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대장경판을 제작하게 되었는가? 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도 엄청난 돈과 시간이 소모되는 목판 대장경판 제작사업을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 중에, 그것도 강화도에 수도를 옮겨 온 나라가 피폐할 데로 피폐한 시기에 범국가적인 사업으로 계획하였는가? 우리는 이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우선 고려대장경판을 판각하기 이전에는 우리 나라와 중국 및 거란에 어떤 대장경들이 있었는지 그 내용부터 알아보자.
2.1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는 물론 중국과 우리 나라를 통 털어 최초로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 부처님 말씀을 새겨 넣은 대장경으로서 이후 우리 나라와 거란 등에서 만든 몇몇 대장경판의 효시가 된 경판이다. 송나라 태조의 어명으로 태조4년(972)에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이르는 11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한다. 북송칙판대장경은 일명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혹은 촉판대장경(蜀版大藏經)이라고도 하며 앞에 말한 지승의 개원석교록를 근거로 하였다.
총 1076부 5048권의 불경을 자그마치 13만 매나 되는 목판에 새겨 천자문 순 으로 이름을 붙인 480개의함에 차례로 보관하였다. 이 대장경의 제작은 인도를 제외한 한문문화권에서는 최초의 엄청난 규모의 불경정리 작업임과 동시에 최초의 불경간행 사업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전파된 불교가 비로소 체계적인 경전을 갖는 계기가 되고 당시 사람들이 불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경판 들은 송나라의 휘종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든 것으로 아려지고 있으나 금나라의 침입을 받은 사회적 혼란기에 전부 없어져 버리고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2.2 초조고려대장경(初彫高麗大藏經) 송나라의 칙판대장경이 만들어지자 중국과 왕래가 빈번하였든 고려에서는 성종10년(991)에 사신으로 가있든 한언공(韓彦恭)이 송나라에서 귀국하면서 관판대장경 481함 2500권을 가지고 들어와 비로소 내용이 알려졌다. 이어서 현종13년(1022)에는 한조(韓祚)가 역시 송나라에서 칙판대장경을 보완한 500여권의 불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후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북방오랑캐들의 거듭된 침략에 의하여 고려는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음은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기록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에 현종은 북방오랑캐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함과 아울러 우선 현화사(玄化寺)라는 절을 창건하여 부처님의 은덕을 얻고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판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려고 한 것 같다. 현종은 수입한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일종의 대장경을 간행하는 관서라고 할 수 있는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하고 대반야경, 화엄경을 비롯한 불경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시작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종대(1010∼1031)에 시작하여 꾸준히 계속되었고 현종20년(1029)까지 거의 완성을 보았고 그 후에도 보완작업은 선종4년(1087)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경판을 우리는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이라 부른다. 대장경의 각판 사업은 조정을 비롯한 전 국가적인 규모에서 진행되었다. 이 초조고려대장경은 대체로 송의 칙판대장경의 내용과 체재를 토대로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고려인들은 보완과 수정을 가하여 원본보다 더 훌륭한 대장경을 만들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는지는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초조대장경판은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여 오다가 고종 19년(1232)에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 2차 침입 때 후술하는 의천의 속고려대장경과 함께 아깝게 불타 버리고 만다. 당시에 인경하였든 초조 고려대장경은 국내에서도 가끔 일부가 발견되고 있으나 경서의 대부분은 일본 교오또에 있는 남선사(南禪寺)등지에만 남아있어서 우리의 아쉬움이 더하고 있을 뿐이다.
