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조절과 Brand 관리로 Beethoven, 음악을 독립시키다
청력을 잃고도 당당함으로 시대를 휘저은 Ludwig van Beethoven(1770-1827, German) (DBR)
1793년, 비엔나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이는 홀로 분을 삭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나타, 협주곡, 교향곡 등 배워야 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조그마한 관심조차 베풀어주지 않았다. 당대 음악계의 원로였던 스승은 연일 계속되는 연주 스케줄과 후원자들과의 교제에 바빴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이는 자신의 사부를 제쳐두고 다른 선생들을 기웃거리며 지휘법 lesson을 청강하고 성악 작곡법을 지도받기에 이른다. 불과 1년 전 자신을 ‘음악의 수도’로 이끌었던 스승은 이제 ‘불성실한 노인, 의뭉스러운 영감’으로 비하되는 대상이 되고 만다. 여기서 젊은이는 신출내기 작곡가로 데뷔하는 Ludwig Van Beethoven이고 스승은 Mozart, 살리에리에게 공히 존경받던 명인 Haydn이었다.
시간이 지나 Beethoven이 한참 Vienna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을 1806년의 일이다. 당시 Vienna은 Napoleon의 France 군대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어느 날 Beethoven의 강력한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France 외교관을 초청한 자리에서 당대 최고의 명인에게 작품을 들려주십사 청원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베토벤은 강하게 거절하며 공작을 세게 노려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주변의 귀족들이 ‘선생님’에게 공작의 체면을 보아 한번만 연주해달라고 부탁해도 Beethoven은 타협하지 않았다. 천재 작곡가의 자부심과 자기애를 볼 수 있는 일화다.
만약 Beethoven이 Hayden이나 리히노프스키에게 충실한 제자와 친구의 역할에 머물렀다면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교향곡 5번이나 opera Fidelio처럼 변혁적인 작품들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No’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베토벤을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은 그의 반골 성향이 그를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영화 ‘Copying Bethoven (2006)’에서 표현됐던 것처럼 지나칠 만큼의 자유로운 영혼과 자기애적 요소가 창의성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라는 관점이다.1
그러나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베토벤의 삶은 여러 가지 역설(paradox)과 입체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한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원숙한 청년 예술가 대접을 받는가 하면 노년에는 작품의 잔금을 치르지 못하는 귀족들에게 소송까지 걸어 받아내고야 마는 괴짜 작곡가의 면모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의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blackbox의 내용을 ‘천재성’이라고 결론짓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과연 그뿐일까? paradigm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천재는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일까?
‘신뢰’와 ‘매력’
Ludwig van Beethoven은 서부 독일에 위치한 영방 국가(선제후(選帝侯)가 다스리는 곳으로 19세기 초까지 독일은 수십여 개의 영방으로 분리돼 있었다) 중 하나인 본 지역에서 태어났다. ‘판(Van)’은 원래 Netherland 귀족 가문의 남자에게 붙는 표현이다. 독일어로 ‘Von’, 프랑스어나 이태리어의 ‘De’에 해당하는 수식이다. 음악사학자들은 비교적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귀한 핏줄’에 속했던 베토벤의 출신 성분이 훗날의 독자적이고 올곧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0대 당시 베토벤의 집안은 이미 몰락해 있었고 아버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궁정 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결국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비상한 계기를 잡는 것이 절실했다. 흔히 베토벤의 평전이나 그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에서 ‘불행한 유년기’ ‘암담했던 시기에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음악인’으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삶을 사료에 입각해서 추정해 나가는 이들은 조금 견해가 다르다. 사회학자이자 음악학자인 Tia Denora는 베토벤을 가리켜 ‘진지하고 사고가 싶은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고 지적한다. 당시에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고관이 칭송받던 시절이 지나가고 깊은 사유와 고민을 통해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진지한 예술’을 할 수 있는 품격을 갖춘 인간을 원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trend에 가장 부합하는, 신뢰성 있고 매력적인 인재였다. 베토벤은 친구였던 의사 베겔러의 소개를 받아 Von Breuning 가문의 식객으로 초청받았다. 여기서 베토벤은 적은 급료를 받고도 성심 성의껏 자녀들을 지도했고 세심한 테크닉까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Von Breuning 가문 사람들은 젊은이의 태도에 반해버렸다. 단순히 기량 있는 예술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됐다’고 평가받은 셈이다. 베토벤은 Von Breuning 가문으로부터 교육 지원과 함께 생계를 감당할 수 있는 정기적인 급여를 받으며 연주 기회도 제공받았다. 부유했던 이 집안은 당시 중서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왕족이었던 Austria 여왕 Marie Theresia의 아들인 Maximilian에게까지 베토벤을 소개했다. 궁중이나 지역 제후의 가문에 소속된 예술가만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시기에 ‘야인’ 베토벤에 대한 지원은 거의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marketing 연구자인 Chrostoph Van den Bulte 교수도 비슷한 논지를 남긴 바 있다. ‘연결망의 Hub’에 위치한 사람과 가치를 교환할 때에 비로소 network의 덕을 보게 된다는 요지다.
