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6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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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조선왕조실록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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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 - 갑신정변(2)
고종과 중전 그리고 민씨 척족세력이 추진하는 온건한 방식의 중국식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분명한 개화와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모인 이들을 세간에서는 개화당이라 불렀습니다.
-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등
그 중 대표는 30대 초반의 김옥균으로서, 그는 글이며 글씨, 언변, 사교성, 수완 등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이들은 수신사 등으로 일본, 미국 등을 다니며 문명개화의 현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특히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이나 유명 학자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일본의 입장에 선 주장들을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 조선이 개화하고 부국강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으로부터 자주독립해야 합니다.
- 우리 일본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도와줄 것입니다.
어느덧 조정은 온건개화파이자 친청파로 분류되는 민씨 척족 세력과 친일을 추구하는 개화당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고종은 친청파인 중전의 개화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은 채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주목할 만합니다.
- 일본으로부터도 얻을 이익이 있으면 얻어야 해!
한편,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을 수 있다는 호언을 한 후 고종의 위임장을 들고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 차관을 얻어 뭴렌도르프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개화의 주도권을 쥐는 거야!
그러나 일본은 종전의 약속과 달리 차관제공을 확답하지 않은 채 미적미적했고, 결국 김옥균은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친청파 주도하에 당오전을 발행하는 등의 재정정책을 썼으나, 그 폐해는 막심했고, 주도권을 잃은 개화당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 자 이제 어떡할 것인가! 일본의 도움을 얻어 한 번에 갈아 엎는 것이 필요한데, 일본이 협조하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그런데 국제정세가 급변했습니다. 베트남을 두고 식민지화를 노리는 프랑스와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일본은 생각했습니다.
- 중국이 몰리는 것 맞지? 조선 주둔군도 많이 빠졌다는데, 이 기회에 조선에서 확실히 주도권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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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0 - 갑신정변(3)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행보가 급해졌습니다.
다케조에는 고종에게 조선이 지급한 배상금 중 40만 원을 돌려주며 고종의 환심을 사는 한편, 박영효를 만나 언질을 주었습니다.
- 청국이 곧 망할 것인데,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돕겠소.
다케조에를 다시 만난 김옥균 등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 여러 대신들과 각국 공사가 참여하는 우정국 낙성식 피로연을 디데이로 삼는다.
- 이곳에서 민씨 척족 세력 등 간신배를 모조리 처치하고 전하를 경우궁으로 모신다.
- 즉시 새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법령을 내 놓는다.
- 일본군이 즉각 출동해서 호위를 해 주는 것이 필요하므로 일본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개화당 인사들의 잦은 회동, 전과 다른 일본 정부와 다케조에의 움직임... 이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중국군 위안스카이는 비상경계를 명했고, 외교가와 조정 안팎에는 조만간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드디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의 피로연이 열린지 얼마 후 ‘불이야~’라는 소리와 함게 소란이 일었고, 민영익이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을 위해 뛰어 나갔다가 대기 중이던 개화당 측 군사들의 칼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와 쓰러졌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와 일본 공사관으로 가 일본군의 출동 준비를 확인한 후 궁궐로 가 침전에 든 고종을 깨웠습니다.
- 우정국에서 정변이 발생했나이다. 즉시 피하셔야 하옵니다.
- 일본 공사에게 호위해 달라고 청하시옵소서.
놀란 고종 옆에서 중전이 날카롭게 이것저것 물었으나 때마침 궐 안에 준비해 두었던 폭약이 터지자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종의 호위를 요구하는 친서를 받은 일본군은 즉시 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 밖을 감쌌고, 궁궐 안에는 김옥균 등이 준비한 군사들이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고종이 있는 경우궁으로 달려 온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이조연, 윤태준, 한규직 등 수 많은 대신들과 고종을 모시던 내시 유재현 등이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자 김옥균 등은 고종을 사실상 감금한 채 개화당 인사들로 채워진 내각 인사를 발표하고, 왕의 명을 빌려 14개항의 개혁안을 발표하였습니다.
- 대원군 조속 귀국,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등 등
김옥균 등 개화당이 생각보다 쉽게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 그런데, 이제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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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1 - 갑신정변(4)
정변이 일어난 지 3일째! 김옥균 등이 과감한 시도로 권력을 틀어쥐긴 했으나, 그 토대가 없었습니다.
중국군 대장 위안스카이는 곧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 국왕의 의지와 별개로, 소수의 젊은 애들이 약간의 일본군과 조선군 병력을 믿고 벌인 어처구니없는 불장난! 일본도 별 대책은 없어 보인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위안스카이는 중국군대를 이끌고 궁궐 앞에 당도했고, 조선군 좌·우영 군사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압도적인 인원과 화력을 보유한 위안스카이는 포와 총을 쏘며 궐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일본군과 소수 조선군이 맞섰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당황한 다케조에는 철수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김옥균 등은 고종을 인천으로 모시고 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고종이 응하지 않았고, 다케조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정변의 주역들은 모든 일이 이렇게 끝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논의한 정변의 주역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홍영식, 박영교 등을 남기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홍영식, 박영교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 못하고 고종이 중국군대를 맞는 것을 막고 나섰다가,
- 전하께옵선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여선 아니되옵니다. 어찰을 내려 위안스카이로 하여금 군사를 물리치라 명하소서.
그 자리에서 호위 군사들에게 난자당해 죽었습니다.
- 아니 저 역적놈 시키 좀 보소?
