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10월 25일 동양선교교회에서 결혼식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의 삶을 쉬지 않고 인도하고 계신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런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2남 1녀 중의 장남인 나는 막내 여동생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막내는 지금의 아내를 여전히 좋아하는데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납득이 될 것이다.
아내와 여동생의 인연은 아마도 1985년 정도부터였을 것이다. 바이올라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를 같이 다녔던 막내는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한번은 부모님과 같이 여동생의 기숙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외부인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때, 특히 남자일 경우 “남자가 들어왔어요!(Men on the floor!)”라고 소리 지르며 걸어가야만 했던 게 무척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이 여학생 기숙사였으므로 신중하게 발걸음 하길 바랐기 때문이리라. 주말이 되면 거의 모든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봉사하곤 했던 바이올라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막내도 할리우드 근처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돌아와 지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에서 집까지 귀가할 교통편이 없다는 거였다. 로스앤젤레스는 대중교통시스템이 형편없어서 직접 차를 몰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때 여동생을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던 사람이 지금의 내 아내다.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았던 아내와 무척이나 가깝게 지내던 막내는 그녀를 자신의 오빠들보다 더 의지했던 것 같다.
나는 처음에 그녀가 막내 또래의 친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중 막내는 “오빠, 나 데려다주는 언니 한번 만나볼래?”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여동생의 말에 순순히 밥스빅보이라는 서민 카페에서 그녀와 단둘이 처음 만났다. 대화하다 보니 나와 동갑내기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같은 학번이었다는 걸 알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녀를 만나게 된 시점의 나는 주중 오전에는 영어를 터득하기 위해 Los Angeles City College에서 영어의 기초를 다지면서 서서히 신학을 공부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택했던 과목 중 기억에 남는 과목들은 영어 작문/연설 수업과 일종의 음성학, 발음(Voice & Articulation) 수업, 대학 영어(College English 1&2) 등이었다. 이 모든 수업을 듣게 된 이유는 지역 대학에서 치루는 영어 수준 파악 시험(Placement Test)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영어를 좋아했고 성적은 괜찮았지만, 미국 대학생과 비교해서는 일 년이나 뒤떨어진 실력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꼼짝없이 일 년 동안 영어의 구문활용능력(Syntax: 문장배열 활용능력) 면에서 언어학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지나고 보면 그들의 가르침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발음, 문장 구조, 배열, 활용 등에 있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오전에는 학교다니고 오후에 작은 동네 마켓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코리아타운의 은행을 청소하며 참으로 바쁘고 고단한 삶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때였다.
막내의 친구이자 선배였던 그녀와는 세 번 정도 더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와중 지금의 장모님이 여섯 딸을 키웠던 베테랑으로서 “당신의 집안 전통은 남녀가 의미 없이 자주 만나는 것보다 집안의 어른들이 한번 보고 나서 두 사람의 만남을 지속할 관계인지를 결정”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보내셨다.
나는 주중의 여러 일정으로 고단했고, 쉬어야 하는 토요일 아침에는 나성영락교회 대학부에서 늦깎이 대학생으로서 제자훈련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주일에는 이른 새벽부터 갈릴리 젊은이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그야말로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막내가 소개한 그녀가 미래의 아내로 적합한지 알아보려는 여유를 갖기도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고단한 이민 생활을 이미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고 있던 분이어서 나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가진 게 전혀 없고 나이도 어리며 경험도 부족한 청년이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가 단둘이 사는 방 하나짜리 아파트로 초대되었다. 긴장한 상태로 인사를 드리고 앉았더니 “장차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헌신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신앙은 어떻게 갖게 되었고 헌신의 계기가 있다면 한번 말해 보라”고 물으셨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절 나는 제자훈련으로 다져진 정신과 몸이어서 제법 단단하고 분명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여태까지 너는 네 마음대로 돌아다녔으나 이제는 나를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순종의 삶을 살게 되리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빗대어 일종의 신앙고백을 담대하게 나눴다. 마침 교회에서 권사님의 직분을 맡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흡족한 미소로 화답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분은 젊은 시절 두 번의 암을 믿음과 기도로 이겨냈으며 종일 말씀과 기도로 살고 계시던 분이었다.
권사님은 나를 위해 얇은 스테이크를 구워주며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나는 바짝 긴장한 상태여서 구워주는 대로 빨간 고기를 입으로 허겁지겁 집어넣기만 했다. 본래 음식을 빠르게 먹는 습관을 갖고 있던 내가 그때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먹었던 것 같다. 바로 그때였다. 권사님은 마지막 남은 고깃덩이를 포크로 뒤집어 보더니 “아니 이걸 어쩌나. 고기를 쌌던 봉지를 자세히 보니 작은 글씨로 염장됨(salted)이라고 쓰여있는 걸 잘못 샀네. 고기가 많이 짰을 텐데. 쯧쯧” 하시며 당황하셨다.
신앙심 깊은 권사님과 그녀 앞에서 졸지에 신앙 간증을 한 나는, 다시 근처의 한 가정집으로 자리를 옮겨 방문했다. 나는 거기에서 그녀의 형부인 다섯 명의 남자와 다섯 명의 언니 앞에 앉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었고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연이어 과일과 음료수가 차려지고, 나를 마냥 환대하는 듯하였으나 이내 연배가 가장 높아 보이는 분이 면접관처럼 등장했다. 그분은 내게 진지한 태도로 몇 가지 질문을 차례로 하며 답하게 했는데 그때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몹시 긴장해서 도무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면 크게 웃으며 기쁘게 받아주었던 느낌만 남아 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동양선교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으며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골고루 맡고 있던 헌신된 교인들이었다. 그날 나는 평생을 통틀어 예기치 못한 대화들을 오랫동안 나누었고, 잊지 못할 신기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내 부모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그 면접관 형님은 부모님과 신중하게 의논했다. 그리고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니 두 젊은이가 미래를 위해 같이 기도하고 지원하면서 살아가도록 혼인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나는 뭐에 홀린 듯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일종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가짐으로 1986년 10월 25일에 장문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와 동양선교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성영락교회 대학부와 청년부, 그리고 동양선교교회의 교사들과 청년들은 코리아타운, 바이올라대학, LACC, 교회모임 등에서 알고 지내던 조용한 여자 청년과 찬양 인도를 하고 제자훈련을 열심히 받던 늦깎이 대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동양선교교회 본당이 꽉 찰 정도로 하객이 차고 넘쳐 혼인예배의 풍성함을 더하였다.
당시에는 대개 결혼축의금 보다는 작은 선물을 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이어서 교회 근처의 한인 전자상점 같은 곳에서 구입한 소박한 선물들로 장모님과 같이 살던 조그만 방 한 칸짜리 아파트가 가득 차고 넘칠 정도로 들어왔다. 결혼 후 나는 바이올라 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원까지 기독교교육학 전공으로 마치게 되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동부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신학 수업을 위해 떠날 수 있었다.
1986년에 만나 결혼한 아내와 오늘까지 두 자녀를 키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왜 그때 서둘러 가정을 이루게 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의 자녀들이 결혼하여 세 자녀(손주)까지 낳았으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다. 되돌아보니 내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 안에 있었고, 나는 그분의 손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부족한 나를 위해 늘 기도하는 집사람과 딸들 그리고 부모님 덕에 이때까지 지내온 것이다.
주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처럼 때를 따라 나를 살피고 도우시며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셨다.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