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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2일 (화) 촬영.
불교중앙박물관에서 2023년기획전을 열었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만월의 빛,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정토의 빛.
박물관 초입 천정에 있는 구룡.
목조보살좌상.木造菩薩坐像 / 조선 후기, 불교중앙박물관. (박물관 입구에 모신 불상)
조선 후기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얼굴과 신체는 네모꼴에 가깝고 얼굴은 편평한 편이고 목이 짧다.
아래로 지긋이 뜬 눈과 옅은 미소는 자애로운 보살의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양손은 모두 가슴 높이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천의는 양어깨를 덮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무릎이 높아 안정적이다.
2017년에 개금 등 불상의 보존처리를 하였다.
2018년 5월 불교중앙박물관회가 발원하여 잃어버린 보관을 조성하고 복장의식을 봉행하였다.
2020년에는 불교중앙박물관회에서 대좌도 새로 제작하여 기증하였다. 불교중앙박물관 원불로 모시고 있다.
전시를 열며
1346년 백운화상이 작성한 장곡사 약사부처님의 발원문은
약 1078명의 소망을 담아 다양한 복장물과 함께 약사부처님 안에 모셔졌습니다.
개운사 아미타부처님의 복장물에서도 수많은 불자들의 소망이 담긴 사경과 경전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한 분의 부처님이 탄생하는 데는 수많은 기도와 염원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생명력을 갖게 된 부처님은 물론 불복장의 가치와 의미는 현재의 중생들에게 경건한 아름다움과 환희의 빛을 느끼게 합니다.
2023년 불교중앙박물관 기획전 <만월의 빛 정토의 빛>은
국보인 청양 장곡사 약사부처님과 보물인 개운사 아미타부처님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조성된 두 부처님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복장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전시회 팜프렛에서-
불복장의식
불상은 사리가 들어간 후령통(喉鈴筒), 경정, 발원문, 시주물 등을 엄격한 절차에 따라 넣는 '불복장의식'이 거행됨으로써
단순한 형상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부처님의 현신이 된다. 불복장의식이란 속(俗)에서 성(聖)으로 전환하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복장물을 절차에 따라 부처님 몸 안으로 모시는 과정 전체를 말한다.
고려시대 불상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최춘금불복장조성원문>에서
"금불의 복장을 조성하기를 뜻하여 오승포(五升布)를 한필 바칩니다."라 하여 고려시대부터 불복장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조상경>이 발간 되었는데 <조상경>은 불복장의식과 절차에 관한 기록을 모아 체계화한 경전이다.
<조상경>을 통해 전해지는복장의식은 부처님의 심장을 상징하는 여러 물목과 사리를 넣는 후령통을 만들고 부처님의 법을 상징하는
경전과 불상 조성에 대한 발원문 및 다라니 등을 법식에 맞추어 납입한다.
더불어 동경이나 금, 은, 보화, 복식 등을 마지막으로 넣은 후 복장공을 봉인한다.
봉인된 복장공은 다라니로 마무리한 후 점안을 하여 성상(聖像)으로 모셔진다. -현지 설명문 내용-
복장물의 종류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복장물이 발견된 사례는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통일신라)이며,
고려 시대에는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274 이전),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1346), 통영 안정사 혜위등광불좌상 등이 있다.
불상 복장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리를 넣는 후령통은 나무나 은 등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합의 형태이다.
합에 붉은색 주사(朱砂)로 팔엽(八葉)이나 범자를 그린 뒤, 안에 사리와 함께 심주, 오곡, 오향, 오보병, 원경 등을 넣는다.
후령통 외에는 불상 제작과 관련된 조성문과 발원문, 발원자들이 시주한 경전과 의류가넣어지기도 하고,
불상 내부의 충전재로 다라니를 인경하여 채웠다. 이와 더불어 시주물(금, 은, 칠보 등)과 사경이 함께 들어가기도 한다.
장곡사의 연혁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인 장곡사는 850년 보조선사 체징(804~880) 스님이 창건하였다.
