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激情)의 세월(歲月)
마무정은 혈화포(血花袍)라 불리는 대총수의 의복을 걸친 채 일천 위사와 상견례를 거행했다.
일천 위사는 비삼(秘衫)이라 불리는 옷을 걸쳤는데, 그 옷은 마박사가 만든 특수한 의복이었다.
비삼은 여덟 가지 빛으로 바꿔 입을 수가 있고, 수화독(水火毒)을 막는 보의로 은둔술을 쓸 때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
지난 며칠 간 영양을 충분히 취한 위사들은 이전의 건강을 거의 되찾았다.
이들은 마무정이 너무 젊고 너무 나약해 보인다는데 퍽이나 실망한 눈치였으나, 마무정이 손을 쳐드는 순간 감복하고 말았다.
마무정은 허공섭물공으로 위사 중 칠십 인을 허공으로 떠올렸다.
"이 정도면 자네들의 주인이 될 만한가?"
그렇게 말하면서…….
한 잔의 차(茶), 마무정은 용정차를 들고 있다.
그 뒤, 흑강은 마무정의 애검(愛劍)이 된 천뢰전룡검(天雷戰龍劍)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검에는 검집이 만들어져 끼워진 후였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럽고 육중해 보이는데, 마병야의 철야작업으로 인해 상고의 어떤 보검보다도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검집에는 마화문양이 가득했다.
마병야는 금갑(金甲)을 걸친 채 시립해 있었다.
마무정 맞은편, 마가대군사(魔家大軍師)라는 지위와 함께 제이비검대장(第二秘劍隊長)이 된 마박사가 단아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마박사는 몹시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는 마무정이 지극히 태연하다는 사실에 꽤나 놀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날은 바로 대출관의 날이기에.
"대총수는 제일 먼저 마화성(魔花城)에 가시어야 합니다!"
"흠……!"
"그 곳은 황산(黃山)이라고 하는 중원명산 중의 거봉인 천도봉(天都峰)이 있습니다!"
"황산… 천도봉!"
"제사비천검대가 백 년 전부터 그 곳을 지키고 있는데, 그 곳이야말로 절대마가가 일어난 곳입니다!"
"그럼… 가야지!"
마무정은 찻잔에서 입을 떼어 냈다.
전신에서 남을 압도하는 기(氣)를 흘리는 약관 청년, 그는 천 년의 모든 것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제일대(第一代) 마도의 대총수였다.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그에게는 정녕 거대(巨大)한 기개가 있었다. 산(山)보다 더 거대한 기도가!
"물론입니다!"
"그런데 왜 고민을 하는가?"
"고, 고민이라니요?"
"자네 얼굴에 쓰여 있네!"
"……!"
마박사는 말을 못한다.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대총수의 눈빛 때문이외다. 번뇌하는 이유는 그 눈빛에는 신기가 가득하오. 마가의 장로들이 그 눈빛에 복종할지 의문이오. 그들이 대총수를 인정할지, 아니면 대총수가 마인(魔人)이 아니라는 구실로 반역을 할지 모르기에 번민을 끊지 못하는 것이외다.'
마박사는 마무정을 충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마도의 장로들이 마무정을 대총수로 섬길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마무정은 차를 들며 이야기했다.
"나가는 대로 마박사는 흑강과 더불어 강호로 흩어지시오!"
"예?"
마박사가 놀라자…….
"강호 정세를 자세히 알아야 하오!"
"……!"
"내가 보기에 우리는 아주 약자요. 상대는 너무도 강하고, 변황에도 거대한 조직이 버티고 있소!"
"……."
"나는 시일을 길게 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오. 모든 것은 속전속결로 처리될 것이오!"
"대총수, 설마… 잠룡지계(潛龍之計), 혈룡지계(血龍之計), 비룡지계(飛龍之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행동하시렵니까?"
마박사가 흠칫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천 년 간 모은 저력으로 천하를 정복하는데, 무엇이 두렵겠소. 훗훗, 나는 마풍(魔風)이 되어 십팔만 리를 휘감을 것이오!"
마무정의 자세는 단아하기만 했다. 그는 일만 효웅(梟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문사(文士)로 보였다. 무(武)와는 어울리지 않게 온화해 보이는데, 그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면모였다.
"나는… 세 가지를 믿소!"
마무정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주위를 차분히 쓸어 보며 웃었다.
"첫째는 여러분들!"
"아아, 황송하옵니다!"
"대총사께 죽음을 다해 충성을 하겠소!"
"대총사, 속하들은 대총사의 수족이 될 것이오!"
삼 장로는 허리를 숙였고, 마무정의 눈길은 창 쪽으로 돌려졌다.
하늘(天)! 거기 하늘이 걸려 있다.
"두 번째는 천기(天機)를 믿고, 세 번째는… 훗훗, 말하지 않겠소! 조금 시시한 것이니까!"
마무정은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었다.
세 번째로 믿는 것,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이니까!
이제 남은 것은 바람과 구름의 세월뿐인가?
아아, 이제야 천 년의 풍운이 깨어나는 것인가?
천 년 무림사상 가장 잔혹하고 웅장한 시절은 이제 막을 올리는 것인가?
천년절곡(千年絶谷)은 어느 날 갑자기 허물어졌다.
큰 지진이 일며 천년절곡은 없어졌다.
그 날, 거기서 수천 개의 유성(流星)이 튀어 나와 남천(南天)으로 사라져 갔던가?
그리고 큰 웃음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있다던가?
