 구체적으로 양육을 하여 교회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웨슬리는 1725년 9월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처치 교회에서 옥스퍼드 감독 존 포터에게 안수를 받은 영국교회의 신부로서 일평생 영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헌신을 하였다. 웨슬리는 개신교회의 중요한 두 인물 마틴 루터나 존 칼빈과 같이 자신이 소속되었었던 교회들로부터 추방되거나 새로운 교회를 창립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자신이 속하였었던 영국교회 안에서 교회 회원권을 소유한 가운데 영국교회 부흥운동을 위하여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운동이었다. 스나이더는 웨슬리의 이러한 부흥 운동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을 하였다: “웨슬레는 제도적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참백성을 형성하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조직의 재능을 사용했다. . . . 그의 체계는 선전이나 공개적 이미지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세우는데 전력했다.” 스나이더, 조종남 역, 혁신적 교회 갱신과 웨슬레, 서울: 대힌기독교출판사, 1986, 14.
웨슬리의 “작은 교회 부흥운동”은 옥스퍼드의 호울리 클럽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웨슬리가 우릇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에 동생 찰스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학문과 경건한 삶을 정진하기 원하는 동료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하고 형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웨슬리는 1729년 11월에 엡워쓰와 루트에서의 목회를 계속할 것을 권유하는 부친을 떠나 옥스포드 대학교로 돌아왔다. 찰스 웨슬리는 로버트 커캄 그리고 윌리암 몰간과 함께 주 4일간 모여서 고전 서적, 신약원어 성서, 그리고, 신앙서적을 읽으며 경건한 삶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학문적 훈련과 함께 청교도적인 내면 성찰을 모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옥과 병자를 방문하는 도덕적인 성결의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였다. 이들에 대한 별칭이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성경벌레, 메쏘디스트, 성찬주의자와 같은 것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별칭은 이 모임의특성을 시사하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성경 읽기와 엄격한 청교도적인 삶 그리고 고교회적인 성찬 참여를 중시하였다.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정규 학생들을 교과과정에 따라서 가르치는 한 편 일부 학생들을 별도의 시간을 내어 전인격적으로 지도하는 교수와 목사로서의 웨슬리의 사역은 북아메리카의 조지아주에 소재한 사반나 도시의 선교사역으로 일단 종료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그 자신이 성령 충만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사반나에서 귀국하여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는 웨슬리의 믿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도와준 인물이 모라비안 목사 피터 뵈흘러였다.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이 간직하고 있는 복음주의적 믿음이 없기에 믿음에 관한 설교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뵈흘러는 그 믿음이 없으니 오히려 믿음에 관한 설교를 하여야하며 그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이 있기에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웨슬리가 사반나 목회의 실패로 인한 충격으로 방황하였으나, 1738년 5월 24일 15분전 9시에 해결되었다. 웨슬리는 죄사함의 확신과 내적인 기쁨을 갖게 되었으며 중보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 날의 일기는 전형적인 모라비안적 구원의 체험에 관한 기록이었으며, 이신득의, 죄사함, 성결 등에 관한 주제가 주로 다루어지었다. 그해 5월 1일에 런던의 훼터레인 거리에 있는 비국교도의 한 가정에서 신도회가 시작되었고 “팀 미니스트리”를 하게 되었다.
1739년 1월 1일 새벽은 웨슬리에게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날이었다. 웨슬리와 함께하는 약 60명이 공동체적으로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복음을 통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었으며, 브리스톨 사역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올더스게이트가 제 일의 체험이라면 송구영신 체험은 제 2의 체험이 아니겠는가? 웨슬리 목회는 이때부터 역동적이었으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웨슬리의 대중집회를 통한 영적 부흥운동은 브리스톨에서 시작되었다. 웨슬리의 호울리 클럽의 10년 아래의 회원이었었던 조지 휫필드는 브리스톨에서 대중집회를 인도하였었고, 북아메리카 선교를 계획하였기에 웨슬리를 브리스톨로 초청하였다. 웨슬리는 옥외설교가 당시의 교회법을 어기는 행위였기에 몹시 망설였지만 마침내 가게 되었고, 4월 2일에 첫 대중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자신도 놀라게 되는 영적 체험의 역사가 회중 가운데 일어났다. 성령님의 역사로 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고 이들을 양육하기 위한 각종 조직을 시작하였고, 문맹자를 위한 교육을 하였다. 조직과 양육과 돌봄을 함께하는 전인격적 목회이었다. 웨슬리는 옥스포드 교구출신이었기 때문에 브리스톨 교구 감독의 부름을 받아 심문을 받았으며, “세계는 나의 교구입니다“라는 유명한 답변을 하였다. 웨슬리가 고백을 한 것처럼,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브리스톨에 머무르지 않고 우선 런던으로 번지었고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전 세게로 번지게 되었다.
