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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장성 둥양시의 노택, 중국 유일의 구진(문 열고 들기를 아홉 번 한다는 의미) 대저택이다. |
2003년에는 저장성 둥양시(東陽市) 노택(盧宅·노씨의 저택이란 의미) 문물관리위원회 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해 또 다른 노 대통령(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사진이 지금도 노택 안에 자랑스레 걸려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2012년 지금도 우리나라의 노씨중앙종친회(회장 노경래)는 조상을 찾아가는 종친회 여행을 매년 두어 차례씩 주관합니다. 허베이성 줘저우(州)로 가서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의 사당을 돌아보거나, 산둥성의 노씨 발원지를 찾아보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유일한 구진(九進) 민간저택인 노택을 찾기도 한답니다. 오늘은 바로 이 노택을 찾아 그 안에 담긴 건축과 문화와 민간교류를 음미하려고 합니다.
강태공의 후예들
- ▲ 2003년 청와대를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과 기념 사진을 찍은 노택문물관리위원들.
진(秦)나라 때는 노씨 일부가 범양(范陽)의 탁현(縣·줘저우)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탁현의 노씨 중에서는 삼국시대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盧植)이 유명합니다. 지금도 줘저우에 가면 유비의 도원결의 기념공원과 함께 노식의 사당을 볼 수 있지요. 이 범양 노씨의 후예 가운데 한 사람이 북송 시절에 강남으로 부임하면서 저장성에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노택은 이곳에 정착한 노씨들이 15세기 중반에 지은 건물입니다. 역사가 550여년이나 된 민간 살림집입니다. 종심이 320m나 되고 민간주택으로는 보기 힘든 9진(進), 즉 문 열고 들어가기를 아홉 번 해야 제일 안쪽에 도달하는 대저택입니다. 주변의 부수적 건축물까지 포함하면 면적이 총 2만5000㎡나 되고, 방도 125칸이나 됩니다. 전형적인 봉건시대 강남의 명문망족(名門望族)의 대가족 살림집이지요.
남향이지만 서쪽으로 35도 틀어져 있습니다. 중축선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를 보고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첫 대문의 안쪽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앞산의 세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입니다. 그것에 맞춘 것이지요.
중축선을 따라 9진의 건축물들이 남북으로 배열된 것 이외에, 중축선의 동서 양측의 부축선을 따라 또 다른 건축물들이 배열돼 있습니다. 그 외에 원림과 패방 등이 많고, 작은 하천이 전체 건축군의 서북동 삼면을 감아 흐르고 있습니다.
베이징엔 자금성, 강남에는 노택
- ▲ 화려한 실내 장식.
노택에 대해서는 “북에는 고궁이 있고, 남에는 노택이 있다(北有故, 南有 宅)”는 꽤 오만한 말도 있습니다. ‘현존하는 고건축’에서 자금성은 황궁의 최고이고, 민간주택에서는 노택이 제일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1994년 진화시 인민위원장이 만들어낸 일종의 정책 슬로건이지만 구진이라는 구조가 자금성과 공묘(孔墓) 외에는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긍심을 들어줄 만하지요.
인재라는 면에서도, 자금성에서는 천자가 대를 이어 살았지만 노택에서는 천자가 주관하는 최종 과거에 일등으로 합격한 진사(進士)를 50년에 한 명꼴로 8명이나 대를 이어 배출했으니, 감히 자금성에 견주어보는 수사적 과장도 수긍할 만합니다.
노택은 처음부터 구진으로 지은 것은 아닙니다. 명(明)나라 때인 1456~1462년에 1차로 6년에 걸쳐 현재의 일진에서 사진까지를 신축했고, 60여년 후에 오진을 증축했으며, 신축 200여년 후인 청대 초기 강희제 시절에 육진에서 구진까지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가 된 것입니다.
구진을 기능 면에서 나눠 보면 전형적 전당후침(前堂後寢)입니다. 전당, 즉 구진 가운데 일진에서 사진까지의 전반부는 방문객의 접대, 제사, 집회, 경조사, 교육 등 문중의 대내외 의례를 행하는 구역입니다. 오진은 전당과 후침을 구분하고 있고, 후침은 육진부터 구진까지로 침실과 주방을 포함한 일상의 주거 공간입니다. 이것은 자금성도 비슷합니다. 남쪽은 조(朝)라 하여 황제가 의례를 행하고 업무를 보는 공간이고, 북쪽은 정(廷)이라 하여 황제와 그의 가족들이 사는 공간입니다. 전당과 후침을 구분하는 중간에 석고문이 있는데 이 문은 평상시에는 닫혀있어 외부인은 후침으로 들어가지 못하지요.
1949년 마오쩌둥의 신중국이 들어서면서 이 저택 역시 한 가문의 사택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동주택이 되었습니다. 방 한두 개씩으로 구분해서 수많은 가구가 복작대며 살았으니 주택문제 해결에는 조금 기여했겠으나 훨씬 큰 문화유적의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 발생한 화재로 팔진이 전소되어 지금까지도 빈터만 흉물스럽게 남아있습니다. 훗날 진화시가 노택을 유적지로 복구키로 결정한 다음 노택에서 150여가구가 이사를 나갔다고 하니 어떤 상황이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두 번째 문은 손님 맞는 곳
- ▲ 동수당에 걸려있는 노씨 선조들의 초상.