고종은 중국 군영에 몸을 맡겼다가 며칠 만에 창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 군란 때 겪은 수모가 얼마인데 2년 만에 또 이런 수모라니...
정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불태우고, 눈에 보이는 일본인들을 마구 공격했습니다.
- 이때 맞아 죽은 일본인이 39명이었습니다.
김옥균 등은 머리를 깍고 양복을 입고 일본 배에 올라 일본으로 도망갔으나, 고달프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 조선에서는 송환을 요구하고, 자객을 보내는데 일본은 큰 뜻이 없어 보이니 어찌할 것인가.
조선에서 이들은 모두 역모로 의율(법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사실이나 행위에 대하여 법원이 법규를 적용함.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법을 적용함)되어 가족들의 희생이 컸고, 홍영식의 아비는 아들의 역모를 한탄하며 손자에게 독을 먹여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으며 박영효, 서재필의 아비와 서광범의 아내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개화당 청년들이 색출되어 모조리 처형된 것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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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 - 잃어버린 10년(1)
정변 실패 후 청의 영향력과 간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고, 20대의 위안스카이는 총독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정변을 부추키고 가담까지 했던 일본은 군함을 끌고 시위를 벌이며 조선에 책임질 것을 요구해 한성조약을 통해 넉넉한 보상을 받아갔고,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삼아 리홍장과 담판해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수완을 부렸습니다.
김옥균 등 개화당의 꿈은 왜 3일천하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하루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사명감에 불탔으나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저항을 막아 낼 자체의 무력이 전혀 없었으며, 중국이 청프전쟁 때문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라는 정세오판이 있었고, 일본의 철저한 국익우선정책을 간과한 채 일본에 지나치게 의지한 정변이었으니, 실패는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설령 김옥균 등의 정변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역시 일본의 예속을 피할 수 없었을 터이므로, 긍정적인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래저래 후한 평가를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발발과 그 수습과정을 볼 때, 이제 조선이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이제는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겠는걸 ㅎㅎ)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해 국내문제가 외세에 의해 국제문제가 될 수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정변 이후 이러한 현상은 확연히 강화되었는데,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삼아 일본, 영국 등 해양세력의 진출을 막으려는 러시아가 대표주자였습니다.
- 우리도 알고 보면 이웃사촌 아닙니까?
영국도 한반도에 말뚝을 박고 막무가내로 한자리를 차지하려 들었습니다. 1885년 조선은 영국으로부터 일방 통보를 받았습니다.
- 뜻밖의 일에 대응하기 위해 얼마간 헤밀턴을 차지해야겠다.
헤밀턴은 거문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다짜고짜 거문도를 점령하더니 군사기지를 만들고 그대로 주둔하였습니다. 조선이 반발하고 주변국들의 협조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2년이나 마음대로 있다가 떠나갔습니다.
고종과 중전은 러시아의 접근을 어느 정도 허용하였습니다.
- 일본도 중국도 믿을 것이 없으니, 차라리 러시아를 통해 견제를 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중국 리홍장은 러시아에 붙은 뮐렌도르프를 해임하고, 고종과 중전에 대한 견제를 위해 잡아 두었던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 신경쓰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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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2 - 잃어버린 10년(2)
임오군란 때 납치된 대원군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고종도 직접 나가 맞았으나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 이런 싸가지
고종은 형식상으로 최대한 극진히 대우하면서도 사실상 가택연금을 시켰습니다.
- 조정 신하는 명을 전하는 것을 제외하고 일체 사적방문을 금한다!
20대의 오만한 위안스카이를 대장으로 한 중국군은 조선 에서의 영향력을 키워갔으나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지켜보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1884년 이후의 조선 정세는 중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일본, 러시아 등과 묘한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형세 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세는 1894년까지 10여년 간 이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와 같은 10년은 조선이 힘을 키워 망국을 막을 절호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화에 대한 의식도 크게 성장했고, 서양이나 일본에 다녀온 사람이 많아 인적자원도 어느 정도 마련 되었습니다.
- 미국엔 국왕이 없고 백성이 뽑은 대통령이 다스린다네?
- 영국에는 땅속으로 철마가 달리더라니까?
개화는 어느덧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고종과 조정은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와 수교를 하고 여러 근대화작업을 추진했습니다.
- 외국어 교육을 위한 육영공원 설립, 서양 교회 허용, 배재 학당, 이화학당 설립, 근대식 병원(제중원) 설립, 전신가설 (경복궁에 전기가 들어오다!)
이렇게 정변 이후 10여 년 간 겉으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선과 다름이 없었던 일본이 서양 강국의 우위를 인정한 후 나라의 체제를 180도 완전히 바꿔 10여년 만에 그럴듯한 강국이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합니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 엄중한 세계정세의 변화를 인식하고 나라를 이끌어나갈 개혁 주체인 임금(할줄아는게 없어 그저 중전의 지시나 기다리고 애비는 싫고)과 조정의 비젼이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여전히 중요한 것은 개화가 아니라 왕실의 유지와 사대부의 지배였을 뿐,
부국강병을 하지 않으면 망국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울러, 진정한 개화, 개혁, 부국강병은 강력한 내정 개혁을 동반하는 것일 터인데도 구체제 그대로를 유지, 답습 하였으니, 조선 조정의 개화, 개혁은 부국강병의 길과는 멀어도 아주 먼 것이었습니다.