그 날은 눈(雪)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이 년(二年)! 마무정이 절곡을 찾고 벌써 이 년이 지나갔던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 가운데, 천년설(千年雪)과 하늬바람이 스쳐 가는 가운데…….
* * *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열사(熱砂)의 땅.
낮이면 숨이 콱콱 막히는 열풍(熱風)이 유린하고, 밤이면 사막의 달 아래로 한풍이 덮쳐 든다.
변황의 땅은 그렇게 만 년을 지내 왔다.
아특목격(阿特木格)이라는 곳이었다. 서장(西藏) 너머에서는 하늘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 곳에는 만 리에 걸쳐 사막이 있고, 사막 가운데에는 기이하게도 늘 온화한 초원(草原)이 백만 묘(百萬畝) 정도의 규모로 펼쳐져 있다.
아특목격 깊은 곳, 천축국(天竺國)의 하늘이라는 곳이 있다.
보라! 떠오르는 태양 아래 희게 반짝이는 거대한 물체를.
거대한 흰 코끼리 같은 궁전(宮殿), 그것은 천축의 성궁(聖宮)이라는 타지마할묘 이상의 미학(美學)을 지니고 있었다.
규모에서는 서장의 하늘이라는 포달랍궁(包達拉宮)보다 더 거대했고, 장식에 있어서는 회회성묘(回回聖廟)보다 더 현란했다.
기와는 모두 백자기, 기둥은 세 아름이 넘어 보이는 흰 대리석(大理石)으로 이루어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궁전.
사천황궁(死天皇宮).
이 곳은 바로 중원인들이 죽음의 장소라 부르는 사천황궁이었다.
백팔 대방파(百八大幇派)를 속파(屬派)로 거느리고 있고, 천축오강(天竺五强)의 대형(大兄) 노릇을 하고 있는 장소.
포달랍궁(包達拉宮),
소뇌음사(少雷音寺),
홍교(紅敎),
황교(黃敎),
회회교(回回敎).
이들 천축오강은 일국에 해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중원은 일통된 반면, 천축 주위는 열국시대이다.
원(元)이 명(明)과 자리바꿈을 하고 백 년도 아니 되는지라, 천하의 정세는 꽤나 혼란한 상태였다.
죽음 같은 아름다운 사천황궁은 그 혼란기를 이용해 세력을 배가시켰다.
후정(後庭), 분수가 십 장 높이 치솟고 있다.
새벽의 여명은 분수의 영롱한 물보라 가운데 찬란히 깨어났다. 그리고 기문도해(機門圖解)에 따라 천자만홍이 피어 있다.
온갖 화려함이 집합되어 있는 곳, 여기 와 보지 않은 자만이 변황인을 오랑캐라고 할 수가 있다.
여인은 화려한 뜨락을 거닐고 있다.
총명하고 이지적인 여인, 그녀는 기이하게 생긴 악기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악기에서 아주 많은 줄(絃)이 매달려 있어, 손가락으로 살짝 긋기만 해도 물방울이 쏟아지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사박- 사박-!
여인은 비단 신발로 새벽의 이슬을 딛으며 돌아다닌다.
가끔 가다가는 꽃을 살펴보고, 그러다가는 문득 가없는 한숨을 내쉬고…….
미녀(美女), 나이 열아홉 정도 되었을까?
여인의 눈은 유난히도 컸다.
눈이 크면 겁이 많다던가? 여인은 그러한 눈으로 하늘가를 살피고 있었다.
"맹(盟)의 단결과, 아버님의 회갑(回甲)을 기리는 대회의 날은 바로 변황이 완전히 뭉치는 의식이 거행되는 날이리라!"
여인은 누구일까?
꽃잎처럼 보드라운 살결에 촉촉한 물기를 띤 입술.
옷이라기보다 흰 천을 몸에 칭칭 감고 있는 호리호리한 여인.
그녀는 무엇인가 꽤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 날 비무대회가 열릴 것이고, 아버님은 변황 제일고수를 선발하실 것이다!"
무슨 번뇌가 이리 심한 것일까?
여인의 볼은 파르라니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나의 낭군이 될 것이다!"
볼우물 두 개가 깊이 패인다.
사라라고 하는 의복을 걸친 미녀, 그녀는 꽤나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집갈 때가 되었다는 걱정이었다.
변황맹주(邊荒盟主)를 아버지로 둔 여인.
부영롱(扶玲瓏).
그녀는 무예를 알지 못한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율법(律法)에 따라 금지되었다.
여인이기에 외부로 나가 저자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남자가 아니기에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도 금지되었다.
미녀(美女)이기에 늘 갇혀 지내는 여인 부영롱(扶玲瓏).
그녀는 지금 시집가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란 꼭 있어야 하는가?"
부영롱은 섬뜩한 듯 몸을 움츠린다.
"수염이 많고 지저분한 남자들. 그런 사람들에게 발가벗은 채 안기는 것이 바로 시집이 아닌가? 으으……!"
부영롱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녀는 이런 여인이었다.
사천황존(死天皇尊)!
그는 늘 화살(矢) 하나를 지니고 다닌다.
일컬어 천시(天矢).
그 화살은 바로 그의 신표이고, 사천황궁의 신물이었다.
<천시가 부러지면 천하가 피에 젖는다!
천시가 부러진다는 것은 변황의 모든 고수가 중원을 향해 쳐들어가라는 명령이다!>
변황을 상징하는 천시!
사천황존은 그것을 두 손에 걸쳐 쥐고 있었다.
그는 늘 휜 옷을 입고 있다. 머리 위에는 검은 테반을 둘렀고, 아래턱에는 위엄 있는 수염이 사자의 갈기마냥 자라나 있다.
