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펜션의 흰둥이
물길이 마을을 에워싸듯 원을 그리며 흐르고 칠성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가랏마을. 가랏마을과 칠성산은 마치 서로를 바라보며 애간장 태우는 흡사 연인의 모습이다.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을 듯하면서 닿지는 않고 길이 없어 감히 사람이 오고 갈 수 없는 곳, 그러기에 칠성산에 전설은 마을 사람들 입을 통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사라지곤 하였다.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칠성산의 밑동이 중장비로 인해 파헤쳐지더니 시멘트를 입힌 농토 길이 생겨났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가랏마을과 고당리의 경계가 칠성산 밑으로 길이 생겨나면서 장벽이 무너지듯 기뻐하는 사람들. 고당리 사람들은 칠성산에 새로 난 산길을 통해 가랏마을로, 가랏마을 사람들은 고당리로 운동을 다녔다. 그리고 길이 난후 우후죽순처럼 크고 작은 펜션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하천을 따라 고당리로 운동하는 걸 좋아한다. 칠성산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도 좋고 낙엽 냄새도 좋다. 칠성산 모퉁이를 따라 돌다 보면 마주하는 앞산은 돌산에 마치 사과를 반쪽 잘라놓은 듯 직선의 절벽이 장관이다.
봄이면 돌을 비집고 진달래꽃이 분홍으로 물들고, 여름이면 푸른 물이 절벽을 타고 흐를 것만 같다. 가을에는 단풍의 물감이 붉게 빛나고 겨울에는 하얀 솜털을 뒤집어쓴다. 모난 말들이 마음에 차오를 때 칠성산 허리를 잡고 돌다 보면 불편했던 마음이 잔잔해지고 절벽을 움켜쥐고 삶을 살아내는 나무와 풀들을 보며 위로받는다.
봄이 되면서 양파밭에 잡초 뽑기와 잦은 소독을 하게 되면서 고당리로 운동가는 걸 한동안 멈추었다. 그러다가 나이만큼이나 불어나는 체중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런데 운동 종점 고당리 마을 끝자락에 낯선 건물이 어느 틈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판에 ‘무지개펜션’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나무판을 마주 보고 원목으로 지은 개집도 하나 놓여있다. 그 안에는 보기에도 튼실해 보이는 곰 같은 흰둥이 한 마리가 아주 순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흰둥이, 안녕! 가교리 아줌마야. 마당에 놓여 진 너희 집 그네 타도 돼?” 흰둥이는 알았다는 둥 꼬리를 흔들었다. 울타리가 없는 무지개 펜션, 나는 나무 그네로 다가가 그네를 타며 흰둥이를 바라보았다. 흰둥이는 꼬리를 흔들며 컹컹! 하고 짖더니 앞발을 모아 턱을 괴고 누웠다. 사람의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종종 고당리 길로 운동을 나섰다. 가서 흰둥이를 만나고 그네도 탔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흰둥이와 친해졌다. 철장을 사이에 두고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담 해주면 기분 좋은 듯 꼬리를 흔들었고, 내 손등을 핥기도 하였다. 나의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흰둥이도 내 말을 알아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떤 날은 흰둥이 안부가 궁금해 일부러 고당리를 가기도 하였다. 창살을 두고 만나는 흰둥이와 나는 서로에게 어떤 위험을 느끼지 못하였다.
여름 한낮, 가마솥 열기가 시골 마을을 삶아대고 있을 때 나는 고당리 길로 운동을 나섰다. 가랏마을 길을 벗어나 칠성산을 돌아가고 있는데 저만치서 어딘가 익숙한 모습의 개가 목줄을 한 채 중년 여자와 함께 걸어오고 있다.
나는 모른 체 얼른 흰둥이와 아주머니를 지나쳤다. 그런데 흰둥이는 나를 알아봤는지 가다 말고 되돌아섰다. 흰둥이는 개집 안에 있을 때와 다르게 개집 밖에서 보니 훨씬 몸집이 컸다. 내 뒷다리를 물려는 거처럼 맨살인 내 장딴지 가까이 주둥이를 댔다. “엄마야!”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주머니도 내 비명에 놀랐는지 흰둥이의 목줄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흰둥이는 흥분한 듯 앞발을 들고서 으르렁거렸다. 나는 도망치듯 얼른 그 자리를 피하였다.
