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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성박사논문 문둥이가 아니란 韓何雲한하운의 절규 韓何雲한하운은 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韓鍾奎한종규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 본명은 泰永태영이다. 韓何雲한하운의 학교공부를 걱정한 부친은 1926년 함흥으로 이사와 함흥보통학교에 입학 하게 된다. 韓何雲한하운은 이때에 음악과 미술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학예회 같은 데에서는 출중한 재주를 보였다고 술회했다. 부친 한종규는 獸醫畜産學수의축산학을 전공시킬 의향으로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입학하기 힘들 었던 裡里農林學校이리농림학교의 축산학과를 지원케 하였다 . 이때 함경남도에서 이 학교에 지원한 학생이 19명이 었는데, 韓何雲한하운만이 유일하게 합격하였다. 韓何雲한하운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남쪽, 이리에 유 학하여 이리농림학교의 입학식을 회상하면서 보리가 파 아랗게 우거지고 매화꽃이 피어 있는 교정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다고 했다. 그림에서만 볼 수 있었던 대나무 숲을 보고 따뜻한 남쪽의 풍광을 글로 적었다 고 했으며, 일본 말로 된 『詩論시론』과 『詩學시학』, 또는 『詩作講座시작강좌』를 보았으나, 무슨 말인지 몰라 알 만 한 곳만 공부하면서 시를 썼다고 했다. 일어 시간이나 한문 시간에는 일본인 교사가 일본의 短 歌단가와 和歌화가, 그리고 排句배구, 漢詩한시 등의 작법을 가 르쳤는데, 동양의 寂적이나 幽玄유현이 근본사상이 된다는 말에는 수긍하기 어려워 불만이었다고 했고, 바이런이 나 하이네, 릴케, 타고르의 시를 읽고 워즈워드나 베를 레느의 목가적인 서정시에 심취했으며 일본 시인으로 北原白秋북원백추와 石川啄木석천탁목의 시를 애송했다고 말하 였다. 당시 한국시에는 환멸을 느꼈으나 김소월의 시에서 느 껴지는 슬픔과 한을 떨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고 말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일체 쓰지 못하게 했고 만약 우리말을 쓰다 발각나면 시말서를 쓰게 했으 나, 도리어 반항적으로 우리말을 더 쓰고 의도적으로 우리말 잡지인 『三千里삼천리』나 『朝光조광』을 비밀로 보았 다고 했다. 인생과 자연을 정확히 관찰하려고 노력하면서 詩시 習作 습작을 했고, 이때만은 자신의 내면세계가 엄청나게 크며 사색의 시야가 한없는 비상을 했다고 술회하였다. 韓 何雲한하운의 다정다감한 정서가 한창 꽃필 때라고 짐작된 다. 학교공부는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문학작품을 읽고 「어머니」, 「뻐꾹새」 등의 소설을 써서 잡지사에 투고 하였으나, 그 결과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재미있는 일은 어느 것은 너무 길다고 반환되었다고 한다. 상급학교 에 진학하기 위하여 시험공부를 하라는 부친의 말씀에 문과에 진학하여 장래 문학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질책 을 당하고 만약 문학을 한다면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는 통고를 받고 일본에 건너가 理科이과를 선택하게 된다 . 이해가 1936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해가 된다. 韓何雲한하운에게는 이 해가 운명을 바꿔 놓는 첫 시련이었다. 그 해부터 얼굴이 붓기 시작 했고 누이동생의 친구인 여학생을 사귀게 되었다. 얼굴 이 붓기 시작한 것은 나병의 시초로 판명되었고, 여학 생과 사귐은 사랑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癩結節나결절. 육체의 陽城양성에 桃色 도색 小丘소구를 이루어 진찰한 바 나병이라는 선고에 의사 를 不信認불신인하고 다시 城大성대 世醫專세의전의 피부과를 찾았으나 성대 세의전에서 틀림 없는 나병이라는 선고 에 黃色人生황색인생과 灰色人生회색인생의 절망 속에 침잠하였 다.” 韓何雲한하운의 이 글에서 확인될 수 있듯, 그는 공부 와 문학, 모든 것을 던지고 금강산으로 입산하여 神溪 寺신계사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溫井里 온정리의 온천에 다녔다. 절간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에 諸行無常제행무상을 느끼고 극도의 허무에 빠져 공부는 해 서 어디다 쓸 것인가? 더욱이 나환자가 공부해서 무엇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러시아의 시인 에세에닝, 프랑 스의 시인 보들레에르와 독일의 헤르만 헷세의 시를 읽 었다. 어느날 애인이 금강산으로 찾아왔다. 