Communication Skill로 발판을 마련하다
그러나 매력 발산 한 가지만으로 작곡가가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훌륭한 음악가’는 넘쳐났다. 명망가들의 ‘살롱’과 ‘가족 음악회’에서 수많은 예술 영재들이 기량을 겨루고 있었다. 계속되는 국가 간의 갈등과 국지전으로 경제기반이 약화돼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귀족들은 저마다 취미를 과시할 수 있는 연주회와 모임을 만들었다. 1780년대 후반의 베토벤은 Von Breuning 가문의 소개를 받아 자신의 대표적인 Piano Sonata를 헌정할 주인공을 만났다. 바로 Waldstein 백작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척으로 Vienna에서 본으로 파견됐던 이 젊은 귀족은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에게 후원을 했고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선물했다. 후원 결정을 한 이유는 ‘모차르트와 Hayden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영재의 재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의 작곡가들과 달리 발트슈타인이 베토벤에게 베풀었던 호의는 취향이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까웠다. 명문 귀족으로서 그 이름을 과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고 사회가 주목할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길 원했던 것이다. 음악사학자 Julia Moore는 베토벤이 귀족들과 대화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고 지적한다. 비록 동시대의 예술가였던 괴테, 브렌타노처럼 고등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수사학, 문학과 같은 분야에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용어와 맥락을 꾸준히 학습하고 읽어낼 만큼 성실하고 명석하다는 증거였다. Plato을 주제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논할 수 있었고 라틴어 시구를 인용하면서 인문정신을 피력할 수 있었던 ‘백작의 친구’는 작품마다 후원자의 이름을 붙이며 특유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변방이 아니라 주류 문화계를 선도하는 천재상을 원했던 발트슈타인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하이든의 손에 담아 자네에게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네”4 라고 말하며 애석하지만 ‘가장 소중한 친구’를 Vienna로 보내는 데까지 일조했다.
베토벤은 작품의 의도를 언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고 있었다. 유년기의 그가 처음 사사했던 오르가니스트 네페(Neffe)는 유난히 소통을 강조했다. 베토벤의 10대에 만들어진 첫 작품 키보드변주곡집(WoO 63)과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선제후(Elector)’는 초연 때부터 궁중에 헌정됐다. 작곡가들은 외부에 곡을 선보이기 전에 계약주의 궁정이나 관청에서 시연을 통해 점검을 받았다.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곡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계약주가 이해하지 못한 작품들은 거의 무시당하거나 대가를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버려지기도 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새롭게 설명할 능력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타인의 검증을 받은 감성을 일반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결국 베토벤은 단순히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을 후원자들에게 제대로 selling하고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code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던 셈이다.
당시 작품의 생산 구조와 비교해 보면 분석력이나 언어 구사 면에서 탁월했던 베토벤은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당시 베토벤의 선배였던 모차르트는 ‘매우 신선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양산하는 작곡가’로 낙인 찍히곤 했다. 왕실의 인증과 탁월한 경력으로 명사가 됐던 살리에리는 이미 식상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장이 냉정하게 비평(Critic)을 통해 창작의 가치를 재단하고 계약주가 특유의 감식안으로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던 시기에 베토벤은 ‘그들의 언어’로 작품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발트슈타인 백작을 비롯해 그의 후원자 친구들은 이것을 베토벤의 매력이라 불렀다.
속도 조절의 미학
후원자들은 23세 이후의 베토벤에게 project나 활동을 사실상 백지 위임했다. 발트슈타인의 소개로 Vienna의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문객으로 살롱에 들어간 베토벤은 어린 나이에 평균 이상의 급료를 제시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에 베토벤이 받았던 연봉은 600플로린가량인데 이는 궁중에서 활동하는 카펠마이스터(지휘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공작은 서자 문제로 인한 부인과의 갈등 등 복잡한 가정사에도 꾸준히 베토벤을 지원하려고 애썼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 ‘금요일 아침 음악회’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꾸준히 친구들을 모아 베토벤을 소개시켜줬고 ‘기사 협회’를 결성해서 베토벤의 소중한 작품들을 collection으로 표집해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기도 했다.5 공작은 Rusia의 압제하에 있던 폴란드에서 망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보편적인 예술을 통해 유럽 전역을 풍미할 것이라 기대되는 베토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자만하거나 자신을 과시했다면 장기적으로 이런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분석한다. 베토벤은 ‘속도조절’에 능했다. 빠른 출세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할 만큼 그는 현명했다.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고 영향력을 입증받았다고 해서 금세 대작(大作)의 길로 이행하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1790년대에 비엔나의 명망가들이 개최하는 살롱에서 자주 초청받던 연주자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도 베토벤은 끊임없이 스승을 찾아다녔다. 이미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었지만 기꺼이 학생이 됐다. 아직 하이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1792년에는 유명한 violinist인 Schuppanzigh가 이끄는 4중주단에 들어가 청강생으로서 기악 연주법을 배웠다. 또 권위 있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하이든의 친구였던 Albrechtsberger에게 대위법(Counterpoint)을 배우면서 큰 흐름으로 작품의 철학을 표현할 줄 아는 자세를 체득했다. 훗날 베토벤은 알브레히츠베르거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인내, 성실, 불굴의 자세, 그리고 내면의 진지성에 호소하는 작업이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고 강조했다.”6
두 번째로 그는 자신의 position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알았다. 왕족이나 명문가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금세 ‘kappelmeister’가 되려고 단꿈을 꾸는 이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젊은 베토벤은 ‘충실한 건반 연주자이자 훌륭한 pianist’로 평가받았다. 출판 시장에서도 그의 피아노 소곡집들이나 trio들은 절찬리에 판매됐다. 출판업계가 작곡가의 노고를 좀체 인정하지 않던 시절에 보기 드문 대접이었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공개 연주는 대부분 바흐를 비롯해 지나간 시대의 대가들이 남긴 작품을 선보이거나 자신이 신중하게 고른 작품 중 일부를 시연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795년이 돼서야 기사협회의 후원을 받아 자신을 후원한 명문 귀족들의 친구로서 피아노 콘체르토를 대중에게 선보인다. 그가 story를 만들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했거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결국 진가를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대의 paradigm이 ‘진지한 음악과 진지한 천재’를 점점 원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그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으로 청중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썼다.