좌하(座下), 일백십삼 인(人)이 백옥전(百玉殿)의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숙연한 공기가 흐르는 장소, 이 장소는 바로 사천황맹의 대회장이었다.
-중원은 우리들을 변황이라고 하나, 우리에게는 중원이 변황이다!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 하나, 공격당하게 된다면 피에 굶주린 사자(獅子)가 된다!
사천황맹의 일백삼 맹주(一百三盟主)들은 입버릇처럼 그러한 말을 한다.
수만 리 먼 곳에서 모인 사람들, 이들은 태상맹주(太上盟主)인 사천황존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천황존은 천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시에서는 아련한 혈채(血彩)가 흐른다.
사천황존은 그 빛을 보고 눈가를 찌푸렸다.
"천기보(天機譜)에 이르자면, 천시가 핏빛을 일으키게 되면 큰 싸움이 가까워졌다고 한다!"
나직한 말이나 백옥취의청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곳, 노라마(老喇麻)들과 변황의 고수들은 숨소리를 멈추고 있다.
설산(雪山)에 은거하던 부족의 부족장들도 있고, 의림호(倚林湖)의 패자(覇者) 달투목(達鬪木), 천룡사원(天龍寺院)의 장교(掌敎) 오룡(烏龍)도 끼어 있다.
각 지방에서는 신(神)으로 군림하는 사람들, 이 곳에서는 일개 회원에 지나지 않으나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천황궁은 변황의 하늘이었다. 이 장소는 가히 신들의 제전이었다. 사천황궁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변황계는 분열되었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늘 싸움이 있었을 것이고, 중원의 마도는 필히 변황을 쳤으리라!
천시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러 나왔다.
"어쩌면… 싸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천황존은 느릿느릿 말을 한다.
나이 육십하나. 그는 회갑을 맞이하는 초로의 나이였으나, 휘하제자들에 대한 고뇌 때문인지 나이보다 조금 늙어 보였다.
"아아, 문제는 중원의 판도에 있다!"
일순, 그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리고 지난밤, 어떤 변화가 있었다. 훗훗……!"
독수리의 눈이랄까? 그의 눈은 강한 힘과 예지에 번뜩거렸다.
종족을 위해 늘 기도하는 변황의 절대자!
그의 일생 가운데 오늘같이 초조해한 날은 단 하루뿐이었다.
바로 십구 년 전 가을, 그의 딸 영롱이 태어나는 그 날 그는 이렇듯 초조해 했었다.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어 깊은 강이라 불리는 문무의 초월자!
그는 천시를 불끈 쥐며 눈길을 쳐들었다. 그리고 그는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중원에 다녀온 사람의 말에 의한다면, 중원은 정법회와 마혼십가로 양분된다고 했다!"
"……!"
"……!"
백십삼 인은 모두 침묵한다. 말대답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불안을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힘이 강하게 되면 서로 충돌하고, 그러다 보면 피맛에 익숙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도 싸움에 끌려들 수밖에 없는 위란이 닥쳐올 테니까!"
사천황존은 중원 쪽을 바라봤다. 그는 몹시 근엄하게 생긴 인물이었다.
'우리는 싸움을 싫어한다. 그러나 싸움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막강하니까.'
사천황존은 입매를 강하게 찌푸렸다.
"만에 하나, 난(亂)이 벌어진다면… 큰 희생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다수이나, 고수의 수에 있어서는 중원의 명문거파보다 적다!"
"……!"
"아아……!"
"중, 중원! 그 풍요한 대륙!"
사람들의 눈빛이 중원이라는 말에 달라진다.
그 중에는 싸움을 바라는 사람도 있다.
사천황존의 평화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도 수없이 많다. 그렇지만 사천황존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기에 아무도 그런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
변황의 절대자, 사천황존! 그는 차츰 웃는 표정이 되어 갔다.
"싸움이 벌어지건, 벌어지지 않건, 우리는 존재할 것이다! 늘 이길 테니까 말이다!"
그는 그제서야 사람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회의는 지난밤 내내 거행되었다.
사천황존은 회갑연을 한다는 구실로 변황의 고수들을 모았다. 하나, 진정한 이유는 회갑연이 아니었다.
그는 맹도들의 의견을 하나로 뭉쳐 보자는 뜻에서 엄청난 연회를 베풀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이고, 그들은 그들이오. 우리의 계획에 따라 만사를 처리해야 하고 우리의 야망에 따라 만사를 해결해야 하지, 중원의 정세에 따라 일을 처리해서는 아니 되오!"
모든 사람은 합장하고 있다.
천축인들은 신앙을 목숨 이상으로 여긴다. 비록 다른 종파들이나 신앙이라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만에 하나, 사천황존이 쓰러진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파를 내세우기 위해 타파를 괴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천황존의 눈은 꿰뚫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 냈다. 그래서 그가 보는 앞에서는 의혹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을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하오! 꽤나 슬픈 일을……!"
지금 사천황존의 눈길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대설산(大雪山) 설인방(雪人幇)의 수좌.
나이는 팔십이고, 별호는 설중신마(雪中神魔).
백모(白毛)가 눈구멍 이외의 모든 장소에 숭숭 솟아난 설인 같은 노고수.
그는 사천황존의 눈길을 받고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왜, 그는 땀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떨구는 것일까?
'설마… 알고 있단 말인가?'
설중신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때 사천황존은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드리웠다.
절대자의 웃음! 그 웃음은 온화한 것이 아니라, 강철같이 힘차고 모질었다.