나병과 사랑의 엄청난 거리를 축소해 낼 수 없는 고민에 빠져 구룡폭포에서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나병환자라도 좋다는 애인의 말에 나병도 완치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두 사람이 인생을 개척하자고 맹세하는 悲願비원에 얽힌 용기를 얻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간의 일본생활은 문학공부도 했고 술도 마시는 절망과 희망의 교차였다. 나병이 재차 발병하여 금강산에 다시 들어가 몇 달 동안 치료한 것이 효험이 있어 나결절이 消褪소퇴하였다. 인생의 포기와 애인에게서 도피한다는 심정으로 만주를 거쳐 북경에 간 뒤, 그래도 공부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北京大學북경대학 農學院농학원 畜産學科축산학과에 입학하였다. 1942년 「朝鮮畜産史조선축산사」를 졸업논문으로 쓰고 귀국하게 되는데, 북경에서 사귄 協和醫科大學협화의과대학의 여학생이 韓何雲한하운의 나병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생겼다. 1943년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취직되어 근무하다가 고향인 함흥에서 관리생활이 싫어 전근운동을 해서 개마고원으로 올라가 牛馬우마와 면양의 증식 사업을 하는 長津種畜場장진종축장에 근무했다. 감자와 보리로 연명하면서 8월에도 눈이 내리는 그야말로 하늘 아래 첫동네에서 문학적인 視眼시안이 없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경기도청으로 전근된 것이 1943년, 그때는 수의사로서 조선 소(牛우)를 연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용인군 양지에 있는 친일파 송병준 백작댁의 면양목장에서 양 키우는 지도를 맡게 되어 그집에 자유출입이 허용되면서 고귀한 골동품 및 서화, 한․일 합병 당시의 문서철과 고서적을 열람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연구하려고 할 때 나병이 심하게 도져 황급히 퇴직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3년 동안이나 방에 갇혀 지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궁핍과 불안은 태양빛도 못보고 치료약도 없이 지내게 만들었다. 온 몸이 짓물러 고름투성이가 되어 옷도 못 입고 실오리 같은 명맥을 이어갈 때는 금방 죽음이 눈앞에 다가서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때도 유일하게 목숨을 지탱하게 만든 것은 문학서적을 읽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일의 생명을 예측하지 못하면서 문학은 해서 뭐하느냐는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넓은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했었다. 그 까닭은 문둥병을 앓다가 그대로 죽었다는 것보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작용해서 작품과 작가를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읽어 내려갔다고 한다. 결국 무서운 병마에서 마지막 구원을 한 것이 문학이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고 북쪽에 소련군정이 실시되자 家産가산을 몰수당하게 되었다.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하여 아우와 헌 책방을 열었다. 수많은 책을 다루면서 자신은 단 한 권의 저서도 없다는 自嘆자탄과 함께 무능을 탓하면서 시와 소설의 습작에 몰두하였지만, 地主지주라는 이유 때문에 재산이 몰수되고 거리에 추방되어 생활의 안정은 꾀할 수 없었다. 그 다음 해 3월 13일 함흥학생사건이 터지고 아우와 함께 사랑하는 여인과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자, 1947년 어머니가 별세하였다. 불행은 이중삼중으로 다가왔다. 다시 반국가 음모로 체포되어 3개월 넘게 고생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보석되었다. 나병약을 구하려고 월남하였다가 다시 북으로 넘어갈 때 체포되어 함흥까지 연행당해 투옥되었으나, 이감 수송 중 원산에서 탈출하여 한 달 넘게 걸어서 서울에 왔다. 월남하여 2년간 문둥이로서 갖은 학대와 쫓김을 받으면서 문전걸식도 했고, 다리 밑에서 잠도 잤으며 굶은 배를 훑어 내리며 울기도 했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韓何雲한하운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고 말하였다. 무너져가는 육체와 정신적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쓴 시 「전라도 길」, 「별」, 「목숨」 등 13편을 『新天地신천지』 4월호에 발표하고, 그 해(1949) 5월에 正音社정음사에서 『韓何雲詩抄한하운시초』를 출간하였다. 