베토벤의 속도조절 전략은 작품의 타깃 설정 과정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의 작곡가들이 듣기 쉬운 음악을 지향했다면 1790∼1800년대 초반 문화계는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청중들끼리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즐기는 장르를 선호했다. 실제로 베토벤은 음악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아는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파했다. Gottfried Van Swieten 남작과 Von Lobkowitz 공작이 대표적인 청자였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여러 국가를 여행하면서 계몽주의 철학과 진지한 고민을 강조하는 북독일 철학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괴테를 비롯해 독일어권의 청중은 원숙한 천재의 등장을 원했다. 베토벤은 이들의 취향을 집중적으로 반영한 작품을 내놓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략은 많은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설득력을 얻는 데 공헌했다. 1800년이 되자 남독일의 시골에서 이사한 천재 작곡가는 비엔나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예술가의 철학을 필요로 하는 시대
조직경제학을 연구하는 피에르 아출라이 MIT 교수는 천재의 영향력에 대해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영재 과학자가 죽게 되면 작업을 함께하던 연구자의 논문 생산성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당사자와 관련 없는 다른 이들의 연구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천재가 죽으면 친구의 친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가장 큰 영향인자는 죽은 이의 풍부한 자금이나 인맥이 아니라 연구의 저간에 흐르는 철학적 문제였다.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사상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베토벤에게는 지나간 시대의 빈자리가 일종의 기회였다. 과거의 스타들은 저마다 커다란 빈자리를 만들고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교향곡과 협주곡 분야에서 새로운 금자탑을 쌓았지만 자신의 작곡법을 이론으로 체계화해서 설파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자신의 음악이 당대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제대로 청중을 설득하기 전에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음악계에 던졌던 여러 실험적인 작품들이 이렇다 할 만한 해석 기준이나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Dietersdorff를 비롯해 다른 작곡가들도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모차르트가 제시했던 혁신 코드를 새로운 방법으로 정의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시대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터키 전쟁이 일어났고 inflation으로 작곡가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안정적으로 기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베토벤의 사부들도 뚜렷한 입장을 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이든은 한참 런던과 비엔나를 오가며 자신의 오라토리오 작품 흥행에 몰두했다. 훗날 베토벤이 그를 회고했을 때처럼 하이든의 교향곡들은 주제가 다르고 진행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 대부분의 동기 표현이나 악상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
살리에리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1800년대 이후부터 말년까지는 거의 제자 양성이나 교회음악계에 봉사하기 위한 작품을 썼다. 결국 베토벤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지나간 시대의 패러다임이 밝고 경쾌하고 듣기 쉬운 음악이었다면 앞으로는 어떤 작품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그가 가진 본연의 성품이 중요한 실마리가 됐다. 그는 항상 큰 스케일의 작업을 거쳐서 악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일종의 ‘숙고주의(Deliberation)’인 셈이다. 무엇보다 단순한 표현 이상으로 거대한 모티브를 중시했다. 우선 한번 완성한 다음에 여러 차례에 걸쳐 부분을 수정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악장 전체를 새로 작곡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청중들도 큰 차원의 스케일에서 완결 구조를 가지려는 작곡 방법에 동감을 표했다. 확실히 그의 구상은 실험적이었다. 과거 작품들이 모듈화된 부분을 반복하면서 친숙함을 확보하려고 애썼다면 베토벤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통짜 이론(Overarching Theory,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사물을 하나로 설명하는 이론)’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대 리더들은 더 이상 모방과 반복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위대함’ ‘진지함’ ‘새로움’과 같은 거대 담론을 뒷받침할 만큼 큰 스토리를 가진 작품을 원했다. 결국 베토벤은 시대의 요구에 맞게 자신의 작품이 갖고 있는 구조와 표현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해나갔다.