첫 대문이 바로 일진이 됩니다. 문 안의 중축선에 서서 대문을 통해 멀리 시선을 던지면 앞산의 세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입니다. 당시 봉건사대부들의 풍수지리 관념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지요. 이 문은 손님이 온 것을 얼른 알리라는 뜻에서인지 첩보(捷報)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손님이 왔을 때 하인이 안에 소식을 알리면서 문을 열어 안내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첫 번째 문이란 뜻으로 두문(頭門)이라고 부르고, 문의 양편으로는 하인들이 사는 방이 붙어있지요.
일진을 통과해 마당을 건너면 이진입니다. 두 번째 문은 국광(國光)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나 통상 의문(儀門)이라고 부릅니다. 의례를 갖추는 문이란 뜻인데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돌아가는 손님을 환송하는 지점이 바로 의문입니다. 의문의 가운데 큰 문은 3품 이상의 고관이 방문할 때에만 열고, 문지방까지 빼냄으로써 극진한 환영의 뜻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손님이 왔다는 기별을 받은 주인은 의문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삼진으로 안내하게 됩니다.
가장 큰 마당 거느린 숙옹당
- ▲ 숙옹당 앞의 정원.
숙옹당의 내부 천장은 팔작지붕의 형태이고, 바깥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돼 있습니다. 좌우 다섯 칸에 도리가 열두 개에 이르는 넓고 큰 공간을 품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공간은 조정에서 반포한 건축 관련 규정에 위배되는 것인데 어떻게 사가에 이런 큰 전당을 짓고도 문제가 없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라고 합니다.
이진과 삼진 사이, 즉 숙옹당 앞의 정원은 460여㎡로 널찍합니다. 현존하는 중국의 고건축 민가 가운데 가장 큰 마당이라고 합니다. 중축선을 따라 중간에는 돌을 깔아 길을 냈고, 나머지 좌우로는 아란석으로 米자 형태가 반복되는 문양을 연출했습니다. 콘크리트가 없던 옛날에는 찹쌀을 으깨어 회에 섞어서 바닥을 치는데 아주 견고합니다.
정원의 사면 둘레로는 명구(明溝)를 설치해 배수가 잘 되도록 했습니다. 지면에 개방된 배수로는 명구라고 하고, 배수관처럼 묻혀진 배수로는 암구(暗溝), 빗물이 빨리 빠지도록 지붕에 설치된 배수구는 천구(天溝)라고 합니다. 이런 배수로들이 잘 갖춰져 있고, 전체 건축군의 둘레를 흐르는 하천이 큰 배수구의 역할을 하고, 구진 후면의 연못이 배수장이 되기 때문에 큰 비에도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구진 후면의 연못을 메워 건물을 지은 뒤 큰비가 내렸을 때 배수가 빠르지 않아 침수피해가 발생했었답니다. 되짚어보면 수백 년 전에 집터 주위에 하천을 흐르게 하고 연못을 설치한 것은 꽤나 현명한 재해 예방법이었던 것이지요. 애석하게도 당장의 부동산 가치가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삼켜버리는 일이 발생한 셈입니다.
삼진 숙옹당과 사진 동수당은 천당(穿堂)이라고 하는 회랑이 이어주고 있습니다. 동수당 중앙에는 선조들의 초상이 걸려 있고 정초에 문중 사람들이 모여 배례를 하는 곳이지요. 오진은 전당후침을 구분하는 석고문과 담장입니다.
1970년대 화재로 일부 소실
육진부터 구진은 이층으로 된 침실들입니다. 칠진은 후침에서 중심이 되는 건축이지요. 팔진은 1970년대 화재로 인해 붕괴되고 지금은 양측면의 담벼락과 빈터만 남아있습니다. 후침은 13칸의 방으로 구성된 삼합원을 기본단위로 해서 네 개의 삼합원을 직렬로 연결한 구조입니다. 각 삼합원은 좌우로 다섯 칸씩 열 칸이고, 정면에 세 칸이 있어서 3대가 함께 살 수 있는 침실과 주방 등이 갖춰져 있지요.
구진에는 주인장 내외의 침실이 있는데, 두문에서 구진까지 거리도 멀고 문도 많아 출입이 몹시 불편하지 않을까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중축선과는 직각이 되는 동서 방향으로 좌우 각각 여섯 개의 문 또는 통로가 설치돼 있습니다. 이런 문을 이문(移門) 또는 변문(邊門)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임의로 출입이 이뤄지는 문이고,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해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구진에는 좌우뿐 아니라 후면의 화원과 연못으로 갈 수 있는 쪽문이 설치돼 있기도 합니다. 화장실은 내부에 없고 침실 안에 용변을 받아내는 대변통과 요강이 있습니다.
노택에는 중축선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축선과 평행하게 잡혀진 부축선을 따라 동쪽에 사진·삼진·이진 세 갈래의 건축물이 있고, 서쪽으로도 일련의 건축물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중국에 가면 자금성이나 커다란 사원의 건축군에 익숙해진 탓에 대수롭지 않은 듯 느껴질 수도 있지만 민간의 살림집으로는 아주 특별한 집이 노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