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미국의 저명한 야구기자 레너드 코페트의 말이다. 한편의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선수, 코칭스태프는 ‘그라운드’라는 무대 위에서 혼신의 땀을 흘린다. 그리고 팬들은 그 땀을 지켜보며 ‘야구’라는 예술에 열광한다.
하지만, 그라운드 뒤에서 조연을 자처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야구는 예술이 아니라 그저 ‘흔하디흔한 공놀이’로 남았을지 모른다.
<프로야구를 만드는 사람들(프만사)> 시리즈는 지금껏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조연들의 이야기다.
프로야구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 관계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프로야구의 숨겨진 세계를 집중 조명해보자는 게 기획 의도다. 두 번째 시간은 '5년의 그림을 그리는 베테랑 스카우트'의 이야기다.
LG 김현홍 스카우트 팀장(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92년 10월. 서울 연고지팀 OB(두산의 전신)와 LG는 고려대 투수 이상훈 지명권을 놓고 한판 전쟁을 벌였다. 창과 칼이 동원된 전쟁이라면 전략, 전술이 난무했을 테지만, 이 전쟁의 향방은 주사위가 쥐고 있었다.
양 구단의 지명 신인이 동일할 경우 2개의 주사위를 3번 던져 그 합계로 신인지명 우선권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LG 유지홍 스카우트는 ‘주사위 특훈’을 하며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OB는 달랐다. 구단 직원 대부분이 주사위 던지는 걸 꺼리는 분위기였다. 만에 하나 주사위를 잘못 던져 이상훈을 놓쳤을 경우 그 파장이 엄청나리라 예상한 까닭이다. 그때 김현홍 스카우트가 손을 들었다.
“그거 뭐 어려워. 아무나 하면 되지.”
호기롭게 주사위 주자가 된 김현홍은 다수의 언론과 야구계 관계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유 스카우트와 주사위 전쟁을 펼쳤다. 1라운드 승부에선 김현홍의 압승이었다.
그가 던진 주사위의 합은 ‘10’이었고, LG는 ‘8’이었다. 그러나 2라운드부터 일이 꼬였다. 김현홍의 2라운드 주사위 합은 ‘2’였던데 반해 LG는 ‘5’가 나왔다. 운명의 3라운드.
김현홍이 던진 2개의 주사위 합은 ‘6’이었다. 만약 LG의 3라운드 주사위가 ‘3’ 이상을 가리킨다면 이상훈의 유니폼 색깔은 핀 스트라이프(줄무늬)가 될 게 자명했다. LG가 던진 주사위의 합은 ‘8’이었다. 21대 16으로 LG 승.
주사위 전쟁에서 승리한 LG는 대졸 좌완 최대어인 이상훈을 품에 안았다. 이상훈 쟁탈전에서 패한 두산은 아쉬움을 곱씹으며 대학 최고타자 추성건을 지목했다. 두 선수의 운명은 많은 야구팬이 기억하듯 주사위 싸움에서처럼 LG 이상훈의 압승으로 끝났다.
김현홍은 주사위 싸움에서 패한 뒤 원래 보직이던 연봉 고과점수 기록원으로 돌아갔다. 그에겐 이때가 생의 가장 아픈 기억이자 차후 스카우트로 활동할 때 가장 큰 교훈으로 작용한 시간이었다.
항간엔 주사위 싸움에서 패한 뒤 스카우트직에서 물러난 거로 알려졌습니다.
그건 아니었어요. 원래 내가 하던 일이 더그아웃에 앉아 선수들 기록들을 적고,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연봉 고과점수를 계산하는 일이었어요. 스카우트는 주사위 싸움할 때 그해 잠깐 한 거고. 주사위 싸움 끝나기 전부터 원래 보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어요.
1982년 OB 베어스로 투수로 입단해 1986년부터 OB 연봉 고과점수 기록원으로 일하신 거로 압니다. 당시 연봉 고과점수 기록원은 지금과 큰 차이가 있었을 듯싶은데요.
야구선수 출신이라도 정식 기록원으로 일하지 않으면 기록만 볼 줄 알지, 막상 경기 때 적으라고 하면 빨리 못 적어요. 그래 은퇴하고서 고과점수 평가하는 일을 맡아 하라고 해서 한 달 정도 기록 적는 법만 배웠어요. 특히나 연봉고과 기록은 일반 기록원들이 적는 스코어북과는 달라 이거 ‘영’ 배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어떻게 달랐습니까.
일반 기록은 실책이면 실책, 안타면 안타 이렇게 최종 결과만 적잖아요. 그런데 연봉고과는 안타라도 ‘보이지 않는 실책’인지 아닌지를 따진다고. 반대로 실책이라도 불규칙 바운드에 의한 안타성 실책이 있으니까 그걸 감안해 적지. 경기마다 선수별 고과점수를 매기는데 1점당 10만 원인가 그랬을 거예요.
가뜩이나 연봉이 낮았을 때라, 선수들이 고과점수에 굉장히 민감했을 듯싶습니다.
당연하죠. 연봉 협상 때면 선수들이 수첩이나 노트를 가져와. 보면 경기마다 자기가 작성한 기록이랑 자기가 알아서 계산한 고과점수가 빼곡하게 적혀 있어요(웃음). 그럼 연봉 협상 때 선수가 하루하루 기록이랑 고과점수를 구단이 작성한 거랑 다 맞춰본다고. 연봉 협상 때 단장, 사장님이 들어오시는데 선수들이 그래. “사장님. 0월 0일에 ‘런 앤드 히트’ 성공했는데요. 여기엔 빠졌네요?” 그럼 단장, 사장님이 내가 고과점수 기록원이니까 나한테 물어봐. “애 말이 맞느냐”고.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렸다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드렸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지금도 생각나는 게.
네.
OB 때 테이블 세터가 김광수(현 한화 수석코치), 김광림(현 NC 타격코치)이었다고. 김광수가 1, 2루에 있으면 김광림이 배트로 신발을 턴다든가, 어깻죽지로 배트를 닦곤 했다고.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시즌 끝나고 고과점수를 맞추는데 둘 다 그러는 거야. “이날 런 앤드 히트 성공했는데 왜 점수에서 빠졌냐”고. 내가 “무슨 소리야? 이날 기록 봐라. 무슨 사인이 나왔다는 소리냐”했다고. 그런데 둘은 무조건 했다는 거야. 고과점수 기록원은 3루 주루코치 사인을 다 보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인 나온 적이 없단 말이지. 알고 보니까 배트로 신발을 턴다든가, 어깻죽지로 배트를 닦는 행동이 둘만의 사인이었던 거예요(웃음).