이런 노력을 기반으로 탄생된 작품이 피아노 트리오 1번(Op.1)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 중에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작품 중 하나다. 2, 3부 이상 구매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대 비엔나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들이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 킨스키 백작, 하이든을 후원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물론 연주하기 쉽고 가볍고 대중적인 작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귀족들은 살롱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다. 사회학자 Tia Denora는 이러한 베토벤의 ‘지식계층을 위한 음악’에 대해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답변과 설명을 갖춘 경우’라고 지적한다. 결국 사람들은 베토벤의 표현과 기량뿐만 아니라 철학과 가치를 함께 사고자 했던 것이다.
베토벤, 지휘자가 되다
그렇다면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인으로 인식되게끔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오케스트라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베토벤은 활동 초창기에 피아노를 중심으로 일부 악기 간의 조화를 확인하는 곡을 썼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악기를 통해 역량을 발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알브레히츠베르거를 비롯한 대가들에게 배운 작곡 기법이 누적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집대성할 만한 큰 스케일의 교향곡에 관심을 가졌다.
여기에도 친구들이 한몫했다. 자신의 작품이 갖고 있는 실험성과 성공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구독자들과 공연기획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리히노프스키 공과 그 주변의 명문 귀족 후원자들이 그 주역이었다. 이들은 ‘알타리아’라는 출판사와 베토벤의 작품을 전속 계약하기로 하고 전문 구독자들이 자유롭게 베토벤의 작품을 향유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플랫폼 비즈니스를 구상했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후일 베토벤이 알타리아뿐만 아니라 각각 지적 재산권의 표준이 달랐던 독일과 영국, 프랑스 곳곳에서 작품을 출판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비엔나의 귀족들은 작품의 구독과 구매/공연장 섭외와 연주회 콘셉트 기획을 통한 한정된 청중의 선정/공연 시연 후 의견 교환 및 각종 미디어를 통한 여론 조성 등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베토벤은 이러한 플랫폼에 힘입어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이 시중에 유포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전까지 곡을 지도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감독(Director)이 자신의 작품 구상과 방향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앞에서 직접 지휘(Conducting)를 하는 관행이 생겨난 것이었다. 콘서트 지휘자(Concert-Conductor)의 탄생이다. 이는 과거의 탈중심화된 작품 생산 방식(Decentralized Production)에서 벗어나 집중화되고 체계화된 형태로 산업의 구조로 진화하는 원동력이었다. 지휘자라는 존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자 작곡가나 연주자가 자신의 의도와 메시지에 맞게 청중이 감상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7 극장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과거의 연주회는 사교의 장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조용한 감상이나 집중을 요하지 않았다. 공연장 내에서 식사를 하면서 곡을 듣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러나 심각하고 진지한 음악을 했던 베토벤과 그의 친구들은 이제 공연장 안에서 음악이라는 독립적인 아이템을 감상하면서 그 순간 자체에 집중해 명상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음악 작품이 이제 일상의 맥락에서 독립돼 하나의 생산 시스템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제품으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있었던 베토벤은 자신의 교향곡이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그리고 매우 진지한 방식으로 청중에게 전달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1800년 4월 비엔나의 부르크 극장에서 열렸던 교향곡 1번 초연은 슈비텐 남작 일가의 지원하에 성공리에 연주될 수 있었다.
1800년부터 1801년까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하는 대작 2편(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을 남김과 동시에 인생의 색깔도 점점 짙어져 갔다. 유명한 소나타 ‘월광(Sonata quasi una fantasia, Moonlight)’을 작곡하는가 하면 흥행 무용가이자 발레단 감독이었던 Salvatore Vigano의 리브레토를 기반으로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라는 발레 서곡도 흥행시켰다. 또 1799년부터는 유명한 ‘불멸의 편지’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안나 브룬스빅과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풋풋한 사랑을 키워가기도 했다. 아직 그에게 ‘청력 상실’이라는 불행이 닥치기 전의 일이었다.
‘단계 전략’을 통해 성장했던 오피니언 리더
베토벤의 57년 생애에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사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명문 귀족들 사이에서 천재로 호평받았던 나날도 있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어려움과 전란으로 인해 사회가 피폐해지자 사교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평면적으로 베토벤을 괴팍한 천재라거나 막연히 낭만파의 대부라고만 조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은 생각보다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networking system에서 추구되던 상식을 기반으로 한 음악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음악을 하고자 했고 그러한 이상이 당대의 문화인들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만약 베토벤이 스스로 이슈를 셀링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금세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외면했을 것이다. 베토벤이 활동했던 시기부터 음악인은 더 이상 상류층이 원하는 결과물을 제조해 내는 ‘직인’이 아니라 고유의 영혼과 작품관을 지닌 ‘창조자(creator)’로서 존중받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원동력에는 베토벤처럼 자신의 내공을 갈고 닦기 위해 긴 기간 고도의 집중력과 communication을 통해 외부 환경과 소통하고자 했던 노력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하려는 모든 리더는 처음에는 점진적인 성과의 축적과 자기 표현을 통해 정당성을 입증받아야 한다.
이제 30세, 비로소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속 깊은 예술가는 그렇게 차분하게, 그리고 서서히 다가올 ‘운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혜옥, DBR 109호 (2012년 7월 Issue 2)
Beethoven 추천 음반
1770-1800 베토벤의 생애 ‘전반기’(前半期)를 대표하는 작품들
피아노 트리오 작품번호 1번(Op.1),
수크 트리오(Suk Trio), DENON, 2008.