지배층이 죽어도 내려 놓지 못하는 구체제 특권세상의 균열을 내는 것은 결국 ‘아래’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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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3 - 조선의 1894년(1)
혹세무민의 혐의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동학 교주 최제우는 고종 즉위 즈음 효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주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외세의 접근에 불안해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절망하던 백성들은 동학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습니다.
- 우리 동학은 신분의 귀천도 남녀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린 양반이고 상놈과 노비는 당연한 것인데 이런 반사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니 이런것이 이단이야)
그러나 동학을 믿는 것은 나라에서 금한 일이었으므로, 지방 수령들은 동학교도들을 붙잡아 탄압했습니다.
- 당장 주리를 틀 것이로되, 스무 냥만 내면 한 번 봐주지. 어쩔래?
동학은 지친 백성들의 폭발적인 지원속에 충청, 전라지역 으로 확대되어갔고,
이에 고무된 최시형 등 동학 지도자 들은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우리가 왜 불법이고 왜 이단이란 말이냐!
1892년 신도 1천여 명이 공주에 모여 집회를 가졌고, 전라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으며,
1893년에는 40명의 대표가 상소문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궐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 속히 이들을 체포해 조사한 후 괴수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잔당은 잘 깨우쳐 돌아가게 하소서!
복합 상소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조정의 적극적인 탄압만이 뒤따르자 동학 지도부는 본격적인 실력행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팔도의 모든 교인은 보은으로 모여라!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의 교도들이 접주의 인솔 하에 모여들었는데,
여기에는 동학교도 외에도 수탈에 이골이 난 농민들, 다 뺏기고 고향을 떠난 유랑민들 등 등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은집회는 종전 집회보다 훨씬 더 강력했고, 정치적 색채 역시 훨씬 강했습니다,
- 우리 수만이 죽기로 왜와 양이를 쓸어 대보의 의리를 본받고자 한다.
이에 조정은 서울의 군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하는 등 바짝 긴장했으나, 보은집회는 용두사미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 안에 강력한 정치적 색채를 갖는 세력이 꿈틀거리는데, 교주 최시형이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 이는 바로 전봉준이었습니다. 전봉준은 실망했습니다.
- 이게 뭐냐.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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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4 - 조선의 1894년(2)
1894년 1월 10일 저녁, 전라도 정읍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 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 단신의 사내 하나가 우뚝 섰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담력은 산같이 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던 전봉준입니다.
-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저 악랄한 자들에게 들어간 지 오래되었소. 여기에 조병갑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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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에 태어난 전봉준의 집안은 본디 벼슬을 했던 양반 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자 몰락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준은 고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떠돌아다니다 서른 살 즈음 고부 마을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풍수도 보고,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나 소장도 대필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호남 지역은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부패한 지방 관리들이 이 땅을 한밑천 챙기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인 조병갑은 세도가 풍양 조씨 척족(성이 다른 친족, 친족은법률상의 의미로는 피붙이인 혈족과 혼인으로 맺어진 척족인 인척을 말하며 이러한 넓은 의미의 친족은 보통 친척이라고 하는데 이는 관습상의 친족과 척족을 말한다)으로서 수탈의 달인이었습니다.
- 황무지 개간 시킨 후 징세하고 빼앗기
- 아버지 공덕비를 세울 경비 거두기
- 강제로 만석보를 쌓게 한 다음 물세 거두기
- 죄명 만들어 잡아들인 후 면죄 대가 받기 등 등
군수 외에도 양전 사무를 맡아보던 양전사, 세곡 운반을 담당한 전운사 등의 불법 수탈이 더해져 고부 군민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 끼니때인데도 연기 나는 집이 몇 없다!
견디다 못한 군민들은 전봉준을 찾아 소장을 써달라고 한 후 이를 가지고 관아로 갔지만, 돌아온 것은 매질과 구금이었습니다.
- 어디서 이런 불순한 행태를 배웠느냐! 퍽! 퍽! 퍽!
군민들은 몇 번이고 관아로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조병갑은 이들을 난민으로 몰아 엄한 형벌로 다스렸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도 이 일에 앞장섰다가 난민으로 몰려 체포되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군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 젠장,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바탕 해봤으면 원이라도 없겠네!
예나 지금이나 나랏돈은 눈먼돈이요 국민혈세는 자기 배채우기 일수고, 서민들이야 굶어죽던 말던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넘들은 세도가를 등에 업고 세상 천지를 주무르니 국민을 위한 공무원을 찾을 길이 없다.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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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5 - 조선의 1894년(3)
오랫동안 지주와 관리의 수탈에 이를 갈며 기회를 엿보던 전봉준이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전봉준은 뜻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 이제 우리가 꿈꿔 온 일을 펼칠 때가 되었다.
의견을 모은 그들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습니다.(사발통문은 사발 모양으로 발기자들의 이름을 빙 둘러 쓴 통문을 말함)
그 내용은 이전의 민란에서 보였던 주장들과는 질이 달랐습니다.
- 고부성을 함락해 조병갑을 목베어 죽일 것.
-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탐리를 엄히 징벌할 것.
-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나아갈 것.
그동안의 민란은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수령을 잡아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등 기본적으로 나라의 틀을 깰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전봉준의 사발통문에는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이고 전주 감영을 함락한 후 서울까지 진격하겠다는 것이니, 이는 국가적 차원의 변혁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봉준이 이런 뜻을 공공연히 밝힌 것은 백성의 등골을 빼는 수탈이 수령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나라의 구조적 문제이어서 절대로 고쳐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데 기인한 것이고, 나아가 동학 조직을 통해 교감한 인물들이 함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 1월, 고부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전봉준의 지도 아래 고부 관아로 들이쳤습니다.
