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 19장 1-9 13-15
설교제목 : 리토스트론
코로나와 함께 하는 성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힘겨운 코로나의 시간이 열 달 째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있으신지요? 저 개인적으로 코로나의 발발과 맞물려 허리디스크가 오면서 제 인생의 젊음이 꺾이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과정에서 제 개인적인 작업은 죽음과 심판에 관련한 논문이었고, 단테의 지옥편과 씨름하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의식화할 필요성을 저에게 부과한 듯 합니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삶에서 경험하는 정신적 국면임을 동일하게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무의식성 속에 빠져 있는 인간은 지옥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안겨준 진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에 눈뜨게 했습니다. 인간이 기세등등하게 자랑했던 문명의 이기와 과학의 진보가 결코 우리의 생명과 평안을 담보할 수 없음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내심 부러워하던 서구 문명의 민낯 또한 우리는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확고부동하게 신봉했던 의례의 형식을 해체시켰고, 맹목적 신앙의 위험성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의식화된 독립된 개체만이 모든 것이 차단된 삶의 국면에서도 자신의 길을 오롯이 갈 수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를 통하여 무엇을 배우고 계신가요? 코로나와 함께 하는 성탄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새로운 희망과 질서를 갈망하는 이 어두운 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성탄일 것입니다. 외부로 향하던 삶의 에너지를 우리 자신의 내부로 거두어들여 우리 자신 안에서 새로운 희망의 별이 탄생하는 그런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엑체 호모 Ecce Homo
오늘까지 요한복음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그 밤에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빌라도에게 차례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고, 병정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색옷을 입힌 뒤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치며 조롱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했지만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해서 밖에서 기다리던 대제사장들과 경비병, 사람들에게 다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데리고 나오면서 빌라도는 말합니다. “엑체 호모Ecce homo, 보시오 이 사람이오” 대단히 유명한 말입니다.
그림 한 장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 장면은 15세기 이후 서양 화가들의 주요테마였습니다. 이 그림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그림(1480-1490)입니다. 벌거벗은 예수는 망토를 하나 걸친 채 서 있습니다. 고문의 흔적으로 알 몸에는 피가 모두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표정없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표정없는 예수, 상처입은 예수, 무력한 예수의 모습입니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영광스런 예수의 상보다는 이런 고통받는 무력한 예수상을 담아낸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참 인간이셨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라보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엑체 호모의 제목의 그림들을 보면,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예수의 상과는 사뭇 다릅니다. 화려하고 황금빛의 후광을 두고 자애로운 상을 그리스도에게 투사할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형상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생도 상처받고, 무력해지고, 고통 속에 찢겨지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만하는 불쾌한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처입고, 피흘리며 무력한 예수의 상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마주해야만 하는 삶의 진실이고 신비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화려하고 축복받은 출생이 아니었습닏.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여 마굿간에서 누추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이런 처절한 고통과 조롱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는 예수를 보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입고, 무력함에 진저리쳐야 하는 삶의 현실을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할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는 조롱과 멸시, 무력함의 십자가를 온전히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융은 “조시모스의 환상”이란 글에서 “성스런 변화의 과정은 인간의 이해 안에서 벌, 고문, 죽음, 그리고 변환으로 그 자체를 드러낸다”고 언급합니다.(C.G.Jung, Alchemical Studies, CW 13, para.139.)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통받고 무력한 예수의 상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원형적 삶의 국면이고, 그 고통을 넘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희망이 되고, 상처입고 치유된 치료자의 원형이 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엑체 호모, 예수를 보십시오.” 처절하게 상처입고 쓰러졌지만 다시 살아날 그분을 통하여 우리 삶이 치유되고 새로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제의 왕국에 살지만
그런데 “엑체 호모”라는 빌라도의 말에 대제사장과 경비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은 율법에 따르면 마땅히 이 자는 죽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기존 문법과 확고한 율법적 체계를 지닌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졌습니다.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향해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예수를 놓아줄 권한도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나를 어찌할 권한이 없을 것이요. 나를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라고만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의 권한은 바로 바로 하나님이시며, 죄를 묻는다면 자신을 넘겨준 자들의 죄가 크다고 확고히 답하십니다. 죽음의 위협으로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예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살려고 하는 자만 발버둥치기 마련입니다. 죽기로 마음 먹는 예수에게 권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내적 진실을 따라가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애쓰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니고, 자기를 가리켜 왕이라 하는 자는 누구나 황제를 반역한 자라고 소리칩니다. 타락한 종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하늘의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들의 기득권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결정적으로 유대인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이 유대인들의 진심일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금과옥조로 섬긴다 했지만 하나님 없는 껍데기 율법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은 아닌가 반문하게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세상의 왕국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황제의 힘과 물질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뼈 아프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눈은 자꾸 곁눈질하게 되고, 우리도 모르게 황제의 힘과 물질에 머리를 조아리며 그것을 쫓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매년 우리에게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왕으로 신봉하며 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점검하고 우리의 중심에 아기 예수를 다시 모셔들이는 일입니다. 황제의 왕국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의 지향은 하나님의 왕국, 영적인 왕국을 향해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리토스트론
그런 다음 빌라도는 ‘리토스트론’에 앉습니다. 관주를 보면 “돌을 박아 포장한 광장이나 길”이라 설명합니다. 히브리 말로 ‘가바다’,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권좌입니다. 권력의 자리입니다. 돌을 박은 자리는 깨뜨릴 수 없는 권력의 상징이자 판결의 자리입니다. 확고부동하고, 경직되고 딱딱한 신념의 자리, 비판의 자리입니다. 이런 리토스트론은 인간이면 누구나 앉으려 하는 욕망과 권력의 자리이고 경직되고 확고부동한 신념과 비판의 자리일 것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이들이런 리토스트론에 앉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리토스트론을 갖기 마련입니다. 패거리가 생기면 누군가는 우두머리가 나오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충동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리토스트론에 앉았지만 실상은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황제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리토스트론에서 빌라도의 무기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 역시 황제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는 자일 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야하고, 황제에게도 인정을 받아야하는 빌라도의 리토스트론은 힘의 상징이지만 두려움과 무기력의 상징인 것입니다. 리토스트론의 또 다른 이름은 두려움입니다. 내 자신의 자리, 영역을 더 확장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두려움과 무기력을 경험하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리토스트론이 있으신가요? 어찌보면 우리의 성탄의 기다림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놓은 리토스트론을 부수는 시간이자 집단의식이 우리에게 만들어 우러러 보게 한 우리를 조작하게 했던 리토스트론을 해체하는 시간입니다. 이 코로나의 시간은 인간이 신봉하던 돌로 만든 자리를 뒤흔들고 있는 듯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러러 보는 리토스트론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말구유 하나로도 아기 그리스도를 담아낼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용기있게 이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