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지인 순천일원에 대한 {역사별곡]이 2015년 2월부터 순천광장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다보니 작품들이 그 지역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라 자료로 알리는 차원에서
몇편만 올립니다. 현재 30편이 넘게 연재되고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순천지역’의 여순사건 인식 1
주철희 | webmaster@agoranews.kr
[75호] 승인 2015.02.12 07:17:51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여순사건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에서는 여수와 순천 주민을 ‘반란’의 주체로 지목했다. 여수와 순천은 여순사건의 중심지이다. 여순사건 당시 여수는 7일 동안 반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순천은 3일 동안이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인명 피해(사망자)는 여수 1200여 명, 순천 1134명이다. 이 피해가 정확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짧은 점령기간 임에도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여순사건에 있어 여수지역은 보다 적극적인 반면 순천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순천시사』등 지방지(地方誌)를 통해 순천지역의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순천지역에서 여순사건을 최초로 언급한 책은 1965년에 편찬한 『삼산이수 : 순천승주사』이다. 이 책은 주암면 요곡마을 출신인 정한조가 펴냈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혁명의용군사건을 거론하면서 “육군중령 박승훈이 부임하여 반란을 계획하던 동 부대 내 공산세포분자를 일거할 겸 제주도 폭동진압을 위하여 응원부대를 편성하고, 1948년 10월 19일 오후 9시 공산분자로 지목된 1개 부대를 제주도로 전송할 계획을 완료했다”고 서술했다.
두 가지의 기록에 주목하면, 하나는 반란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14연대의 제주도 파병이 제주도 폭동 진압만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숙군을 단행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정한조의 주장은 당시 정부의 견해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란의 계획을 알고도 왜 막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정한조는 반군 점령기간에 선량한 관민 635명이 살해됐다고 했다. 그런데 국군이 순천을 탈환한 이후 협력자 색출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여러 연구자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학살 가해자로 우익(군인·경찰·우익단체)이 70% 이상이며, 좌익(반군·빨치산·좌익단체)이 30% 정도이다. 정한조는 왜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언급하지 않았을까. 정부의 눈치와 지역사회에 만연한 분위기로 인하여 군과 경찰에 의한 희생은 언급할 엄두조차내지 못할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5년 『순천승주향토지』와 1978년 『순천‧승주향토지』가 발간되었다. 두 책에서 주목할 점은 오경심(吳敬心)에 대한 기록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오경심은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로서 쏘프라노 가수였다. 그녀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부역하여 구법원 앞에서 사형 집행을 하려고 할 때 봉선화 노래를 불러 유명하기도 하다.”(순천문화원,『순천승주향토지』, 1975)
“여자의 이름은 오경심.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이며 … 그녀의 절절한 목소리에 실린 노래는 한 대목 한 대목 온 군중의 가슴속에 박히며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회한을 자아냈다. 노래의 긴 여운은 총소리와 함께 결국 여인은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세월은 흘러 오래된 사진처럼 낡고 곰팡이 낀 그 얘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순천·승주향토지편찬위원회, 『순천·승주향토지』, 1978)
▲ 1935년 4월 12일과 7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오경심의 기사이다. 오경심의 독창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오경심(1914년 1월 15일~?)은 평안남도 평양부 수복리 출신이다. 평양정희학교에서 순천매산학교로 전학하여 고등과 1년을 수료한 후 광주 수피아여중 2학년으로 편입하여 1932년에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했으며, 동경제국음악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1934년부터 ‘오경심 독창회’를 개최할 정도로 당시를 대표하는 여류 성악가였다. 그녀는 박만고(朴萬古)와 결혼을 하면서 순천에 다시 정착했고, 순천사범학교 음악교사였다.
오경심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오경심의 절절한 목소리가 순천시민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는 『순천‧승주향토지』의 기록은 사실일까. 이는 오경심이 좌익혐의에 연루되어 여순사건으로 순천시내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1948년 당시 오경심에 대한 기록은 신문 보도를 비롯하여 한 줄도 없다. 여수에서 대한노총 지부장이었던 우익인사 김창업이 처형 직전에 ‘봉선화’를 불렀다고 기록화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국적인 인물로는 오경심이 훨씬 능가했는데...