며칠이 지나 다시 고당리로 운동을 갔다. 그리고 흰둥이한테 “안녕!”하고 손을 흔들었다. 흰둥이는 벌떡 일어나 개 집안을 서성이더니 다시 앞발로 턱을 괴고 누웠다.
“ 저번에 왜 나 물려고 했어? 내가 얼마나 너에게 잘해줬는데” 흰둥이는 힐끔 곁눈질하더니 눈을 감아버린다.
“말해보라고?”
흰둥이는 귀찮다는 둥 나를 등지고 옆으로 누워버린다. 나는 나무 그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원생활의 환상을 가지고 흰둥이는 망설임 없이 주인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고당리 산골로 이사를 왔다. 주인은 통나무로 펜션을 지으면서 나에게도 통나무로 만든 집 한 칸을 지어주었다. 심심한 것만 빼면 나무 냄새가 솔솔 나는 것이 집과 한적한 시골 마을이 좋았다.
주말이면 간간이 펜션에 손님이 왔다. 마당에서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밤새 떠들었다.
“컹컹! 컹컹! 컹컹!”
“저기요. 나도 한 입 주세요?”하고 말하면 일행 중 맘씨 좋아 보이는 사람은 고기를 가져다주었다. 역시 고기는 숯불에 구워야 제맛이다. 그러나 손님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분명 고기를 나눠 먹자고 말했는데 느닷없이 돌이 날아오기도 하였다. 자기들은 고기를 먹고 나한테는 돌을 먹으라 하는 건지. 그런 날은 주인을 따라 이곳에 온 게 후회되었다.
얼마 전부터 가을 모과를 닮은 아줌마가 무지개펜션을 찾아왔다. 와서는 혼잣말하고는 우리 집 그네를 공짜로 타고 갔다. “컹컹. 컹컹. 컹컹 아줌마 왜 허락도 없이 남의 그네를 타요.”하고 말했더니 무턱대고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나쁜 아줌마 같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가을 모과를 닮은 아줌마는 이제는 대놓고 무지개펜션 마당에 들어오더니 그네를 맘대로 탔다. 그러고는 혼잣말을 한참하고 갔다. 정신을 놓은 것이 분명하다.
여름 한낮, 외출만 하던 안주인이 오늘따라 목줄을 하더니 산책하러 가자고 한다. 앗싸! 오랜만에 산책이다. 안주인의 뒤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데 저만치서 어딘가 익숙한 모습의 아줌마가 걸어온다. 흡사 곰 한 마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컹컹! 하고 “반가워요, 아줌마. 운동가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휙 모른 채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아줌마 나라고요. 무지개펜션 흰둥이. 와? 아줌마 장딴지 봐라 쌀 한 가마니를 올려놔도 거뜬하겠는걸.” 나는 아줌마 장딴지를 놀리려고 다가갔더니 아줌마는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쯧쯧쯧. 창피한 건 알아서.” 아줌마를 놀리고 있는데 안주인이 내 목줄을 당기며 어서 가자고 한다. 나는 가을 모과 아줌마한테 서운하였지만, 안주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을 모과를 닮은 아줌마가 무지개 펜션으로 왔다. 드럼통 같은 몸을 에스라인을 만들겠다는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안타깝다. 매일 운동을 핑계로 이곳에 와서 그네만 타고 간 것이 언제인데 몸은 변한 것이 없다. 어떻게 저렇게 운동을 해도 드럼통인지 연구 대상이다. 아줌마는 언제나처럼 내 집 앞에 와서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제는 질린다. 그만 좀 왔으면 좋겠다. 에라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가을 모과 아줌마를 모른 척해야겠다.
흰둥이는 밤이면 불빛 하나 없는 고당리 마을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자꾸만 눈 속에서 어른거린다. 자연인은 티브이 속에서만 가능한 거였다는 걸 흰둥이는 너무 늦게 알아챘다.
*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근래에 참 많이 받는다. 그래서 소설을 가장한 수필을 써보았다.
수필같은 소설.
첫댓글
ㅎㅎㅎ 성공예감!!!
머릿속에 벌통 하나 농사하고 있습니다.
소설같은 수필...
수필같은 소설. 이제 시작의 문을 열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