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족보의 변천
족보의 일반적인 성격, 즉 개념, 종류, 명, 연원, 발간, 체제, 등이 족보가 처음 출현한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 항상 같지는 않았다. 동일한 종족이 간행한 족보라 하더라도 구보와 신보의 기재내용은 많은 점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다. 특히. 족보의 이러한 기재내용의 변화가 동족의식 내지 동족의 조직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때 시대의 변천에 따라 동족자체의 성격이 변화하였음을 말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족보 기재내용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조선중기 17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변화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 국한하기로 한다.
동일한 종족의 구보와 신보를 모두 갖추어야 이러 변화를 명확히 고찰할 수 있으나 그러한 자료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여러 시기에 발간된 족보의 범례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온 신보에 구보의 범례가 모두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여도 여러 동족의 족보(구보, 신보)의 범례를 종합하여 보면, 대체로 한 종족에서 발간한 바 있는 모든 구보, 신보의 범례를 알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시기가 좀더 소급되는 시대, 즉 1500년대, 1600년대, 1700년대의 족보도 주요한 자료가 된다.
▣ 수록 자손의 범위 변화
먼저 초기의 족보에 수록된 자손의 범주와 범위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에 세대가 경과함에 따라 즉 조선 후기로 올수록 이것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알아본다. 초기의 족보는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끝까지 기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안동권씨, 전의이씨, 문화유씨 등의 족보뿐만 아니라 《청풍김씨 세보》, (1750)《안동김씨을 족보》, 《남원윤씨 족보》, (1760).《한양조씨 파보》(1917) 등의 범례에 의하면 이들의 구보가 모두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문화유씨의 《가정보》(1562)를 통하여 알아본다.
《가정보》의 계보 첫 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유씨의 친손도 사위나 외손과 마찬가지로 성(姓)을 꼭 기재하였다.(후기의 족보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둘째 자녀의 기재순위는 출생순위 즉, 연령 순 이다. 여자는 언제나 사위의 이름으로 기재한다.
셋째 문화유씨의 성을 가진 문화유씨의 친손뿐만 아니라 문화유씨의 외손, 외손의 외손, 외손의 외손의 외손......까지 모두 기재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문화유씨의 《가정보》는 친손과 외손을 모두 포함하는 자손보(子孫譜)라 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조선 말기의 족보에는 이성자(異姓者)는 보통 사위만이 기재된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족보가 외손(이성자)을 모두 기재하였다고 한다면, 조선 초기에서 말기로 옴에 따라 외손의 범위가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떤 동족(청주이씨,고성이씨,진성이씨,반남박씨)은 이미 17세기초에 외손의 범위가 '외손 3대'로 축소되었는데 반하여, 그 밖의 동족은 18세기 또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외손 3대'로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동족이 같은 연대에 외손범위를 축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사된 20개 동족 가운데 14개 동족은 18세기에 들어서 와서 외손의 범위를 3대 또는 2대로 축소하였다.
요컨대, 15세기, 16세기까지는 대체로 외손도 친손과 똑같이 한정하지 않고 모두 기재 하다가 17세기에 들어와서 일부는 외손의 범위를 3대로 한정하였고, 18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동족이 외손 3대로 한정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족보를 시간 한 동족의 외손제한 기재는 다음의 어느 한 과정을 밟은 것 같다. 즉,
가. 외손 전 부 → 3대→2대→사위
나. 외손 전부 → 3대→사위
다. 외손 전부→2대→사위
그러나 조선 중기에 족보를 시간 한 동족은 대체로 처음부터 외손 3대 내지 2대만 기재하다가 사위만 기재하게 되었고(예: 1702년 시간의 대구서씨의 경우), 조선 말기 내지 그 이후에 족보를 시간 한 동족은 처음부터 사위만을 기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 : 1821년 시간의 칠원제씨의 경우), 그 이유는 족보의 범례에 나타나 있는 용어를 빌리면, '본말(本末)'이나 '주객(主客)' 또는 '내외지별(內外之別)'을 밝히기 위함이다. 또는, 경제적 이유를 드는 족보도 있지만, 이 것 마저도 동족 즉 부계친의 의식이 강화되어 외손보다는 친손을 더욱 존중한 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문화유씨《가정보》의 예처럼 16세기에는 친손(부계친)도 외손(이성자)과 함께 성을 기록하였는데, 그 뒤에는 외손은 언제나 성을 기록하는데 대하여 부계친, 즉 본종은 시조만 성을 기록하는 현상도 본종(부계친)위주 사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자손이라도 동성동본의 자손과 이성의 자손을 구별한 데서 생긴 것이다. 즉, 족보의 범례에 따른다면 외손만 성을 기록하는 것은 본종 위주 내지 동성자손과 이성자손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 남녀 서열의 변화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아들, 딸(사위)을 출생순위로 기재하였으나, 중기, 후기로 내려오면서 아들을 먼저 기재하고 딸(사위)을 나중에 기록하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남녀 기재순위의 변천은 성의 기록여부나 외손의 범위축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동족의식과 관계가 있다. 즉, 후기로 내려오면서 본종사상(동족의식)이 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벌써 선남후녀의 양식을 따른 동족도 있고(평산신씨,고성이씨,문화유씨), 18세기에도 아직 남녀의 출생 순위의 방식을 따른 동족도 있기는 하나(반남박씨,연안김씨,달성서씨,용인이씨,동복오씨,풍양조씨,청풍김씨,남원윤씨,안동김씨), 대체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동족이 선남후녀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17세기에는 출생순위와 선남후녀의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18세기 후반부터는 선남후녀의 방식이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외손의 범위가 축소된 연대와 출생순위로부터 선남후녀로 남녀의 기재순위가 이행한 연대는 거의 동일하다고 하겠다.