何雲하운이란 호는 스스로 지어 부른 것으로 구름처럼 흩어져 살며 떠돌아다니는 문둥이란 뜻이 담긴 슬픈 이름이다 「何雲하운」이란 시에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두르네/산도 언덕도 나무가지도//여기과 뜬 세상 /죽음에 주인이 없어 허락이 없어/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두르는가//매양 벌려둔 저 바다인들/풍덩실 내 자무러지면//수 많은 魚族어족들의 원망에 넘칠 것 같다//썩은 육체 언저리에/내 헒과 菌균과 悲비와 哀애와 愛애를 엮어/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아, 구름이 되고파/바람이 되고파//어이 없는 창공에/섬이 되고파’란 시를 보면 그의 호가 나타내는 뜻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문전걸식하는 거지 문둥이가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이색적인 것이었다. 서점 앞에는 길이 한 자 다섯 치, 폭 여섯 치의 새빨간 바탕의 종이에 「韓何雲詩抄한하운시초」라고 희게 인쇄한 광고가 5월의 바람에 나부끼는, 봄바람 부는 거리거리에 깡통을 쥐고 다니는 나의 모습처럼 처량하기 한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韓何雲한하운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최초로 발표한 「전라도 길」은 ‘소록도를 가는 길에’란 부제가 달려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란 구절은 육신의 피로와 문둥이의 설움과 헝클어진 의식 상태를 절묘하게 표현해 주었고,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란 표현은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준다. 1950년 강원도로 황해도로 전전하던 韓何雲한하운은 富平부평에 나환자 수용촌을 건설하고 자치회장에 선출된다. 그 실마리는 韓何雲한하운의 끈질긴 집념에 의하여 풀려 나갔다. 시집을 낸 그는 당시의 명동에서는 유식한 인텔리 거지, 문둥이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인이 문전걸식을 해서 되겠는가 묻고 다른 생활을 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그때 韓何雲한하운이 기거하는 자리는 명동성당 안에 있는 방공호였다. 6개월 남짓 토굴 속에서 살면서도 서양사람 신부의 철거명령을 안 들어 좋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가 겨우 찾아간 곳이 삼각동 다리 밑, 청계천의 썩은 물과 몸둥이를 썩게 만드는 나병이 함께 共存공존하는 때였다. 그 뒤에 다시 옮긴 곳이 인현동, 인현공원 안의 풀장이었다. 일제 때 지은 풀장에는 탈의실과 물품 보관 창고 등이 있어서 살 만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때 韓何雲한하운은 나환자 사회에도 많이 알려져 서울과 수원에 사는 환자들이 찾아와 함께 살기를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국가적인 救癩事業구나사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韓何雲한하운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환자들 자신은 자발적으로 癩撲滅나박멸에 일어섰는데 官관과 民민은 일체 무관심했다고 말하면서 동서고금의 유토피아 문학과 논설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수원의 나환자 집단부락도 지방민들이 작당하여 환자를 축출하기 위한 폭력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고민하던 중, 경기도․강원도 일대에 있는 나환자를 부평의 공동묘지 골짜기에 모아 나요양소 기지를 만들겠다는 당국의 안에 찬성하고 부평으로 옮겨가기를 환자들에게 설득했으나, 뜻대로 안되어 70명만 이끌고 1949년 12월 30일 밤 8시에 부평으로 가게 되었다. 이미 부평에 와 있던 나환자들과 새로 입주하는 환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려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본 韓何雲한하운은 크게 느낀 바 있다고 술회했고, 경찰 30여 명의 출동으로 싸움은 겨우 가라앉았으나 뒷처리 할 문제는 산처럼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 6백여 명이 모여들어 자리가 잡히게 되자 韓何雲한하운은 자치위원장에 뽑혀 그 집단 부락을 成蹊院성계원이라 이름 붙였는데 挑李之下도이지하 自成蹊자성혜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했다. 이때부터 韓何雲한하운과 나와의 交遊교유는 시작되었다. 언제나 푸석한 얼굴, 푸르딩딩한 피부색으로 손가락이 구부러져 펴지지 않았고 발가락이 몇 개 안 남아 걸음을 잘 걷지 못했다. 그는 성계원에서 닭도 치고 양돈을 해서 먹을 거리를 해결하고 나환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하여 부지런히 관계요로를 찾아 다녔다. 