1795년 출판된 이 작품은 베토벤의 가장 대표적인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의 음악 살롱을 위해 헌정한 것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알레그로/아다지오/스케르초 또는 미뉴엣/프레스토 또는 프레스티시모의 순서로 완료되는 전형적인 구성을 띤다. 후일 베토벤은 이 작품을 수정해서 C 단조 String Quartet Op. 104에 반영했다.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인들인 수크 트리오가 1984년 작업했던 하모니가 잘 반영돼 있다.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퀸텟, E-Flat, Op.16.
피아노 알프레드 브렌델 외 3명, 필립스
1796년 작곡된 것으로 모차르트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 진 작품이다. 베토벤은 이 작품과 동일한 세팅의 현악 트리오(바이올린/비올라/첼로) 구성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바로크 음악과 낭만음악 모두에서 기량을 선보였던 하인츠 홀링거, 권위 있는 베토벤 해석자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 브랜델이 함께한 음반으로 특정 악기를 중심으로 초점화된 하모니를 원했던 베토벤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해석이다.
베토벤 교향곡 1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푸르트 벵글러 지휘, Naxos
베토벤 음악의 ‘가장 진지한 후원자’ 중 하나인 고트프리트 폰 슈비텐 남작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사실상 그는 현악 4중주, 피아노 콘체르토, 각종 소곡집 등에서 동원된 다양한 악기와 관련된 스킬이 오케스트라 표현을 통해 집약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동원된 악기군만 해도 플루트, 클라리네, 파곳, 오보에, 호른, 트럼펫, 팀파니, 현악기 등의 세팅으로 당대로서는 역동적이고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다. 당시 비평가 베버는 ‘불같이 격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2차대전 전/후 교향악단의 전통을 보존한 명 지휘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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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력 잃은 Beethoven, 당당함으로 시대를 휘젓다
“한때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인정받았던 청각이, 이제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어.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해야 할 때에 위축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치고 가슴 아픈 일이지…. 내 가장 친한 친구들, 슈밋 박사와 리히노프스키 공(公)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너희들(동생 칼과 조카 요한) 중 누군가가 그들에게 받은 선물을 꼭 간직해 주기를.”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보내는 유서
베토벤에게 서른 살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기였다. 우선 교향곡 3번을 구상하면서 기존 작품과 차별화된 실험을 감행하려던 때였다. 또 친구들(후원자들)의 신의와 후원도 매우 두터워서 그들의 힘을 빌려 여러 독주회와 협연을 하고 권위 있는 연주자로 인정받는 시절이기도 했다. 위의 유서를 쓰기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가장 화려한 젊음을 보내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권위 있는 음악 비평지인 <비엔나 음악 신문(Wien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은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라며 1800년 4월2일 베토벤이 직접 지휘했던 교향곡 1번 연주를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가혹한 운명이 닥쳤다. 명석한 두뇌와 절대음감으로 인정받았던 작곡가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청력을 잃은 것이다. Tinnitus라고도 알려진 이 질병은 26살이던 1796년부터 베토벤을 괴롭혔다. 처음에는 메니에르 병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거나 이명 현상이 발생하는 듯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나 음악 감상도 어려워졌다. 청력 장애가 점점 심해지자 극도로 예민해진 작곡가는 주변 사람들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생애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가 청력을 잃고 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고 평가한다. 유서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가게 됐다. 당대 지식인들의 호의에 기생하는 명사가 아니라 당당하게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어느 소설가가 자신의 삶을 ‘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베토벤의 삶도 격동의 시대에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밝히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그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나타 ‘열정’을 비롯해서 피아노 협주곡 ‘황제’, 교향곡 5번 ‘운명’ 같은 강인하고 장엄한 작품들 역시 이 시기에 나왔다. 시대의 변화를 읽은 베토벤의 새로운 예술적 선언이었다. 절망의 끝에 다다랐던 예술가가 본격적인 자신의 opinion을 세상에 밝히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고, 그가 지향했던 가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객관적 통찰로 위기를 정면돌파
전략 연구자인 Robert Michell과 그의 동료들은 경영자가 전략적 일관성(consistency)을 갖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메타인지능력(Metacognition)과 환경역동성(Environmental Dynamism)에 대한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지나간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위치와 환경 변화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들은 ‘감’이라는 경험적인 요소와 기존의 성공 공식에 의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환경을 통찰할 수 있는 이들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도 강한 정면 돌파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베토벤 역시도 객관적인 성찰이 가능했던 사람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돌아온 그는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재개한다. 구시대의 귀족이었던 친구들이 ‘허락해주는 연주’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1802년부터 1813년까지의 베토벤은 교향곡 3번부터 8번에 이르는 굵직한 작품들을 써내려 갔다. 예전에 작곡했던 피아노 Sonata series에 이어 ‘합창 환상곡(Choral Fantasy. Op. 80)’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1805년 이후부터는 리히노프스키 공을 비롯한 살롱 후원자들에 대한 의존도 역시 점점 줄어갔다. 