3. 사회 구원과 개혁을 촉구하는 교회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개인과 교회의 영역을 넘어 사회 부흥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은둔의 종교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의 종교이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웨슬리, 전집 5, 설교 산상수훈 4, 296.
이곳에서 웨슬리는 기독교를 사회적이라고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설명을 이어서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내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라고 할 때, 기독교는 사회가 없이,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대화를 나누는 것 없이 잘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전집 5, 산상수훈 4, 296.
이처럼 웨슬리는 교회의 사회성을 강조하였으며, 자신의 메쏘디스트 운동이 사회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의 사회 운동이라 함은 성서에 근거한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허락하신 필요가 결핍되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다. 즉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와 교육의 문제가 중요한 사항일 것이다. 그리고 감옥소의 처우 문제나 노예해방과 같은 사회적 문제도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측면에서 웨슬리는 이러한 사항들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이 복음 전파에 필수적인 사항이라는 측면에서 웨슬리는 항상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자에 있었다. 임승안, “웨슬리의 정치관과 희년사상,” 웨슬리복음주의협의회보, 22호, 95/11, 41-56.
18세기 서민의 경제 상황은 참담하였으나, 영국 사회의 기득권층의 이기주의와 보수주의는 가난한 자들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그리고 경건주의자들은 박애 사역을 성결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웨슬리 역시 초기에는 박애사역을 외적 성결의 수단으로 여겼지만, 성령 체험 이후에는 박애사역을 성결의 조건이 아니라 열매로 인식하게 되었다.
영국 사회의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176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었다. 마르쿠바르트, 존 웨슬리의 사회 윤리, 서울: 보문 출판사, 1992, 19.
삶을 위한 기본적인 것들이 결핍된 상황이었고, 동정도 받지 못하였다. 범죄 행위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고통은 덜 알려지었다. 소작인과 빈곤한 사람들이 백성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들의 빈곤의 주 원인은 산업화, 소유주의 이기심, 부자의 재산 증식 욕망, 농민의 토지 박탈, 관리의 무관심 등이었다. 가난에 대한 종교적 형벌관이나 성금을 제공함으로 종교적 의무를 다하였다는 사고는 가난의 근본적인 상황을 변혁시키려는 의지를 근본적으로 봉쇄하게 되었다. 자연히 학교교육, 직업교육, 구호 혜택, 진료, 사망률 등에 있어서 18세기의 영국사회는 최저의 수준이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사회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개인과 교회의 부흥운동을 사회구원의 차원으로 연결을 시켰다.
웨슬리가 박애사역을 실천하게 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고,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며,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성결은 없고 사회적 성결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와 높이는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 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나 선한 일에 열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영혼은 형제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 주기를 열망할 걸이다. 또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만다 주님이 그랬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서기종, 요한 웨슬리의 경건한 생활, 내쉬빌: 애빙던 출판사, 1997, 102 인용.
웨슬리에 있어서 믿음은 사랑의 행함이 수반하는 믿음이며, 그렇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Wesle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Alesbyry and London: Hazell Watson and Viney LTD, 1954, 695.
그리스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시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사람 행복과 정비례의 관계가 됨을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결이며 행복이라고 믿었다.
웨슬리의 박애사역은 당시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던 18세기의 신앙 단체들과도 관계가 깊다.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5, 21-25.
안톤 호르넥(Anton Horneck)과 리차드 스미티스(Richard Smithies)의 지도 아래 17세기 말에 태동한 신앙 단체들은 가뭄에 내리는 비와 같았다. 신앙단체는 소그룹 형태의 개인적인 대화와 엄격한 규칙적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청년 중심의 사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여러 종류의 박애 사역을 하였으며 사회 제도에도 관심을 가졌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감옥소를 방문하고, 병원의 환자를 돌보며, 강제 노역장과 서민들의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박애 사역의 기본 동기는 철저히 종교적이었으며, 사회적 활동은 그 다음 문제였다. 특별히 박애 사역은 성결의 삶의 한 면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의 정통적인 교회가 이러한 사회 활동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사회 활동은 자연히 두드러지었다.