갓 월남한 다음 분기탱천해서 美軍政미군정의 담당자를 면회하려고 할 때, 거지라고 쫒겨나면서도 대학에서 배운 영어 실력을 동원해 나환자들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구호를 요청했던 일, 그리고 그게 빌미가 되어 효자동에 있던 순화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일을 되뇌이고 쓴 웃음을 지으면서 문둥이가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사회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6백 명, 7백 명으로 불어나는 성계원 식구들 때문에 밤낮으로 고민하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는 1951년 영등포에 未感兒미감아 보육기관으로 新明保育園신명보육원을 창설하고 원장에 취임하면서 그가 어려서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예술교육을 펼쳐나갈 결심으로 나환자 예술원도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허가를 얻어 영등포구 대방동에 2만 평의 땅을 얻어 그야말로 광채나는 나환자의 예술활동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 보자는 비장한 각오를 갖기도 하였다. 정부가 부산에 있을 때, 「新聞신문의 新聞신문」이란 주간신문에서 독자의 흥미를 사로잡기 위하여 쓴 「문둥이 시인 韓何雲한하운 정체」란 기사(1953. 8. 1)에 그의 시집 「韓何雲詩抄한하운시초」가 실제 문둥이 韓何雲한하운이 쓴 것이 아니며 韓何雲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이라고 쓰자, 당시 平和新聞평화신문, 太陽新聞태양신문 등이 이에 동조하여 무자비한 보도를 하였다. 심지어 그의 아호인 何雲하운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고, 시의 내용이 모두 적색시라고 날조하였다. 그 뒤 몇몇 일간지들이 저널리즘의 근성을 발휘해서 찬반의 시각으로 떠들어댔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 14일에 잉태되었다. 韓何雲한하운은 당 서 울신문의 吳蘇白오소백 부 장을 찾아가서 즉석에서 「보리 피리」란 시를 써 보였다. 韓何雲한 하운은 실존인물이 아니고 문 화 빨치산이며 그가 쓴 시가 모두 불온하다는 허위 기사로 유명(?) 해져 있었기 때문에 오소백 씨도 흥미에 끌려 당시 사회부 차장이었던 文濟安문제안 기자에게 취재토록 일렀던 것이다. 오소백 부장의 펜대로 직접 시를 쓴 韓何雲한하운을 본 많은 기자 들이 그 펜대에 나병균이 묻 어 있을 거라는 말 때문에 그 펜대를 원고지에 말아 휴지통에 내던 졌다고 술회한 대목은 너무 도 생생하기만 하다. 오소백의 글을 보면 ‘何雲하운 서울에 오다. 레프라 王者왕자, 환자 수용 을 지휘’란 제목을 붙였다. 기사 내용의 요지는 이러했다. ① 4만 5천 명의 문둥병 환자를 지도하는 何雲하운이 나타나서 서 울시 위생과의 협조로 거리 에서 방황하는 문둥이를 수용 중에 있다. ② 何雲하운은 국립 부평 成蹊院성계원(문둥이 수용 소) 자치회 회장이며 신명보육원의 원장이다. ③ 何雲하운은 실존 인물이다. 기사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何雲 詩하운시 「보리 피리」를 2단으로 넣고 또 그 의 싸인을 동판에 떠서 삽입했 다. 뿐만 아니라 何雲하운의 사진을 찍어 1단으로 실었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꽃靑山청산 어린 때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人寰인환의 거리 人間事인간사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幾山河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닐리리. - 「보리 피리」 全文전문 이 詩시는 何雲하운이 편집국에서 쓴 것인데 원고대로 신문에실 었다. 인용문이 길지만 이 대목을 몰라서는 韓何雲사건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다 실었다 이 기사가 나가자, 韓何雲한하운의 「보리 피리」란 시도 이상하고 실제 인물이 아니란 공격이일었고,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터졌다. 白斗鎭백두진 씨가 국무총리 시절, 각부 장관이 참석하여 국정 전반에 대한 질의를 할 때 최모 의원이 ‘공산주의 전쟁과민주주 의 전쟁은 그 방식부터 다르다. …(중략)… 대한민국 문화전선에 이상이 있다. ’란 발언으로 韓何雲한하운을 매도했고, 각 신문들 은 다투어 대서특필했다. 더불어 韓何雲한하운은 치안국 특수정 보과를 비롯하여 문교부, 보건사회부, 검찰청,경찰서로 불려 다니 며 조사를 받았고 서울 대방동에 있던 나환자 예술원도 폐쇄되었 다. 다시 오소백의 말을 들으면, K라는 <신문 평론지>의 기자가 何雲하운 사건에 관한 것으로 몇 가지 묻고 싶다는 것이다. 올 챙이 기자는 주저치 않고 무엇이든지 물어 달라고 했다. 