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의 <귀족노동자>
정의, 의리-귀족노동을 넘어
우대식(시인)
시의 고향
시와 노동은 어떤 관계인가? 첨예한 자본주의는 대개의 노동자가 자본의 힘에 굴복하며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떠밀려 소외의 표상이 된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부정한다. 시는 대체적으로 노동이란 약자의 그것으로서, 노동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획득해야 한다는데 표를 던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경제 구조는 노동의 순수한 본래 가치를 왜곡시키고 심지어 과연 대개의 노동자가 약자인가 하는 점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만들었다. 그것은 경제적 발전이라는 것과는 다른 층위를 가지는 문제이다. 토마스 피케트의 급격한 불평등 사회에 대한 경고를 담은 보고서가 한국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경제야말로 우리 현사회의 강력한 관심사라는 것도 부인할 길이 없다. 이즈음 권혁재의 귀족노동자 연작을 만나게 된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풍부한 사회과학적 지식으로 시에 접근한다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니 몸 둘 곳을 모르겠다.
2004년 1월 몇몇의 시인들과 함께 속초 해안가에서 진창으로 술을 마시고 잠시 명징하던 어느 아침, 며칠 지난 신문을 보다가 권혁재의 「土雨」를 읽었다. 바닷가 허름한 술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평택 三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汽笛소리
누이의 嬌聲이 흘러 다니는 三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그의 시에는 평택역 주변의 오래된 풍광이 담겨 있었다. 한 시인이 말했다. “너무 노련하다”. 평택 주변에서 살던 나로서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용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고향의 오랜 연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지촌의 외곽도시에 작동하고 있는 성적 메카니즘이 경부선의 기적소리 그리고 누이의 교성과 합쳐졌을 때 어떤 절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누이의 꿈’에서 오랫동안 막혀 있었다. 그런 상태로 그와 나는 서로 조금은 무심하게 만났으며 서로의 ‘三里’를 지나쳤다. 그는 늘 성실한 생활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반듯한 복장, 태도 등은 완고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문학적 치기 이런 것들을 그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밤늦게 까지 술집을 전전하고 다음날 후회를 동반한 지키지도 못할 반성을 스스로 내뱉는 나 같은 사람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행로는 완강하면서도 끈질긴 어떤 측면이 있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늘 시를 쓰고 시와 관련된 일을 꾸준히 챙기고 적절한 간격에 시집을 출간하고 있었다. 시류에 편승하거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늘 역동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태생적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이다. 또한 고향에 기대어 사는 자의 여유 같은 것이 밑바탕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에 언급한 「토우」는 평택역 앞 사창가를 배경으로 한다. 외곽 소비도시의 쓸쓸함을 그린 이 시는 평택역을 중심으로 한 매춘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러한 부당한 생의 조건을 넘어서려는 쓰라린 몸짓을 보여준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 삼리(三里)에 내리는 비릿한 토우(土雨)’는 이 땅의 욕됨을 씻고 부활하고자 하는 제의적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삼리로 상징되는 평택의 아픔을 넘어서고자 하는 몸짓이라고 보인다. 이전의 시집 『잠의 나이테』 에는 더 나아가 미군부대와 기지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는 「흑토(黑土)」, 「평택은 평야가 아니다」, 「평택쌀」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평택의 현재에 가장 근접된 시각을 제공해준다.
너희의 고향은 더 이상 평택 들판이 아니다
관제탑 서치라이트에 밤잠을 설친 독새풀들이
벼의 모가지를 칭칭 감아 질식시키면
너희는 은장도를 만지작거리는 각오로
사망신고를 해야 하느니라
(「평택쌀」 부분)
그가 인식한 고향 평택은 이제 평화로운 평야가 아니고 독새풀들이 벼의 모가지를 칭칭 감고 있는 살육의 현장이다. 그 현장에 대한 육성의 고발이 그의 시 전면에 배치된 것은 고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캠프 험프리로 상징되는 미군의 주둔은 고향마을의 황폐함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시인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을 끝없이 각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은 그동안의 시와는 큰 변별을 가지고 있다. 노동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그렇다.