조병갑이 이미 달아난 고부 관아를 점령한 이들은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을 했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헐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기세를 올린 농민군은 고부 일대를 점령한 채 한 달을 보냈으나, 애초의 선언대로 전주 감영으로 진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인근 지역과 다른 동학 지도자들의 호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이러다 고립된 채 진압되는 거 아냐?
때마침 고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신임군수로 박원명을, 봉기를 진압하고 조사할 안핵사로 이용태를 내려 보냈고, 박원명이 회유책을 쓰자 농민군이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전봉준의 뜻이 꺽이는 듯 했으나, 그 뒤에 나타난 이용태가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줄줄이 잡아갔고, 특히 농민들이 주축이었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전가하며 동학을 강력히 탄압하였습니다. 다시 봉기의 불길이 번졌습니다.
- 이번엔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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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6 - 조선의 1894년(4)
다시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자 전봉준은 무장현의 동학 접주 손화중을 찾았습니다.
- 저 소리를 들어보세. 이제 정말 때가 되었네.
손화중이 봉기에 적극 참여하면서 태인현의 농민들도 접주 김개남의 주도 아래 봉기하자 그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드디어 3월에 지도부를 조직하는 등 모양을 갖추었으며, 5월 백산면에 모인 군중은 1만 3천명에 달했습니다.
- 총대장 : 전봉준
- 총관령 : 김개남, 손화중 등 등
전봉준은 격문을 손수 지어 봉기의 이유를 널리 알렸습니다.
-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또한 네 가지 군율을 정했습니다.
-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 것.
-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
-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할 것.
- 4.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
이로써 처음에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민란은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태인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처음 관군과 만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농민군은 계속해 정읍, 흥덕, 영광, 함평, 장성 일대를 점령하며 세를 키웠고, 장성에서는 양호초토사로 서울에서 내려 온 홍계훈의 서울 군대와 싸워 박살을 내는 성과를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더욱 자신감을 얻은 농민군은 마침내 ‘호남제일성’이라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큰 고생 없이 전주성을 함락해버렸습니다.
- 이겼다 또 이겼다!
전주 감영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고종과 조정을 공황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 서울에서 경군이 내려갔는데도 우리 왕조가 일어난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것인가!
결국 조선 조정은 위안스카이와 교섭한 뒤 정식으로 청에 파병요청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런 일이 계속되면 중국 정부에 걱정을 끼침이 클 것입니다. 임오, 갑신년의 두 변란 때에도 중국 군대의 진압에 힘입었는데, 그 때 일을 참작하여 신속히 군대를 파견토록 해 주십시오.
또 다시 외국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대단한 정권이야~~
외국에선 이정도 민중 봉기면 정권이 무너져야 정상인데 어찌 그리 똑똑한지 국민을 작살내기위해 외국군대 까지동원해서 진압하는걸 보면 이건 뭘까 망해가는 조선 얼마나 더 백성들이 죽어야하고 고난을 받을까. .불쌍한 조선 백성들 . .헐 진실로세상에 공짜는없다.외국군대가 모든 일끝내고 공손히 가것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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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 탄생의, 시대적 배경과 이념 -
* 진주민란 *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 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 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 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 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 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 한다고, 보는 범천론 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 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 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 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 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 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라는,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 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 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 들여져 그 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 를 두어,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 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 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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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7 - 조선의 1894년(5)
조선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으나, 달리 길이 없다고 보고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 파병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 현지 위안스카이의 전언입니다.
그러나 청군의 파병은 조선침략 더 나아가 대륙침략의 꿈을 꾸고 있는 일본군의 파병을 불러왔습니다.
- 텐진조약 제3조 : 장차 조선에 중대한 일이 일어나 어느 일국이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서로 연락하며, 사태가 진전되면 다시 철수한다.
일본 정부는 이번 사태를 살펴보며 일찌감치 조선 조정이 청군 파병을 요청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습니다.
- 무슨 준비? 전쟁준비!
일본은 그동안 대륙침략을 목표로 국력을 강화하고 조선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력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해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이라는 현실만 부각시킨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일본은 조선이 잃어버린 그 10여 년간 최신전함을 구입하고 무기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현대식 징병을 통해 군인 수를 대폭 늘리고 훈련을 강화시켜 정예화하였습니다.
- 이제 싸우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전쟁의 명분을 만들어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다다른 후 일본군이 공관과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인천항에 상륙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본군의 상륙에 고종과 조정은 당혹했습니다.
- 아니 일본이 왜... 게다가 서울로 오고 있다고?
이즈음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홍계훈의 관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청군과 일본군의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농민군과 홍계훈은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그래야 청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해서 5월 7일 전봉준은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다음날 전주성을 나와 농민군을 해산시켰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전주 화약입니다.