다음 호에는 오경심이 불렀다는 ‘봉선화’ 실체를 비롯한 순천지역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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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명칭 탄생의 비밀
주철희 | webmaster@agoranews.kr
[74호] 승인 2015.02.05 21:53:48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여순사건’이란 명칭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순사건’이란 명칭을 쓰고 있지만,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여순반란사건’ 또는 ‘반란사건’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입에서는 그냥 쉽게 반란사건이라고 부른다. 내포된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들어왔던 말에 익숙한 탓도 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뒤 정부의 첫 발표는 10월 21일에 있었다.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의 발표가 각 신문에 보도됐다. 당시 여순사건은 ‘국군 제14연대 반란’이라는 명칭이 가장 많이 쓰였다. 그러나 곧바로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으로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게 됐다.
▲ 1948년 자유신문 기사이다. 당시 반군의 경로를 지도로 표시해 보도했다.
현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명칭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주로 ‘여순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연구자마다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병란’, ‘여순군란’, ‘려수군인폭동’, ‘여수폭동사건’, ‘여순내란’, ‘여순사건’, ‘여수‧순천10‧19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등으로 부른다. 용어의 다양성은 그만큼 사건의 성격 규정이 매우 복잡함을 의미한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명칭은 없다. 다만, 국사 교과서에서 서술한 용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형태이다. ‘여순사건’이 국사 교과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6년이었다. 당시의 용어는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이었다. 이를 줄여 통상 ‘여순반란사건’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반란의 주체를 여수와 순천의 지역주민으로 규정하는 것이라는 반발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는 1988년부터 명칭 변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교육부는 1995년 2월 21일에 그동안 사용한 ‘여순반란사건’을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공식 확정하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표기하기로 했다. 이를 줄여 ‘여순사건’이라고 현재 부르고 있다. 명칭 변경 과정에 당시 여당 대표였던 김종필의 강력한 반대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교육부는 ‘역사’ 맥락에서 명칭을 변경했지만, 軍 관련 발간자료와 보수우익의 연구자 또는 발간물에는 여전히 여순반란사건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반란의 주체도 일부 군인과 지역주민으로 여전히 호도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지역 주민들은 ‘여순반란사건’ 또는 ‘반란사건’으로 부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부분이 명칭에 있어 핵심이다. ‘여순반란사건’이란 명칭에는 이승만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사건을 지역주민에게 전가하기 급급했다. 이범석 국무총리와 김형원 공보처 차장은 ‘반란’의 책임과 주체를 지역주민으로 간주했다.
이번 반란사건의 성격은 여수14연대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데 민중이 호응한 것 같이 일반은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전남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에 일부군대가 합류한 것이 되는데 그 실증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서울신문』, 1948년 10월 29일)
14연대 반란에 지역주민들의 동조ㆍ호응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정부는 현지의 민중이 일으킨 음모에 일부군대가 합류했다고 사실을 왜곡했다. 군대 내의 반란이라는 자체가 이승만 정권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리하여 정부 내각에서는 책임회피를 위해서 민간인이 주도한 반란으로 언론에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왜곡과 책임 회피를 위해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명칭이 탄생했고, 고착화됐다.
‘여순반란사건’으로 명명된 이후 전남 동부지역은 ‘빨갱이’ 또는 ‘빨갱이 지역’으로 국민에게 선전ㆍ홍보됐다. ‘반공 국민’이 애국자란 인식, 즉 여순사건 이후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의식이 확고하게 구축된 과정에 전남 동부지역은 ‘비국민’으로 낙인됐다. 그리고 ‘빨갱이=공산주의자=비국민’은 ‘여순반란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여순반란사건’ 명칭 탄생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이제 명칭은 독자에게 그 몫을 넘긴다. 독자들께서 글을 읽어가면서 어떤 명칭이 가장 적절한지 판단을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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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별곡-3] ‘순천지역’의 여순사건 인식 1 역사별곡 / 기획연재 2015.08.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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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별곡-4] ‘순천지역’의 여순사건 인식 2
‘순천지역’의 여순사건 인식 2
주철희 | webmaster@agoranews.kr
[76호] 승인 2015.03.01 19:40:34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순천에 구구절절 내려오는 오경심의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당시 여러 신문에는 오경심에 대한 재판기록이 남아 있다.