아이고.
그래 내가 그랬지. “아니 그런 게 있으면 나한테 얘길 해줬어야지, 둘만 아는 사인을 내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소리냐. 난 인정 못 한다.” 다음 시즌부턴 다 반영해줬지만(웃음).
‘두산의 작은 친구들’이 불러온 야구계의 변화
과거 두산과 경찰청의 2군 경기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현홍은 선린상고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고교 졸업 후 공군-한국전력-아마 롯데를 거쳐 1982년 OB 베어스 창단 멤버로 뛰다가 1984년 은퇴했다. 프로 통산 성적은 2승 1패 1세이브 평균자책 3.70. 눈이 번쩍일 만큼의 화려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는 OB의 원년 한국시리즈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리고 은퇴 후엔 1986년부터 OB 프런트로 일하며 ‘베어스 선수 출신으론 처음으로 프런트 직원’이 됐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꽤 오랫동안 OB 고과점수 기록원으로 근무하셨습니다. 그러다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셨던 거로 아는데요.
그랬죠. 1997년에 IMF 광풍이 몰아쳤잖아요. 그 통에 팀장급 직원 가운데 한 두 명 빼고 다 회사를 떠나야 했어요.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베어스 나오고 미국에서 한 4년 정도 살았죠.
어떻게 다시 베어스로 돌아오시게 된 겁니까.
1998년까지 베어스 사장하시던 경창호 사장님이 2003년인가 두산 리조트 사장과 베어스 사장을 겸직하게 되셨어요. 베어스 돌아오셔서 “김현홍 어딨어?” 찾으셨나 봐요. 미국에 있다고 하니까 연락이 오셨어요. “어이, 김현홍. 미국에서 팔자 좋게 뭐해. 어여 돌아와.” 그래 군말 없이 다시 돌아왔죠.
2003년 베어스로 돌아오셔선 스카우트 업무를 맡으셨습니다.
맞아요. 경 사장께서 스카우트를 해보라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이러시더라고요. “이봐, 김현홍. 지금 당장 좋은 선수 뽑을 생각 하지 말고, 늘 5년을 내다보고 뽑아. 그리고 당장 1군에 써먹겠다고 대졸 선수만 찾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고졸 유망주들을 눈여겨봐. 나야 사장 잘리면 끝이지만, 당신과 팀은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 아니야. 알았지?”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보스를 만났었구나’ 싶어요.
프로선수로, 고과점수 기록원으로 꽤 오랫동안 많은 선수를 보셨습니다. 하지만, 스카우트는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가 아닌 ‘그라운드에서 뛸 선수’를 보는 게 주업무인데요. 아무래도 후자 경험은 부족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누가 아니래(웃음). 스카우트가 되자마자 짐 싸들고 2군으로 내려갔어요. 일주일 동안 2군 경기만 죽어라 봤다고. 계속 보니까 ‘향후 베어스에 어떤 선수가 필요한지’ 감이 오더라고.
잠시 전, 경 사장을 언급하시면서 ‘참 좋은 보스를 만났다’고 하셨는데요. 사실 프로야구계에서 스카우트가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려면 ‘참 좋은 보스’만큼이나 ‘참 좋은 감독’을 만나야 합니다. 시시콜콜 신인지명에 간섭하거나 당장의 즉시전력감에만 관심있는 감독은 그 팀의 미래를 망치는 주범이 되기도 하니까요.
전 그런 의미에서 운이 좋은 스카우트예요. 2003시즌 끝나고 두산 감독이 바뀌었어요. 누구냐? 지금 NC 사령탑인 김경문 감독이에요. 김 감독과는 같은 OB 원년 멤버인데다 선수 땐 룸메이트이기도 했어요. 누구보다 김 감독 성향을 잘 알았지.
김 감독이 두산 사령탑에 선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요?
그랬죠. 아마 그즈음 양상문 지금 LG 감독이 롯데 감독으로 내정됐을 거예요. 당시 김경문 감독이 두산 배터리 코치였는데 양 감독이 김 감독한테 “수석코치를 맡아달라”고 했을 거예요. 둘이 고려대 시절 선·후배로 가까웠거든. 그런데 그때 두산에서 새 사령탑으로 김 감독을 선임하면서 김 감독이 롯데에 가는 대신 베어스에 남게 됐어요. 두산한테도 잘 된 일, 나한테도 잘 된 일이 됐지.
어떤 점에서 ‘잘된 일’이라고 평가하시는 겁니다.
두산 사령탑이 되고서 김 감독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어떻게요?
“형, 나 구단과 3년 계약했어. 3년 동안 나만의 야구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난 두산에서 10년 이상 감독할 생각도 없고, 윗사람들한테 잘 보여서 감독 연장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잘릴 때 잘리더라도 나만의 야구를 펼치다 잘리고 싶어요. 그래야 잘려도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까.”
아.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디다. 지금도 그 말이 안 잊혀요.
어떤….
“형, 힘있는 애들은 힘있는 애들대로 뽑되 잠실구장이 크니까 가능한 발 빠르고 수비 잘하는 애들로 뽑아줘요. 타격은 내가 어떻게 만들 테니까”
두산 ‘발야구’가 그렇게 시작된 거군요.
맞아요. 두산 팀 색깔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전만 해도 두산엔 중장거리 타자가 많았다고. 대신 발 빠르고 수비 잘하는 선수는 적었고. 김 감독이 두산에서 한 5년간 배터리 코치하면서 그게 늘 답답했던 모양이에요.
두산 사령탑이던 현 NC 김경문 감독(사진=두산)
경 사장과 김 감독의 생각이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요. 두 분의 의견을 바탕으로 스카우트로서 첫 번째로 뽑은 선수가 누구였습니까.
200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은 중앙고 유격수 김재호였어요.
김재호의 어떤 면이 눈에 들어왔던 겁니까.
스카우트 사이에서 방망이 치는 건 솔직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발이 무척 빠르고, 수비범위도 넓고, 무엇보다 어깨가 좋더라고. ‘프로와서 2, 3년간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하면 힘도 붙고, 타격도 좋아지리라’ 예상했어요. 그래 과감하게 1차 지명으로 뽑았죠.
김재호와 또 한 명의 걸출한 유격수에게 두산 유니폼을 입히시기도 했는데요.