이 화약대로 전봉준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폐단이많은정치)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집강소는 농민들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농민 자치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주성이 회복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즉각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군대가 철수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 철수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때부터 1945년 해방때까지 일본 군대가 한국에 주둔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돌아가는걸 보면 모든 문제는 나한테 있다. 결국 조선이 힘이 없으니 이를 막을 군사력이 없어 자주국방이 안되는것이고 내나라 국방을 다른나라에 맡기고 조공이나 바치는 현실ㅠ_ㅠ
암튼 목소리 큰놈하고, 힘쎈놈이 장땡은 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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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을미사변은 동학농민운동직후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입니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을 위한 영향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이를 주도하였고 이에 친일세력인 박영효는 1895년7월 명성황후시해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달아나고 친일파는 세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미 8월에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습니다. 게다가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고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 아소정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습니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이두황,이진호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를 포섭 하였습니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고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습니다.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습니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다 사망하였다. 흉도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에 난입하여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에 묻었습니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에조가 본국에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 "에조보고서"에 의하면 20여명의 자객들이 강간하고. 숨이멎은후에 도 시간(죽은사람을 범하는것)을 계속한후 불에태우고 백성들이 먹는 우물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사건으로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나빠져 제천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국제적으로도 거센 비난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사건 처리 방안으로서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고무라를 판리공사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습니다. 을미사변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었고, 이에 친일 내각은 실각하고 김홍집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친일파로 몰려 군중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자주권이 훼손되고 내정간섭을 받게되었으며, 내각은 친러파가 장악하면서 일본은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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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8 - 조선의 1894년(6)
일본은 조선의 철병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 동학군이 해산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청군은 도리어 증강되었다.
그러자 청군이 함께 철병하자 제안했고, 이어서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서 철군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일본은 오히려 중국에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 함께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개혁에 착수하자.
중국이 일본의 의도를 알아채고 거부하자, 일본이 드디어 막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조선은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을 조선에서 철수시켜 조선이 자주국임을 실증하시오. 기한은 3일 후인 6월 20일!
기한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일본군은 21일 새벽 경복궁을 습격했습니다. 궁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잠시 대항했으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한 고종이 희생을 줄이기 위해 저항 포기를 명하자 일본군은 고종 침전까지 그대로 내달았습니다.
- 전하께서 기침하셨느냐?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 원하는 바를 얻어냈습니다.
- 청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
- 청국군은 모두 조선에서 떠나라.
그리고 이틀 뒤, 청군은 일본군의 도발에 확실한 방침을 정하지 못한 채 영국 국적의 배에 군대를 싣고 아산만 풍도 앞바다를 들어서다가, 일본 군대의 포격에 의해 침몰당하고 말았습니다.
- 선빵이 최고여!
조선땅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한 판 붙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면서도 청군 리홍장은 일본이 10여 년 간 전력을 크게 강화시킨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상이 다 청나라가 이긴다고 하는데도 싸움을 피하고자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 그렇다고 풍도에서 선빵을 맞고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
리홍장은 조선 땅 평양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습니다.
- 요동의 군대를 평양으로 이동시키고 아산에 주둔 중인 군사도 평양으로 집결시켜라!
그러나 아산에 주둔해 있던 청군은 평택을 지나 내려오는 일본군과 성환에서 만나 박살이 나고 말았습나다.
- 청군 사망 500명, 일본군 사망 82명!
남은 청군은 산 넘고 물 건너 평양으로 향했고 일본군도 병력을 평양으로 집결시켰습니다.
쪽발이들 썬방날리며 들어오는데 청군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그만큼 군사력에 자신이 있단 얘기인데 모든면에서 마음에 안들지만 우리 보다 힘이 센데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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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9 - 조선의 1894년(7)
1894년 9월 15일, 평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기습했고, 청군은 지리멸렬하다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습니다.
- 청군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 일본군 사상자 500여 명
그 이튿날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 함대가 맞붙었는데, 청나라 북양함대가 화력에서 우위에 있었음에도 일본 함대에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평양에서 패배한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 넘어 강변에 요새를 만들고 일전을 준비했으나, 병력을 보충한 일본군은 10월 24일 밤 압록강을 건너 청군을 무너뜨렸고, 다음날에는 단둥의 청군 기지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에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요동반도 남쪽 도시들과 여순항을 점령하였고, 해를 넘긴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으며, 타이완에도 상륙함으로써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년도 되지 않아 일본에 무참히 패한 청은 1895년 4월 17일 일본에 사실상 항복을 하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 거액의 전쟁보상금 지급, 랴오둥 반도, 대만 등 할양 등 등
1894년 즈음까지 조선에서 종주국을 자임하며 외견상 일본을 누르고 있던 청은 준비된 군대를 보유한 일본에 이와 같이 무참히 깨졌습니다,
이로 인해 청은 조선과 다름이 없는 신세, 즉 세계열강의 식사꺼리로 완전히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넓은 땅덩어리도 그 많은 인구도 아무 짝에 쓸 데가 없었습니다.
한편, 청과의 전쟁 명분을 얻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은 반일 여론 무마와 조선 지배의 편의를 위해 두 가지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그 하나는 중국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와 아들과 며느리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대원군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마저도 대원군에게 손을 내밀 정도로 대원군에 대한 국민의 신망이 매우 높은 점을 고려한 것입니다.
- 우리가 힘을 찾아드릴 테니 함께 개혁을 도모해보지 않으시렵니까?
- 좋소!(빠드득)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고종에게 요구했습니다.
- 전권을 대원군에게 넘기시오!
그렇게 돌아온 대원군은 원성이 높은 민씨 일가를 축출하고 곧 의욕적 행보를 하기 시작했지만, 대원군이 그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이 친일적 성향의 내각을 구성해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뭐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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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0 - 조선의 1894년(8)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사실상 점령한 일본이 꺼내 든 두 번째 카드는 내정개혁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갑오경장입니다.
