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으로 그림 도구를 받아서 그림을 제대로 잘 그릴 생각을 하다니.
그땐 전혀 우습지 않았어. 좀 긴장이 됐지.
차상, 차하도 돼.
크레파스하고 스케치북이 상품으로 나오긴 하니까 모자라는 대로 어떻게 되겠지.
그냥 특선이나 입선은 곤란하지. 공책이나 연필밖에 안 주니까.
상장 뒷면에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나는 아버지가 사준 크레파스를 들고 학교로 갔어.
한 해 전과는 다르게 크레파스 뚜껑이 달아나 버려서 습자지를 덮고 고무줄로 동여맸지.
한 해 전처럼 그림을 그려서 제출할 도화지를 받아 들고 뒷면에 미리 부여받은 내 번호를 적었지.
나는 124번이었어. 잊어버릴 수가 없는 번호야.
그 몇 해 전에 무장간첩들이 남한으로 내려왔는데 무장간첩을 훈련시킨 부대 이름이
124군 부대라서 그런 게 아냐.
하여튼 나는 도화지 뒤 네모난 보랏빛 칸에 검정색으로 번호를 124라고 분명히 적었어.
내 앞에는 언제부터인가 여자아이가 두 명 앉아 있었어.
한 아이는 낯이 익었어.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지만 천수기 선생님하고 같이 가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자주색 원피스에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고 머리에 푸른 구슬 리본을 매고 있는데
무척 얼굴이 희고 예뻤지.
나하고 한반이었다고 해도 나 같은 촌뜨기에게는 말을 걸지도 않았겠지.
그 여자애와 나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어.
크레파스부터 한번도 쓰지 않은 새것,
한 번만 더 쓰면 더 쓸 수 없도록 닳은 것이라는 차이가 있었어.
처음부터 다른 길에서 출발해서 가다가
우연히 두어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그림을 그리게 되겠지만
앞으로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야.
그 여자아이도 그걸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어.
나를 한번 힐끗 넘겨다보고는 코를 찡그리더니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어.
자리를 뜰 것 같았는데 계속 그리기는 하더군.
나를 의식하기 전에 밑그림을 그렸던 게 아까웠겠지.
히말라야시다가 쑥색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화단이 있고
화단 뒤에 나무쪽을 붙인 벽이, 벽 위쪽에 흰 종이가 발린 유리창이 있는 교사가 있었어.
히말라야시다 앞에 키 작은 영산홍이 서 있고,
화단을 따라 발라진 시멘트 길에 햇빛이 하얗게 비치고 있었어.
축구 결승전이 열리고 있을 공설운동장은 꽤 멀었지.
멀지 않다고 해도 나에게는 목표가 있었어.
장원, 그리고 다음 군 사생대회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나는 그림에 집중했지.
내가 생각해도 그림은 잘 되었어.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그림을 제출했어.
그 여자아이는 진작에 가고 없었어.
그런 아이들이야 재미로 그리는 거니까 쉽게 빠르게 그리고 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지.
할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림 같은 건 돈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하는 놀이라고.
우리 같은 가난뱅이 농사꾼 무지렁이들이 무슨 예술을 하느니 마느니 개나발을 불다가는
쪽박이나 차기 십상이라는 거지.
있는 쪽박이나 잘 간수하는 게 주제에 맞는다는 거야.
그림을 제출하고 나면 공설운동장에 갈 수 있고
잘하면 축구 결승전 끄트머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
내가 정작 궁금한 건 심사 결과니까 말이야.
축구야 누가 우승하면 어때.
어차피 군민 체전이니까 군민들 중 누군가 이기는 거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내가 일 년 동안 퍽 성숙했다는 증거였어.
그렇게 되는 데 열 살짜리가 열한 살 이상이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서 장원을 했다는 게
큰 작용을 한 건 당연하지.
오후부터 3층짜리 신축 교사 2층 교실 한 곳에서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했어.
나는 예전에 함께 축구를 하던 아이들과 공을 차면서 시간을 보냈어.
