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경쾌한 모닝콜 음악이 들려온다.
두어 시간 눈을 붙였었기에 평소보다 몸과 마음이 가쁜하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준비물을 챙기면서
거실에서 주무시는 부산 큰형부와 큰언니를 깨우고 방으로 가서 작은딸을 깨웠다.
이번 충청남도권의 태안, 서산, 예산 답사는 할머니와 손자녀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나도 큰형부와 큰언니에게 그동안의 신세진 것을 조금이라도 갚을겸 함께 가기로 했다.
큰언니는 22살 때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언니보다 8세나 연상의 큰형부와 선을 보았다.
큰형부는 과자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십여리 먼 우리집을 드나드셨는데
겨우 말을 배우던 내가 언니들을 따라 "세아저씨"라고 부르자
어린 처제라고 몹시 예뻐하며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마을밖 과수원까지 데려가곤 하셨다.
엄마를 대신해 나를 키우다시피했다던 큰언니는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가마를 타고 새터동산을 지나고, 수리티를 지나고, 좀실 서낭당을 지나
외남 모단(못 안)으로 시집을 갔다.
가마를 타고 떠나는 언니를 따라가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몇 날을 울었고
낯선 집으로 시집간 큰언니는 해질녘이면 내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고 했다.
큰조카가 태어났을 때 파란 포대기를 사 가지고 엄마와 함께 언니네 시집을 찾아 갔는데
애기한테 부정타지 말라고 새포대기를 통시(?)에 잠시 갖다두었다가 가저오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내 나이가 아마 다섯 살 쯤일 것이다.
언니들이 아무리 나를 키웠다고 해도 내 기억에는 이런 희미한 기억밖에 없다.
기억이 안 난다고 업고 안고 먹이고 입히고 키웠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는지라
이번에 크게 마음 먹고 두 분을 답사 여행에 동행하기로 했다.
막내의 궁색한 변명이지만 큰언니는 나의 언니이니 함께 다니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호호 할배인 형부까지 함께 여행가는 것이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내가 왜 큰세아저씨 모시고 다녀야 되는데......" 라고 세째 언니에게 넋두리를 하고
"언니야, 이번에 한 번만 세아저씨와 함께 가고 다음부터는 언니만 와야 해."
라고 큰언니한테도 단단히 약속을 받았다.
우리집에서 여덟번째이며 막내인 나는 하고싶은 말은 참지않고 해 왔던터라
이 나이가 되어서도 분명히 선을 그어 말하는 버릇은 버리지를 못 했다.
오죽하면 옆에 있던 작은딸이
"내가 가서 이모와 이모부 챙겨 드릴께, 엄마 걱정 하지마."라고 했었다.
함께 가면서 굳이 두 분이 같이 앉지 않고 따로 앉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큰언니는 다리가 아파서 불편하다며 형부랑 따로 앉겠단다.
'젊어서 마음 고생시킨 것을 동생 앞에서 시위라도 하는 건가. 이럴거면 함께 오시지나 말지.'
당황스럽고 곤란하지만 어쩌겠는가. 두 분을 따로 앉도록 했다.
김천 휴게소에 들리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몸은 불편하지만 휴게소에 갈 때까지 쉴 수 있는 내겐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충혈된 눈을 감고 몸은 쉬면서 머리만 가동을 시킨다.
한번의 답사를 실시하기까지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한다.
주제를 정하고,
코스를 정하고,
인원을 정해 차량을 예약하고,
여행자 보험을 가입하고,
점심, 저녁 식사를 예약하고,
자료를 모아 자료집을 작성해서 제본을 하고,
출발 시간과 돌아올 시간을 문자로 부모님들께 알리는 것으로 출발 전의 일은 일단락 된다.
23회의 국내 답사와 1회의 해외 답사를 실시하면서
나는 왜 이런 고생을 하는가에 가끔 회의가 들기도 했고,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다.
통제가 안 되는 어린 녀석들에게 짜증을 낸 것이 미안해서 후회스러울 때도 있고,
인터넷을 통해 맛집을 찾아 예약을 했는데 실제로 먹어보면 실망스러울 때도 두어 번 있었다.
길을 잘 모르는 기사 때문에 예정된 코스를 다 돌아보지 못할 때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실수는 아마추어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이 든 언니나 형부가 동행하는 것이 내게 마음 편할리없다.
나는 내 언니와 형부만을 위한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누누히 얘기를 했기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 졌지만
형부가 가는 곳마다 커피를 찾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 가족이라고 형부만을 챙길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기사가 새로온 분이라 신경쓰야할 일이 많다.