일본은 이를 위해 군국기무처를 만들어 3개월 동안 무려 210개의 의안을 심의, 의결하였는데, 그 변화는 조선 봉건주의에서 생각해 내기는 어려운 실로 획기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궁내부를 두어 왕실을 국정과 분리
- 신식화폐를 발행하고 모든 조세는 금납으로 명문화
- 도량형 통일
- 노비제, 백정신분 등 폐지
- 과거제 폐지
- 과부의 재가 허용, 조혼과 인신매매 금지
- 사법관 제도 개시, 연좌제 폐지
유럽의 근대사회는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등 문화적 혁신과 과학적 문명의 진보를 통해 주체적으로 획기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실학운동과 동학혁명이 고질적인 봉건왕조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개화를 보지 못한 채, 갑오경장이라는 타율적인 힘에 의해 외세 자본주의가 이룩한 서구적 근대화 과정으로 이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갑오경장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일 뿐 조선의 장래를 위한 것은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에 의해 강제된 갑오경장이 조선의 근대화에 단초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일본이 일본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대원군의 복귀와 갑오경장이라는 두 카지 카드를 썼으나, 일본이 기대한 효과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 들었어? 왜놈들이 경복궁을 습격했단 얘기.
- 저런 쪽발이 쉐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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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앞서 본 바와 같이 청군과 일본군의 입국에 따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나온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과 청나라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목도한 후 재집결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개남, 전봉준이 힘을 합쳤고, 이즈음 이들에게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대원군 합하의 뜻을 전하러 왔소!
모든것은 힘의논리 곧 자연의 이치...
강대국이 된 일본이 조선을 주무르는 것은 당연한 것.
어떤 일본 극우주의자 한말이 생각나네. . 역사적으로 식민지가 되면 식민지 국민들은 짐승 취급 당했는데 조선은 그래도 잘해 준 축에 들어간다나 뭐라나.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꼭값아 주어야 할 빚이라 생각하고. 꼭 갚아주마. 쁘드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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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1 - 조선의 1894년(9)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으로부터 전권을 약속받고 일본 측과 손잡아 왕비 쪽을 눌렀으나, 대원군은 곧 자신이 단순한 이용물에 불과함을 깨닫고,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 어떻게든 왜놈들과 친일관료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대원군은 평양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아직 일본군에 깨지기 전임)과 동학 농민군에 각기 밀서를 보냈습니다.
- 북에서는 청군이, 남에서는 농민군이 협공해 일본군을 쓸어버리자!
이 과정에 대원군은 유림에도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을 촉구했으나, 유림은 거절했습니다.
- 향기나는 풀은 악취나는 풀과 한 그릇에 담기지 않는 법. 우리의 적은 저 무도한 동학당이다.
책상머리 앉아서 책이나 읽는 유림(도대체 머리에 뭐가들었나?)
젤로 힘든건 역시 서민들의 삶
작금의 나라 형세를 다시 살펴 본 전봉준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격문을 만들어 돌리자 농민들이 격하게 호응했고, 순식간에 앞선 봉기 때보다 훨씬 많은 농민이 전봉준과 김개남의 휘하로 몰려들었습니다.
- 와우 십만도 넘겠어!!!
한편, 보은집회 이후 전봉준과 거리를 두어 온 동학 교주 최시형도 아래로부터의 격렬한 요구를 받고 드디어 결심을 했고, 마침내 충청지역의 동학교도들까지 총궐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민심이 곧 천심. 좋다!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 농민군과 최시형, 손병희가 이끄는 충청 농민군이 연락을 취하며 논산 땅으로 집결했고, 김개남은 전주에 남아 다른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이즈음 대원군의 기대와 달리 평양에 진주해 있던 청군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일본군에 박살이 났고, 해전에서 마저도 박살이 났습니다.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조선 조정에 농민군 공격을 돕겠다는 통보를 하였습니다.
- 그까짓 오합지졸쯤이야!
결국 중앙의 관군과 일본군 1개 대대가 농민군 공격에 나섰습니다.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소소한 전초전을 벌인 뒤 드디어 우금치에서 일본군, 관군과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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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2 - 조선의 1894년(10)
조선 동학 농민군은 동학농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이자 분수령이었던 12월 5일부터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일본군과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금치 마루는 농민군의 시체로 뒤덮여갔습니다.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압도적 수적 우세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는 용맹성으로 무장한 농민군이었지만, 현대식으로 무장한 소수의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 농민군은 남접 북접 합쳐 2만, 조선군 3천에 일본군 2천.
당시 농민군이 갖고 있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 수 있는 소총에다 막강한 화력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화력에서 도저히 싸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류의 전쟁은 유럽에서도 있었는데. 독일군 최초 장갑차와 탱크앞에 하얀 백마를 타고 나타난 폴란드군 화력이 월등히 앞서니 쪽수가 많아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네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농민군 정예부대들이 모두 함께 싸우지를 못했고,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전투를 지휘하는 기술이 부족했으므로, 역부족이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래서 제대로 훈련받은 전문가가 필요한거야)
우금치 전투 패배한 후 동학 농민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가며 후퇴를 거듭했고, 대오는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11월 23일 태인 전투에서 또 다시 패한 뒤 전봉준은 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계속되는 희생을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손화중, 최경선 등의 동학 농민군도 해산령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황해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군도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외세, 반일본을 기치로 내건 동학 2차 농민 봉기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본군은 반일을 기치로 내건 동학당을 완전히 소멸하라는 본국의 명에 따라 마치 비질하듯이 동학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을 이어갔습니다.