아, 손시헌(웃음). 솔직히 시헌이는 동의대에서 뛸 땐 자주 못 봤어요. 아시다시피 시헌이는 두산에 신고선수로 들어왔어요. 우리가 뽑았다기보다 우릴 찾아온 선수였죠.
손시헌 덕분에 3년 뒤 이종욱도 신고선수로 잡을 수 있었는데요.
(이)종욱이는 원래 현대 선수였어요. 그런데 상무에서 제대하자마자 현대로 돌아갔다가 바로 잘렸어요. ‘선수 TO가 넘친다’는 게 이유였을 거예요. 하루는 시헌이가 날 보더니 “발 빠르고, 수비 좋은 선수가 있습니다”하는 거예요. 일단 “알았어”했죠. 그리고서 김광수 수석코치한테 “이종욱 잘 아느냐”고 물어봤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알고 있더라고. 김 수석이 1년가량 야인으로 쉰 적이 있어요. 그때 선린인터넷고에서 인스트럭터를 했나봐요. 거기서 종욱이를 지도한 모양이야. “형, 걔 발이 죽여” 하더라고. 그래 시헌이한테 그랬지. “무조건 데려와라.” 그래서 데려온 선수가 이종욱이라고. 걔나 두산이나 서로 운대가 잘 맞았던 거지(웃음).
2003년 이후로 두산 팀 색깔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덩치 크고 한방 있는 선수들보단 발 빠르고, 수비 좋고, 어깨 강한 선수들이 그 변화를 주도했는데요.
두산의 작은 친구들이 정신없이 그라운드를 누비고 다니니까 상대 팀에서 깜짝 놀랐지. 전 두산 때문에 프로야구 스카우트의 관(觀)이 변화했다고 생각해요. 그전만 해도 스카우트의 기준은 체격 좋고, 방망이 잘 치는 애들이었다고. 수비나 주루는 그다음이었고. 그런 흐름을 ‘잘 뛰고, 수비 잘하고, 어깨 좋은’ 3박자를 갖춘 두산의 작은 친구들이 바꿔놓은 거예요.
특히나 LG전에서 ‘작은 친구들’의 효과가 컸던 듯싶습니다.
(고갤 끄덕이며) 그럼 그럼. 2000년대 중반부터 LG랑 잠실에서 붙으면 주자 2루일 때 외야 짧은 안타만 나와도 곧바로 득점으로 연결했으니까. 왜냐? 두산 선수들 발이 그만큼 빠른 반면 LG 외야진 어깨는 그리 강하지 못했거든. 정말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두산 ‘발야구’가 통하기 시작하면서 이용규, 정근우(이상 한화)처럼 발 빠른 선수들이 덩달아 각광을 받는 시대가 도래했어요.
신고선수와 지명선수 첫해 연봉이 같았던 두산
두산 주축선수로 성장한 김현수와 오재원(사진=두산)
기자는 기자생활을 처음 했을 때부터 김현홍 스카우트를 ‘부장님’이라고 불렀다. 두산 스카우트 팀장 시절 김 스카우트의 직급이 부장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야구인’이라는 느낌보단 대기업 부장처럼 정돈되고 스마트한 이미지가 더 강한 까닭이었다. 김 부장은 두산 ‘화수분 야구’가 만들어지기까지 스카우트 부문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선지 지금은 LG 스카우트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과거 두산 시절 스카우트사(史)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장님. 전 개인적으로 민병헌 스카우트야말로 두산의 현명한 선택이자 탁월한 육성 케이스였다고 봅니다. 원래 민병헌은 유격수였잖아요.
(민)병헌이가 중학교 때까지 유격수를 봤을 겁니다. 민병헌은 당시 덕수고 사령탑이던 최재호 감독을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행운이요?
최 감독이 보기에 병헌이가 1학년인데도 야구를 참 잘하더래요. 마음 같아선 주전 유격수로 쓰고 싶은데 3학년이 있으니까 쓰질 못했나 봐요. 그래도 발 빠르고, 어깨 강하니까 쓰긴 써야겠고, 고민 끝에 주전 중견수를 맡겼나 봐요. 그러다 시간이 흘러 병헌이가 졸업반이 됐는데 어느 날 경기를 보니까 유격수로 뛰더라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군요.
그렇긴 했는데 ‘영’ 플레이하는 게 어색했어요. 그래 내가 최 감독한테 그랬지. “쟤는 유격수보단 중견수가 더 나은 거 같다. 사전접촉이란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여러 말 하진 않겠지만, 쟤가 계속 중견수로 뛰면 난 쟤를 그냥 놓치지 않을 거”라고. 최 감독이 선수 장래를 봐서 중견수로 다시 포지션을 돌려놓더라고. 결국 그해 신인 드래프트 때 투수를 잡지 않고, 외야수 민병헌을 선택했죠.
체격과 타격보단 발 빠르고, 어깨 강한 야수를 선호하셨다고 했는데요. 신일고 졸업반 시절의 김현수를 회상한다면 당시의 두산이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신일고 시절에도 (김)현수 타격은 알아줬어요. 체격도 좋았고. 그런데 결정적인 단점이 발과 수비였어요. 타격하고 1루까지 뛸 때 보면 좀 느렸거든. 외야수비 나가면 만세도 자주 불렀고(웃음). 잘 알려진 사연이지만, 그래서 2005년 신인 드래프트 때 청소년대표팀 멤버 중에 유일하게 현수만 지명받지 못했어요. 아마 그때 충격이 컸던 모양이라.
고려대에서 김현수를 눈독 들였던 거로 압니다.
그랬죠. 고려대에서 ‘와라’ 했죠. 그런데 현수는 ‘신고선수라도 프로에 가겠다’ 이런 입장이었어요. 현수 부모님이 SK, LG, 롯데를 차례로 만나보신 모양이더라고. 나중에 두산을 만났는데 조심스럽게 입단 조건을 물어보셨어요.
당시만 해도 계약금이 없는 신고선수는 사전에 입단 조건을 더 꼼꼼하게 물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현수 부모님이 현명했던 거 같은데요.
좋은 분들이더라고.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니까 조건에 대해 말씀드렸지.
어떤 조건을 내세우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우린 조건 같은 거 없습니다” 했어요.
네?
“다만, 두산은 신고나 지명 선수 가리지 않고 첫해 연봉은 똑같이 드립니다. 그리고 편견 없이 선수 육성을 합니다. 신고와 지명 선수 차이는 그저 계약금이 없고, 있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했어요. 그때까지 두산만 신고, 지명 선수의 첫해 연봉이 똑같았을 겁니다.