기독교지식증진 단체(SPCK, the Society for the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698년 설립)와 복음전파단체(SPG,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1701년 설립)가 대표적이었다. 하이젠라이젣, 21-25. 전자는 가나한 사람들을 위한 교리교육과 서적 출판과 미국식민지 신앙 교육이 목적이었고, 후자는 미국식민지 영국인 신앙과 선교가 중요 사역대상이었다. 제레미 테일러와 윌리암 로와 같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사회악 제거와 가난한 사람들의 상태를 호전시키려는 노력이 특별히 돋보였었다. 절대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의 가난에 대한 무관심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돌봄을 자신들의 성화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으로 인하여 불행스러럽게도 사회적 악의 원인에 대한 규명을 충분히 밝히지 못하였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박애사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괄목할만한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주고 있다.
웨슬리의 박애 사역은 옥스퍼드 시절의 초기 메쏘디스트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호울리 클럽에서 시작되었음을 그가 우리리암 몰간의 사망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에 휩싸여 있을 때 보낸 편지에서 발견된다. 웨슬리, 전집 1, 서언적 서신, 5-16.
웨슬리의 호울리 클럽은 학문적이며 종교적인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박애 사역을 진지하게 실천하였다. 사역에 필요한 경제적인 기반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정기적으로 후원하거나 호울리 클럽회원들이 젊은 학생들로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거나 절제하면서 기금을 적립함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박애 사역은 올더스게이트 채플(1738년 5월 24일)에서의 성령 임재와 훼터레인 집회(1739년 1월 1일)의 성령 충만 체험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관점이 그 이전과는 달랐다. 즉, 박애 사역은 성결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나 조건이 아니라 성결된 삶의 열매이며 결과로서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박애 사역을 통한 부흥운동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이루어지었다. 마르쿠바르트, 조경철 역, 존 웨슬리의 사회 윤리, 서울: 보문 출판사, 1992, 18-23.
교도소 사역은 그의 사회구원을 위한 부흥운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웨슬리는 옥스포드의 두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였다. 일기와 쓰기가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가르치기도 하였다. 변호사를 중재하기도 하였고 출소 이후의 직업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도 하였다.
웨슬리는 소외된 가정을 위한 사역에 혼신을 쏟았다. 부모가 병든 가정을 위한 사역도 하였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여 의약품과 의복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교육시겼고 어린이들과 성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하였다. 웨슬리는 병자들을 방문하면면서, 그들의 숙식처의 위상 상태가 참혹하고, 영양 공급이 열악하며, 농도 높은 알코올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을 위하여 의약품을 나누어주고 옥스포드에서 수강한 의학강의를 활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여 주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의료 도움을 받은 다수의 사람들은 메쏘디스트들이 아니었고, 의료 혜택이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웨슬리는 영국에서 최초의 무상 약국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리고, 직접 “기초 물리학”을 저술하였으며, 환자들을 위한 영양, 위생, 치유, 보호 등의 문제에 도움을 주도록 하였다.
강제 노역자를 위한 사역에도 웨슬리는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을 시켰다. 자연히 그의 사역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사역으로 연결되었다. 웨슬리 자신이 교수이었기 때문에 성인을 위한 가정 방문 사역을 할 때 자연히 어린이들이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자신이 성경, 기도, 교리 등을 가르치고 손공작을 감독할 뿐만 아니라 여선생을 고용하였으며 이를 위한 월급을 직접 제공하였다. 도저히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20여명의 어린이들이 여러 해 동안 도움을 받게 되었다.