장곡사는 칠갑산 중턱 경사진 지형에 상, 하 2개의 대웅전이 건립된 이원식(二院式) 공간 배치를 이룬다.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공간인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부처님, 약사부처님, 아미타부처님으로 다소 독특하게 구성된
삼세불상이 봉안되었고, 하대웅전에는 약사부처님이 모셔져있다.
고려시대 상대웅전에는 다섯 분의 부처님을 석좌대와 불단 위에 모셨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지역의 자복(資福) 사찰과
왕실의 원당으로서 사세가 유지되었다. 1962년 상대웅전에 모셔진 철조약사부처님과 석조대좌가 국보로 지정되었고,
1963년 상, 하대웅전 전각과 함께 상대웅전 철조비로자나부처님과 석조대좌 하대웅전의 금동약사부처님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금동약사부처님의 복장물로 나온 발원문과 복장유물이 추가 연구되어 2022년 6월 23일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가람은 1969년 봉황각 건립을 시작으로 1994년 지장전 및 요사채를 신축했고, 1997년 일주문, 범종루, 삼성각을 건립하였다.
1999년 염화실 및 심검당을 신축하여 현재의 가람 배치를 이루었으며, 청양지역 불교문화의 중심 사찰로 자리 잡았다.
장곡사 약사부처님 복장유물.
"전씨의 여동생은 영원토록 널리 중생을 따르기를 바랍니다.<全氏妹生世廣遂衆生>"
장곡사 약사부처님 발원문에 부착된 비단 직물에 적힌 금산군부인 전씨의 여동생이 한 발원이다.
1346년 백운화상이 작성한 장곡사 약사부처님 발원문은 약 1,078명의 염원이 적혀 있으며,
다양한 복장물과 함께 부처님 안에 모셔졌다. 복장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58년 장곡사의 신도인 이은창 선생님의 복장 조사였다.
당시 장곡사에서 발견된 복장과 발원문은 도난 위험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12년 발원문을 포함한 44점의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불교중앙박물관으로 모셔와 현재까지 보관 중이다.
이후 새롭게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발원문과 오색번(五色幡), 비단주머니 등 18점의 복장물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금동약사부처님과 함께 국보로 승격되었다.
오색번,五色幡 /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장곡사(불교중앙박물관), 국보
오색번은 각색의 직금직물을 사용하고 자수 및 금박을 곁들였으며,
상단의 호리병 부분과 하단의 제비부리 댕기모양의 드림으로 이루어졌다.
호리병 형태는 앞, 뒷면을 동일하게 제작하였는데 녹, 황, 청, 백, 홍의 오방색 직금 8종류 17조각으로 구성하였다.
비단주머니 /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장곡사(불교중앙박물관), 국보
비단주머니는 귀주머니의 형태로
홍색과 녹색의 대비되는 색을 상하좌우로 구성하고 안감은 홍색견을 대고 상단을 가장자리수로 마무리하였다.
주머니 안에는 풀솜에 싸여진 각종 향이 들어 있어 고려시대 향낭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청색연화조문릉 /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장곡사(불교중앙박물관), 국보
긴 청색의 연꽃 문양 비단에 묵서로 약사부처님에 대한 발원과 발원자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 고려 1377년, 불교중앙박물관, 영인본, 서병패기증.
백운 경한(1298~1374)스님이 선종 역대조사의 법맥과 어록 등을 간추려 요약한 책으로 '직지'로 통칭된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 초인본이 간행되었으며, 이듬해인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본으로 개판되었다.
금속활자본은 현재 하권만 전하며,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직지와 백운 경한스님
백운 경한 白雲景閑(1299~1374)스님은 전라도 고부 출신으로 10세를 전후한 시기에 출가하였다.
백운스님은 1351년 원나라로 건너가 중국의 고승인 석옥 청공스님과 지공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청공스님으로부터 <불조직지심체요절> 한권을 하사받아 귀국 후 1372년 성불산에 머물며 증보하여 상, 하 2권으로 엮었다.
'직지', '직지심체요절'로 약칭되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선종 역대조사의 법맥과 어록 등을 발췌하여 요약한 책이다.
