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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교사 자료실 스크랩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투(2)
김정현 추천 0 조회 66 08.09.30 17: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펌]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투 (2) | ♠ 과학의 세계
출처 : 을파소의 블로그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투 (2)
토마스 맬더스(Thomas Malthos, 1766-1834), 맬더스의 『인구론』은 다윈과 윌러스가 진화론 찰스 다윈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비글호로 영국에 돌아온 지 4개월이 지나서 다윈은 자신이 보낸 화석들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한 리처드 오언(Richard Owen, 추후에 다윈의 가장 큰 적이 됨)으로부터 연구결과를 받았다. 그는 다윈이 보낸 화석들이 이들이 남아메리카에 아직 살고 있는 동물의 덩치 큰 변종이라고 말했다. 하마만한 설치류, 말만한 개미핥기도 있었다.

이 말을 들은 다윈은 왜 멸종한 동물들과 같은 지역에서 오늘날 살고 있는 동물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가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동물들은 결국 화석 동물들의 변형된 후손이 아닐까하는 것이 그의 큰 의문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주목을 끌은 것은 다윈이 채집하여 보낸 핀치새들의 표본이었다. 다윈은 이들 새들의 부리의 모양을 보아 여러 종류의 새 즉 핀치, 굴뚝새, 검은지빠귀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가장 저명한 조류학자 중에 한 명인 제임스 굴드(James Gould)는 다윈이 보낸 새들이 모두 핀치라고 말했다. 단지 특정한 먹이를 먹기에 편리하도록 굴뚝새나 검은지빠귀 같은 부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윈은 기묘하게 생김새가 달라진 핀치가 어떻게 생겼을까 의문에 빠졌다. 다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신이 세계를 창조해 낸 그 최초의 날에 이들 13종의 핀치가 한번에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윈은 처음 섬에 도착한 핀치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 섬에 살게 되자 후손들이 현재의 생활양식에 가장 적합한 신체 특성을 가진 독특한 종으로 변해갔다고 추정했다.

다윈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발견한 거대한 화석을 남긴 옛날 동물들은 몸집이 좀 더 작은 오늘날 포유류의 조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핀치나 개미핥기를 지배하는 법칙이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
다윈은 더욱 비약하여 인간을 단지 지능이 뛰어난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트 위에 다윈은 한 종이 새로운 종으로 가지치기를 해나가는 계통도를 그렸다. 그는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습다. 사람들은 지능을 가진 인간의 탄생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지능 아닌 다른 감각을 지닌 곤충의 등장은 더욱 놀랍다. 아름다운 초원과 숲으로 덮인 지구 위에 사는 존재라면 어떻게 감히 지능이 세상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윈은 핀치새처럼 인간도 진화의 산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노트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원숭이에게서 왔는가?”

다윈은 자신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시류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학계로부터 따돌림 당할 수도 있었다.

이런 경우 아마 대부분 다윈과 같은 상류층 자제들이라면 자신의 상상력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한 구설수에 휘말린다는 것은 편하게 살 수 있는 상류층들이 선호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과감히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다윈은 꼼꼼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계속 모으면서 자기의 이론을 계속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맬더스(Thomas Malthos, 1766-1834)가 1798년에 쓴 『인구론,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읽었다. 맬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물은 많은 자손을 만들므로 만약 그것이 모두 자란다면 지구는 곧 포화상태가 될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식량의 증가보다 빠르다. 따라서 인간의 수를 전쟁, 질병 등으로 항상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생활이란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여기에서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맬더스에 따르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식량 공급은 한정된다. 그 결과 인위적인 조치가 따르지 않는다면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하여 가장 허약한 인구 집단을 절멸시킨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윈은 생존 경쟁과 그 결과로서의 적자생존에 의해 이와 같은 종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다윈의 상상력은 또 다시 비약하기 시작했다.