웨슬리는 박애사역을 위하여 기금을 모금하고 대여를 하는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가난한 가정, 공장, 강제 노역장, 병원, 교도소 등을 방문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으게 되었다. 주례적으로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기금을 모금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현금을 지급하거나, 의복, 생필품, 의약품, 그리고 연탄 등을 제공하였다. 웨슬리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3개월 동안 무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하여 고리업자들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웨슬리는 이윤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관리자를 두고 관리하였다. 웨슬리는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설교 “돈의 사용”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하였다: 가능한 많이 벌어라, 가능한 많이 절약하라, 가능한 많이 주라. 웨슬리, 전집 6, 설교 “돈의 사용,” 124-135.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업을 알선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실업이 만연한 빈곤의 주원인임을 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 하였다. 실업자들을 공장에 취직시키는 것이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며, 직접 직업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겨울철 반년 동안 처음에는 12명이 면직 작업을 하였고 후에는 뜨게질을 하였다. 웨슬리는 이 일로 인하여 공개적인 모욕을 감수하여만 하였다.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뿐만 아니라 가난에 대한 분석을 함으로써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웨슬리는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가난을 가난한 사람들의 나태함이나 종교적 형벌로 여기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극복하여야할 불행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였으며, 부유층과 사회와 정부의 과오를 엄하게 지적하였다. 즉, 부유한 사람들의 사치 생활, 밀수업자의 행위, 양주업의 성행 등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을 하면서 정부가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질타하면서 정부의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였다. 특별히 부자의 사치는 그들 자신을 피폐할 뿐만 아니라, 생필품의 값을 올리고 실업률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웨슬리는 부자의 사치와 낭비의 생활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착취하는 것으로 가르치었다.
III. 19세기 미국 성결운동
나사렛교회는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의 결실이었음을 나사렛교회의 교리와 장정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이 운동은 물론 웨슬리에 의한 18세기 영국에서의 부흥 운동의 확장의 결과이다. 교리와 장정, 20.
웨슬리가 인도하는 메쏘디스트 운동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영국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스코트랜드는 물론 북아메리카에서도 확장되었다. 북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됨에 따라 웨슬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온 가장 위급한 상황은 성례전을 집례할 성직자들이 그곳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북미의 메쏘디스트 평신도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애즈베리였으며, 그는 웨슬리에게 평신도 설교자들이 상호적으로 안수를 줌으로써 성례전 집례자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통보하였다. 웨슬리는 이 문제를 런던교구의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영국교회의 안수 목사를 미국에 파견하여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상황을 복음전파를 위한 비상사태로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토마스 콕을 감리사로 안수하고 두 명의 평신도 설교자를 목사로 안수하여 북미로 파송하였다. 영국교회의 장로 목사가 안수를 집례한 것은 영국교회의 법을 어긴 매우 심각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메쏘디스트의 연합신도회가 영국교회에서 분리하여 비국교회로 독립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우 찰스 웨슬리는 형 존 웨슬리와 다른 입장을 취하였으며, 상당한 기간 형제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다. 웨슬리가 이처럼 안수문제로 인하여 영국교회와는 물론 메쏘디스트 내부로부터도 심한 추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과 양육의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애즈베리에 의한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은 약 100년 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교리와 장정, 20-25.
1. 1890년대의 미국교회는 성결의 가르침을 중요시하는 시대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미국의 기존 교회들이 교회의 본연의 자세와 사명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교회의 정체성을 성결의 가르침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원하는 교회들은 기존의 교단에서 탈퇴하거나 교회를 개척하여 독립교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결을 중시하는 많은 교회들이 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 교회 형태로 있으면서 예배와 교육과 전도를 강조하는 연합 집회 성격의 부흥회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2. 성결 중심의 독립교회들은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이 전통적인 교 회들로부터 소외를 받고 있는 점을 중시하였다. 성결운동의 독립교회들은 도시의 빈민을 위한 전도를 강조하였고, 가난한 가정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었다. 음주와 금연 등의 사회악을 해결하기 위한 특수 기독교 단체들도 왕성한 사역을 하였다.
3. 교회와 사회의 성결을 부르짖는 독립교회들과 특수사역기관들은 점진적으로 전국단위 연합하고 가입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 그리스도의 성결교회, 그리고 나사렛교회가 있다. 이들은 각각 웨슬리의 전통에 입각한 성결운동의 교회들이었으며 개인성결, 교회 성결, 그리고 사회 성결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기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는 지도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교회들이었고 연합회였다. 나사렛 교회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으며, 미국 감리교회의 감리사이었던 브릿지 목사에 출범되었다.
IV. 미국나사렛교회
1. 설립자 브릿지의 가르침
미국의 나사렛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1895년 10월에 미국 감리교회의 감리사이었던 브릿지(Phineas F. Breesee)목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Carl Bangs, Our Roots of Belief,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of Kansas City, 1981, "The Making of a Founder: Phineas F. Breese," 9-25; 교리와 장정, 26.