이상하게 축구가 재미가 없었어.
자꾸 눈이 심사를 하고 있을 교실로 향하는 거야.
내가 골을 집어넣을 수도 있는 기회에서 엉뚱한 데 눈을 주니까
아이들이 정신을 어디다 파느냐고 화를 냈지. 나는 미안하다고 했고.
그러면서도 아, 이제 나한테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사실 그건 크레파스나 스케치북 같은 상품이 아니야.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천부적인, 천재적인 재능을
명백히 확인받고 싶다는 충동이었어.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어.
아무리 시골 구석에서 염소나 키우고 구렁이를 잡아다 장날에 내다 파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내 아버지니까.
심사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줄은 몰랐어.
다리가 아프도록 축구를 하고 수도꼭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씻고 다 말리도록
심사는 끝나지 않았어.
아이들이 풀빵을 사 먹으러 간다고 학교 밖으로 갈 때까지도.
나는 평소처럼 아이들을 따라가지 않았어.
고픈 배를 부여잡고 교사 앞에 앉아 있었어.
심사 결과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야.
그냥 어떤 기미라도, 결과의 부스러기라도 얻고 나서야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아이들이 가버리자 학교는 조용해졌어.
그리고도 한 삼십 분은 있다가 다른 학교에서 온 심사위원들이 걸어 나왔어.
물론 나한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주 선생님이 보였어.
심사를 한 건 아니고 우리 학교의 미술 지도교사로 참관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어.
교문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심사위원들과 인사를 나눈 주 선생님은
뒤돌아서서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어.
새하얀 시멘트 길에 떨어지던 새하얀 햇빛,
그 위에 또각또각 찍히던 그 발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해.
선생님은 히말라야시다 앞 시멘트 의자에 숨은 듯이 앉은 내게 와서는 불쑥 손을 내밀었지.
"백선규, 축하한다."
나는 못잊어.
"장원이다."
나는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렇게 목이 죄는 듯한 느낌은 평생 다시 없었어.
그 뒤에 수십 번, 이런저런 상을 받고 수상을 통보받았지만.
나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어.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무척 놀라고 당황했어.
하지만 곧 내 어깨를 잡고는 내 얼굴을 가슴에 가만히 안아주었어.
그 따뜻하고 기분 좋은 냄새, 못 잊어.
1
나는 한 번도 상 같은 건 받아본 적 없어.
학교 다닐 때 그 흔한 개근상도 못 받았으니까.
상에 욕심을 부려본 적도 없었어. 내게는 모자란 게 없어서 그랬는지도 몰라.
어릴 때는 부유한 집안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딸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여자대학에서 가정학을 공부하다가 판사인 남편을 중매로 만나서 결혼했지.
내가 권력이나 돈을 손에 쥔 건 아니라도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한 적도 없어.
아이들은 예쁘고 별 문제 없이 잘 자라주었지.
큰아이가 중학교부터 미국에 가서 공부할 때는 적응에 힘이 들었지만
결국 학생회장까지 지내서 신문에도 여러 번 났지.
나는 상을 못 받았지만 내가 타고난 행운, 삶 자체가 상이다 싶어.
그렇지만 단 한 번 상을 받을 뻔한 적은 있지.
스스로의 실수 때문에 못 받은 거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내가 받을 상이 남에게 간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까.
할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면.
아니면 천수기 선생님한테라도.
왜 안 했을까.
그때 나를 스쳐가던 그 아이, 그 아이의 표정 때문인지도 몰라.
땟국물이 흐르던 목덜미, 전신에서 풍겨나던 뭔가 찌든 듯한 그 냄새, 그 너절한 인상이
내 실수와 잘못된 과정을 바로잡는 게 너절하고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을 거야.
어쩌면 그 결과 한 아이가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씻지 못할 좌절감이
내게도 약간 느껴졌는지도 모르지.
상관없어.
나는 그런 상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도 행복해.
그런 스트레스를 받는 것 자체가 싫어.
왜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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