더구나 신문평론지라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말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의 질문 요지는… S신문에서는 신문이 나오기 전에 몇몇 중역 이나 사장에 이르기까지 臺狀대상을 본다는데 이번 何雲하운의 시와 기사가 실린 날만은 대장을 안 보였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청천하늘에 벽력이었다. 올챙이 기자는 이 질문을 받 고 대뜸 모종의 복선이 있음을 알았다. 이와 같은 말은 韓何雲 사건이 단순한 것이 아닌 매우 복잡하게 얽혀 돌아간다는 것을 예고한다. 당시 S신문의 사장은 소설가 朴鐘和박종화 씨였다. 오소백 부장은 韓何雲한하운이 쓴 「보리 피리」까지사장이었던 박종화가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何雲하운의 「보리피리」詩 가 운데 ‘人寰인환의 거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놈의 寰환자가 寰 너무 어려워 교정부장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한문이나 문장이 있을 때마다 나는 사장이며 文總문총의 간부인 P사장에게 의논하곤 했다. 그래 人寰인환이란 말이 있느냐고 물 었더니 P사장도 처음 보는 한문자라고 하며 중국 상해에서 발행 된 유력한 사전을 꺼내 찾기 시작했다. 대장 뜨기 전에 사장실에서 나한테 전화가 왔다. 내려가 보니 그 것은 寰환자라고 대주며 일장의 해설까지 했다. 일본말로는 ‘치마다’라는 뜻이고, 우리말로는 ‘잡다한 市井시정’ 이나 또는 ‘땅덩어리’라는 뜻도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을 새겨 보면 K기자와 P사장 중 누군가는 한 사람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회에서 韓何雲의 문제가 터진 다 음날 오소백 씨는 시인 朴巨影박거영과 함께 성계원을 찾아 갔 다고했다. 韓何雲이 살던 집 앞에는 미루나무가 서 있었고 방 안에는 영문 잡지와 문학서적이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뒷날 韓何雲한하운이 실존인물이고 그가 쓴 시도 사실이며 문화 빨치산이 아니란 것이 밝혀졌지만, 오소백 씨는 서울신문에서 단순히 ‘혼란을 일으켰다’는 죄명으로 문제안 차장과 함께 파면을 당했다. 이 사건을 겪고난 뒤 韓何雲한하운은 어처구니 없어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고, 이 사건에 분발하여 두 달 동안에 『보리 피리』란 시집을 박거영 시인이 경영하던 人間社인간사에서 출간하였다. 또한 『희망』지에 「나의 슬픈 반생기」를 연재하였다. 이 원고를 다시 손보아 1955년 역시 인간사에서 같은 제목 『나의 슬픈 반생기』로 책을 엮어 냈다. 1960년에 일생을 괴롭히던 나병이 이제는 음성이란 진단을 받고 사회에 복귀하여 韓美製藥會社한미제약회사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그해 7월에 명동에 無何文化社무하문화사란 출판사를 설립했고 자작시 해설서 『황토길』을 신흥문화사에서 출간했다. 1962년에 『나의 슬픈 반생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황토길」을 미국공보원에서 제작했고 안성에 농장을 설립했다. 그해 서울신문회관에서 최초로 시화전을 가졌으며 『시화집』을 출간했다. 이때가 韓何雲한하운에게는 가장 활발한 활동시기였고 그토록 대접 받기를 바라던 사회에서 대접을 받던 시기였다. 더부룩한 머리칼, 그리고 언제나 부은 것 같은 눈꺼풀을 지닌 모습으로 거의 날마다 나타나 그는 중국요리에 배갈을 마셨고, 문학이야기, 나환자촌 자활문제, 유토피아, 그리고 냉대와 학대를 이겨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의논을 했다. 성계원에서 시를 쓰던 尹芝影윤지영이란 사람을 소개해서 내가 발행하던 『詩시와 詩論시론』에 동참시키기도 했고, 발간비가 모자라면 그 일부를 선뜻 대주기도 하던 韓何雲한하운의 인상을 잊을 수 없다. 성계원에서 키우는 돼지나 닭을 개량하고저 가축개량사업을 위하여 京仁種畜場경인종축장을 세운 것은 그가 축산학을 전공한 수의사였기에 가능하였으며 월간 『새빛』에 연재한 「世界癩文學小史세계나문학소사」는 이 방면에서 아주 희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67년 이 무렵부터 간경화증이 나타나서 술도 못 마시고 우울하게 한 쪽에 앉아 있는 모습은 보기에 딱하기도 했다. 1971년에 카톨릭사회복지협회를 결성할 때, 명동성당 방공호에서 지낼 때, 서양사람 신부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때를 회상하면서 싱긋 웃으며 ‘이제는 그 신부들도 밉지 않다.’고 하던 말의 여운이 귓가에 남아 있다. 1973년에 韓何雲한하운 시비가 소록도에 세워지고 그 시비에 「보리 피리」가 새겨졌다. 1976년 2월 28일 오전 10시, 그는 한 많은 일생을 인천시 십정동에서 마치고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계양산에 묻혔다. 