그는 약 100명의 교인들과 함께 미국 서부의 로스 앤젤리스에서 제일 나사렛교회를 개척하였으며. 특별히 다음의 사실들을 강조하였다:
1) 성결의 메세지
나사렛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결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파한다.
2) 가난한 사람들을 돌봄
성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는 것이다.
3) 교회의 단순성
예배당은 단순하여야 한다. 교회 장식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돌보는 것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4) 영혼 구원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도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브리지는 위의 강조 점들을 포함하여 공동체로서의 중요한 규범들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 즉. 1898년 초에 일반규약, 신조, 제한적 감독권, 치리, 집사 임명, 목사 안수, 각종 교회 예식 등에 관한 바를 “교리와 장정”의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2. 미국나사렛교회 조직 과정
브릿지에 의하여 하나의 지역교회가 출범한 나사렛교회는 점진적인 연합활동을 통하여 하나의 교단을 형성되어 갔으며, 그 관정은 다음과 같다.
1) 출범시의 상황
미국의 나사렛교회는 서부의 로스 앤젤레스의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개척교회로 출발하였으며, 브릿지와 뜻을 함께하는 교회들이 서부 해안을 끼고 확장되었고, 로키 산맥의 동부로부터 일리노이(Illinois)주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쳐 통합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2) 제 1차 중앙총회
나사렛교회 대표들은 1907년 10월 10일-17일에 미국 오순절 교회 연합회와 시카고에서 중앙총회를 갖았다. 이 총회에서 양 대표들은 양 교회의 고유한 의결권을 침해하지 않고 교회를 육성하고 격려하며 치리 하는 형태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연합한 양 교단의 이름을 오순절 나사렛교회(the Pentecostal Church of the Nazarene)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초대 중앙 감독으로 브릿지 목사와 레이놀즈(Hiram F. Reynolds) 목사가 피선되었다.
3) 교단명칭 변경
제 1차 총회 이후부터 오순절 나사렛교회는 성결 연합회, 그리스도인 성결교회(the Christian Church), 그리스도 성결교회 중앙 협의회, 미국 오순절교회 연합회(the Association of Pentecostal Churches of America), 그리고 그리스도 성결교회(the Holiness Church of Christ) 등과 연합을 하게 되었다. 1919년 중앙 총회에서는 35개 연회의 청원에 따라 교단의 명칭을 오순절 나사렛교회에서 나사렛교회(the Church of the Nazarene)로 변경하였다.
4) 국제 나사렛교회로 성장
미국 나사렛 교회는 선교 사역을 중시하는 오순절 선교회(the Pentecostal Mission, 1915년)와 성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평신도 성결연합회(the Laymen's Association, 1922년)와 같은 미국 내의 독립 교회들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1922년), 한국(1948년), 남아프리카(1950년), 영국(1952년), 캐나다(1958년), 나이지리아(1988년) 등에서 성결을 강조하는 교회들과 지속적으로 연합을 하여 나사렛교회는 국제적인 교회로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현재 157개의 나라에 나사렛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을 감당하게 있다.
3. 나사렛 교단의 사명적 정체성
나사렛교회는 하나의 공적인 교단으로서 출범시부터 교리와 장정에 언급되어 있듯이 다음과 같은 사명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국제 사역의 독특성: 역사적으로 나사렛의 우주적 사역은 복음전도, 박애 사역 그리고 교육이 그 중심을 이루어 왔다” 교리와 장정, 24,
1) 선교 사역
나사렛 교단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땅 끝까지 확장(advancing the kingdom of God)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을 장정 “머리말” 첫 머리에서 간단명료하게 6명의 중앙감독이 천명하고 있다. 나사렛 교단은 세계선교의 사명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고 있다: “나사렛 성결교회는 세계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왕국 확장에 기여하는 도구로 존재합니다” 교리와 장정, 머리말.
선교를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없겠지만 특별히 교단적인 차원에서 세계선교를 출범시부터 가장 강조하고 실천하는 교단이 나사렛교단이라고 말하여도 과히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복음 변증과 교회 초석 확립(초대교회), 교리의 조직화 작업(중세교회). 교회의 개혁(루터와 칼빈), 세계 선교(진젠돌프, 웨슬리) 등이 교회 역사의 시대적인 사명이었다면, 나사렛은 “세계는 나의 교구”를 강조한 웨슬리의 전통을 이어받아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세계 선교의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교단이다.