그의 수입은 점점 후원자들의 project 일환으로 조성된 기금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출판한 작품의 인세를 중심으로 채워지게 된다. 친구들에게 항상 ‘음악가는 작품을 통해 충분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세상과 직접 소통하며 적극적인 전략을 모색할 것을 강조하던 베토벤이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구호로 외치던 ‘European 정신’을 그는 당당하게 business model로 입증해 냈다.London과 Paris, 그리고 Berlin과 Vienna와 같은 굵직한 문화 중심지마다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지적 재산권 규정을 간파하고 국제적인 규모로 작품을 출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시대의 변화를 주도 면밀하게 읽어 냈다. 자신의 친구였던 브렌타노나 실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식인이 자유롭게 의견(opinion)과 문화 코드(cultural code)를 창출하고 대중이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가능성에 점점 빠져들게 됐다. 이것은 후원자들과 ‘위대한 천재’의 모습을 논하던 20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이상이 갖는 가치를 찬양한 교향곡 9번 ‘합창’의 구상 역시 이 무렵부터 진행돼 왔다고 음악사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작곡가에게 음과 선율, 그리고 곡의 구조를 형상화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청력’이 상실돼 간다는 것은 최대의 위기였다. 특히 작곡가가 작품을 생산(production)하는 것뿐만 아니라 후원자와 대중들 앞에서 공개 연주를 하는 것이 일상화된 경제 system에서는 다른 신체 부위가 불편하게 된 것보다 더욱 강한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자신에게 찾아 온 어두운 운명을 비극적으로 해석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몸보다 더욱 가파른 속도로 변화해 가는 시대의 양상에 주목했다. 흔히 클래식 음악이 낭만주의로 가는 가교가 열렸다고 평가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다
1803년부터 1810년까지 베토벤은 모든 문화인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데에 한계가 생겼다. 우선 청력 상실로 직접 연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피아노 협주곡 협연을 하다가 망치거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소절을 놓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 1806년 이후부터 베토벤은 직접 공연에서 작품을 선보이기보다는 ‘곡을 만드는’ 작곡가로서의 역할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깊은 만남을 통해 사람들을 접하고 의견을 공유하려고 애썼다. 뿔처럼 생긴 호른을 보청기처럼 사용해 듣다가 그조차도 시원치 않자 필담을 통해 상대방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비록 예전처럼 쾌활한 모드로 깔끔한 화술을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작품에 대한 식견과 통찰을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많았다. 이제 관계는 예전의 귀족 친구들과 프로젝트를 모색하는 하나의 ‘사건’ 또는 ‘단계’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아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됐다. 관계를 자산으로 해 대외적인 역량을 쌓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에너지를 갖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중장년기가 되면서 베토벤은 관계를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 셈이다.
베토벤보다 20살이 많았던 작곡가이자 건반악기 연주자인 Clementi와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클레멘티는 자신이 작곡한 작품의 모티브나 조성의 구현 방식을 module화된 방식으로 만들었다. 베토벤 역시 제자들에게 반드시 클레멘티 소나타를 공부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에게 직접 권유 받아 ‘피아노 환상곡(op.77)’이나 ‘합창 환상곡(Op.80)’처럼 실험적인 시도를 감행하기도 했다. 또 클레멘티는 예술가인 동시에 런던의 대표적인 출판업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베토벤의 건반악곡 중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클레멘티 사를 통해 활발하게 영국에서도 유통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과의 인연 또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베토벤은 추기경이 10대 후반의 어린 왕자였던 시기부터 음악교사로서 피아노와 작곡법을 지도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은 베토벤에게 매우 특별했던 제자이자 친구, 때로는 선생님으로 평가받았다.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하자 추기경을 비롯한 왕실 일가는 비엔나를 잠시 떠나야 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자신의 가장 돈독한 친구에게 베토벤은 ‘고별(피아노 소나타 26번)’이라는 곡을 바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그가 바쳤던 대부분의 곡들을 헌정자의 실제 연주로 듣고자 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대공(Archduke)’이라는 피아노 3중주곡을 비롯해 14곡의 작품이 합스부르크 추기경의 시연을 위해 씌어졌다. 베토벤에게 추기경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창작을 자극하는 기폭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인간관계들이 어떤 변화를 가져다준 것일까? 우선 자신의 삶에 타인이라는 존재가 크게 자리잡을 만큼 심적인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30세 이전까지의 베토벤은 완벽하게 짜인 삶을 사는 천재 작곡가였다. 항상 준비된 자세로 연주를 기획하고 자신의 후원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에 보답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력을 잃어가고 그 스스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시기가 되자 자원과 가치를 교환하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끊임없는 연주 시연과 작곡가의 변(辨)을 통한 설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베토벤은 계획된 비즈니스 마인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은 모습의 여유와 정감, 그리고 근본적인 정체성(identity)에 호소하게 됐다.
경영학자 James March도 비슷한 요지를 자신의 저서에서 남긴 바 있다. 조직이나 개인의 변화는 ‘고도로 계산된(managerial calculation)’ 방책의 결과가 아니라 오랫동안 맥락화되고 내재된 특성들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 산물이라는 것이다.3 이제 베토벤은 진정으로 위대한 천재는 예술가를 신화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personality)과 영혼(soul)으로’ 만들 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메이나드 솔로몬을 비롯해 그를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은 베토벤의 30대를 정리하면서 ‘격정과 좌절에 가득 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낭만 작곡가로 변화되기 시작한 시절’로 평가한다.
