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범패의례와 가사
3)가사의 내용과 사상
(1)선사상과 범패가사
자아의 실체를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인류사 이래로 명상이라는 인간 행위의 중심적 과제였을 것이다. 명상의 오래된 원형으로 알려진 요가이론과 행법, 문화를 발전시킨 고대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 곧 신성이라고 생각하여 신성과의 합일이라는 의미로 요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조건으로서의 한계를 요가 수행을 통해서 신성(神)과 합일하는 것으로서 완전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불교는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서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는 불성(佛性)이라는 개념이었다.
힌두교와 불교가 각각 신성과 불성을 추구한 방법론상의 차이를 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견, 불교는 지혜의 개발을 통한 각성(覺性)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것이 신에 대한 헌신을 중시하는 고대 브라만교 및 힌두교와의 차이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사실상은 그마저도 차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고대 브라만교와 힌두교에도 각성을 개발하는 수행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가는 명상문화의 역사적인 근간으로서 인류가 기원전의 오랜 과거로부터 자아실현을 위해 탐구한 다양한 방법론들이 혼재되어 있는 학문이다.
또, 불교가 정립한 불성이라는 사상은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통해 발달해서 종내에는 중국이라는 바탕에서 선불교의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중국의 선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는 도교사상의 영향으로 불성보다는 성품(性品)이라는 용어가 더 친근하게 사용되는데 이 용어는 후에 남종선의 발달과 함께 구체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어 무위진인(無位眞人)과 평상무사인(平常無事人)이라는 용어도 애용된다.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선불교적 성향이 강한 한국불교의 종교의식에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을 불전에 사루는 향(香)에 비유하는 가사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상주권공재(常住勸公)의 할향(喝香)이라는 곡이다.
상주권공재를 지낼 때 상단권공의식이 시작되면 먼저 범패승 한사람이 부처님을 모신 상단에 한 조각 향을 사루어서 바치는 예가 표현된다. 그 중 제1구 '봉헌일편향'은 불일불이적(不一不二的) 원융한 진리의 관념을 일편(一片)의 향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제2구 '덕용난사의'에서 '덕(德)'은 법신(法身)의 '체성(體性)'을 의미하고 '용(用)'은 법신의 작용을, '난사의(難思義)'는 향이 퍼지는 모습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법신의 부사의(不思議)에 비유한다. 제3구 '근반진사계'는 법신의 체성을 뿌리에 비유하여 법신이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를 표현한다. 제4구 '엽부오수미'는 제3구의 댓구로서 법신의 작용이 우주를 덮고 있음을 표현한 시구(詩句)이다.
이상 할향의 가사에는 여래장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여래장은 중생의 번뇌 중에 있지만 그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으며, 청정하여 변함없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진여(眞如)나 불성의 이명이며, 무명(無明)에 가려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뜻한다. 여래장사상은 여래의 불가사의한 지혜를 설하는 『화엄경』과 일체중생이 부처의 아손(兒孫)이라고 하는 『법화경』의 일승사상(一乘思想)을 계승하여 "일체 중생은 여래를 태에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승만경』ㆍ『능가경』ㆍ『열반경』을 통해서 전개되고 『기신론』에서 체계화된 여래장사상은 선종사상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범패 설행의 원리로 보면 할향을 담당하는 승려가 10여분동안 독창하고 대중은 묵연히 경청하는데 시문(詩文)의 운치와 범패 운율이 어우러져 도량 전체가 합심(合心)으로 성품을 참구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러나 오늘날 재회에서는 대중과 청중이 성숙한 재회에 대한 이해가 갖춰지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은 대중대로 범패를 창화하고, 청중은 청중대로 경내를 기웃거리며 소일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수륙재》, 《영산재》와 같은 전통 재의식들이 문화행사 성향의 연중불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범패 설행자와 청중이 다함께 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행체험으로서 전통문화를 공유하는 성숙한 불교문화적 면모를 재고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2)염불사상과 범패가사