나사렛 교단의 사명적 정체성이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세계 선교적 사명임을 천명한 중앙감독들은 그 사명이 죄인이 회개하고(conversion of sinners), 타락한 자가 개심하고(the reclamation of backsliders), 신자가 완전히 성결하도록 하는 것(the entire sanctification of believers)이라는 점을 부언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분명한 사명(well-defined commission)이 다름 아닌 “성서에 명시된 그리스도인의 거룩”(Christian holiness as set forth in the Scriptures)이라고 요약을 한다.
나사렛 교단의 이러한 성서적 성결을 통한 선교적 사명의 성서적 근거로서 특별히 마 28: 18을 제시하면서 “제자화”가 나사렛 교단의 사명이라는 점을 “머리말” 둘째 단락에서 밝히고 있다. 즉,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은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Great Commission)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중앙감독들은 제자화가 “영적인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성서적 성결을 가르치고 전파하여 제자화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영역이 아니라 한 영혼이 회개하여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목적은 교리와 교훈을 포함한 정책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다고 중앙감독들은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사렛교단의 신학적 교리와 도적적 규범과 정책적 규정등은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나사렛 교단의 교리와 규범과 규정이 성결의 복음을 통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2) 박애 사역
나사렛 교단은 박애 사역의 교단이다: “국제적 차원의 나사렛 박애 사역은 일찍이 인도의 기근 구제와 고아를 돌보는 일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교리와 장정, 24.
나사렛 교단은 중국에 브리지 기념 병원을 세우기 위하여 의료선교협회(Medical Missionary Union)를 1920년대 초기에 조직하였으며, 의료를 통한 구호 사역은 스와질랜드에서 개발되고 확장되었다. 북한에 의료 약품을 제공한 것 역시 나사렛 교단의 구호 사역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이 부분이 약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한국나사렛 교회가 구호 사역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어야 할 것이다.
3) 교육 사역
나사렛 교단은 교육사역을 중시하는 교단이다: “교육은 세계 사역으 한 측면으로 일찌기 1905년 캘커타에서 바나지에 의해 창설되고 그 다음 해 나사렛성결회가 입수한 여자소망학교가 그 실례이다.” 교리와 장정, 24-25.
교육이 교회의 필수적인 조건이며 사역인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교육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으며, 교회가 있는 곳에 기독교 교육이 있다. 건강하고 성숙한 교육이 있는 곳에는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교육 사역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나사렛교단이 교육 사역을 강조하는 부분이 나사렛교단의 공식적인 문서와 개인적인 글들 가운데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교육의 내실화에 대하여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나사렛 교단 157개국에 있는 57개의 고등교육기관의 현황을 살표볼 때 그러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나사렛 교회와 교육의 과거와 현재가 한 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의 나사렛교회가 교육 사역에 큰 관심을 기울여할 것이다.
4. 나사렛 교단의 체제적 정체성
나사렛 교단의 최고의 권위 기구는 중앙 총회임을 “머리말”에서 중앙 감독들은 천명하고 있다: “중앙 총회는 나사렛성결교회의 법과 교리 제정과 입법의 최고 기구입니다.” 교리와 장정, 머리말.
나사렛 교단은 사무총회, (지방) 총회, 중앙총회를 통하여 공식적인 사항들의 합법적을 처리하고 있으나, 나사렛 교단의 최고의 권위가 중앙 총회에 있다는 것이다
나사렛교단의 최고 권위가 중앙 총회에 있다는 것은 나사렛교단이 회중 중심의 개교회 혹은 국가 중심의 민족 교회가 아니라 “모든 족속”으로 구성된 국제 교회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사렛 교단의 체제가 “대의정치“라고 할 때 이것은 장로교회의 ”대의정치“와는 다른 대의원제도라는 것이다. 중앙 총회가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은 교회의 제도적 권위가 로마 천주교회와 같은 감독집권제가 아니고, 침례교회와 같은 회중집권제도 아니 것이다. 나사렛 성결교단의 귄위는 특정한 인간이나 단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문자화되어있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사렛 교단의 목회자와 제직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가 성결된 그리스도인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들 가운데 ”대의원“이 피선되어 총회가 구성되지만, 성결된 그리스도인이라 하여도 직분에 상관없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왜곡시킬 수 있기에 그 어느 한 편에 권위를 두지 않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V. 한국나사렛교회
한국나사렛교회는 1948년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제자 정남수 목사에 의하여 서울에서 출발을 하였다. 김영백, 정남수 목사, 서울: 도서출판 나사렛, 2002.