경한스님 입적 후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초인본이 간행되었으며,
이듬해인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본으로 개판되었다. 세계 최고 금속 활자본으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직지>는 현재 하권만 존재하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중이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직지> 상권은 하권의 글자체와 판형을 본따 금속활자를 재현하여 인경한 것이며,
하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을 디지털 인쇄로 복원한 것이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 고려 1346년, 장곡사 국보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 고려 1346년, 장곡사 국보
청양 장곡사의 하대웅전에 모셔진 약사부처님은 1346년에 조성되었다.
약사부처님 얼굴은 타원형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반원형의 긴 눈썹과 깊이 반개한 눈, 사실적으로 표현된 긴 코와
작은 입술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왼쪽 가슴의 끝에는 승각기를 묶은 듯한 금구 장식도 지극히 세밀하다.
옷주름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럽고, 약합이 들려진 오른쪽 팔의 옷자락이나 배 밑의 주름은 간격이 일정하게 느껴진다.
고려 후기에는 정토신앙이 활발하였는데 장곡사 약사부처님은 정토신앙과 함께
약사신앙의 상징인 약합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약사부처님이다.
상대웅전에 모셔 있는 아미타부처님, 비로자나부처님, 약사부처님.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고려 1346년, 국보)이 모셔 있는 하대웅전.
장곡사 약사부처님 발원문.
장곡사 약사부처님의 발원문은 길이 약 1,058cm, 너비 47.8cm의 붉은 비단에 5cm 내외의 묵서로 쓰여 있다.
발원문에는 약사부처님의 공덕과 함께 신앙한 사람들이 받을 인연법에 대한 내용과 제자들에게 구리로 약사불을
조성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어 이 공덕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며, 황제와 임금, 문무관료,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발원자는 앞면에 941명, 행간 여백에 39명, 뒷면에는 98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발원자들 중에는 행적이 확인되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후궁인 안경옹주 박씨가 있으며,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인 바얀테무르의 장수를 기원하는 발원도 있어 특히 주목된다.
발원문 /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장곡사(불교중앙박물관), 국보.
찬전사(親傳師) 백운스님이 증명법사로 작성된 이 복장발원문은 약사부처님의 공덕을 롱해 과보를 소멸하고
약사부처님 조성을 통해 중생 구제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 앞면과 뒷면에 1,078명의 발원자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미륵불 괘불 국보
개운사의 연혁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의 말사인 개운사는 1396년 무학대사(1327~1405)께서 안암산 기슭에 영도사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 1779년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인 인명원 건립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개운사로 사찰의 이름을 바꿨다.
개운사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1873년 명부전을 중건하였고, 1880년에는 대웅전 중창과 함께 많은 불화도 조성되었다.
1921년 대방을 중건하고 종각을 신축하였으며,
1925년 석축을 조성, 1926년에는근대불교에는 대석학이셨던 박한영 스님이 불교강원을 설립하였다.
1929년에는 독성전, 1932년과 1935년에는 노전과 칠성각을 지었다.
1981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이 개운사 경내로 이전하여 많은 학승들을 배출하였고, 2001년 김포학사로 다시 이전하였다.
현재는 교육도량으로 선방을 운영하며 변함없이 불교 교육을 대표하는 도심 사찰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개운사 아미타부처님 복장유물
개운사 아미타부처님은 현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1996년 1월, 개운사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복장유물이 도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난을 면한 남은 복장유물을 문명대 교수가 수습하였는데, 이때 당시 명부전에 모셔져 있었던 아미타부처님의 복장조사도 함께
진행하였다. 조사를 통해 1274년 중수 발원문과 9~12세기에 간행된 <대방광불화엄경> 스무권 등 많은 전적들이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봉안되어 있던 일부 <대방광불화엄경>은 불상 조성보다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손으로 직접 쓴 필사본과 목판본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특히 진본(晉本,불타발타라 역, 60권), 주본(周本,실차난타 역, 80권),정원본(貞元本, 반야 역, 40권)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 번역본이 모두 발견되어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경전의 중요한 사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고려 1274년 이전, 개운사,보물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고려 1274년 이전, 개운사,보물
개운사 아미타부처님은 고려 시대에 조성되었으며, 방형의 얼굴에 양 뺨에는 살집이 올라 있는 모습이다.