강자에 의한 약자, 약자에 의한 약자
이번 시집 초고를 받아들고 먼저 자서를 펼쳐보았다. 조금은 찌그러진 한 노동자의 형상이 보인다. 문제는 치열한 육체노동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피로에 지친 세일즈 노동자의 내면에 고여 있던 분노를 우리는 만나게 된다.
시이면서 시가 아닌 것
시가 아니면서도 시인 것,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것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인 것,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것
노동자가 아니면서도 노동자인 것들에 대해
시인이 아닌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불편한 돌직구를 정중하게 날린다.
(「서문」)
시집 전체를 읽어 보고 다시 자서를 보니 시집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 여기에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것 / 노동자가 아니면서도 노동자인 것들에 대해’ 라는 진술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을 들여다본 렌즈와 같은 것이다. 각각의 노동 사이에는 어떤 위계 같은 것은 없다고 속편하게 사는 이 세상에 그는 ‘불편한 돌직구’를 날린다. ‘노동자가 아니면서도 노동자인 것들’에 대한 불편한 발언들은 누구나 그 실체를 알고 있지만 언급하기를 거리끼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인식은 전 시집 『잠의 나이테』에서 이미 그 싹을 볼 수 있다.
나는 약자다
수당 30만원자리 차를 사는 고객이
50만원 어치의 서비스를 요구해도
속 시원하게 팍팍 들어주지 못하는
나는 약자다
회사에서도 고객에게서도
나는 약자다
약자는 약자끼리 어울리거나
위하지 않는다
강자는 더더욱 약자를 보호하거나
편들지 않는다
나는 약자다
약자에게서 버림받는 나는
한없이 약한 자이다
(「세일즈맨은 세일을 하지 않는다」 부분)
세일즈맨의 비애를 이 시는 보여준다. 그것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 때 그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분노를 한 뼘씩 키워온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 너와 나의 차이 나아가 너의 노동과 나의 노동의 차이가 무엇인지 되묻게 하는 것이다. 위의 시구들 가운데 약자를 노동자로 치환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노동자다
회사에서도 고객에게서도
나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어울리거나
위하지 않는다
강자는 더더욱 노동자를 보호하거나
편들지 않는다
나는 노동자다
노동자에게서 버림받는 나는
한없이 약한 노동자이다
이번 시집 『귀족 노동자』는 바로 노동자에게서 버림받은 한 노동자가 쏟아내는 분노의 육성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가 노동자끼리 어울릴 수 없는 현실 그리고 노동자끼리 버림받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의아해 하면서 다른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강자에 대한 분노로 이 시집은 가득 차 있다. 약자에 의해 버림받고 또한 강자에 의해서도 버림받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한없는 불편함과 문제제기가 이번 시집의 주요 테마라 할 수 있다. 세일즈 노동자로서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보다 분명하다.
귀족노동자,
그게 뭐 어떻다는가
우리는 우리대로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살고
너희는 너희대로 룸살롱이나 골프장에서
여자의 속옷을 들추거나 성희롱을 하는
귀족노동자의 개념을 분명히 정리하자.
(「귀족노동자1-프롤로그」 부분)
세일즈 노동자를 귀족노동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노동을 한없이 무시하고 조롱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과연 누가 진짜 귀족노동자인지 본질을 밝혀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20년 이상의 근속, 오버타임근무, 주말특근으로 생성된 급여를 단순히 수치적으로 환산하여 귀족노동자로 매도하는 이면에는 정말 귀족과 같은 타락한 생활상을 영위하는 귀족노동자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욕망의 한 가운데 서있는 개념은 진짜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비열한 귀족공화국의 꼭두각시가 아닌” 진짜 노동자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이 세계를 노동이라는 렌즈를 통해 개별적인 생의 조건을 낱낱이 밝힘으로써 한 발씩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갑과 을의 천한 관계 그리고 그 안의 풍경
위장된 귀족노동자만 있고 왜곡된 노동자만 있는 천한민국
노블레스만 있고 오블리제가 없는 귀족노동자
오블리제만 있고 노블레스가 없는 노동자
누가 미개한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말할 것인가
누가 천한 대한민국에서 의리를 말할 것인가.