이 세상에 살아 있기 57년, 말 못할 처지와 입장에서도 문둥이를 위하여 힘을 쏟던 그, 그리고 시를 위하여 밤잠을 설치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 뼈저린 회한에 잠겨 아픔을 씹던 그가 가슴을 치며 이 세상을 떠나 땅속에 묻혔어도 그가 풍기던 사람다운 바램, 그가 남긴 시는 오늘에도 그와 가깝게 지냈던 많은 사람과 그의 독자들의 가슴에 살아 남아 있다. 韓何雲한하운의 전기적 소설 뒤에 붙일 글을 써달라는 평론가 김선의 여러 번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일생을 훑어 보는 까닭은 내 나름대로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韓何雲한하운의 전기적 소설은 오히려 그의 일생을 골고루 담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서다. 소설은 본래의 기능대로 재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사건이나 자취만을 취급하다 보면 얘기가 길어지고 꾸밈이 있어야 한다. 길어진 얘기에 다른 얘기를 덧붙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꾸며진 얘기에서는 진실한 자취를 더듬어 보기가 어렵다. 이런 까닭으로 그의 전기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였다. 韓何雲한하운과 나와는 1950년대에 만나서 나의 초기 문학수업에도 큰 물줄기를 이루게 했거니와 『詩시와 詩論시론』 창간 당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중국집에서 탁자를 마주하고 술을 마실 때도 그는 언제나 자신이 쓸 작은 접시를 따로 달래서 안주를 덜어 먹었다. 그리고는 술을 권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중국에서의 삶이 중국 사람들의 술 마시는 방법을 익혔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이 문둥이란 것을 깨닫고 남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명동에서 거지 노릇을 할 때 구걸하러 간 집에서 돈을 주지 않으면 어떤 때는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고 가끔 말했다. 그때는 문둥이란 天刑천형의 벌이 왜 나에게만 내렸는가, 엄청난 회의 때문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란 설명도 곁들였고 성한 사람들이 문둥이를 사람 취급 않는데 대한 앙심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푸석한 눈두덩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걸 여러 번 보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힘센 짐승이 포효하는 그런 우렁찬 울음을 가슴 속으로 집어 넣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가슴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목줄기를 타고 넘어 올 때 그의 울음은 꼭 사자나 호랑이의 울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서는 사람 대접 못받는 문둥이가 참으로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사람으로 다가온 韓何雲한하운, 나에게 인생과 사랑,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방법,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방법, 세상을 깔보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골려 주는 방법 따위를 터득하게 만들어 주었다. 김선이 쓴 소설을 읽다 보면 韓何雲한하운의 진한 인간애와 사랑이 배어 나오는 부분이 있다. 그런 경우는 저자의 픽션도 있지만 거의는 韓何雲한하운 본인에게 서 느꼈던 나의 생각과 말이 텃밭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韓何雲한하운 만큼 진솔 하게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남이 베푸는 은혜에 대하여 오래도록 감복하고 기억 하면서 어디서나 그 사실을 광고했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나이 적은 사람에게서 힘을 입었 어도 반드시 경어로 존대해 말하고 고마워했다. 물론 스스로 문둥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비 하하는 습성도 없는 바 아니 었지만, 생명에 대한 존경이나 인간적 삶을 살아가려는 그의 의지 는 금강석보다 더 단단했다. 