호남방면 반란군에 관련된 지방민 폭도에 대한 제1차 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 판결이 지난 12일 정오 계엄지구 법무처 제2호로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 무기 징역(사형에서 감형된 9명) : 丁三台 宋淳弘 朴萬古 徐東葉 金錫基 林奉祚 崔永完 朱晦錫 吳敬心 이상(『호남신문』, 1948년 11월 13일)
오경심과 남편 박만고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오경심은 순천 시내에서 처형되지 않았다. 당시 무고하게 많은 사람이 즉결처분되었다. 그리하여 지역사람들은 오경심이 처형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으며, 그녀가 즐겨 불렀던 ‘봉선화’를 떠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의 입으로 시작된 오경심의 이야기는 사실로 일반화되어 애절한 역사의 한 토막으로 순천지역에 전해졌다.
▲ 민주일보 1948년 11월 17일자. 오경심의 인물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사이다.
옛 승주군에서는 승주군사편찬위원회를 구성해 1985년『승주군사』를 편찬했다. 이 책에서는 「여순반란과 승주」란 제목으로 여순사건과 혁명의용군사건의 연관성을 제기하면서, “동 연대 내 인사계에 복무하던 모하사관(성명발표 없음)이 중심이 돼…” 라고 주동자를 거론했다. 이미 1967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한국전쟁사1 : 해방과 건군』에서 모 하사관이 ‘지창수 상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성명발표 없음”이라고 서술하고, “10월 23일 여수를 완전 탈환했으며, 10월 25일 순천을 탈환했다”고 서술했다. 여순사건의 정확한 사료 검토보다는 집필자의 주관적 성향이 반영되어 집필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는 반란군의 참상으로 기록했다. 여수경찰서장 고인수와 순천의 경찰과 우익요인의 살육에 대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 서술했다. 반면, 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순천에서 발생한 1200여 명의 인명 피해에 대해서도 경관과 우익 인사의 희생으로 간주했다. 학살의 실상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집필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애써 외면하며 좌익의 천인공노할 만행만을 기록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1975년『삼산이수:순천승주사』와 1985년『승주군사』에 공통으로 혁명의용군사건을 거론했다. 여순사건 발발 당시 정부는 극우세력과 공산주의자의 결탁으로 여순사건이 발발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극우세력은 김구였다. 따라서 김구는 여순사건과 무관하다는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순사건을 이해하는데 혁명의용군사건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회가 되면 혁명의용군사건도 자세하게 다루겠다.
1997년 순천시사편찬위원회에서『순천시사』를 편찬했다.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여순사건의 발발과 전개」란 제목으로 안종철 박사가 집필했다. 안종철 박사는 전남대학교에서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지방조직과 지방인민위원회에 관한 연구」로 박사과정을 마쳤으며,『광주전남지방 현대사연구』등의 저서가 있다.
이 책에서는 14연대 창설요원의 사상적 동질감, 경비대와 경찰의 갈등, 국방경비대에 침투한 숙군작업 등을 여순사건의 배경으로 보았다. 반군치하의 여수ㆍ순천 지역의 상황과 탈환작전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모함이나 애매한 희생이 많았다고 했다. 집필자는 여순사건 이후 우익세력 조직화, 국가보안법 제정 등으로 반공노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현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답게 사료를 바탕으로 기술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하지만 거시적인 여순사건의 서술보다는 순천지역의 여순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순천시사』에서는 「순천에서 겪은 여순사건」이란 제목으로 여순사건 당시 남로당 순천군당 조직부 간부이며, 여순사건 이후에는 순천군당위원장을 역임했던 윤기남 증언, 여순사건 당시 순천군당 지도과장이며, 1954년 전남도당 군사2부장을 지낸 심명섭(가명) 증언, 당시 여성동우회 활동을 했던 김○○(여) 증언을 기록하여 여순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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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별곡-5] 화염에 휩싸인 여수, 그 사람들의 인식-1
주철희 | webmaster@agoranews.kr
[77호] 승인 2015.03.08 13:45:27