(「귀족노동자 31」 부분)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천한민국이며 의무만 강조한다는 점에서 부조리한 공간이다. ‘정의’, ‘의리’와 같은 고전적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음은 그만큼 타락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근래 “정의”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의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것도 이와 같은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빈과 부의 역학은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규제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부는 사회 전체 그리고 구성원 각자가 추구해야할 최대의 선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갑과 을이 생겨나고 저열한 갑의 행위를 을이 받아내야 하는 구조가 오늘날 이 땅의 경제학이다. 이 시집에 유독 갑과 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이유는 부조리한 경제 구조의 구체적인 현장으로서의 전형적인 양상을 갑과 을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분노하는 것은 갑과 을의 행위가 단순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면서 인간의 노동을 황폐화 시킨다는 데 있다.
그래
나는 귀족노동자다
간을 내놓고
쓸개를 빼놓고
립스틱 바른 고객의 입술만
사형수처럼 쳐다보는
한없이 작은 乙이 되어
귀족 자본이 만든 오천만원 차를 파는
난 귀족노동자
<중략>
고객이 까닥이는 손가락질에도
혈압을 긁는 무대포에도
귀족노동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나 자신을 갉아먹는
난, 슬픈 귀족노동자.
(「귀족노동자 3」 부분)
그는 소위 대기업 자동차 영업소에 근무하며 차를 팔아야만 자신의 노동을 이어갈 수 있는 세일즈 노동자이다. 그러면서도 대기업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귀족노동자로 치부된다. 그러나 그 실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귀족 자본이 만든 차를 팔기 위해 ‘한없이 작은 乙이’ 되어야 하는 현실을 시인은 스스로 ‘자신을 갉아먹는’ 노동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부당한 요구를 일삼는 갑(甲)을 그는 ‘천박한 갑들’(「귀족노동자 5」에서)이라고 말한다. 천박한 갑들은 늘 자본을 앞에 내세우면서도 을에 해당하는 노동자에게 더 싼 갑과 옵션을 제공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현실의 뿌리를 통째로 흔들고 있는 것이다. ‘집 한 채 가격이 되는 차를 사면서 / 몇 십 만원의 옵션을 해대는 천박한 갑질’(「귀족노동자 12」에서)‘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과연 이 세상은 과연 살만한 곳인가 하는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되는
악순환의 생리를 암묵적으로 방관하는
자본의 치밀한 꼼수,
우린 그런 자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적만 있고 동지가 없는 귀족노동자였다.
(「귀족노동자 19」 부분)
갑과 을이라는 보다 명백한 경제 구조와는 달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익을 바탕으로 한 살육전은 동물의 왕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시인은 인식하고 있다. 한 공간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밥벌이를 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상처를 주고 배반하게 되는 밑바탕에는 ‘자본의 치밀한 꼼수’가 도사리고 있다고 시인은 꿰뚫고 있다. 밖에서 바라보는 귀족노동자와는 전혀 다른 구조 속에서 서로에게 비수를 겨누며 살아가야 현실은 그에게는 뼈아픈 것이다. 갑과 을 너머 자신의 삶 속에도 자본의 교묘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전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했는데 / 자본과 권력에게는 일회용 휴지만도 못한 / 천한 것으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였다’(「귀족노동자 21」에서)는 비탄을 내뱉는 것이다.
진정한 귀족노동자가 되기 위하여
이번 시집에는 다양한 노동자의 상이 그려져 있다. 골리앗 크레인으로 목숨을 걸고 올라간 노동자(「귀족노동자 23」), 보험설계노동자(「귀족노동자 24」), 목욕탕 때밀이 조선족 정씨(「귀족노동자 25」), 비에 젖은 폐지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귀족노동자 26」),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 김씨(「귀족노동자 27」), 용광로에 떨어져 쇳물이 된 청년노동자(「귀족노동자 30」), 홍등가의 야화(「귀족노동자 35」), 피자가게 박양(「귀족노동자 37」), 미용 노동자(「귀족노동자 38」), 고용의 불안에 시달리는 시간 강사들(「귀족노동자 42」), 파견근로자들(「귀족노동자 44」)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문제는 대개가 자신들이 제공한 노동의 진정한 대가를 확인할 수 없다는데 있다. 폐지를 리어카에 싣는 할머니의 행위를 ‘스스로 수의를 짓고 무덤을 쌓는 할머니’로,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김씨가 자신을 ‘음식물쓰레기차 발판에 아찔하게 매달려 / 봉지를 던지고 또 던져 자신의 냄새나는 /하루를 덤으로 던져 넣고 싶은’ 존재로 생각한다는 데 이르면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은 저 자본의 개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데 생각이 미친다. 그럴 때 권혁재 시인은 묻는다.