"본맹이 오래도록 중원에 기죽지 않은 이유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 운(運)이 좋기 때문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시선을 설중신마 쪽으로 돌렸다.
설중신마는 사천황존의 아성(牙城)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십여 거두들 중 하나였다.
사천황존은 왜 설중신마를 예의 주시하는 것일까?
"그 힘의 총체는 두 종류!"
사천황존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장강이 흐르듯이, 그의 말은 백옥취의청 안을 뒤흔들었다.
"하나는 사천황대(死天皇隊)! 천 명이 하나하나 막강하다! 특히 사대위사장은 이미 신(神)이다."
"……!"
설중신마는 손을 가슴께로 갖고 간다. 그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리고 사천황존의 말은 이어졌다.
"또 하나는 장로회(長老會)의 결속! 그 결속 가운데 백만도(百萬徒)의 힘이 하나로 뭉치고 있다!"
"……!"
"만에 하나, 사천황대와 장로회가 쓰러진다면 우리 모두는 쓰러지게 된다. 그것은 중원인이라면 누구든 바라는 일이다!"
"……!"
"한데, 지난밤 누군가 우물(井)에 약을 뿌렸다. 그 약은… 혈시고혈마분(血屍膏血魔粉)이라는 것이었다."
"아아, 독이라니? 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누, 누가 감히 그러한 짓을?"
"누가 배반했소, 맹주? 그 자는 이 자리에서 죽여야만 하오!"
여기저기서 흥분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설중신마의 얼굴은 똥색이 되었고, 사천황존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곳의 물은 성천(聖泉)으로, 그 따위 독기 따위는 영력(靈力)으로 간단히 녹여 버린다. 그래서…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다!"
사천황존은 말하다가 고갯짓을 했다.
"여기… 대령했소이다."
"결정될 증거를 모두 마련했소이다, 존야(尊爺)!"
그 순간, 까마득히 높은 천장 위 석가래에서부터 네 명의 혈포인(血袍人)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사천황대의 사 위사(四衛士).
혈안거조(血眼巨鳥),
벽안신조(碧眼神鳥),
금안비조(金眼飛鳥),
철시천조(鐵翅天鳥).
네 명의 거인은 바로 사천황존의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각 이백오십의 사천황대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회의가 벌어지는 동안, 사천황궁 일대를 암중 경비했었다.
혈안거조(血眼巨鳥)!
그는 웃으며 가죽 주머니 하나를 내미는데, 가죽 주머니 안에서는 붉은 덩어리 여섯 개가 굴러 떨어졌다.
아아, 모두 수급(首級).
여섯 개의 덩어리는 여섯 사람의 목이었다.
"둘은 설인방의 문상(文相)과 무상(武相)! 다른 넷은 천축인으로 변장을 한 중원인들! 성정(聖井) 가에서 잡혔다. 그리고 문초되기 전, 자결했지!"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벽안신조 역시 하나의 주머니를 꺼냈다. 그도 주머니를 기울여 물건을 쏟아냈는데, 그 물건들은 모두 쇠붙이인지라 돌바닥에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비마령부(秘魔令符)>
<순찰제십호(巡察第十號)>
<변황총순찰령(邊荒總巡察令)>
표면에 적힌 글은 모두 한어(漢語)였다.
대체 어떤 방파의 영부인가?
감히 사천황궁을 노리고 잠입한 자들은 어떤 무리인가?
그 때, 금안비조(金眼飛鳥)는 쪽지 세 장을 꺼내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쪽지를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다.
"재미있는 글귀라네, 설중신마."
왜 그리 잔혹하게 웃는 것일까?
첫째 쪽지, 그것은 비합전서구용의 쪽지로 보였다.
ꠕꠑ<대회의를 틈타 마분(魔粉)을 쓰라!>
두 번째 쪽지.
<설산(雪山)에서 나온 설중신마와 접촉하라. 그는 이 년 전, 마가와 손을 잡은 변황마혼첩(邊荒魔魂諜)의 첩주(諜主)이다!>
세 번째 쪽지.
<가능하면 이 기회에 사천황존을 암살하고, 그의 딸을 납치하라.
성사가 된다면 즉시 거조를 타고 중원으로 오라.>
금안비조는 쪽지를 펴며 손을 부르르 떠는데, 네 번째 위사장인 철시천조(鐵翅天鳥)는 설중신마 앞으로 다가가며 하나를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영패(令牌)였는 바, 그 위에는 단 한 자의 글이 적혀 있었다.
<사(死)>
죽으라는 글이 적힌 영패는 설중신마의 얼굴 쪽으로 다가갔다.
사천황존이 권위를 인정한 사패(死牌). 그것을 받는 자는 죽고, 그 자의 구족은 무공을 잃고 유배된다.
지난 오십 년 간 사패를 받은 사람은 열둘이었고, 열둘 모두 제거되었다.
단 하나도 사패의 위력을 거역하지 못하고 죽어 갔다.
사패가 전해질 때, 설중신마는 치를 떨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에잇, 천수불(千手佛) 같은 노마(老魔)!"
'화탄(火彈)을 쓰자. 마화삼이란 분이 밀지와 함께 전한!'
그는 손을 품에서 꺼내려 했다.
그의 손에는 화탄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이 터지면 큰 폭발과 함께 매운 연기가 이 곳을 메우리라.
설중신마가 설안비익술(雪雁飛翼術)로 날아오르며 화탄을 쓰려 할 때였다.
"어리석은 자여! 나를 용서하라!"