우선 새의 종류가 적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는 핀치끼리 경쟁해야만 하고 그래서 핀치의 종류가 많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의 수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처음에는 힘이 약한 핀치나 먹이를 발견하는 것이 능숙하지 못한 핀치는 굶어 죽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큰 종자나 단단한 종자를 먹을 수 있게 된 핀치는 먹이를 놓고 다른 핀치와 다툴 필요가 없어지자 생존을 보장받으면서 새로운 종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딱따구리핀치의 경우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다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진화하는 과정에서 적자만 생존하고 부적자는 멸종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추정이라는 것이다. 부적자의 생존을 허락하는 그러한 환경을 가진 장소가 있는 경우에는 부적자도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 종의 기원은 종의 다양화이고 또 생물의 진화는 생물중의 야당이 아닌 여당이 시간과 함께 어떻게 변화해 갔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푸른물갈퀴뱁새는 육상에 집을 짓는 반면에 붉은물갈퀴뱁새는 나무 위에 집을 짓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사실 진화론 자체는 다윈 이전에도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일이다. 잘 알려진 라마르크(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rmarck)가 그의 이론을 적은 『동물철학』을 발간한 것이 1809년이었다. 그는 󰡐영양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고 오랜 동안 목을 늘이다 보니 기린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변했다󰡑라고 적었다.

라마르크는 진화에 대한 2가지 법칙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제 1법칙은 자꾸 사용하는 기관은 점점 더 강해지지만 쓰지 않는 기관은 퇴화된다는 것이며 제 2법칙은 그런 변화는 차세대에 계속 유지된다는 것으로 큰 틀에서 다윈의 진화론에 흡수된다.

영국의 저명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이 지구의 물리적 구조 변화와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변화는 다 같이 태초에 지구가 탄생할 때부터 작용한 것과 동일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아 초자연적인 신의 개입을 받지 않는다는 정연한 이론을 적은 『지질학원론』을 발간한 것도 1831년이었다. 그는 종들이 먹이와 영역을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어떤 종은 승리하고 어떤 종은 패배하기 때문에 결국 강한 종이 번성한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도 그의 저서에서 ‘하나의 미생물에서 모든 온혈 동물이 발달하였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일까?’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진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설명은 라마르크의 이론을 뛰어 넘는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 라마르크는 환경이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바람직한 변이를 낳는다고 단순하게 설명했다. 다윈은 라마르크와는 달리 특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는 특성을 진화시킨 종이 그렇지 못한 종보다 우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종이 변화할 수 있는 개연설을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물군이 먹이와 생식을 바탕으로 변이를 하는데 생명체가 존속하려면 이 변이형질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소위 적자 생존된 것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다산(多産)하는 생명체가 결국 일정한 개체수만을 자연에 남기는 것도 이들이 환경에 알맞게 자연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린의 목은 원래 말과 비슷한 정도였다. 기린의 조상은 갑자기 키 작은 나무의 먹이가 거의 없자 키 큰 나무에 있는 먹이를 따먹기 위해 목이 그렇게 길게 발달하였다. 한편 카멜레온은 적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피부색을 바꾸는 생체조직을 개발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계속 생체조직을 발전시켰고 수 세대에 걸쳐 이런 변화가 지속되면 낡은 형태는 소멸되고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을 이룬다.

이와 같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특성을 갖게 되면 어떤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독특해지고 결국 같은 종의 다른 개체와는 교배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원래 하나의 종이 있던 곳에 이제는 두 개의 종이 존재하는 것이다.

생물이 지구에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종들은 원형에서 수많은 방법으로 형질이 변하여 생존에 유리하도록 바뀐 것이다. 인간도 이 같은 자연 법칙에 따라 진화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즉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환경에 맞게 서서히 진화 발달한 것이다.

<윌러스와 동일한 결론을 매끄럽게 풀다>

다윈이 진화론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론을 곧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처럼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역작인 『종의 기원』에서 다루게 될 내용들이 종교와 결부되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비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정통 기독교를 확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많은 자신의 동료들과 다투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가 1838년에 쓴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존 더랜트의 글을 인용한다.