과거의 자신에서 차별화하는 창의성
1805년부터 베토벤의 음악은 자신만의 설명을 달게 되면서 점점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 특히 일생에 유일하게 작곡한 오페라였던 ‘피델리오’가 그랬다. 당시 유럽의 정치사에서 보여주듯 모든 갈등의 핵심은 인물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베토벤의 지론이었다. 이를 음악극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성악적인 스킬의 변화가 필요했다. 베토벤은 자신이 원하는 커다란 작품의 스케일을 떠받치기 위해 성악가들이 독자적인 요소로 기능하기를 원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작곡가의 주관과 관습에 맡겨졌던 표현들을 실제 무대 효과와 소리로 관중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00년대 초반이 되자 사람들은 인기 있는 작곡가나 지휘자, 기악 연주자뿐만 아니라 극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성악가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category를 인정받은 이들은 오페라뿐만 아니라 가곡, 오라토리오, 미사와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악가들의 흥행을 정확하게 관측했던 베토벤의 ‘피델리오’는 낭만 시대의 분위기를 선도하는 음악극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45세였던 1815년 이후부터 베토벤은 점차 대중적인 음악 시장에서 잊혀가는 존재가 됐다. 성악가의 표현과 스케일을 강조하던 트렌드는 이제 이태리 오페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베토벤이 아니라 롯시니라는 새로운 인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희, 비극을 다양한 무대 효과와 시나리오로 적절하게 안배하면서 연주자의 재량권을 극대화한 이태리 오페라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베토벤은 유행에서 멀어진 것을 ‘좌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전기작가인 쉰들러의 견해에 따르면 40대 중후반의 베토벤은 거의 ‘구도자’ 또는 ‘초월한 사람’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우선 물리적인 성공과 실패의 향배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단순히 대중이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이론 연구자인 로렌조 비치는 ‘창의성(creativity)’의 개념에 대해 기존의 이론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거시적인 역사를 통찰해 보면 가장 혁신적인 프로젝트나 콘텐츠들은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의 자신과 차별화된다. 과거의 성공 경험이나 궤적을 오늘에 투영하지 않는 자세다. 두 번째로 동시대의 인물들과 괄목할 만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려운 과제다. 환경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증명받지 못한 예술가나 조직은 창의성을 평가받기 전에 사멸해 버릴 위험이 크다.
베토벤에게 가장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미사 C 장조로도 알려진 장엄 미사(Missa Solemnis)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인본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평소 교회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러나 자신을 아끼는 합스부르크 추기경이 젊은 교계의 지도자였던 탓에 그를 위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동기가 있었다. 또 그 자신에게는 초창기 하이든의 영향과 피아노 소곡을 중심으로 한 기본 구상에 충실했던 경향에서 벗어나 전무후무한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하려는 시도였다. 과거 작곡가들이 교회에 소속돼 부과된 의무를 다했던 것과 달리 베토벤은 가장 ‘숭고한’ 음악의 prototype을 제시하고자 미사곡을 작곡했다. 인류애와 자유를 신봉했던 베토벤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기독교와 구원의 메시지를 빌려 ‘장엄미’의 개념을 청중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과제는 교향곡 9번이었다.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읽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발전시켰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거의 반평생 준비된 역작이었다. 교향곡을 절대적인 기악 음악의 표본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관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지막 4악장의 합창과 솔로,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표현하기 위해 1, 2, 3악장의 긴장을 조성했다. 당시 잡지의 비평가들은 ‘이것이 오페라인가? 아니면 오라토리오인가, 그렇다고 교향곡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며 놀람을 표시했다. 교향곡 ‘합창’은 오래 전부터 시행 착오를 거쳐 준비된 작품이었다. piano와 flute, 그리고 ochestra와 합창부가 함께하는 ‘합창 환상곡’의 부분적인 성공을 통해 시장에서 검증됐던 구상인 셈이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다시피했던 그는 동시대와 작품들과 전략적 거리(strategic distance)를 조절할 수 있는 명인(名人)으로 다시 자리매김했다.
노년과 최후
베토벤의 노년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시장의 선호가 바뀌면서 출판사들로부터 얻어지는 인세 수입이 줄어갔다. 합스부르크 추기경을 비롯해 그를 지지하던 Austria 왕실도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독자적인 brand 가치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중의 수요는 복잡하게 변해갔다. 대중들은 롯시니를 비롯한 Italy 작곡가들의 opera처럼 치정과 복수에 얽힌 드라마를 원했다. 한편 지역별로 자국어로 된 작품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고 온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셈이다. 유럽 전체의 보편 정신을 이야기하던 경향은 어느덧 국민국가주의로 바뀌게 됐다.
베토벤 역시도 1824년 이후부터는 거의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 졌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 등장하는 조카는 작은아버지의 권위를 이용해 사고를 치고 다니기 일쑤였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에도 실패했다. 일평생 결혼한 경험이 없는 그는 여러 귀족 여인들과의 연애를 행복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고 긴 세월을 히스테리 증상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했다.