사천황존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렸고, 금빛 선이 흐른다.
푹-!
아아, 금화살 하나가 찰나적으로 설중신마의 미간(眉間)으로 박혀 드는 것이 아닌가?
천시(天矢), 그것은 눈썹 가운데로 들어가 두개골 뒤쪽으로 빠져 나왔다.
"하아… 악……!"
설중신마는 큰 비명 소리도 거의 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숨을 거뒀다.
모든 일은 거의 찰나적으로 벌어졌다.
풀썩-!
설중신마는 떨어지며 핏방울을 여기저기 뿌렸다.
사천황존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중인이 놀라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늘 담대하고 근엄한 자태, 그의 이러한 자태야말로 사천황맹의 뿌리라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참겠다… 중원(中原)!"
그는 나직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분노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 그의 어깨는 고정된 선을 잃지 않았다.
'중원의 첩자는 여럿이다. 설중신마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하나, 참자. 그들을 잡아 내어 죽이는 것을!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형제니까.'
심해 같은 기도를 지닌 사람, 사십 년 간 하나의 하늘이 되어 왔던 대인(大人) 사천황존.
그는 중원 쪽에 대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를 깨우지 말게, 중원!"
그는 노여움을 억지로 삭이고 있었다.
"우리가 일어나면 칠십만이 매일같이 죽어 넘어질 테니까, 중원이여!"
연회는 어김없이 거행되었다.
춤추고, 먹고, 검무를 즐기고… 사람들은 상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모른다.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부영롱의 낭군이 되어 차대(次代)의 사천황궁주가 되느냐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회에서는 부영롱의 낭군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십만 리(里) 너머에서 벌어진 하루 새벽의 일, 중원에서는 꿈과 같이 아득한 일일 뿐이다.
잠자는 대지(大地), 이 곳을 깨우는 자는 제일 먼저 후회라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깨어나지 않는 대지라도 기억해야만 한다.
기억하자, 사천황궁(死天皇宮)을!
* * *
마유정(魔有情)에게 있어 최근의 나날은 분노의 나날이었다.
그는 독주(毒酒)를 쉬지 않고 들이키면서도 내화(內火)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 그것은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였다.
"백도무리들이 끈질기게 저항하며 세력을 키우다니…그자들의 힘이 언제 그 정도였단 말인가? 게다가 변황의 일마저 실패하다니!"
마유정은 마화(魔花)가 가득한 옷을 입고 있다.
전지전능한 권위를 지닌 마화삼(魔花衫)!
그는 여전히 신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천하가 일통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천황궁에 보낸 마혼첩들은 모두 발각되어 주살(誅殺)되고… 으드득-! 화영군주(華影君主)란 년의 세력은 암중에 점점 커져서 나의 배후를 교란하고 있으니……!"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럴 때마다 그는 한 사람을 기억한다.
바로 마무정(魔無情).
그였다면, 이즈음의 일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
"수하들은 나를 가짜로 여기고 속으로 비웃고 있고, 내가 약속한 천하일통은 이루어지지를 않으니……."
마유정의 눈빛은 혈안(血眼)이었다.
눈빛을 돋울 때마다 강렬해지는 혈광, 그것은 그의 마공이 더할 수 없이 심오막측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하나, 나는 꼭 해내고 말리라! 으드득-!"
그의 손에 죽은 혈화삼이 살아난다 해도 이제는 마유정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치를 떨다가 탁자 위를 봤다.
"역시… 해결책은 저것뿐인가? 북황자(北皇子)란 신비인과 연수하는 것뿐인가?"
탁자 위에는 혈첩(血諜)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마화삼 귀하! 이제는 뜻을 돌려 우리들과 연수(連手)하는 것이 어떠한가?
귀하의 수하들이 학수고대 바라는 일대연맹이다.
본좌가 알기로는 그대는 이 년에 걸쳐 헛수고만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본 북황(北皇)의 세력은 그대를…….>
마유정의 눈에서는 섬뜩한 혈광이 쏟아져 나왔다.
"북황(北皇)의 무리들, 그 자들은 피에 굶주린 호랑이들이다. 나는 그들의 속셈을 알고 있다!"
북황, 그들은 가공할 패도집단이다. 그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며, 중원의 그 누구도 그들의 진실된 정체를 알지 못한다.
관북(關北)에서도 만 리를 더 가야 하는 사막의 무리들, 그들이 마유정에게 손을 뻗치다니…….
"사실… 그들이야말로 마가의 반역을 부추긴 자들이다. 그 자들은 마가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마유정은 의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는 두 손으로 턱을 감싸쥐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밤이다. 너무나도 깊은 칠야(漆夜)!
다른 날이었다면 혈발미랑(血髮美娘)과 함께 너른 침상 위를 벌거숭이가 되어 뒹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몇 가지 비밀스러운 계획을 실패로 돌린 후인지라 오늘은 성욕도 일어나지를 않았다.
"나는… 악마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나의 악마 감각은… 북황이 나와 비슷하다는 것을 내게 일러 준다!"
마유정도 이제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마가의 절대자였다.
"그들과 연합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너무도 좋은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하지만…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마유정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무정이었다면… 좋은 계략을 내었을지 모른다. 놈은 약하기는 하나, 천재였으니까.'
마유정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절대자가 아닌가? 큿큿……!"
마유정은 역겨운 웃음소리를 내다가 손을 쳐들었다.
'다시 한 번 그년을 부르자. 그년이 고개만 끄덕인다면 다른 집단과 힘을 합하지 않고도 천하일통(天下一統)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인문(忍門)의 그 계집을…….'