“초기 천문학자들에 대한 박해나 처형당하는 꿈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가까운 친구인 식물학자 후커에게 나의 이론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마치 ‘살인죄를 고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는 어떤 종류의 공개적인 논쟁도 극히 싫어한데다가 1840년 이후 건강이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다윈의 건강에 대해서 학자들은 비글호 항해 때 걸린 열대지방의 풍토병 또는 연구로 인한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여하튼 다윈은 영국신사답게 자신 나름대로의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문제가 생길 소지가 다분한 자신의 이론을 결코 서둘러 발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명분도 있었다. 혁명적인 이론을 표명하려면 방대한 자료로 뒷받침해야 한다며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착실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유전의 메커니즘은커녕 유전의 규칙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던 사정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하다.

사실 1858년 6월 18일, 동인도 제도에 사는 알프레드 러셀 윌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다윈에게 배달되지 않았다면 다윈의 논문은 더 연기되었을 것이다. 다윈보다 14살이나 어린 무명의 윌러스가 대학자인 다윈에게 자신의 논문 초고를 보내면서 다윈의 의견을 물었다.

윌러스는 1823년 영국 남서부(웨일스 지역)에 있는 ?뵈?주의 우스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갑충(투구벌레) 등 채집에 열중했지만 측량기사인 형의 권유에 따라 토지측량, 건축업 등에 종사했고 1844~1845년에 영어 교사를 했다.

1842년 다윈이 1839년에 출간한 『비글호 항해기, Journal of Researches into 섣 National History and Geology of the Countries Visited during the Voyage of HMS Beagle Round the World Under the Command of Capt. FitzRoy, R. N.』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에 관한 설명에 호기심을 느꼈다.

윌러스는 학교 교사 시절에 사귄 베이츠와 함께 1848년부터 1852년까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지방으로 박물 채집에 나섰다. 귀국하자마자 1853년에 『아마존 및 리우네그루 여행 이야기』를 출간하여 학회에 알려졌다. 1854년부터 1862년까지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여행하여 1869년에 『말레이 군도』라는 책도 출판했다.

그는 여행하면서도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에 적힌 생물들의 미소한 차이나 특징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발리섬과 롬보크섬 사이에서 보르네오섬과 셀레베스섬 사이를 지나 필리핀 제도 남쪽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그 동서 지역의 생물들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의 동물이 다른 지역의 동물에 비해 보다 원시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른 지역의 동물들이 더욱 ‘진화’하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이 다른 지역으로부터 지리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생물이 많이 있다. 잘 알려진 캥거루, 쿠스쿠스, 코알라, 주머니이리, 주머니두더쥐, 주머니고양이, 주머니개미핥기 등의 유대류가 절반을 차지한다. 인도네시아 제도로 대표되는 동양구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 대표되는 오스트레일리아구에 사는 동물들이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으므로 윌러스는 어떻게 이와 같은 차이가 생기는 지 추론하기 시작했다.

이 때 맬더스의 『인구론』을 읽은 윌러스는 다윈과 동일한 결론을 내린 후 다윈에게 편지를 보냈다. 윌러스는 다윈과 연구에 관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학자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명성 등에 관심이 없었던 다윈도 이 편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화에 대한 이 논문의 결론은 맬더스의 『인구론』을 인용한 것부터 자연선택설까지 다윈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맬더스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였으므로 다윈과 윌러스가 이 책을 읽고 같은 결론을 유도한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자신과 똑 같은 결론을 내린 윌러스의 논문을 보고 다윈은 재빨리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1797~1875)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고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께서 전에 제가 사람들의 추월을 당할 것이라고 염려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처럼 놀라운 우연의 일치를 본 적이 없습니다. 논문의 각 장의 소제목까지 일치하고 있습니다.”