노조나 파업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면
입에 게거품 물 듯 떠드는 철없는 시민과
여론몰이를 하는 자본과 권력에게서
우리는 절망도 하지만 우리는 투쟁으로
뭉치기도 하였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노동권을 이해 못하는
단세포적인 노동자들 때문에
우리는 다시 분노하였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서글픈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물어보았다
누가 진정한 노동자인지를.
(「귀족노동자 33」 부분)
구조화 된 자본주의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노조나 파업 그리고 노동과 같은 단어들을 불온한 것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철없는 시민’ 또는 ‘단세포적 노동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아픔이다. 자본 혹은 강자로 상징되는 자본권력이 노동을 소외시키고 착취하는 일이야 고전적인 자본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같은 처지의 노동자가 서로를 배타시 할 때 생기는 비애는 그 심리적 파장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그럴 때 그는 물어본다. ‘누가 진정한 노동자인지’. 어쩌면 이 물음은 이 시집의 전체 주제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시집 후반부로 가면서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 것도 비양심적 정치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혹은 부조리함을 감추기 위하여 끝없이 노동을 포함한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시에 대해서도 노동자 정신을 확인하고 있다. 가짜 노동자 즉, 가짜 시인들에 대한 준열한 질타는 시인을 ‘時人’이라고 칭하게 된다. 시의적절하게 땅 투기를 하고 줏대도 없이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이해도 가지 않는 시를 쓰는 이 시대의 시인들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러한 시인들에 대해 ‘눈이 뒤집힌 귀족노동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러 정황을 통해 보건대 권혁재는 이 세상의 모든 행위를 노동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노동은 두 가지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노동의 허울을 쓰고 노동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위선 귀족노동자와 자신의 땀의 대가로 살아가는 참된 노동자가 그것이다. 그가 분노하는 것은 참된 노동자의 노동이 끝내 정당한 그것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의나 의리와 같은 계몽적 어휘가 그의 시 속에 박혀 있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절박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설움은 노동자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
누구는 귀족노동자고 누구는 그냥 노동자라고
미리 경계 짓지 말자
우리 마음의 벽은 우리들만이
허물 수 있는 것
우리끼리라도 그러지 말자
서로 다독이며 한배를 타고
험난한 자본의 강을 거슬러 가자.
권력은 보은인사를 낙하산 투하하듯
노골적으로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자본은 구조조정, 비정규직 양산으로
우리의 일자리를 압박하여 오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닌, 노동자라고 스스로
경계 짓는 저들의 시선에서
대한민국의, 위대한 민국의
99%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 떳떳한 노동자가 되어
99%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우리들만의 진정한 귀족노동자가 되자.
(「귀족노동자 60 - 에필로그」 부분)
그는 진정한 귀족노동자가 되자고 제안한다. 진정한 귀족노동자는 그 의무를 충실히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부조리한 모든 노동의 양상을 타파하고 진정한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동안 노동자와 관련된 시는 주로 생산노동자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노동은 감정노동과 같이 다양한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권혁재의 시는 서비스 노동의 고단함을 통해 노동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노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아마도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일 것이다.
오랫동안 그를 보아왔지만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어떤 의식의 단단함과 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그의 시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보아왔지만 노동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이토록 집요하리라고 짐작조차 못했다. 생활면에서 스스로 꾸준히 단련한 결과이리라 어림 짚어 볼 뿐이다. 미루어 생각하면 과연 이러한 그의 속내를 세상이 정당하게 받아줄까 하는 안타까움이 마음 한 켠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에서 그가 말한 대로 시류에 적절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시인(時人)이 아니라 강철 같은 의지로 이 세계의 부조리를 관통해가는 진정한 시인의 기질을 이 시집에 서 만날 수 있었다. 평택 합정동이나 비전동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그와 한 잔 하고 싶다. 그 동안 적조했다. 평택역 철로변 어디즈음에서 가끔 만나 서로에 대한 위안의 술잔이라도 가끔 치고 싶다. 그가 선택한 이 길 위에서 서성이는 그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