눈은 반개하였는데 눈동자는 상 내부에서 수정을 넣었으며 전체적으로 근엄한 인상이다.
불신은 건장한 체구로 어깨는 넓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상반신을 웅크린 것처럼 앞으로 숙인 듯한 자세가 특징이며
무릎은 높으면서도 좌우로 넓어 안정감을 준다. 양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린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부처님은 균형감있는 바례와 세련된 조각 기법으로, 13세기 전반 불교조각의 기준작이자 대표작이다.
개운사 아미타부처님 발원문.
개운사 아미타 부처님의 발원문은 총 3점으로중간대사(中幹大師) 발원문과 최춘(崔椿)의 복장조성 원문,
그리고 천정(天正)과 혜흥(惠興)의 원문이다. 1272년 중간대사 원문은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훼손된 무량수불을 새로
금칠하여 그 공덕으로 돌아가신 부모와 친척, 본인이 정토왕생 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1322년 5월과 8월에는 최춘 원문과 천정, 혜흥 원문이 기록되었는데, 최춘 원문에서는 왕생과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있다.
천정, 혜흥 원문은 축봉사의 천정과 혜흥 두 스님이 부처님을 개금하면서 발원한 10가지 대원(大願)과 함께
태위왕(太尉王,충선왕)의 조속한 귀국과 심왕(瀋王,심양왕)의 강녕, 종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고려 왕실과 원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도 엿볼 수 있다.
최춘 원문,崔椿 願文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1322년, 보물
고려국 중부(中部) 진사정동1리에 거주하는 최춘이 부처님의 복장조성을 위해 1322년 윤5월 19일에 오승포(五升布)를
시주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원문이다. 최춘이 사는 고려의 '중부 진사정동 1리'는 개경의 5부 가운데 중부 8방에 속한
75리 중 하나로 추정된다. 수도 개경에 거주하는 인물이 상당히 멀리 떨어진 충청도 아산의 불사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을) 받드는 불제자 남섭부주 고려국 중부 소속 진사정동 1리에 거주하는 최춘은 뜻이(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금불의
복장 조성에 오송포 1필을 바치옵나이다. 돌아가신 홑어머니께서는 정토에서 생을 마치고 인간세에 다시 태어나게 하여 주시고
현재 살고 있는 부부와 나이 어린 딸과 자식, 아울러 형도 무병장수하도록 해 주십시오,
지난 잘못이 없어져 해가 지날수록 평안하며,
해마다 더해진 안녕함이 만년토록 이어지게(해 주십시오) 바라는 바를 성취시키실 일(입니다)
금불(金佛)의 앞에 (올립니다) 지치 2년(1322) 윤5월 19일. (번역 국사편찬위원회)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제28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보물
이 변상도는 비로자나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묘사하였다. 중앙 팔각대좌에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부처님이 결가부좌 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로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자리한다.
부처님 좌우에는 제자인 아난과 가섭이 합장을 하고 서 있으며 협시보살의 뒤에는 합장을 한 범천과 제석천이 서 있다.
좌우 끝에는 칼과 탑을 든 사천왕과 커다란 깃발을 든 팔부중(八部衆)이 묘사되었다.
허공에는 꽃잎과 비천, 악기들이 그려졌는데, 법회의 화려한 순간과 소리를 시각적 형태로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경전의 형식으로 볼 때 변상도 또한 12~13세기로 추정되며,당시의 도상을 알수 있는 귀한 사례로 중요하다.
변상도
변상도란 경전의 첫머리에 배치되어 경전의 중심 내용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은 주본(周本) <대방광불화엄경>의 권제28 <십회향품제이십오지육,十廻向品第二十五之六>의 변상도이다.
감색의 표지 일부와 권수제(券首題) 및 역자명만 남아있고 경문은 없는 권수(券首)의 첫째 장이다.