김선의 글을 읽으면서 韓何雲이 내 앞에 다시 태어나 싱긋웃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 힌 것은 김선의 글솜씨도 글솜씨이지만 韓何雲한하운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그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우했던 시인 韓何雲의 일 생이 소설 속에서나마 살아남아 뒷사람들에게 읽힌다면 메마른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가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어//푸른 하늘/푸른 들/날아 다니며 //푸른 도랑 푸른 울음/울어 예우리//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란 시에 나타나 있듯 그는 지상의 속박 즉, 현실의 고통을 초월해서 깨끗한 육신, 희망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고통이 담겨 있는 흠집과 상처를 말끔하게 지워 버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뜻이 담겨진 이 시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그가 꿈꾸던 ‘無何共和國무하공화국’은 문둥병자들의 완전한 유토 피아였다. 그래서 그는 이런 제목으로 글을 썼고 무하공화국에서는 劣敗者열패자로서 이 세상 의 뒤안길을 걸어가면서 서러운 심정을 부둥켜 안고 자연을 벗 삼 아 떠가는 구름에, 피는 꽃에, 덧없이 부는 바람에 푸른 울음을 눈 물로 삼키며 우는 사람들이 사 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文人村문인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도시의 거친 현실과 불안에서 여유를 갖지 못한 문인들이 浩然호연과 悠遠유원한 자연을 멀리하는 바람에 장돌뱅 이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문인 본래의 사명을 찾아 글쓰고, 악폐를 지양하는 전원생활을 모태로 한 문인촌을 만든다는 게 꿈이었다. 그가 남긴 詩시 「癩婚有限나혼유한」은 이러한 그의 이상과 꿈이 얽혀 만들어진 것으로 문둥이끼리 혼인하는 것을 보고 쓴 시였다. ‘어쩌면 울고 싶은 울고 싶은/하늘이 마련한 뼈아픈 慶事경사냐//신부는/오늘만이라 도 성냥개비로 눈썹을 그리고/人造面紗布인조면사포에 웨딩마치는 들리지 않으나 … (중략) … 오, 문둥이의 결혼이여’라 는 이 시를 읽으면서 목이 메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韓何雲한하운은 이렇게 사람을 사랑했고, 문둥이를 사랑했다. 그의 시는 프랑스에 가 공부하던 韓敬子한경자에 의하여 佛譯불역되고 화 가 존 크리스또호루의 삽화로 『자벌레의 밤』이란 제목을 달고 출판 되기도 했다. 표지 그림은 검정 물감만으로 흩뿌려 놓은 듯, 아니 면 단번에 일휘지한 사람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하지만, 자세 히 보면 韓何雲의 일그러진 얼굴 같기도 한 그림으로 장정되어 있 다. 그는 문둥이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문둥이가 아니란 생각을 가 지고 이 세상을 살았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씹고 더 씹어도 알 수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 애써도 될 수 없어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전문 이 시와 같이 韓何雲한하운은 지금도 땅속에서 문둥이가 아니라 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그 는 문둥이가 아니어야만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등단 원고 / 홍건자
이제야 보인다 홍건자
봄이 온다는 것은 동장군이 물러가는 것인 줄만 알았다
봄이 온다는 것은 새싹이 쑥쑥 자라는 것인 줄만 알았다
봄에는 꽃피고 우듬지 죽죽 크는 것인 줄만 알았다
이 작은 눈에도 시의 뿌리가 보이고 이 마음속에도 시상의 촉이 있음을 보았다
내 가슴속에도 봄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보았다. ,,,,,,,,,,,,,,,,,,,,,,,,,,,,,,,,,,,,,,,,,,,
끈
샛노란 은행잎 결별 의식하고 있다
공손히 합장하고 겸손히 참회 기도한다
무거운 짐 오랜 세월 때 묻은 마음 녹이 슬는다
고향 말뚝 엉킨 끈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며 손 모아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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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첫날밤 함박눈이 내린다
소복소복 밤새 그대 가슴 내 가슴에 사랑이 차곡차곡 쌓인다
열십자 음각 꽃무늬
누구에게 보낼 수 있지만
혼자 간직하고 싶다
시련 다 덮는 오직한 사랑 껴안아 녹여 태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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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삭둑삭둑 가르고 저리고 씻고 수 없는 손 맛 어머님 용안 선하다