그래요?
경 사장께서 “똑같이 대우하라”고 지시했거든요. “싸움은 구단 입단 때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동일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죠.
결국 김현수를 잡으셨습니다. 김현수는 왜 두산을 선택했다고 하던가요?
그걸 내가 안물어봤네(웃음). 내 생각엔 신고, 지명 선수 연봉 차별이 없다는 점이 현수 가족에게 크게 어필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2006년 김현수가 입단하고, 2007년엔 오재원이 두산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오재원은 경희대 시절 ‘독특한 선수’로 이름이 자자했는데요.
(오)재원이는 고교 때 이미 두산이 지명했던 선수예요. 당시는 고교 때 지명이 대학 졸업 후에도 유효했을 때니까 두산이 지명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었던 시절이었죠. 하루는 경희대로 오재원을 보러 갔어요. 학교에서 그러더라고.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저런 4차원은 어디 가도 없습니다”라고(웃음). 편견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경기하는 거 보니까 발 빠르고, 어깨 강하고, 수비가 참 좋더라고. 타격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속으로 ‘저 정도면 쓸만 하다. 내야가 안되면 외야로 쓰면 되지’ 생각했어요. 그래 데려왔는데 오재원의 개성을 김경문 감독이 잘 받아줬어요. 고영민 제치고 두산 주전 2루수된 거 보면 오재원은 진짜 좋은 선수야(웃음). 순전히 지 노력으로 된 거니까.
두산 주전포수 양의지도 부장님이 스카우트했던 선수지요?
가능성 보고 뽑았던 친구죠. 프로 오면 곧잘 하겠더라고. 그런데 치명적 단점이 있었어요.
치명적 단점이요? 어깨가 좋지 않았던 겁니까.
아니 그런 거보다 박 기자도 걔를 현장에서 자주 봤겠지만, 애가 걷는 게 팔자걸음이야. 한 번은 2군 경기를 보러 갔는데 양의지가 안 보여. 다음날에 가도 안보이고. 이상하다 싶었지. 그래 알아보니까 사연이 있더라고.
어떤 사연이었습니까.
당시 2군 감독이 양의지가 팔자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으니까 불러서 “야구하는 놈이 팔자걸음이 뭐냐. 씩씩하고 당당하게 걸어”하고 주의를 줬나 봐. “네, 알겠습니다”하고 돌아서서 가는데 이게 또 팔자걸음인거라. 감독이 그거 보고 “너 이 녀석 감독 말이 말같지 않아!”하면서 불러세웠던 모양이야. 의지가 “죄송합니다. 앞으로 똑바로 걷겠습니다”하면 되는데 무심코 “저 똑바로 걷고 있는데요” 했는가봐(웃음).
이런.
감독한테 찍혔는지, 실력이 안됐는지 그날부로 2군 출전은 끝~(웃음). 그래 구단에서 “차라리 군대 먼저 보내자” 결정해서 경찰청에 보냈다고. 거기서 유승안 경찰청 감독 잘 만나 자기만의 야구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지. 넓게 보면 걘 팔자걸음 때문에 스타된 거라고(웃음).
스카우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목동구장에서 아마추어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프로 스카우트는 1층 기자실에 모여 선수들을 관찰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스카우트와 2군 코칭스태프는 ‘한 우리 안에 사는 늑대와 양 같은 관계’다. 이유가 있다. 만약 어떤 선수가 기대보다 성장하지 않는다면 스카우트는 2군 코칭스태프의 육성 능력을 의심하게 마련이다. 반대로 2군 코칭스태프는 “이렇게 형편없는 선수를 데려오다니”하며 스카우트를 원망하기 일쑤다. 물론 그 선수가 잘되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한해 14명(신고선수 포함)의 신인 선수가 입단한다 칠 때 1군 주전급으로 성장하는 선수는 많아야 1, 2명으로 나머지 미성장 선수들에 대한 책임공방은 그만큼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선수 성장을 위해 스카우트와 2군 코칭스태프는 정말 떼래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맞아요. 1군 감독과는 선수와 관련돼서나 선수기용을 놓고 절대 이야기하지 않아요. 하지만, 2군 감독과는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2군 감독이 “아마추어 때 쟤 어땠냐”고 물으면 바로바로 대답해줘야 하니까. 스카우트팀에서도 “쟨 고교 때까지 이랬는데 프로와서 이렇게 변한 거 같다.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 이렇게 2군 코칭스태프에 물어보기도 하죠.
그렇군요.
스카우트는 2군 코칭스태프와의 소통과 호흡이 정말 중요해요. 그래야 ‘뽑긴 잘 뽑았는데 지도력이 엉망이라 선수가 못 큰다.’ ‘처음부터 선수 잘못 뽑은 탓에 실력이 늘지 않는다’ 식의 책임 전가를 막을 수 있어요. 두산 있을 땐 스카우트와 2군 코칭스태프 사이에 그런 책임 전가가 거의 없었던 거로 기억해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하고, 아쉬운 점을 봐도 ‘꾹’ 참거나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죠.
양측의 긴밀한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요. 하지만, 현실은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습니다. 2군 코칭스태프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려면 스카우트 입장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전 ‘인정’이라고 봐요.
인정이요?
만약 선수를 잘못 뽑았으면 스카우트는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음.
두산 있을 때부터 2군 코칭스태프한테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네.
“우리 스카우트들은 원석(原石) 안에 금 덩어리가 들어있으리란 기대감으로 가져온다. 여러분 코칭스태프가 이 원석을 잘 세공해줬으면 좋겠다. 만약 벗겨보니 원석 안이 시커먼 석탄 덩어리라면 그땐 전적으로 우리 스카우트가 책임지겠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금 덩어리든 석탄 덩어리든 계속 표면을 벗겨보려는 노력도 안 하고, 대충 까보고서 ‘이거 아니네’하는 섣부른 판단만은 하지 말아달라.”
스카우트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당부라 생각됩니다.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이 판에서 33년간 일한 제 경험을 토대로 감히 말씀드리면. 이건 절대 누구 비판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야구인으로서 이야기하는 거지.
충정에서 하시는 말씀이란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자 가운데 극히 일부 분들 보면 자신이 구단을 고용한 거로 착각하곤 해요. (손을 가로저으며) 아니에요. 구단이 그분들을 고용한 겁니다. 선수도 그래요. 선수는 감독 소유물이 아니에요. 선수는 엄연히 구단 자산이에요. 지도자가 성과를 못 내면 1년 만에 나갈 수도 있지만, 선수는 아니에요. 계속 그 구단 유니폼을 입습니다. 구단은 말할 필요도 없죠. 항구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니까.