떨리는 손은 쳐들렸고, 허공에 내려진 금줄 하나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금줄을 힘차게 끌어내리는 순간, 요란한 마령(魔玲)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후, 마치 유성(流星)이 떨어지듯이 마유정의 서재 안으로 날아드는 흑포인이 하나 있었다.
슷-!
그는 찰나적으로 이십 장을 가로질러 마유정 앞에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흑포사신(黑袍死神).
마유정의 경호대장인 동시에 마가서열 십오 위에 있는 자였다. 금줄을 당긴 것은 그를 부르는 신호였던 것이다.
"신(臣)을 부르셨습니까?"
흑포사신이 넙죽 절하자, 마유정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년은 지금 어떻게 있는가?"
그는 제황(帝皇)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그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년이라니요?"
흑포사신이 움찔하자…….
"이 년 전 잡혀, 내내 고문을 받았던 인문제일좌 설향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다! 미련한 놈!"
마유정은 눈을 흘기며 소매를 흔들었다.
짜작- 짝-!
나이가 백사 세에 달하는 흑포사신은 피하지도 못하고 뺨을 세 대나 연달아 얻어맞고 말았다.
"크으, 죄… 죄송합니다, 마화삼이시여!"
주루룩… 코피가 터지며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마유정의 행동은 늘 이러했다. 수하의 대답이 약간이라도 늦게 되면 그의 손은 늘 피를 부른다.
흑포사신이 꼭 있어야 할 귀중한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벌써 그의 목뼈는 뒤쪽으로 꺾였을 것이다.
마유정의 성격이 이리도 거칠어진 이유는 만사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천하를 너무 쉽게 보고 있었다.
그는 마가의 제일인에 불과한데 그 자신을 천하제일인 양 여기고 있었고, 그 덕에 몇 가지 실수를 한 것이다.
대부분의 실수는 정법회와의 싸움에서 했다.
정법오장로(正法五長老)!
정풍검대(正風劍隊),
수정옥녀검대(水晶玉女劍隊)…….
수정옥녀(水晶玉女) 단리음(段里音)이 이 년 사이 조직한 백도의 결사대들!
이들은 이 년에 걸쳐 마유정 휘하세력과 꾸준히 싸워 왔다.
마유정의 세력은 그 때마다 늘 큰 피해를 입었다. 마치 과거 인문(忍門)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듯이…….
마유정이 정법회를 상대로 대공략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위협 때문이었다.
내부의 혼란이란 바로 구마존(九魔尊)이 그를 진심으로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외부의 위협이란 옥화삼의 도전이었다.
두 가지만 없었다면 마유정은 이미 정법회를 쳤을 것이다.
하여간, 마유정은 최근 심각하게 격동된 상태에 있었다.
흑포사신은 소매로 피를 닦지도 못하고 허리를 더 움츠렸다.
"설, 설향이라는 계집은… 지금 철혈뇌옥(鐵血牢獄) 안에 있습니다!"
"화접(火蝶)에게 명해 그 계집을 굴복시키라 했었다. 한데, 화접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화접도 손을 들었다 합니다. 내일 새벽, 정식으로 보고가 드려질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계집이 아직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지독한 계집입니다. 독에 당해도 끄떡하지 않고 뱀 떼에 물어뜯기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으으… 음!"
"윤간(輪姦)하겠다고 위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 그 정도로 독종(毒種)인가?"
"그 계집은 무서운 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의식만 깨어나면, '백무엽이 꼭 네놈들을 찾아와 모두 찢어 죽인다. 기다려라!'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백무엽? 실종된 인문제십좌(忍門第十座) 말인가?"
"예!"
"으으… 음!"
"그 계집의 고문을 담당한 형방 사람들은 그 계집이 인문주임을 아는지라, 감히 함부로 다루지 못합니다!"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고?"
"그, 그 계집에게 손을 댈 경우 장차 인문이 나타나 잔혹하게 암살한다며, 모두 그 계집 곁에 가는 것을 꺼려 하고 있습니다!"
흑포사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이야기하다가는 아마 마유정의 손이 그의 두개골을 박살낼 것이다.
마유정의 사악한 눈길은 허공을 뚫고 있었다.
'인문, 그 자들만 휘하에 들일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누구든 죽일 수가 있다.'
마유정은 인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설향을 죽이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흑포사신은 한참 기다려도 마유정의 지시가 없자, 조심스레 고개를 쳐들며 입술을 떼었다.
"속하, 무엇을 어찌해야 할는지요?"
"네가 할일은 하나, 입을 닥치고 그냥 있는 것뿐이다!"
"으으… 음!"
"훗훗… 너는 내가 가짜 마화삼이라 여기며 속으로는 나를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마도제일인이다. 죽은 마무정이놈이 부활하기 전에는. 큿큿……!"
마유정의 눈에서는 광기가 번뜩거렸다.
그는 마공을 속성시키기 위해 독약을 썼다. 결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광기(狂氣)를 품게 된 것이다.
제 어미를 죽이며 태어난다는 살모사의 눈(殺母蛇)!
마유정의 눈은 살모사의 눈과 다를 바 없었다.
"버러지들! 계집과 황금밖에 모르는 놈들! 너희 같은 놈들을 데리고 천하를 정복하려 하는 내가 바보일지 모른다."
마유정은 이를 으드득 간다.
바로 그 때였다. 너무나도 요염한 목소리가 허공에 가득 찬 때는!
"호호… 이제야 아시는군요? 휘하에 황금과 계집만 아는 바보만 있다는 것을?"