- 1895년 1월까지 죽은 농민군이 20만이 넘었다!!!
동학지도자들도 모두 잡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체포되어 바로 처형되었고, 손화중은 고창에서, 전봉준은 순창에서 잡혀 각각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최시형도 체포되어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전주성 전투를 하면서 농민군으로 최종적 승리를 얻을 수 없음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부름을 받아, 죽더라도 싸워보고 죽겠다는 농민군을 이끌고 외로이 황야에 몸을 내던진 사내 중의 사내 전봉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1895년 3월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건만
-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 없구나
-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였으니
- 나라를 위하는 단심을 누가 있어 알아줄까
외세가 들어와 정사를 참견하고 모든일에 제동 거는것엔 나라가 아무힘을 못쓰면서 인간평등 부르짖는 동학군은 때려잡아죽일 적이되었다.
일본군이 '우리가 잠재워줄까?'
달콤함에 조선조정과 조선군은 그리도 좋았을까?
우리농민을 도륙하는일인데~~
우리가 손잡을 때 아무도 못건드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승리도 못함을~~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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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3 - 명성황후 시해(1)
청일전쟁에서 청의 절대 열세가 확인되고 농민군 패배도 가시화되던 즈음, 일본 정계의 거물 이노우에가 공사로 한국에 부임해 왔습니다.
- 내 손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겠도다!
- 그러자면 안으로는 지배의 편의를 위한 제도를 만들고, 밖으로는 일본 외에는 조선에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지?
이노우에는 청나라와 밀약을 도모한 대원군을 끌어 내리고, 왕비의 정치개입을 막는 한편,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튀었던 박영효 등 친일 인사로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노우에는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반포하게 하여 지배를 편이하게 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하고, 청나라를 제압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는 등 보호국화, 즉 식민지화를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외부의 반발이 있었으니,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중국에 침을 흘리고 있던 나라들의 간섭이었습니다.(삼국간섭, 1895년)
- 인간적으로 랴오둥 반도는 돌려줘야 되는 거 아녀?
일본은 고심했지만, 삼국의 요구대로 랴오둥 반도를 돌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자존심 상하지만, 때가 아니므로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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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간섭과 일본의 후퇴를 눈여겨 본 고종과 왕비는 생각했습니다.
- 러시아가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 러시아를 활용한다면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구나.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불러 친러 외교를 펼칠 뜻을 전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뚜렷이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고종은 친일 실세 박영효의 무리수를 이용해 그를 내보내고, 이완용, 민영환 등 친러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일본식 군대인 훈련대를 해산하는 등 급속히 친러적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본국의 입장이 아래와 같았음을 고종은 알지 못했습니다.
-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될 때까지 일본과 충돌할 생각은 없는데?
러시아를 가까이 한다고 해서 궁극적으로 힘없는 조선의 장래가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조선 조정은 러시아로 방향을 틀려했고, 이에 대륙침략을 위해 무조건 조선을 손에 넣을 생각이던 일본이 사이코패스 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 지금 조선을 확실히 잡아 놓지 않으면 곤란하다. 국제여론이고 뭐고 신경 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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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13 - 명성황후 시해(2)
일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 조선이 일본의 강한 힘을 보고도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등의 정책을 쓰는 것은 왕비의 책략이다. 왕비는 아울러 친일 개화당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지금 왕비를 없애지 않으면 조선 보호국화에 문제가 생길 것이며, 왕비를 해쳤다는 국제적 비난은 잔꾀를 써 벗어나거나 그냥 그대로 감수할 수 있다.
일본은 이노우에에서 미우라 고로로 공사를 교체했습니다. 미우라는 일본군 중장 출신으로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조선 공사로 왔고, 또 어찌된 일인지 이노우에는 보름 넘게 공관에서 미우라와 함께 지낸 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미우라가 특수 임무를 띠고 조선에 왔으며, 이노우에가 미우라와 더불어 왕비 시해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곧 왕비 시해는 일본 정부의 작전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미우라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왕비 시해를 모의했습니다.
미우라의 참모 ‘시로’는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 출신으로,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 단체와 긴밀하게 협의하였습니다.
일본 낭인들은 단순한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로, 실제로 낭인 중에는 동경제국대학 출신 등 지식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습니다.
미우라 등은 다음과 같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낭인 자객의 수괴는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
- 거사일은 1895년 10월 10일 새벽으로 하고, 작전명은 ‘여우사냥’으로 한다.
그런데 조선 조정이 예상보다 일찍 일본 훈련대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자, 미우라는 해산 결정 당일인 10월 8일,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일본은 거사에 앞서 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 곧 왕비를 끌어낼 것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국태공 전하!
이 일로 인해 대원군이 왕비 시해에 협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으나,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를 대 놓고 살해하려는 일본! 앉아서 당하는 조선!
이것이 100여 년 전 조선의 현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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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5 - 명성황후 시해(3)
조선 정부가 친일본 성격의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사실을 들은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당일인 10월 8일 새벽으로 바꾸고 용산으로 무장한 낭인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또한 일본군, 순사, 조선인 몇을 규합하여 공덕리 대원군 별장을 찾아 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밀어냈습니다.