갈기 꺾여 처진 몸 겹겹이 쌓인 풍진 어머님은 눈물인가보다
지질히 겪은 바람 삭을 대로 삭아야 어머님 솜씨 닮을 것이다
순진하라 겸손 하라 소태보다 더 쓴 소리 엄마 솜씨 닮고파 줄곧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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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매섭던 겨울 밀어내고 불룩불룩 기를 쓴다
간밤의 맹 풍우 벌떡 일어나 창변을 서성인다
동백 몽우리 추위를 걷어차고 툭툭 터져 나온다
내 가슴에 피어나는 봉오리 세한은 바람으로 다가와 깊은 단잠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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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달빛 무대 아래 발레 춤추는 S 라인 너는 선망의 대상이다
날씬한 몸매 근심 걱정 붙을 곳 없는 행운만 가득 차 심히 부럽다
이 내 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구름 거칠 날이 없단다
너와 놀면 세상만사 다 잊고 발레 천사 될 수 있을까 너의 행복 나도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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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훈련 없이 가는 길이다
세상이란 배움터 우매한 학생으로 길을 간다
같은 날은 한 번도 없고 같은 밤 입맞춤도 없다
장미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힘겨운 나날들 존재하는 땅 삶은 뿌리 심어가는 일이다
미움도 증오도 운명의 짐 이고 가는 길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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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첫사랑이 생각난다
이룰 수 없어 연이래 골방에서 눈물 흘렸다
은하수 사이 깊은 강을 건널 수 없어 울음 울던 첫사랑 각인 되 지워지지 않는다
쓰리도록 아픔 사랑 한스러웠던 미리내 첫사랑의 다리는 애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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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깎아놓은 천년바위 모진고통 다져진 자태 고고함이 버젓하다
불암산 임의 품속 바람화음 새들의 합창 너른 무대 싱그럽다
수락 도봉 삼각산 명산 조심조심 감싸고 뻐꾸기 까투리 정겨운 인사 메아리 산을 울린다
드높은 웅지의 품 명산지덕의 평화와 안정 천년 바위 불암산 그 발원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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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바람
꽃잎 날려 뭔가 했더니 봄바람이 가고 있다
창밖에 꽃잎 날려 뭔가 했더니 꽃잎이 다가온다
몰려온 그리움 와락 끌어안았더니 눈물이 핑 솟구친다
세월 안고 그리운 눈물 흘렸더니 에계 빛났던 사랑 아침 바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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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추억
내리막 길에서 정강이 낭자해도 낯선 길 페달을 밟는다
읍내 길 하이킹 아버지께 들켜 줄행랑 치고 동네 오빠와 동문다리*에서 짜장면 네기 경주를 했다
그 오빠랑 먹던 짜장면 손가락 빨아 먹던 그 맛 잊을 수 없다
철없던 자전거 익어가는 길목 오빠 아빠 브레이크는 듣지 않았다
*동문다리 - 옛 고향 마을 앞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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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月光)의 꿈
불 꺼진 칠흑 문풍지 울음 따라 월광은 침상을 엿듣는다
내 그리움 치마폭에 싸이고 안길 때 그 때는 분명 아들 이였다
잉태 초월한지 오래 먼 길 찾아온 미소 마음속 싸늘한 그림자 그 때는 모닥불 이었다
안으리라 둥근달이 찌그러지도록 첫 닭이 울기 전에 껴안고 꿈에 젖고 싶다. |
첫댓글 여주현회장님 고맙습니다.
성박사님이 쓰신
<한하운시인의 절규> 잘 읽었습니다.
이런 좋은 글을 발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는 일 또한 한하운 문학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