이 선남후녀의 사회적 의미는 동족, 즉 본종을 존중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녀를 연령순으로 기재하는 것은 윤서(倫序), 즉 차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출생순위로부터 선남후녀로 바뀐 현상은 윤서보다 동족질서를 우위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계친에 있어서 선남후녀로 바뀐 시대에도 외손만은 이러한 선남후녀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대구서씨 세보(1775),기계유씨족보(1704].
▣ 양자와 종가사상(宗家思想)
종가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측면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여기서는 족보에 나타나 있는 양자문제의 측면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먼저 장남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의 입양문제부터 살펴보자. 즉, 가계 계승의 강도(强度), 다시 말하면 입양의 보편성의 문제이다. 하나의 예로 문화유씨 14개 파의 종손의 가계도를 분석해보면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파조(派祖)의 장남계보가 시종일관 계승된 집은 하나도 없다. 때로는 입양에 의하여 장남의 가계계승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차남, 3남 계열로 가계가 계승되었다.
② 조선 초기, 중기까지는 차남, 3남 계열로 파조의 계보가 계승되지만 조선중기, 후기부터는 장남계열의 가계계승이 고정되었다. 이렇게 볼 때 종가의 대가 끊겨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은 조선 중기 이후에 강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③ 문화유씨는 시조의 장남계보가 이어지지 않았다.(이러한 경향은 다른 동족의 족보에도 나타나는 경향이다.).
④ 조선 초기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의 가계도 차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장남이 동생의 아들을 입양하는 경우의 양부(養父)와 양자의 관계는 어떠한 혈연적 관계가 있는가를 역시 문화유씨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16세기까지는 형에게 친생자가 없는 경우 동생의 장남이나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동생의 차남.3남을 입양시킨다.
17세기부터는 동생의 장남(독자)을 입양시키는 두 가지 경우가 공존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거의 동생의 장자나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향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독자를 형에게 입양시킨 어떤 동생은 다시 다른 근친자를 자기의 양자로 입양시킨 사례도 있었지만, 입양할 수가 없어서 절가(絶家)된 사례도 있었다.
동생의 장자나 독자를 형에게 입양시켰는가 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종가사상의 유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초기에는 종가사상이 거의 없었고, 17세기부터 종가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후기에 들어와서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라 하더라도 형제간이라야만 동생의 장자를 형에게 입양시키는 것이지 4촌만 되어도 자기의 장자를 4촌집(큰집)으로 입양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자기의 장남을 큰집인 4촌집으로 입양시킬 정도의 '큰집 존중사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형제간에만 이 사상이 농후하였다고 하겠다.
▣ 항렬의 사용
이름의 기준이 되는 항렬자(行列字)의 사용 양식을 보자. 이 방법은 이미 고찰한 족보의 발간이나 외손범위의 축소, 또는 남녀의 기재순위의 변화에 의한 동족 성격의 파악 이상으로 직접적으로 동족조직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① 대략 고려 말기부터 형제간에 항렬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② 이때 이후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항렬자를 쓰는 범위는 점차로 4촌, 6촌, 8촌......등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조선 후기인 1864년(고종1)에는 31세부터 적용되는 문화유씨 전체의 대동항렬자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③ 가족적인 항렬이 동족적인 항렬로 확대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왜냐하면 가족보다 더 큰 동족의 최소의 범위를 8촌이라 한다면 대체로 8촌간에 같은 항렬자를 사용한 시기는 17세기에 들어와서이기 때문이다. 형제나 4촌간에만 항렬자를 사용하던 시기에 8촌 이상의 넓은 범위의 항렬자를 사용한 사례가 하나도 없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하겠다.
④ 특히, 어떤 넓은 범위에서 항렬자가 사용된다는 것은 바로 그 범위가 집단의 조직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직성과 통제성이 없으면 같은 항렬자가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17세기에 들어와서야 가족보다 넓은 하나의 부계 혈연집단으로서 8촌까지의 집단이 조직과 기능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령 17세기에 들어와서 8촌 범위의 항렬자가 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문화유씨의 모든 성원이 각각 그러한 범위의 항렬자를 제정,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대의 항렬제정의 범위가 8촌일 뿐이고 그 밖의 더 많은 사람들은 각각 현재, 4촌 6촌 범위의 항렬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통의 항렬자를 사용하는 동족결합의 범위는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대되어 19세기에 이르러 동성동본이라는 최대의 집단으로 확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항렬자를 보고 동족(동성동본)과 파(派)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이고 그 이전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항렬자 사용의 범위 확대라는 시대적 변화는 앞서 살펴본 외손범위의 축소, 남녀의 기재순위, 장남의 양자신분 등의 시대적 변화와 상응하고 있다. 끝으로 문화유씨 이외의 동족의 대동항렬이 결정된 연대를 보면, 18세기에도 있으나 대체로 19세기에 들어와서이며 20세기에 와서 항렬자를 제정한 동족도 있다. 연안김씨(1870), 남원윤씨(1860), 남양홍씨(1834), 용인이씨(1773), 능성구씨(1853), 남원양씨(1916) 등에서 이러한 사례를 볼 수 있다.(주: 문화유씨의 경우임.) 실제로 항렬의 결정에서는 대체로 오행의 원리에 따랐다.
함평이씨 기성군파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