▲ 주철희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여순센터 소장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제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수지역에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여수에서 여순사건을 최초로 언급한 책은 1952년 여수교육청에서 발간한 『여수향토사』이다. 집필자는 김낙원(金洛原)이다. 『여수향토사』에서는 ‘여순반란사건’ 또는 ‘무자십월사변(戊子十月事變)’이라고 했다. 김낙원은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나름 정당하지 않은 명칭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 만큼 ‘무자십월사변’이란 주장을 강력하게 어필할 수 없었기에 ‘여순반란사건’과 혼용하여, 지역에 고착화된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김낙원은 1962년에 대폭 개정한 『여수향토사』를 발간했다. 이 책은 김낙원의 체험적 수기형태로 여수시내 상황을 세세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1990년대부터 증언채록 등의 자료가 발간됐지만, 당시의 개인 기록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군인과 수도경찰대에 의해 종산국민학교 등에서 행해진 무고한 민간인 즉결처분과 지역공동체 파괴를 생생하게 현장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는 출판 당시의 시대ㆍ정치적 상황 즉, 5ㆍ16쿠데타로 서슬파란 위압의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순사건을 이해하고 인식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파악되기에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여수 진압작전이다. 이미 반군 주력은 봉기 직후 순천에 진주했으며, 나머지 반군도 24일 밤에 지리산 등으로 입산했다. 따라서 여수시내에는 극소수의 군인과 지방 좌익과 학생뿐이었다. 그런데도 육ㆍ해ㆍ공군 합동으로 포탄과 총탄을 난사했고, 마침내 여수시내는 화염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김낙원은 국군이 정보만 제대로 파악했더라도 여수를 쉽게 탈환했을 것이며, 여수 시내가 잿더미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10월 27일에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던 반군토벌사령부는 반란병사 200명, 민간 무장폭도 1000여 명, 동조세력까지 합쳐 총 1만 2000여 명이 대항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김낙원의 주장과는 다르다. 그런데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 점령 후 여수시내에서 10여 명의 반란병사와 민간 폭동군 500여 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무차별적인 진압작전에도 불구하고 체포된 인원은 극히 일부였다. 진압 당시에 반군토벌사령부의 발표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 화염에 휩싸인 여수시내. 하얀띠를 두른 진압군은 그저 쳐다만 보고 있다.
둘째, 진압군과 경찰대는 여수를 온통 빨갱이 고장으로 몰아 무고한 시민까지 학살했다는 것이다. 돌발적인 반란에 대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갖고 신중히 조사해야 할 부분임에도, 백색 지까다비(地下袋)를 신은 사람과 미군 샤쓰를 입은 사람을 무조건 즉결처분하는 등 국군과 수도경찰대의 민간인 학살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국군이 협력자 색출과정에서 ‘손가락질’만으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잔혹함을 당시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손가락이 한 번 가르처진 사람은 사정없이 끌려 나간다. 끌려 내인 사람들은 또 다시 그 집단 속에서 자기와 같이 행동하든 사람들을 꺼집어내도록 명령을 받는다. 주저하다가는 얻어맞고 한 끝에 결국 또 하나를 손까락질 한다. … 손까락질 한 번에 끌려나오면 생명에 위험을 직각하게 되는 것이요, 변명할래야 아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리하고 있는 동안에 학교 마당 남쪽 구텡이에 十五명의 청년이 포박된 채 끌려나와 선다.『카-빙』총의 발사와 함께 그들은 앞으로 꼭그러젓다. 제二탄 제三탄이 쓰러진 그들에게로 다시 발사되였다.(『조선일보』, 1948년 10월 29일)”
셋째, 여순사건은 무장한 군대의 봉기로 이루어진 ‘반란’이라는 것이다. 군인이 봉기하여 민간인을 총칼로 위협한 사실에 대해 군인 자체가 반성해야 하며, 또한 미리 방지 못 한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군은 마치 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점령군처럼 여수시민에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여수와 순천지역 주민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이범석 국무총리 등 정부각료의 몰염치한 행동에 여순사건은 철저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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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
담주 찾아가는 그곳에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라고 외워서 기억저편에 있던 지식이 이번 문학기행 때문에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합니다~ 요즘 뉴스를 들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너무나 많이 가려져있다고 느끼게됩니다~
분명 국민들을 위해서 하는일들은 아닐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