그 말씀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정말 저 같은 스카우트나 감독, 코치는 잠깐 있다가 갈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선수나 구단은 아닙니다. 지도자의 욕심, 스카우트의 욕심, 누군가의 욕심으로 선수와 구단이 망가진다면 그건 큰 손실이에요.
‘내가 이 선수를 키웠다’는 흔히 작품론에 빠져 선수의 폼을 교정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열정과 시간을 할애하는 지도자가 적지 않습니다. 과거엔 훨씬 심했는데요. 스카우트 입장에서 그런 지도자를 보면 꽤 답답한 감정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엔 훨씬 심했어요. 오랫동안 스카우트 하면서 지도자가 불필요하게 건드려서 망가진 선수를 숱하게 봤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이두환도 안타까운 케이스였죠.
누가 빈 그라운드의 주인이 될 것인가(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장충고 시절 이두환은 ‘미래의 김동주’란 소릴 들었습니다.
그 아이 방망이 치는 게 원래 약간 퍼져서 나오는 스타일이에요. 그래도 ‘제2의 김동주’ 소릴 들었다고. 그런데 프로 와서 타격폼이 ‘확’ 바뀌었어요. 하루는 2군에 갔더니 덩치는 산만한 놈이 스윙은 교타자 흉내를 내고 있더라고. 지도자가 현역 시절 자기가 했던 스윙을 두환이한테 그대로 지도한 거였어요. 선수는 지도자 말을 안 들으면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니까 따라 할 수밖에 없지. 한 말씀 더 드린다면.
네.
신인 선수 스카우트나 2군 육성의 목적은 하나에요. 화원의 꽃처럼 관상용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전쟁 중인 1군에 새로운 병사를 만들어 보내는 겁니다. 그게 목적이에요. 그러려면 지도자는 사감(私感)이나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하면 안 돼요. 그런데 간혹 보면 프로야구판에서 “이 선수는 1군감이니 아니니”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야 해요. 입 밖으로 내면 1군 지도자 눈에 편견과 선입견이 생기고, 선수들도 의욕이 사라지고, 사라진 의욕 자리엔 불안감이 싹터요. 그리고 무엇보다 (목이 탄 듯 물 한 모금을 마시고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사라진 의욕 자리엔 불안감이 싹튼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지. (눈을 크게 뜨며) 정말 중요한 건요. 지금은 A란 선수 성장 가능성이 꼴찌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걔가 1등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걸 지도자 혼자서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최종 판단은 누가 하느냐? 구단이 하는 겁니다.
부장님 말씀을 듣다 보니 부장님은 현장에서 선수들에게 조언이나 원포인트 레슨 같은 건 아예 안 하시는 듯합니다.
절대로. 교훈될 만한 일이 있었거든요.
무슨 일이었습니까.
이용찬 장충고 후배 중에 기가 막히게 잘 던지는 애가 있었다고. 그런데 하루는 어느 프로팀 스카우트가 “지금 릴리스포인트보다 조금 위에서 던지면 더 잘 던질 거 같다”면서 조언을 해준 모양이에요. 스카우트를 떠나 선배 야구인으로서 순수한 의미의 조언이었다고. 아, 그런데 나중에 봤더니 애가 완전히 바보가 돼 있는 거야. 잘 던질 때 그 공이 아니더라고. 결국 프로 스카우트들이 죄다 주목했던 아이가 나중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더라니까. 그때 느꼈지. ‘아, 조언은 정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구나.’
‘짠돌이’ 두산에 신인 유망주가 몰리게 된 이유
두산 시절 김명제(사진=두산)
2004년 어느 날. 김현홍은 휘문고 투수 김명제 아버지가 운영하는 일식집을 찾았다. 고교 최대어였던 김명제를 어떻게든 잡으려면 부모 설득이 관건이었다. 마침 김명제의 부모는 먼저 온 손님과 한쪽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 김명제 부모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옆방에서 ‘속닥속닥’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LG 유지홍 스카우트와 김명제 부모가 입단 협상을 벌이고 있던 것이었다. 옆방에 귀를 가까이 댄 김현홍은 유 스카우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해 들었다. 그때 김현홍의 귀가 번쩍였다. 유 스카우트가 무려 4억8천만 원의 계약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 두산의 신인 계약금 총액이 10억 원선이었음을 고려하면 4억8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가뜩이나 두산은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계약금이 박하기로 소문난 ‘짠돌이 구단’이었기에 대부분의 대어급 신인은 두산 대신 LG를 선택하던 차였다.
구단으로 돌아온 김현홍은 경창호 사장에게 “김명제는 제가 오랫동안 지켜본 투숩니다. LG가 4억8천을 불렀지만, 실제 계약은 5억에 할 겁니다. 우리가 걔를 잡으려면 그 이상을 불러야 합니다”고 보고했다. 김현홍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 사장의 입에 주목했다.
경 사장이 뭐라던가요.
“야, 김현홍. 니가 스카우트 팀장 아니야? 잡고 싶으면 몰방해서 잡아. 뭐가 문제야!”
경 사장이 스카우트에 힘을 실어준 셈인데요. 이제 다음으로 넘어야 할 산은 김명제 부모님이었는데요.
명제 부모님 뵙기 전에 작전을 짜봤다고. ‘LG가 4억8천만을 불렀으니 난 5억5천을 부른다. 그러면 분명 LG는 6억을 지를 거다. 어차피 잡을 선수라면 처음부터 우리 쪽에서 6억으로 세게 나가 한 번에 끝내자.’
이전 두산 신인선수 계약금과 비교하면 ‘6억 원’은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작전대로 단번에 끝냈습니까.
명제 아버지께서 “두산은 명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물으셨어요. 언뜻 말씀을 들으니 명제와 김진우(KIA)를 비교하시는 거 같더라고. 그래 내가 그랬지. “아버님. 명제도 좋은 선수지만, 고교 졸업반 시절의 김진우와 비교하면 솔직히 진우 쪽이 더 낫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진우 계약금(7억 원)과 동일 수준으로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곤 회심의 카드를 꺼냈죠.
회심의 카드?
“아버님. 두산에서 6억 드리겠습니다. 지금 결정하시죠.”
우와.
아버님 눈이 휘둥그레지시더라고(웃음).