변상도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복식과 자세, 구도 등의 표현에서 중국 돈황 벽화에 나타난 부처님 설법 도상의 영향이 느껴진다.
경전의 형식으로 볼 때 변상도 또한 12~13세기로 추정되며, 고려 중, 후기 중국 도상의 영향을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사례이다.
다라니
다라니(陀羅尼)는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며,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으로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지는 주문을 뜻한다.
다라니는 몸에 지니거나 외움으로써 수행과 연결되는데 부처님의 진신을 이루는 의미에서 복장으로 봉안되거나 불상 내부에 부착된다.
개운사 아미타부처님의 복장물에서 많은 종류의 고려, 조선시대 다라니가 발견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불정심인다라니;와 범자원권다라니, 수구다라니와 태장계만다라다라니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불정심인다라니는 중앙 보주형 문양이 최고의 깨달음인 '불정심인(佛頂心印)'을 상징하며, 이를 지니면 현세의 어려움이
사라지고 후세에 극락정토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전해진다.
범자원권다라니는 정중앙에 진리와 비로자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옴'자를 새기고 부처님과 보살님을 상징하는 범자들을
이중의 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부처의 모든 법을 갖춘 만다라를 이룬다는 진언이다.
범자원권다라니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서울시 유형문화재
금강계 다라니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삼중의 원권으로 구성되는데 중앙에 진리와 비로자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옴'자의 모양의 종자(種子)를 두고 중간과 바깥 원권에 각각 다라니를 안쪽을 향해 새겼다.
팔엽심연삼십칠존만다라, 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진언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서울시 유형문화재
개운사 아미타 부처님의 복장에서 발견된 목판으로 인쇄된 진언이다.
중앙에 팔엽심연삼십칠존만다라를 원형으로 배치하고, 그 주변에는 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진언을 둘렀다.
중앙의 팔엽심연삼십칠존만다라는 밀교 양대 만다라 중 하나인 태장계 만다라의 팔엽과 금강계 만다라의 37존 종자가 결합한
독특한 만다라이다.
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진언은 일체여래의 진신사리에 깃든 공덕을 담은 진언으로 이 진언을 탑 등에 납입하면 일체여래의
위신력으로 공덕을 쌓아 성불할 수 있다고 하여, 탑 또는 불상의 복장 등에 납입하였다.
다라니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조선, 서울시 유형문화재
이 다라니는 총 12통의 진언 및 다라니를 목판에 판각하여 주사(朱沙)로 인쇄하였다.수록된 진언 및 다라니는
오륜동자, 비밀실지진언, 진심동자,입실지진언, 보치진언, 준제구자, 정법계진언,육자대명왕진언, 출실지진언,보궐진언,
대불정수능엄신주, 팔엽심연 삼십칠존만다라,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진언이다.
이 가운데 팔엽심연 삼십칠존만다라,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진언은 같은 개운사 아미타부처님의 복장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다라니와 형태가 유사하여, 시대에 따른 다라니의 전승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불정심인다라니,佛頂心印陀羅尼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고려, 서울시유형문화재.
한 장의 종이에 동일한 다라니 두 개를 찍었다.
중심부의 연화좌 위에 형식화된 불정(佛頂)이 있고 그 바깥 원권에 다라니를 안쪽을 향해 돌렸다.
부적다라니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 조선, 개운사(불교중앙박물관), 서울시유형문화재.
붉은 색으로 찍은 다라니를 여러 장씩 접어 두 개의 피봉으로 쌌다.
다라니 왼쪽 끝에 '동치사년을축세오월(同治四年乙丑歲五月)'이라는 간기가 있어 1865년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장문의 다라니와 연잎을 덮어 연화좌에 얹은 태극과 부적을 새겨 조선 말기 다라니의 세속화 양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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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교 유형문화재와 보물들을 소중히 봅니다.
여러종류의 다라니들도 잘 봤어요.
귀한 자료들이네요.
잘 모르지만 서산용현리 마애불상을 보고 왔는데,
이곳에도 원물을 보존 하고 있으니 신기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