대체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일까?
"누… 누구냐?"
흑포사신은 신비한 목소리에 자지러지며 손을 번쩍 쳐들었다.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 온 것일까?
이 곳은 신절대마가(新絶大魔家) 깊은 곳!
영패가 없는 사람은 절대 이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한데, 그 누가 마유정의 거처까지 들키지 않고 잠입을 했단 말인가?
"호호… 나는 적(敵)이 아니니, 안심해요."
허공에서 나긋한 음성이 들리더니, 돌연 뿌연 기류가 뭉치고 있었다.
츠으으- 츠으으-!
사방에서 분홍색 기류가 몰려들며 사람의 형상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화르륵-!
한기가 흩뿌려지는 가운데 분홍색 기류는 차츰차츰 엷어졌고, 옷자락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인영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핏빛 천으로 휘감은 여인.
얼굴은 짙은 적색 몽면으로 가려졌고, 살갗이 나타나는 부위라고는 양 손뿐인 괴여인!
그녀는 사악한 눈빛을 흘리며 내려섰고, 순간 마유정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멋진 백마귀영은(百魔鬼影隱)! 그대는 관북무림계(關北武林界) 사람이로군?"
그는 동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방어태세를 갖춘 후였다.
그는 왼쪽 발로 벽돌 하나를 지그시 밟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창안한 기관장치로, 그것을 세게 누르면 천장이 허물어지고 독침이 천만 개 튀어 나온다.
일컬어 필살관(必殺關).
마유정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기관장치 중 하나로, 만에 하나 나타날지 모르는 암살자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혈포녀(血袍女)는 쉬지 않고 마무를 흘렸다.
"마화삼 나으리, 저는 착한 계집이니 노여워 마십시오. 호호…!"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몸매는 완연히 나타났다.
굴곡이 완연한 몸뚱이, 허리는 끊어질 듯 잘록했고, 올라 붙은 둔부는 암반만하게 부풀어올라 좌우로 흔들거렸다.
지독한 암내를 풍기는 우물(尤物).
그녀의 가슴은 도발적으로 발달되어 있는데, 젖가리개를 하지 않은 듯 젖꼭지 두 개가 선명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 버릴 듯 육감적인 여인.
그녀는 마유정이 필살관의 장치에 발을 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천하제일인의 거처치고는 소박하군요, 이 곳은?"
교태로운 목소리다. 여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목소리에 실린 색기(色氣)를 느낄 수가 있으리라,
끈적거리는 목소리, 나긋나긋하고 풍만한 고깃덩어리.
그녀는 차츰차츰 하나의 육체로 마유정에게 느껴졌다.
'쓸 만한 몸뚱이인데?'
마유정은 뭇여자를 거쳤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시녀의 품안에 안겨 잤다.
그가 진짜 여자의 맛을 안 시기는 열세 살.
그 때 그의 시녀는 그가 자는 틈을 타서 수음을 했었고, 마유정은 기이한 흐느낌 소리에 몸을 일으키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계집은 웅크리고, 그 표정은 너무나도 괴이했었다.
그 다음 날, 마유정은 그 계집에게 겁탈당하다시피 여자(女子)를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늘 여자를 곁에 두었었다.
지금도 그의 주위에는 그만이 손을 댈 수 있는 미녀가 천(千)에 달한다.
그 중 우두머리는 혈발미랑 음요홍!
천 명의 미인은 하나같이 뛰어난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마유정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여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유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적의녀는 마유정의 눈빛에 담긴 뜻을 아는지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흘린다.
"그대가 영웅(英雄)임을 압니다! 그것을 알기에 지금 제가 십만 리 밖에서 왔으며… 그래서 저희 세력은 칠 년 전 그대의 반역에 적극 지지했던 것입니다!"
"칠, 칠 년 전?"
"호호… 당시 구마존(九魔尊)에게 절대마가를 초토화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십만 발의 화마시(火魔矢)를 주었던 세력은 바로 우리들의 세력이었지요."
적의녀가 낭랑하게 말할 때였다.
"으음, 그럼… 늘 우리 마혼십가와 교분을 맺고자 하는 북황(北皇)에서 나왔군?"
"그래요. 회신을 기다리다 못해 친히 왔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바로 때이기에!"
적의녀의 눈이 반짝 빛을 냈다.
북황(北皇), 아직은 천하가 알지 못하는 세력이다.
그러나 마혼십가는 북황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들은 마유정이 구마존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대반역할 때, 변황의 마도들과 더불어 적극 지지를 보낸 바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철씨(鐵氏)라던가?
그들의 뿌리는 몽고(蒙古)의 광대한 평원이라고 했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적의녀는 손을 들어 서탁 위를 가리켰다. 서탁 위에는 혈첩(血牒)이 떨어져 있었다.
"북황자(北皇子)께서는 구마존을 통해 마화삼께 보낸 저 첩지에 대한 해답을 직접 알아 보라 하시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밀사(密使)이지요."
혈첩, 북황첩(北皇牒)!
그것은 수 일 전 구마존을 통해 마유정에게 접수되었다.
마유정은 아직 화답서를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 밤을 틈타 북황의 밀사가 직접 나타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칠 년을 기다렸습니다. 마혼십가가 우리와 대동맹(大同盟)을 맺기를! 한데, 마혼십가는 자신의 아성(牙城)을 지키기에 급급해 우리와의 대동맹을 꺼려하는 눈치이니… 어찌 초조하지 않겠습니까?"
"아성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고?"
마유정이 불끈 노했다.