김명제에 이어 신일고 우완 투수 서동환에게도 5억 원을 안겨줬습니다.
다들 놀랐지. ‘짠돌이’ 두산이 김명제, 서동환 합쳐 11억 원을 썼으니 말이야(웃음). 그때 신인 계약금으로 10억 원인가 책정됐는데 그걸 두 선수한테 쓰고도 예산을 오버한 셈이었어요.
그럼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계약금을 주신 겁니까.
머릴 썼지.
머리요?
지금이야 계약금을 한 번에 주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두 번에 걸쳐 나눠주기도 했어요. 명제, 동환이 계약했을 때도 그렇게 했지. 입단 계약서에 사인한 날 절반 주고, 다음해 1월 1일에 나머지 절반을 줬다고. 만약 2016년 책정된 신인 계약금 예산이 10억이라면 그 10억을 반드시 2016시즌 끝나고 쓰란 법은 없거든. 그러니까 다음 해 예산을 좀 댕겨 썼던 거지.
김명제, 서동환 지명 이후 두산과 LG의 피 말리는 스카우트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대부분 LG가 아니라 두산이었습니다.
맞아요. 아마추어 대어들이 두산을 먼저 선택하기 시작했어요. 통 크게 투자한 이후로 ‘짠돌이’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다고. 명제, 동환이 이후로 수혜받은 애들이 이용찬, 임태훈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흐름이 ‘쭉’ 계속됐지.
하지만, 두 구단의 치열했던 지명 전쟁도 이젠 역사 속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타 구단이 두산, LG를 엄청 싫어했다고. 아무리 많이 줘야 2억5천만 원짜리 선수인데 LG, 두산이 싸우느라 몸값이 갑절로 뛰게 마련이었거든. 그럼 타 구단에 입단한 선수들이 “쟤는 나보다 못했는데 저렇게 계약금을 높게 받았다. 나도 저 정도 수준으로 달라”고 안 그러겠어. 진짜 욕 많이 먹었어요(웃음).
“유망주는 끌어모으는 것만치 원활하게 정리하는 게 중요”
'내일의 스타'가 되기 위해 바늘구멍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013년을 끝으로 김현홍은 두산을 나왔다. 정년퇴직하고도 두산 스카우트 팀장을 계속 맡았던 그였다. 하지만, 두산과 인연을 맺은 지 31년 만에 그는 베어스와 헤어져야 했고, 여러 팀의 구애를 받은 끝에 2014년부터 LG 스카우트 팀장을 맡기 시작했다. ‘한지붕 두 가족’을 모두 경험하는 스카우트가 된 것이다.
일전에 제게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유망주는 적금이 아니다. 야구판에선 적금을 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약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늘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지난해 제가 LG 와서 스카우트 팀장과 육성 팀장을 겸했어요. 자주 2군 경기를 봤는데 모 선수가 계속 경기에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 2군 스태프에 물어봤지. 그랬더니 “쟤는 연습을 안 해요. 아주 게을러요” 하더라고. 그래 내가 “그럼 연습 안 하고 게으른 쟤를 왜 저렇게 두고 있냐. 설득해서 잘하게끔 만들던가 아니면 ‘계속 이러면 방출시키겠다’ 경고를 하든가 그도 아니면 자르든가 해야지”하고 뭐라 했다고. 그리고서 며칠 있다가 단장님을 찾아갔어요. 마침 그즈음이 해마다 하는 1차 선수 정리 기간이었어요.
단장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000 선수는 정리기간에 맞춰 좀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했지. 이름을 들으시더니 “얘는 프로 입단 1년 차 아닙니까”하시더라고. “네, 체력 좋고, 센스도 있어 보여 데려왔는데 2군에서 연습도 안하고, 게으르다고 하네요. 제가 지명을 잘못 한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말씀드렸지.
스카우트가 지명 실수를 인정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혹여 구단이 그 스카우트의 혜안과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요. 차라리 육성에 실패한 2군 코칭스태프나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1군 코칭스태프를 비난하는 게 야구판에선 더 유용한 ‘출구전략’일 수 있습니다.
박 기자, 난 다른 생각이에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카우트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해요.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는 게 뭐 어떻습니까. 전 그래요. 만약 내가 스카우트를 잘못해서 책임져야 한다? 그럼 팀을 떠나면 돼요. 옛말에도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산다고 하잖아요.
단장도 모 선수 정리에 'OK' 했습니까?
하셨죠. 그래 6월에 그 선수를 퇴단시켰어요. 퇴단한 선수에겐 다시 프로의 길을 돌아볼 수 있는, 남은 선수들에겐 풀어진 긴장을 조이는 좋은 기회로 작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남은 선수들에겐 풀어진 긴장을 조이는 좋은 기회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군요.
신인 드래프트가 끝나면 우리가 지명했던 선수들을 다 불러서 전달해줘야할 것들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때 꼭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프로구단과 계약했다고 프로선수가 되는 건 아니다. 유니폼을 입고 홈에서 열리는 1군 경기에 출전할 때 비로소 프로선수가 되는 거다. 앞으로 너희들은 프로선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게 될 거다. 그 과정을 밟고 통과하기 전까지 스스로를 프로선수라고 생각하지 마라. 명심해야할 건 여기 있는 너희 중에 프로선수가 몇 명이나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너희가 우리 구단의 부름을 받아 입단하는 영광을 누리지만, 내년엔 그 영광을 너희 후배들이 누리게 될 거다. 정말 중요한 건 내년에 너희 후배 10명이 입단 영광을 누리게 되면 너희 중에 몇 명은 후배들을 위해 팀을 나가야 할지 모른다는 거다. 지금이라도 우리와 계약하지 않고, 대학에 가고 싶다면 말해라. 이 지라에서 당장 계약 파기해주겠다.”
정말 ‘계약 파기하겠다’고 나오면 어쩌시려고.
지금껏 그런 애들은 한 명도 없었어요(웃음).
이런 말씀드리면 곤란하시겠지만, LG는 1·2·3군에 참 보유선수가 많은 팀입니다.
입대자까지 합치면 한 120명 될 거예요. LG가 그만큼 젊은 야구선수들에게 취업기회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자, 그런 의미는 의미대로 인정하고, LG처럼 선수 많은 팀이 정말 잘해야할 게 있습니다.
육성인가요?
그건 당연한 거고요.
좋은 신인선수를 끌어모으는 기술?
반대에요. 정리에요. 얼마나 선수 정리를 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정리라….