라이엘은 다윈에게 두 사람 공동의 논문을 권위 있는 <린네 협회>에 발표하고 또 그가 집필해 놓은 원고를 조속히 정리하여 출판하도록 충고했다. 윌러스의 동의를 얻은 다윈이 이 충고를 따랐고 이들의 논문은 공저로 하여 1858년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즉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존속(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 『린네협회잡지』에 발표되었다. 다윈과 윌러스는 각각 서로의 업적을 칭찬하였으며 우선권을 다투지 않았다. 1862년 영국으로 돌아온 윌러스는 1870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 자신의 역량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종의 기원』을 쓰는 일이 내 손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윈 씨는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가 계획하고 또 이룩한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다윈과 윌러스가 공동으로 진화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음에도 다윈이 진화론의 시조로 거론되는 이유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거의 15년 전인 1844년에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후커(Sir Joseph Dalton Hooker)가 다윈의 소논문을 낭독한 적이 있었고 또한 다윈이 한 미국 교수에게 자신이 연구하는 내용을 보낸 적이 있었으며 윌러스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그가 진화론에 관한 이론을 세워두었다고 적은 적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논문이 발표되기 20년 전에 비글호의 항해를 마친 후 1839년에 『비글호의 항해기』를 발간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종의 기원』은 19세기에 출판된 자연과학 책 중에서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의 책 때문에 말썽이 벌어지는 것을 반기지 않았으므로 『종의 기원』에서 인류에 대한 것은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은 즉시 과학자들과 일반 독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초판 1,259부가 출판된 첫날 다 팔렸고 다음해 1월에는 3,000부를 더 찍었다.

다윈이 걱정한대로 정말로 폭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일단 말썽이 벌어지자 다윈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윈은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1871년에 인간의 진화에 대해 그가 모을 수 있었던 증거를 모두 기록한 『인간의 조상, The descent of Man』을 비롯한 생물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간행했다.

<원숭이 조상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관 즉 진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담고 있지만 매우 방어적인 책이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오랫동안 비웃을 것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상상하면서 책을 썼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윈은 진화론에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의 증거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정황적인 것이지 확연한 과학적 사실에 의해 증명될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그가 믿고 있는 믿음에 명백히 반한다는 것이다. 종의 독자성과 불가침성, 생명의 목적성,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지위가 그의 이론에 의해 손상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윈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매우 명쾌한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선택은 생물체의 다양성에 대한 주요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이 가정에 의할 경우 이제까지 생물계에서 혼란스럽고 연관이 없이 보이는 모든 종류들의 생명체의 존재 이유와 방법에 대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논증에서 돋보이는 점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솔직하게 나타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문제점들이 왜 진정한 문제거리가 되지 못하는 가를 적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 인해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책의 맨 끝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자연 속에서 싸움, 기근, 죽음 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 높은 단계의 동물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세계관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다. 이 세계관 속에서 생명의 힘은 당초에 몇몇 생물 또는 단 하나의 생물에 불어넣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단순하고 불변인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질학적 순환을 계속하는 동안 생명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태초의 생명체로부터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체들이 무수히 진화했고 또 진화해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솔직함과 노련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은 출간하자마자 폭풍을 몰고 왔다. 다윈의 진화론이 특별히 세인의 비평을 받은 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내용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다윈은 지구에 사는 무수한 종이 공동조상들로부터 거듭된 분화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원숭이에서 분리된 것과 다름 아니라고 이해된 것이다.

여하튼 다윈의 반대자들이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단순히 원숭이의 변종이라면 도덕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당시의 식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가장 분명한 차이는 지적 능력이라고 보았다. 언어 구사력과 논리적 사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인간에게 특별한 별도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다윈이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원천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다윈이 예상한대로 종교계에서의 반발이 거세자 다윈은 ‘왜 자신의 생각이 사람들의 종교 감정에 충격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특히 후에 수상이 되어 영국 민주주의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대정치가로 거명되는 벤자민 디즈레일리(1804~1881)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다윈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지금 사회 앞에 놓여 있는 의심할 바 없이 가장 놀라운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원숭이인가 그렇지 않으면 천사인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천사 편을 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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