"호호… 외람된 말이나 마화삼 휘하에는 탐욕의 무리가 있을 뿐, 야망(野望)의 무적고수들은 없습니다. 제 말이 틀리나요?"
가히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이었다. 너무나도 절묘한 시기에 너무나도 절묘한 말이다. 마치 숨어서 마유정이 격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난 듯…….
북황밀사(北皇密使)는 마유정을 쩌릿하게 하는 말을 토했고, 마유정의 얼굴은 술 취한 듯 붉어졌다.
탐욕(貪慾), 야망(野望)!
너무나도 상이한 두 단어.
마유정은 적의녀를 한참 쏘아봤고, 한순간 그의 눈길은 흑포사신 쪽으로 돌려졌다.
"나가! 이 곳을 천라지망 포위하라!"
"나, 나가라고요?"
"어서!"
마유정의 눈에서 살광이 흐르자, 흑포사신은 찔끔 놀라며 위로 솟아올랐다.
슷-!
그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삐익- 삑-!
그리고 호각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주위는 수십 겹의 포위망에 뒤덮이게 되었다.
본시 이런 경비는 마유정이 운기행공을 할 때에만 펼쳐진다.
마유정, 그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너는 말이 통하는 계집이다! 마음에 든다!"
"역시 그대는 영웅이십니다. 호호! 북황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인들 같은 구마존을 통해 저희 세력의 의사를 전하기보다, 마화삼을 직접 찾아뵙고 단판을 짓는 것이 낫다고 하셨는데… 호호! 역시 그러하군요."
"훗훗… 나는 늘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마유정은 사악하게 웃으며 적의녀의 몸을 위아래 차근차근 훑어봤다.
뱀이 기어오르는 듯 섬뜩한 시선.
음악하고 음탕한 시선이 흐르는 가운데, 적의녀는 풍만한 몸매를 흔들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전시에도 사자(使者)는 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호호! 설마 북황자의 밀사인 나를 범하겠단 말인가요?"
"큿큿… 나는 북황자를 본 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는 용병술(用兵術)의 천재이고,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도 천재라고 했다! 그는 나에 대해 잘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지요?"
여인의 눈빛도 만만치는 않았다.
"네가… 내게 바쳐질 계집임을 내가 안다는 말이다! 거의 본능(本能)으로!"
너무나도 노골적인 말이다.
그러나 적의녀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호호… 역시 영웅과 통한다더니… 호호! 그대는 사내 중의 사내군요? 호호! 그래요. 나 무선(巫仙)은 그대에게 바쳐지는 북황자의 예물입니다! 그대가 맞추었어요! 호호……!"
무선(巫仙), 그녀는 웃으며 몸을 뒤튼다.
순간, 천이 스르르 풀리며 농염한 몸뚱이가 나타났다.
뱀이 허물을 벗듯 적포가 벗어졌고, 무선은 찰나적으로 나체로 화했다.
태어난 그대로의 몸뚱이는 터질 듯 부푼 채 방을 가득 메웠다.
"아예… 속옷은 입지 않았군?"
마유정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두 팔을 넓게 벌렸다.
"호호… 북황자의 조건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예물을 취하시렵니까?"
무선은 사박사박 걸음을 내딛었다.
젖가슴이 파도치듯 출렁거렸고, 비지의 숲 테두리가 바람에 흔들리듯 뒤흔들렸다.
기름이 전혀 없이 매끄러운 허벅지의 선.
아아, 풍요로운 여체!
색감의 극치미를 이룬 무선의 몸은 점점 마유정 쪽으로 다가섰다.
"내가 북황자를 인정하고, 북황자가 나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와 더불어 천하를 훔치는 싸움을 해 볼 수도 있겠지! 어차피 그와 연수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참이니까!"
마유정은 징그럽게 웃고 있었고, 무선은 이미 마유정의 무릎 위에 앉아 젖가슴을 마유정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흐으응……!"
실내는 돌연 열기에 휘감기고, 마유정은 근자에 드물게 흥분하고 있었다.
"너는… 뜨겁구나. 정말……!"
"흐으… 응……!"
무선의 몸은 점점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마유정의 옷을 풀어 흩트렸다.
아아, 격정의 밤!
천라지망에 뒤덮인 마화삼의 거처 안은 돌연 열풍에 휘감겼다.
"아아… 악! 나… 나빠, 나를 터뜨리려 하다니……!"
"좋… 좋아, 계… 계속하라!"
"밤은 길어요. 아직… 겨울이니까!"
"북녀(北女)답게 거칠군.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으으…음!"
"아직 시작에 불과해요. 흐으… 응……!"
격풍이 몰아치고 있을 때,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왜 내가 들어가지 못하지?"
혈발미랑 음요홍은 흑포사신에게 가로막힌 채 눈에 쌍심지를 돋구고 있었다.
그녀는 방사를 치를 차비를 다 차린 상태였다.
걸친 옷은 속살이 환히 보이는 나삼이고, 손에는 춘약(春藥)을 탄 여아홍이 한 병 들려 있었다.
거의 매일, 그녀는 마유정과 밤을 지샜었다.
한데, 이 밤의 공기는 달랐다.
"대체 왜 내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냐? 나로 말하면 마화삼의 내방(內房)을 지키는 제일호법이거늘……!"
"무조건 아니 됩니다. 이유는 제게 묻지 마십시오. 마화삼의 명이니까요."
흑포사신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밤의 격정이여, 격정의 밤이여!
기억해야만 한다. 이 깊은 밤의 격정(激情)을!
첫댓글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