LG 스카우트 팀장으로 왔을 때 단장님께서 물어보시더라고. “김 팀장, 두산 ‘화수분 야구’를 어떻게 만든 겁니까. 그 좋은 신인선수들을 어떻게 잡아온 거예요?” 제가 뭐라고 대답한지 아세요?
글쎄요.
“단장님. 좋은 선수를 뽑아오는 것만치 팀에 꼭 필요하지 않은 선수를 얼마나 잘 정리하느냐도 무척 중요합니다. 전 선수단 정리를 얼마나 신속하고, 능숙하게 하느냐가 팀의 미래에 더 결정적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음.
구단 입장에서 보면 유망주는 죄다 김현수, 박병호야. 키우면 잘 될 거 같거든.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프로 6, 7년 차 2군 선수들보다 갓 고교 졸업한 애들 실력이 더 좋을 때도 있다고. 그런데 베테랑 유망주가 1군에 오르면 다행인데 계속 2군에 버티고 있으면 어린 애들이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어진다고. 그땐 가슴이 아프더라도, 좀 손해 보는 거 같아도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LG는 그런 식으로 가지치기해서 결과가 좋지 않았던 팀입니다. 박병호, 서건창(이상 넥센), 김상현(kt) 등이 대표적입니다.
만약 선수를 잘못 가지치기했다? 전 그 책임은 프런트에 있다고 봐요. 하지만, 그 책임을 두려워하면 강팀이 될 수 없습니다. 박병호, 서건창, 김상현이 LG에 계속 있었다면 그 선수들은 지금 같은 대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거예요. KBO리그도 지금처럼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테고. 한편으론 그런 가지치기를 통해 LG도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얻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현홍의 역발상 ‘수비는 타고나는 것, 타격은 훈련으로 보강 가능’
누가 과연 프로의 부름을 받을 수 있을까(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부장님이 생각하는 ‘될 성 싶은 떡잎’의 기준은 뭡니까.
기준은 구단마다, 스카우트마다 다를 거예요. 제 경우만 이야기하면 전 스카우트 대상을 A, B, B+ 3등급으로 나눕니다.
각 등급의 차이는 뭡니까.
투수만 놓고 보면 A급은 속구 구속 145km 이상인 선수들이에요. B급은 구속은 130km 후반대지만, 프로 들어와서 힘만 붙으면 145km 이상이 가능한 친구들이에요. B급은 힘이 붙어도 시속 145km까지 못 가지만, 140km 초반대라도 원포인트 릴리프로 써먹을 수 있는 애들이에요.
B급 이하는요?
C급부터는 속구 구속도 느리고, 변화구도 별로고, 제구 역시 그저 그런 친구들이죠. 그런 친구들은 스카우트할 필요성이 크지 않으니까 검토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그럼 야수는 어떤 기준입니까.
일단 발 빠르고, 수비 잘하고, 어깨 좋은 ‘3박자’를 갖춘 선수가 최곱니다. 문제는 3박자를 두루 갖춘 유망주가 극히 적다는 거예요. 그럴 땐 3박자 중에서 누가 2박자라도 갖췄는지 유심히 관찰합니다.
타격 실력은 고려 대상이 아닌가요?
고려는 하지만, 큰 고려 대상은 아니에요. 어린 선수들의 타격 실력은 아마추어 땐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우니까요. 프로 들어와 힘이 붙으면 타격은 충분히 보강 가능하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이게 좀 헷갈리는 게요. 보통 프로 지도자들이 “수비는 충분히 훈련으로 극복 가능하다”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반면 타격은 “타고나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요. 그런데 부장님 말씀대로라면 타고나는 건 수비고, 훈련으로 보강 가능한 타격이란 건데요.
확실히 수비는 훈련하면 할수록 늘어요. 하지만, 센스 있는 야수한텐 못 당해요. 훈련으로만 다져진 선수는 몸 앞으로 오는 타구는 잘 처리해도 양 사이드 수비는 여전히 취약점을 드러냅니다. 한데 천부적으로 수비 센스가 좋은 선수는 양 사이드로 빠지는 걸 기가 막히게 잡아내요. 어깨도 그래요. 박 기자.
네?
훈련으로 강해진 어깨 봤어요? 시속 130km 던지는 투수가 아무리 훈련해봐야 선동열처럼 150km를 던질 순 없다고. 순발력도 예외는 아니에요. 발에 모래주머니 차고 매일같이 아무리 달려도 순발력은 크게 좋아지지 않아요.
대학 시절까지 속구 구속이 느렸던 유희관은 어떤 이유로 스카우트하신 겁니까.
유희관은 고교 때부터 제구가 참 좋았던 친구예요. 그런데 속구 구속이 130km 이하인 거라. 대학 때도 잘 나와야 132km 정도고. 구속보단 제구를 보고 뽑긴 뽑았는데. 상무 가서 뭘 먹었는지 힘이 붙어서 왔어요. 나름 자기만의 타자 공략법도 정립했고. 노력이 지금의 유희관을 만들었다고 봐요.
요즘 야구팬들은 ‘세이버매트릭스’ 같은 고급스러운 스탯을 통해 신인 유망주를 평가합니다. 미국에 갔더니 그쪽에서도 세이버매트릭스 활용 비중이 높더군요. 부장님께선 ‘경험과 감’이란 전통적 의미의 스카우트 기법과 세이버 매트릭스 같은 현대적 의미의 스카우트 기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구단마다 선수 평가 배점이란 게 있어요. 예를 들어 ‘주루’ 항목이 있다 치면 10점 만점에 애는 몇 점, 이런 식으로 항목마다 점수를 매겨요. 이렇게 점수를 매기려면 육안과 감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각종 스탯이나 데이터를 살펴봐야 합니다. 전 숫자는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고 보고. 하지만, 우리처럼 작은 시장에선 숫자 이면에 있는 뭔가를 더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다고 봐요. 미국만 해도 원체 선수가 많고, 땅덩어리가 넓으니까 선수 하나하나를 집중 관찰하기 힘들어 숫자에 의존을 많이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요. 선수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려면 알 수 있다고. 개인적으론 숫자만큼이나 선수 인성, 가족관계, 멘탈 등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고 봐요.
“1년 잘 못 뽑았다? 그건 줄곧 스카우트를 잘 못했다는 뜻이다.”
한 프로구단 스카우트가 아마추어 선수 관찰기록을 적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스카우트한 선수들이 막상 프로와서 죽을 쑤면 참 가슴이 답답하실 듯합니다. 그래도 다음해 잘 뽑으면 그 답답함이 사라질 수도 있을 텐데요.