2.3 거란대장경 거란은 송나라의 북송칙판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거란의 흥종(1031∼1054)때에 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여 도종(1055∼1100)때에 완성하였다. 479함으로 구성된 거란대장경은 개원석교목록과는 함호(函號)배열이 다르고 일부 없어져 버린 불경이 수록되어 있는 등 북송칙판대장경이나 우리의 초조고려대장경 및 의천의 속대장경과는 또 다른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귀중한 대장경이다. 거란대장경이 언제 시작되어 완성되었는 지는 확실하기 않으나 거란의 도종이 고려 문종 17년(1063)에 거란대장경 전질을 고려에 보내온 것으로 보아 이 보다 앞서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2.4 의천의 고려속장경 초조대장경을 현종.선종대에 걸쳐 완성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고려조정에서는 문종때 대각국사인 의천(義天, 1055-1101)에 명하여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 간행을 시도하였다. 초조대장경이 북송칙판대장경을 모태로 경?율?론 삼장에 만족하지 않고 이의 주석서나 연구서 라고 할 수 있는 장소(章疏)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경.율.논의 3장은 이미 정리가 이루어지고 판각까지 되었으나 장소는 아직 정리하여 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츰 흩어져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의천은 판단하고 있었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천은 문종 27년(1073)에서 선종 7년(1090)까지 25여년 간에 걸쳐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의 송.요나라까지 광범위하게 장소를 수집하였다. 특히 선종 2년(1085)에는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서 화엄대불사의론(華嚴大佛思議論)등 3천여권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수집한 자료을 하나하나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의천의 고려속장경의 각판 시기는 속장경이 거의 완성된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경율론의 정장과는 다른 일종의 속장(續藏)인 장소를 간행한 것은 고려가 또 다른 대장경을 각판하였다는 귀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몽고의 침입을 비롯한 잇달은 외환으로 말미암아 전질의 경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남아 있는 일부의 판본과 국내 및 일본의 몇몇 개소에 보관되어 내려오는 인쇄본을 통해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2.5 고려재조대장경판(高麗再彫大藏經板) 비록 중국의 북송칙판대장경을 모방하기는 하였으나 고려의 군신이 혼신의 힘을 받쳐 이룩한 초조고려대장경과 이어서 만들어진 의천의 속대장경은 동양삼국에서 우리 나라가 당시로서도 문화민족으로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었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조그만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나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항상 중국대륙의 정치적 변동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었고 대장경판을 보존되기 위하여는 전란의 참화만은 피해야 하였다. 고려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이 거의 연속적으로 만들어진 이후 고종조(1213-?)에 이르기까지 약 130년간에 걸쳐서 대장경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의 예종, 인종, 의종, 명종조에 그 도장(道場)이 궁중에서 열리었다는 기록정도를 볼 수 있고 다시 대장경을 새기거나 크게 간행한 흔적은 보이지 않은다.
이때는 임금과 국민이 모두 염원하든 대장경판을 완성하고 목판 한 장 한 장에 새겨진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더욱 가슴깊이 아로새기면서 중국대륙의 크나큰 정치적 변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든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대륙의 야심만만한 정복자들은 오직 불심하나로 뭉쳐있는 고려국을 그대로 둘리 없었고 드디어 고종18년(1231) 8월 몽고 태종의 명령을 받은 살례탑은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12월에는 수도 개경까지 단숨에 밀고 내려온 것이다. 이는 이후 거의 30여년 동안 7차에 걸치는 몽고군에 의한 고려침략의 서막일 뿐이었다. 개경이 몽고군에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서 조정은 화해를 청하여 간신히 평화조약을 맺고 다음해 즉 고종19년(1232) 1월에 몽고군은 철수하게 된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든 최이는 수전에 약하다는 몽고군의 약점을 간파하여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주민을 산간과 섬으로 피난시켜 결사항전을 시작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같은 해 가을 살례탑을 선봉으로 세워 2차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고려조정은 변변한 대응한번 못하고 개경을 위시하여 전국토가 몽고군의 말발꿉에 짓밟히게 되었다. 1232년의 몽고군 2차 침입! 우리민족이 외적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아 위대한 민족의 문화유산들이 하나하나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역사의 뼈아픈 한페이지를 또 한번 기록하는 해가 되고 만다. 즉 현종이래 거의 70여년에 걸쳐 온 국민의 염원과 피와 땀이 서린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대장경 경판은 부인사에 고이고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없이 넓은 대륙의 초원에서 양떼지기에 불과하였든 몽고 오랑캐들이 고려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든 대장경의 의미를 알리 없었으므로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군의 불길질에 하룻밤사이 처참하게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때 고려국민의 분노와 허탈함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억울함이 가신다면 같은해 12월 수원 처인성 싸움에서 승병대장 김윤후가 화살하나로 저승에 가서도 다시는 밝은 세상을 볼 수 없도록 살례탑의 왼쪽눈을 꽤 뚫어 사살해 버린 것이다. 