정남수 목사는 1895년 평남에서 출생하여 도산의 도움으로 1908년에 대성고등학교 입학하여 수학을 하였으며, 도산의 옥중생활을 “꼬마 연락병”으로 도우다가 도산이 출옥 후에 망명하실 때 수행하여 미국에 선생님과 함께 도착하였으며, 흥사단 활동을 하였다.
정남수는 어느 날 당시의 애즈베리 신학대학원장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분의 권유에 의하여 공부를 하던 가운데 성령 체험을 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졸업 후에는 일제의 군국주의에 의하여 억압을 받고 있는 백성을 복음올 해방시키고자 귀국하여 감리교와 성결교회의 부흥사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었다. 이 때에 정남수는 정막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성화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일제의 핍박으로 고문을 당하기 도하였다. 해방이 되어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John Hodge) 사령관의 통역관으로 발탁이 되었지만 3일을 근무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령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통역을 하던 가운데 그들의 내용이 중상모략이었기 때문에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절친한 친구인 이묘묵 박사에게 부탁을 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해방 이후의 한국의 혼란과 가난의 사회 속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한 정남수는 계속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미국의 캔사스에 있는 나사렛본부를 통하여 한국선교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고자 함이었다. 당시의 선교국장 와렌 존스(Warren Jones)이었으며 한국에 나사렛교회를 설립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였었다. 한국에 이미 동양선교회가 있으며 미국나사렛교회 출신 가운데 동양선교회에 소속되어 선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성결교회 2대 총회장을 감독을 지낸 헤슬톱 목사는 미국 나사렛교회의 안수목사이었으며, 후에 시카고 근교에 있는 올리벳(Olivet)나사렛대학교 학장을 지내었다. 그러나 정남수와 대화를 나누던 국제지도자들은 그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한국에 나사렛을 시가하기로 하였다. 귀국한 후에 하나님의 교회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대한기독교 성교회라는 교단 창립 예배를 1948년 10월 25일에 서울 필동 교회에서 드리었다. 4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현재의 한국연회는 1명의 총회 감독, 11개 지방, 약 300개 교회가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결론
나사렛교회는 사도행전의 성령충만과 성결된 삶을 실천한 초대교회가 역사적 뿌리이다. 그리고 이 뿌리가 루터와 칼빈을 거쳐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결실되었다고 믿는 교회이다. 웨슬리는 개인과 교회와 사회를 성결의 복음으로 갱신하고 개혁을 하여 영국 교회가 성서적 기독교로서의 능력을 회복하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과 메쏘디스트들의 사명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이 운동은 웨슬리의 평신도 설교자로 파송된 애즈베리를 통하여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가 되었지만 미국의 독립 전쟁으로 인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웨슬리의 집념과 애즈베리의 노력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에서 성결운동으로 활성화 되어갔다. 그러나 이국 감리교회가 개인과 교회와 사회의 성결적 복음의 부흥 운동이 쇠약하여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일단의 지도자들이 개교회적인 성결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들이 점진적으로 연합하는 과정을 거쳐 교단들이 형성하게 되었다. 브릿지에 의하여 출범한 나사렛교회도 그러한 경우이며 특별히 전도와 선교, 박애 사역, 그리고 기독교 교육을 중시하는 교단적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을 하고 있다. 한국의 나사렛교회는 미국 나사렛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 정남수 목사에 의하여 1948년에 시작이 되었으며 현재 약 300개의 교회들이 한국에서 본연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교단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올더스게이트와 훼터레인 집회에서 웨슬리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성령 체험을 한 것처럼, 교단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 장로님들이 성령 대강림을 통하여 온전히 거룩하여지기를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브리스톨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났던 영적 대각성 운동이 교단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를 사모하는 운동이 교단 전체의 기도 제목이 되어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게 되는 것은 나사렛교회가 교단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한국 사회의 복음주의적 사회 성결을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실업, 가정 분열, 청소년 자살 등으로 인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총체적으로 위기에 처한 오늘날 나사렛교회는 역사적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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