한국불교 전통수행의 주류를 논한다면 염불과 참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염불은 초기불교시대 석존의 가르침인 불수념(佛隨念)으로부터 시작해서 정토종의 신앙적 염불수행과 선종의 선관적 염불선(念佛禪)이라는 두 가지 사조를 통해서 그 수행의 전통을 이어왔다. 중국선종에서는 염불의 특성을 이행문(易行門)이라는 관념으로 수용하면서 염불수행의 장점을 선수행에 도입 활용했으며 선종 4조와 5조의 시기부터 비롯하여 송, 명, 청대의 불교를 거치며 염불선이라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불교에서도 그대로 전승되어 불교의식의 중심적인 내용에서 염불신앙과 염불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불교의식에는 선과 교를 중심으로 제종을 포섭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사상이 원융사상을 통해서 정선된 한국적 조사선사상이 관통하고 있음도 재고할 여지가 있는 분야일 것이다. 한국불교의식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영산재에서 전하고 있는 15곡의 짓소리의 가사를 살펴보면 그 구성은 불(佛) 관련 8곡, 교(敎) 관련 3곡, 밀교(密敎) 관련 4곡으로 한국불교의 다양한 면모를 느끼게 하면서도 그 중 불(佛)과 관련된 내용이 특히 많다. 이는 재공의식(齋供儀式)의 특성상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해야할 목적이 의식으로 구비되는 한편, 모든 수행의 귀결이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한국불교의 일승사상적 특성을 대변하는 구조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기인해서 살펴볼 때, 한국불교의식에서의 염불사상은 정토적 염불사상, 선종적 염불사상, 일승적 염불사상의 3종이 분포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밀교사상과 범패가사
인도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에 서역에서 중국에 도래한 승려들 중에는 거처가 없이 떠도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중국에 공식적으로 불법을 전한 승려로 알려진 축법란(竺法蘭)도 유랑하며 포교를 하다가 낙양에 오게 되었고, 안식국(安息國)의 태자였던 안세고(安世高), 대상(隊商)의 아들 우법개(干法開)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거지를 '화즈(花子)'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유화승을 일컫던 '교화자(敎化子)'에서 나온 말이다.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이 문자를 쓸 줄 몰랐던 시기에 유랑승들이 외는 범어 주문을 따라하거나 주문을 외며 일으켰던 신통력이 화제의 중심에 서며 포교의 효과가 컸다.
우리 역사의 신라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경덕왕 19년(760년)인 경자년(庚子年) 4월 초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재화(災禍)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왕과 신하가 상의한 결과 재단을 차려 놓고 기다리다 지나가던 승려에게 청하여 재화를 해소하고자 한다. 그 때 왕을 만난 월명사는 "향가만을 알 뿐 성범(聲梵)은 모릅니다."하고 대답했고 결국 향가를 불렀지만 변고가 멎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내용은 범패에 대해서 시사하는 점이 있다. 첫째, 나라에 변고가 생겼는데 왕과 신하가 승려에게 산화공덕(散花功德; 불교의식)을 부탁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는 범패를 알지 못한다고 답한 월명사의 말에서 당시 범패에 대한 일종의 기대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영산재를 구성하는 가사의 내용으로도 볼 수 있었듯이 진언(眞言)은 밀교수행의 한 가지 형태로서 한국불교의식을 구성하는 분야이다. 범패의식에서 진언을 사용하는 방식은 주로 도량의 결계(結界), 예불(禮佛), 삼보에 대한 공양(供養), 불상(佛像), 조전(造錢)에 대한 점안(點眼), 영혼의 목욕(沐浴)과 시식(施食) 등 의식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시설되고 있다. 전통의식에서 진언의 시설에는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와 더불어 의식을 진행하는 수행자의 전념(專念)이 요구된다. 이러한 밀교적 명상의 관념체계가 수반되는 진언의식에 '특사가지(特賜加持)'라는 내용을 보면 사다라니(四多羅尼) 가사를 창화하다가 특사가지'라는 가사에 접어들 때 대중이 짓소리로 장엄하게 합창하며 법의 가지력(加持力)을 기원하는 형태의 작법도 전해지고 있다. 재공의식에서 설행되는 이러한 밀교적 작법을 보면 한국불교 전통의식에서 밀교적 공덕을 성취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집약해 왔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범패의 수행원리와 활용방안 연구/ 덕림(이병진)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