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야와 반야바라밀다의 뜻
〖원효〗 반야는 지극한 도
반야는 지극한 도이다.
도라 할 것도 도가 아니라 할 것도 없다.
지극하다 할 것도 지극하지 않다 할 것도 없다.
조용하여 고요하지 않은 곳이 없고,
매우 커서 넓지 않은 곳이 없다.
참 모습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 아님이 없고,
참 비춤은 밝음이 없기 때문에 밝지 않음이 없다.
밝음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는데,
누가 어리석음의 어둠을 멸해 지혜의 밝음을 얻을 것인가.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는데,
어찌 임시의 이름을 부수고 참 모습을 말할 것인가.
임시의 이름과 허망한 모습이 참 성품 아님이 없어서
교법과 그 뜻을 통달하여 달변으로 알아듣기 좋게 말해도
그 모습을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실상반야는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탐욕의 더러움과 어리석음의 어둠이 모두 지혜의 밝음이어서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으로도 그 비춤을 볼 수 없으니,
반야를 관조한다면 그것을 훼손하고 또 훼손하는 것이다.
『대혜도경종요』
〖해설〗 반야
반야(般若)는 범어 ‘prajna’의 음역어이며, 혜(慧)라고 번역한다. 반야를 대개 지혜(智慧)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지는 반야를 이름하는 것이고, 혜는 일정한 대상을 관하는 마음작용을 말하는 것이니, 반야의 깊은 뜻은 혜(慧)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반야를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그 뜻이 깊기 때문에 그 밖의 지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반야를 굳이 설명하자면, ‘모든 법의 실상은 공(空), 무상(無相)이라고 통찰하여 분명히 아는 지혜’이다. 부처님이 증득하신 네 가지 지혜 중에 묘관찰지(妙觀察智)는 일체의 법을 비유비무로 관하는 지혜이니, 곧 관조반야로 성취하는 지혜이다.
실상반야는 관조할 대상이 아니지만 중생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관조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관조반야로 실상반야를 증득하면 그때 비로소 눈으로 눈을 보려고 애썼음을 깨달을 것이다.
〖해설〗 반야바라밀다
반야(般若)는 혜(慧 : 또는 지혜)라는 뜻이다. ‘바라밀다’의 ‘바라’는 ‘저 언덕’이라는 뜻이요, ‘밀다(줄여서 밀이라고 함)’는 ‘이르다’ 또는 ‘건너다’라는 뜻이다. ‘바라밀다(또는 바라밀)’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도피안(到彼岸)‘이니, ‘저 언덕에 건너감’이라는 뜻이다.
〖원효〗 저 언덕에 건너간다는 뜻
『대혜도경종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저 언덕에 건너간다.’는 뜻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경론(대반야바라밀경, 대지도론)에 의하여 대략 네 가지 뜻을 뽑았다.
첫째,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삼승의 사람들이 이 반야로써 저 언덕인 열반에 이르러 일체의 근심과 괴로움을 소멸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의 과정에서 과보를 말한 것이다.
둘째, 유상의 이 언덕에서 무상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 등은 색심의 두 법으로 구하는 것을 버리고 견실하지 못한 것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의 과보를 말한 것이다.
셋째, 원만하지 않은 지혜인 이 언덕에서 구경의 지혜인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일체의 지혜를 다한 것을 ‘저 언덕’이라 이름하고, 파괴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한다. ‘파괴할 수 없는 모습’이란 곧 여법한 성품의 실제이니, 그 실제를 쓰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반야 가운데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의 과정에서 과보를 말한 것이다.
넷째, 여기와 저기의 언덕이 있는 곳에서 여기와 저기의 언덕이 없는 곳에 이르러 더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에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의 과보를 말한 것이다.
〖해설〗 저 언덕은 정정취, 열반, 정토의 언덕
모든 경전은 제도할 대상에게 적합한 법을 근본으로 삼아 중생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뜻으로 삼아 가르침을 펴 보인다. 이 언덕은 예토, 삼계육도, 생사윤회, 주객의 이분화 등으로 표현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를 말한다. 저 언덕은 정토, 일심법계, 생사해탈, 일심의 근원 등으로 표현되는 괴로움이 없는 세계를 일컫는다. 이 언덕은 사정취(삿된 믿음의 무리)와 부정취(믿음이 결정되지 않은 무리)와 정정취(믿음이 바르게 결정된 무리)가 섞여서 사는 국토이고, 저 언덕은 오직 정정취만 사는 국토이다. 소승은 수다원 이상이 정정취에 해당한다. 대승의 정정취는 보살계위 십해 초발심주 이상의 수행자를 일컫는다. 저 언덕은 묘관찰지를 성취하고 발심하는 정정취의 언덕,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의 언덕, 부처님의 세계인 정토의 언덕이다.
〖해설〗 정토경은 아미타바라밀
반야경은 반야를 근본으로 삼아 관조반야로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 건너가는 교법이므로 ‘반야바라밀’을 설한다. 그러나 정토경은 아미타를 근본으로 삼아 염불수행으로 예토의 이 언덕에서 정토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교법이므로 ‘아미타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다.
아미타(무량수, 무량광)는 아미타불이 불가사의한 공덕으로 성취하신 명호이며, 신령한 주문이며, 절대 밝은 주문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바라밀’에 의지하는 일체 중생은 반드시 삼계를 초월한 정토에 태어난다.
출처 : 원효성사의 일심정토 염불수행을 실천하는 인터넷 전법도량
다음까페 '아미타파' http://cafe.daum.net/amitapa
첫댓글 우담바라님 수고하셨습니다
반야를 굳이 설명하자면
모든 법의 실상은 공(空), 무상(無相)이라고 통찰하여 분명히 아는 지혜이다
정토경은 아미타바라밀
아미타(무량수 무량광)는
아미타불이 불가사의한 공덕으로 성취하신 명호이며
신령한 주문이며 절대 밝은 주문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바라밀에 의지하는 일체 중생은 반드시 삼계를 초월한 정토에 태어난다
念淨土 일심 광명 화신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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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덕은 예토, 삼계육도, 생사윤회, 주객의 이분화 등으로 표현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를 말한다.
저 언덕은 정토, 일심법계, 생사해탈, 일심의 근원 등으로 표현되는 괴로움이 없는 세계를 일컫는다.'
우담바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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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바라밀'에 의지한 일체중생은 반드시 삼계를 초월한 정토에 태어난다.
감사합니다 우담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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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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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바라님!
" 정토경은 아미타바라밀 "
일심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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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저 언덕에 건너 간다는 뜻
넷째, 여기와 저기의 언덕이 있는 곳에서
여기와 저기의 언덕이 없는 곳에 이르러 더 갈곳이 없는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에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의 과보를 말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