1827년에 일생을 마감하자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인 모두가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을 그린 삽화도 남아 있다. 관을 운구하는 이들은 당대의 명사와 지식인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젊은 슈베르트도 동참했다는 설이 있다. 독일인들의 조직 기억(organizational memory)에 남은 사상가가 된 것이다. 후대의 베르디(Verdy)나 푸치니의 예를 제외하면 음악가의 장례로서는 최대의 국민적인 열기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을 신화화된 인물로 논하거나 괴팍한 낭만 예술가의 전형으로 해석해 왔다. 청력 장애로 음악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된 것도 그를 영웅이나 초인적 인간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 그의 성공은 오랜 세월 갈고 닦아 온 내공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전략적 직관(strategic intuition)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던 20대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고민했던 성실한 예술가였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비엔나와 문화계를 주름잡는 오피니언 리더로 성장했다. 핵심 역량인 청력과 감식력에 장애가 생기자 과감하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통찰력도 갖췄다. 역동적이고 혼란스런 시기를 살고 있었던 것은 본인뿐만이 아님을 깨닫고 당당하게 ‘자유와 이상을 위한 예술’을 외친다. 물론 이것이 흔들림 없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따뜻한 사람들과의 교제와 지지가 있었다. 창의성(creativity)이 사회적 지지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천재들의 삶은 계량화하고 일반화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궤적은 많은 이들이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체계화된 자기 진단의 결과로 다져져 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 그리고 어떤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예술가의 명민함. 그것이 바로 베토벤이라는 남자가 위대하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김혜옥 DBR 111호 (2012년 8월 Issue 2)
베토벤 중후기의 대표적 작품들
합창 환상곡
Choral Fantasy, in C minor, op. 80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마우리치오 폴리니 피아노, 빈 시립극장 합창단, 빈 필하모닉. 도이치 그라모폰.
이탈리아인으로 런던에 정착한 클레멘티는 성공한 건반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한참 여행 중이었던 그는 베토벤을 만나 기악 음악의 정수와 합창 음악의 표현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일 것을 권유한다. 청력 장애 이후로 내면이 피폐해 있었던데다가 여러 번의 연주 실패로 슬럼프에 빠졌던 베토벤은 과감하게 독주자, 성악 독창자, 그리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교창(함께 노래 부르며 상호작용하는) 구조로 연주하는 듯한 작품을 구상해 냈다. 1810년 이 작품이 완성되자 베토벤은 후일 작곡하게 될 교향곡 ‘합창’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카라얀에 이어 교향곡 해석의 1인자로 손꼽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직접 빈 필하모닉과 합창단을 지휘했다. 피아니스트인 폴리니는 베토벤 못지않게 리버럴리즘적인 정치사상을 가진 이로 유명하다. 섬세한 피아니즘과 박력 있는 오케스트레이션이 결합된 해석으로 호평받고 있는 음반이다.
교향곡 9번 ‘합창’
지휘 로저 노링턴, 솔로이스트 패트릭 파워, 사라 파커,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 & 쉬츠 합창단
2005. Virgin Classics.
베토벤은 거의 30년에 걸쳐 교향곡 ‘합창’의 스케치를 고치고 다듬었다. 곡은 죽기 3년 전인 1824년 10월에야 작곡가 자신이 참관한 자리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슈판치히 4중주단의 멤버이자 바이올린 선생이었던 이그나츠 슈판치히와 후배였던 움라우프가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곡을 이끌어 갔다. 실질적으로 혼돈 속에서 하나의 빛이 형성되는 모습은 후일 브루크너를 비롯한 낭만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리고 실제로 ‘교향곡 9번’과 같은 방식으로 곡의 분위기를 이끌고 갔던 이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지휘자 로저 노링턴 경은 바로크 시대와 고전 시대의 작품들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음반도 당시의 음향과 조음 구조를 고려해 당대 악기를 사용해 연주된 것을 녹음했다.
오페라 ‘피델리오’
지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취리히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요나스 카우프만, 카밀라 밀룬트 등
피델리오는 프랑스 대혁명기에 구금됐던 혁명운동가 플로레스탄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남장해 잠입했던 레오노레의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희극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 부파를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봤던 베토벤은 그가 지향하던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음악극으로 만들려고 했다. 1805년 작품이 완성됐을 때에는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어서 거의 프랑스 장교들을 청중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관람하는 이들은 독어 공연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음악의 장대한 스케일에 놀랐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극장 측은 이 작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고쳐달라고 베토벤에게 제안했고 그것을 금방 수락할 수 없었던 작곡가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교정해 두 번의 재초연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바로크 음악 전문 지휘자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최근 들어 고전/낭만 시대의 오케스트라와도 종종 협연하고 있다. 고음악 연주자의 섬세한 작품 해석과 현대 악기로 연주되는 합주단, 그리고 솔로이스트들의 웅장한 표현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음반이다.
첫댓글 Franz Joseph Hayden(1732-1809, Austria)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8. 28. - 1832. 3. 22, German)
Franz Peter Schubert(1797-1828, Aust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