(기자의 질문을 막고서) 박 기자님. 만약 올 시즌 신인 스카우트 농사가 실패했다 치죠. “올해는 실패했으니 내년엔 잘 뽑자‘ 할 수 있을 거예요. 한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올해 신인을 잘 못 뽑았다면 그건 지금 1년 잘 못 뽑은 게 아니라 줄곧 잘 못 뽑았던 겁니다.
네?
우리 같은 스카우트들은 올해뿐만 아니라 5년을 내다보면서 신인을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머릿속으로 그려야 해요. 저 같은 경우는 ‘올해는 이 포지션에 이런 애를 뽑고, 내년엔 이 포지션에 이런 애를 뽑고, 3년 후엔’ 이런 식으로 계속 5년간의 그림을 그립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올해 신인 농사가 실패해도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하지만, 큰 그림없이 눈앞에 괜찮은 신인이 나왔다고 덥석 물면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올해 못 뽑은 실책을 만회하려고, 다음 해엔 더 즉흥적으로 스카우트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계속 망하는 거예요.
음, 그렇군요. 엉뚱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5년간의 큰 그림에 해당하는 선수가 있다 치죠. 그 선수는 B+급 외야 자원입니다. 공교롭게도 LG에 외야 유망주가 부족하다 치죠. 아, 그런데 정말 출중한 실력의 3박자를 갖춘 A급 내야 자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LG엔 내야 유망주 자원이 많아요. 이때 부장님은 누굴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럼 어느 팀이나 다가오는 신인 드래프트 땐 내야수보다 외야수 스카우트에 초점을 맞출 겁니다. 그때 우리 지명 순서에 특급 유격수 요원과 B+급 외야수 요원이 한꺼번에 나왔다 치면. 보통이라면 후자를 선택하겠죠. 왜? 내야수 자원은 많으니까. 하지만, 전 전자를 택할 겁니다.
왜지요?
내야 유망주 서너 명이 있다고 걔들이 다 A급 내야수로 성장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내야자원이 풍부하다고 특급 내야 자원을 포기해? 전 그건 아니라고 봐요. 성공 가능성이 높은 A급 선수에게 베팅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B급은 잘하면 주전 혹은 백업까지 올라가지만, A급은 잘하면 팀의 중심, 못해도 언젠간 주전까지 오를 수 있으니까요.
지금껏 많은 신인선수를 스카우트하셨습니다. 성공으로 이어진 선수도 많지만, 실패로 끝난 선수는 더 많을 것으로 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선수가 있다면 그게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고인이 된 이두환이 가장 아깝고, 안타까운 친구예요. (눈시울을 붉어지며) 두환이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선지 뭐든 하려는 의지가 넘쳤죠. 우리도 굉장히 잘할 거로 예상했고. 그런데 여러 이유로 생각보다 잘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몹쓸 병에 걸렸고. 휴우-.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숨만 내쉰 뒤) 그리고 투수론.
네.
성영훈이 정말 아까워요.
덕수고가 낳은 또 하나의 초고교급 투수라는 이야기를 듣던 선수인데요.
난 지금도 그 정도 빠른 공과 정확한 제구를 자랑하는 고교 투수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2008년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 걔가 에이스로 나서서 한국을 우승시키지 않았어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혼잣말로) 휴우-. 150km 던지던 놈을 160km 던지는 선수로 만들려고 했으니. 프로 2, 3년 차 돼서 힘 붙으면 지가 알아서 던질 텐데. (기자를 바라보며) 박 기자.
네.
150km 던지는 강속구 투수는 저만의 스타일이 있는 거예요.
네.
그 스타일을 억지로 뜯어 바꾸면 밸런스고 뭐고 다 무너진다고. 그리고 그 상태에선 예전 폼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그 폼이 나오지가 않아요. 150km 강속구 투수는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1987년 OB 베어스 시절 김현홍이 작성했던 고과평가 기록지(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인터뷰 내내 제가 힘든 질문만 드린 듯합니다. 프로야구 스카우트를 고려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KIA 스카우트 중에 ‘현승민(개명 전 현철민)’이란 친구가 있어요. 덕수상고에서 뛸 때 내가 스카우트할까 말까 고민했던 친구라고. 그 친구가 지금은 스카우트를 하고 있어요. 그거 보면 세월 참 빨라(웃음) 어쨌거나 이 친구가 “부장님, 어떻게 하면 좋은 선수를 뽑을 수 있습니까” 묻더라고.
저와 같은 질문을 던졌군요.
다들 그 질문을 하시는데요. 전 그랬어요. “승민아, 좋은 선수를 뽑으려면 너 먼저 좋은 스카우트가 돼야 한다. 좋은 스카우트가 되려면 네가 뽑은 선수는 네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나중에 실패로 끝났을 때도 뒷구멍을 찾지 마라. 그리고 끊임없이 메모하고, 관찰해라. 혹여 네가 뽑고 싶은 선수를 네 발언권이 약해 뽑지 못해도 네가 뽑으려고 했던 선수가 타 구단에 갔을 때 어떤 활약을 하는지 살펴봐라. 그래서 네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 그렇지 않았던 것인지 항상 확인해라.”
부장님이 지명하지 못한 선수 가운데 다른 팀으로 갔을 때도 유심히 지켜봤던 선수가 있습니까.
있죠. 2003년이었을 거예요. 부산에서 열린 화랑대기에 갔는데 경남상고 좌완 투수가 참 예쁘게 공을 던지더라고. 몸도 호리호리하고 말이야. 그런데 속구 구속이 133km 밖에 안 나와. 그래도 난 딱 ‘쟤구나’ 감이 오더라고. 그해 신인 드래프트 앞두고 구단에서 스카우트 회의를 했는데 난 걔를 밀어다고. 한데 다른 스카우트들은 “너무 체격이 작고, 공도 느리고”하면서 반대를 하더라고. 그땐 내가 스카우트 초짜니까 속으로만 ‘쟤 봐라. 분명히 프로 오면 큰다’하고 더는 밀어붙이지 못했어요. 아니나다를까 SK에서 2차 2순위로 지명하더니 2005년부터 주전 불펜투수로 써먹는 거야.
그게 누구였습니까.
정우람. 걔 덕분에 공부 많이 됐지(웃음).
과거로 돌아가 다시 스카우트하라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스카우트를 왜 해? 스카우트한테 뽑히는 선수를 다시 해야지. 안 그래?(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