이 1.2차 몽고침략 이후에도 1254년의 7차에 이르는 포악한 몽고군의 침략을 계속 받으면서 국토는 몽고군의 말발꿉에 유린되고 처참한 서민의 삶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을 즈음 최이(崔怡)를 비롯한 고려의 세력가들은 몽고군의 퇴치를 그들이 숭배하고 믿어 마지않은 부처님의 힘에 의존하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 현종이 초조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간 과거의 예를 보아 정성껏 대장경을 간행하면 포악한 몽고군도 스스로 물러가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에 임금은 강화도 섬에 피신하여 있고 본토는 몽고군의 말발꿉에 유린되어 국민의 삶이 피폐할 데로 피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재위 24년째인 1237년 수년동안 준비하여 오든 대장경의 각판을 몽고군 퇴치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이후 고종38년(1251)까지 장장 16년이란 세월에 걸쳐 오늘날 해인사의 수다라장 및 법보전에 보관되어 있는 8만천여장의 고려대장경판 정본을 완성하였다. 초조대장경을 잃고 군신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였는 지는 대장경 각판을 시작하면서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은 태자와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더불어 목욕제계하고 향을 피우며 먼 하늘을 우러러 온누리에 무량하신 여러 보살님과 천제석을 비롯한 삼십삼천의 모든 호법영관에게 비옵나이다. 몽고군이 우리에게 가한 난동질이 너무 잔인하고 흉폭하여 어찌 말로서 나타낼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망나니는 다 갖다 모았다 하겠으며 금수보다도 더 혹심하옵니다. 이러하오니 어찌 천하가 다 존경하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 줄을 못된 몽고군이 알 리가 있습니까? 몽고병의 더러운 말 발꿉이 지나가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불상이고 불경이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다 불살라 없애고 말았으며, 부인사에 소중히 모셔두었든 처음 만든 대장경판본도 역시 이들의 마수에 걸려 하나도 남은 것 없이 재가되었나이다.
윗대로부터 이어온 수십년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나라의 큰나큰 보배를 순간에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여러 보살님들과 하늘의 임금님들이 아무리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온들 이렇게 못된 짓이야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여 보건데 우리 중생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막을 계략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힘이 모자라서 불법의 큰 보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이 모두 저희들의 잘못이므로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본래 이루어짐과 잃어버림이 없는 것이요, 잠시 대장경판을 머무르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경판을 만들고 또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써 망가지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중생이 해야할 일 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지니고 있고 집을 가지며 불법을 지극히 숭상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없어진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일에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귀중한 보배를 잃어 버렸는데 어찌감히 공사가 거창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만드는 작업을 꺼리고 망설이겠습니까?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귀당관사(句當官司, 대장도감)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코저 하옵니다. 처음 대장경을 새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현종 2년에 거란병이 대거 침입하여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셨으나 거란병은 송도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큰 원을 세우고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더니 놀랍게도 거란병이 스스로 물러갔나이다. 생각컨데 오직 대장경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이며 판각하는 것도 다를 바 없으며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발원함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어찌 그 때에만 거란병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병은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하늘의 보살피심이 한결같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지성을 다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는 바는 그때의 정성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 및 삽심삼천께서 이 간절한 기원을 들으시고 신통의 힘을 내리시어 저 추악한 오랑캐 무리들의 발자취를 거두어 멀리 달아나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라 안팎이 모두 편안하고 모후와 태자가 만수무강하시며 나라의 운이 영원무궁케 하소서. 우리 중생들은 마땅히 더욱 노력하여 불법을 지키어 부처님 은혜의 만분의 하나라도 갚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업드려 비옵나니 굽어 살피옵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