이 날 새벽 4시경 이미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 등 일본군 측 병력이 궁궐을 포위한 상태였고, 5시경 대원군이 도착하자 일본군 수비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넸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습니다.
이어서 일본 낭인들과 부역 조선인들이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 앞에 이르렀고, 곧 춘생문, 추성문 등으로 일본군과 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소리를 지르며 쳐들어와 경복궁을 포위하였습니다.
그 전에, 미국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경비대 500여명이 경복궁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훈련대 대장 홍계훈이 시위대 병사와 함께 막아섰으나 현장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 군대가 궁궐을 완전히 봉쇄하고, 동원되었던 훈련대 조선인 병사들이 영문을 모르고 있는 사이, 낭인들은 조선의 국모를 찾아 나섰습니다.
경복궁에 명성황후가 없음을 안 일본 낭인들은 황후가 기거하던 경복궁 북쪽인 건청궁으로 가 대오를 맞추어 합문을 포위하고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며 난폭하게 위협했으나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목숨을 잃으면서도 신음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이 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다 그 자리에서 몸이 베어져나가 죽었고, 낭인들은 곧 궁녀와 상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누가 황후인지 색출하던 중 변복한 황후를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낭인들은 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도망치는 황후를 잡아 넘어뜨린 후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러 기어이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어 궁궐로 들어온 미우라는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화장을 지시했고, 낭인들은 건청궁 동쪽 녹원 순속에서 장작더미 위에 황후의 시신을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본의〈에조 보고서〉에는 낭인들이 황후를 칼로 찌른 후 발가벗겨 국부검사를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과 110년 전 일입니다.
결국 명성황후는 치욕의 죽음을, 시체를 불살랐다는건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했다는 것과 증거를 없앨려는 ~~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며 " 호통하던 이미연이 생각나네?
아! 어찌 조선의 국모를 저렇게~ 정말 뚜껑 열리네 과거로 돌아가서 만일 내가 궁궐수비대였다면 나쁜 일본 개시키들 다 박살을 내버리고 싶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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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6 - 명성황후 시해(4)
갑작스런 상황 앞에 고종은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하자 외국 공사관에 구호를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무의미했습니다.
고종은 낭인들의 주의를 돌려 명성황후를 보호하고자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방 문 앞으로 직접 나섰는데, 낭인들은 칼을 휘두르며 한 나라의 임금인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했고,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앉히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 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에서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전문 한 장을 보냈는데, ‘극비’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조선 심장을 무참히 유린한 미우라는 유길준 등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각국에 황후 시해는 일본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강변하였습니다.
- 왕비의 정적인 대원군과 훈련대 해산령에 분개한 군인들이 합작해 벌인 듯 하오!
그러나 이 일의 전모가 점차 드러나 국제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하자, 일본은 미우라를 소환해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일본 재판부는 미우라 개인이 훈련대 해산에 불만을 품고 대원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낭인을 동원해 저지른 일이라는 판결을 하였습니다.
- 무식한 무장이 욱해서 벌인 일이다!
그러나 그 이후 미우라가 승승장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황후 시해 사건이 일본 정부가 기획한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일은 불과 110년 전 일입니다.
일본의 황후 시해 이후 고종은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황후를 폐서인 조치하였다가, 황태자의 간청에 빈으로 강등시켰습니다.
곧 일본에 의해 구성된 친일 내각(김홍집, 유길준, 박영효 등)이 권력을 잡았고, 이들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등의 서구화 조치를 취했습니다.
고종이 시범이 되어 머리카락를 잘랐고, 세자 역시 유길준이 직접 머리카락에 칼을 대었습니다.
이후 단발령은 강력하게 실시되어 길거리 곳곳에서 상투가 잘려나갔습니다. 유림 등 조선 백성이 크게 반발한 것은 당시 사정상 당연했습니다.
- 오 드디어 조선이 금수의 나라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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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7 - 아관파천(1)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의 단발령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태평양 진출을 위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만 했던 러시아는 일본이 사실상 조선을 지배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 반일감정 등을 활용해 임금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신다!
- 일본이 화를 내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와 전쟁을 하려 들지는 못할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사전 협의하여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한 후, 고종에게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습니다.
고종 역시 을미사변 이후 일본에 사실상 감금된 상태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데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일본의 독살을 우려해 직접 식사를 만들어 제공하는 등의 성의를 보이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는데 동의를 하였습니다.
파천을 주도한 세력은 이즈음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 150명과 포 1문을 서울로 이동시켰고, 일이 워낙 은밀히 진행된 관계로 일본은 파천의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물론 일본이 알았다 하더라도 지방의 을미의병 진압을 위해 주력군이 이동한 상황이어서, 일본이 러시아군을 제압한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엄상궁의 가마에 오른 후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엄상궁이 궁궐을 출입할 때 쓰는 가마인지라 파수를 보던 이들에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군사들의 철통 경비 아래, 러시아 공사관의 고종은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고종은 새로이 친러 조각을 발표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친일 내각의 핵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 썩어도 준치! 어명은 어명!
고종이 아관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체포되던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 등은 길거리로 몰려나온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한편, 아관파천으로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으로 탈출해버리자 일본은 당황했고, 고종을 확보한 러시아와 미국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물론 이 일로 일본과 러시아는 곧 한바탕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니 나라꼴은 더욱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그나마 나라 살리겠다고 의병을 일으켜서 항쟁을 하는 마당에 왕이라는 사람은 도망만 다니고 한심 그 자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