하루의 일정을 미리 알려주고 다음 코스로 가는 길과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라거나
예약한 식당의 전화번호를 주고 도착 시간을 예상해 미리 식당에 전화를 걸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느긋한 식도락관광을 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답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계획된 일정을 계획된 시간 안에 빈틈없이 진행해야 한다.
미리 충분히 주유를 해오지 않고 주유소에 들르는 기사 때문에 내 신경은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4시간 30분으로 예정했던 태안 도착 시간이 5시간 20분을 경과하고 있다.
10시 반쯤에 도착해야 일곱군데 답사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는데
11시 20분이 되어서야 태안 마애삼존불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도 빨리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그렇지 않아야 될 곳이 있다.
우리나라 초기 불상인 6~7세기의 태안 마애삼존불과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교해서
마애불의 변화과정을 확인하고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느낌을 오랜동안 간직하게 해 주고 싶어 두 군데 마애불의 특징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다.
서산 마애삼존불보다 먼저 조성되었고,
조각의 기법이 뛰어나지도 않으며, 바로 앞이 막힌 동향을 하고있다.
불심이 깊지 않은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높은 습도로 인해 마멸되고 손상된 불상이
그저 싫거나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어린이들과 중학생들은 열심히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으며 재잘재잘 한마디씩 자기의 느낌을 얘기한다.
할머니들은 부처님께 간절한 기원을 올리러 가셨는지 우리들의 수업을 방해하지 않으셨다.
불상의 존명을 알기 위한 手印과 여래와 보살에 대해 설명하고,
초기 백제 불상에 등장하는 봉보주인을 한 관세음보살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더니
서산 마애삼존불 앞에서는 미륵 반가사유상과 시무외인 여원인을 한 석가모니불과
봉보주인을 한 관음보살(혹은 제화갈라보살)을 맞춰서 많은 관람객들을 놀라게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요. '두려워하지말라, 네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3학년부터 답사 때마다 따라왔던 정욱이가 나서서 한마디 하자 관람객들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쏠렸다.
정욱이는 순식간에 스타강사가 되었고, 봉보주인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멋있게 직접 수인을 지어 보였다.
백제시대 창건했으나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중흥을 맞았던 보원사지에 들렀다.
시간은 12시 반을 넘고 있어서 몹시 시장했지만 통일신라의 당간지주, 수조, 고려 탑,
법인국사 보승탑과 비를 하나하나 훓어보았다.
작년에 지리산권 답사에서 실상사와 연곡사에서 승탑을 많이 보았으므로 그때 동행했던
중3 희근이한테 연곡사 승탑과 비교해 보랬더니 싱긋 웃으며 사진만 열심히 찍는다.
장차 고고학자가 꿈인 전교 10위권 이내의 학생이다.
100여 동의 건물은 한 채도 남아있지 않으나 절에 속해있던 여러 시대를 거친 유물과
넒은 절터를 통해 당시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태조 왕건 때 법인국사가 기도를 올려 광종이 태어나게 되었고,
광종 때 왕사를 지낸 법인국사가 주지로 계실 때 최고 전성기였을 절의 건물은 간데없고
터만 남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것 같다.
사람이나 절이나 다 절정기일 때가 있나보다.
철조 석가여래좌상은 국립중앙박물관 2층으로
금동불입상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어서 이 곳에서 볼 수 없음이 서운했다.
바램은 오늘 마지막으로 보게 될 조선시대 중흥기를 지낸 수덕사와
고려시대 중흥기를 지낸 보원사지를 어린 친구들이 비교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원사지와 수덕사를 답사 코스에 넣었는데 내 의도를 알아줄지 모르겠다.
30분이나 걸려서 예산의 특별식 '게국지'를 먹으러 갔다.
그러나 반찬은 괜찮지만 주 메뉴인 '게국지'는 건성으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배추에 눈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고추가루 조금과 작은 새우가 들어있는
국도 찌개도 아닌 것이 짭기만 해서 수저가 나가지 않았다.
서해안 갯벌에서 잡은 각종 해산물과 게를 넣어 만든 별식을 기대했었는데.
정순왕후 생가와 남연군 묘를 이번 답사 코스에 함께 넣은 것은
조선후기를 이끈 당대의 두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에서였다.
안동김씨 일문의 세도정치를 조장한 정순왕후가 태어나고 자라 간택되기까지 살았던 생가이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의 영조의 계비로 들어가 가문의 번영만을 생각했던
그녀의 머리 속에는 나라와 백성은 없었다.
그녀(왕비)의 삶은 행복했을까.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갈라놓았고,
임오화변의 배후에 있었으며,
정조의 등극을 저지하려했고,
정조 사후 그의 어린 아들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반대파인 시파와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어켰던 여인.
삼정의 문란과 과거제의 문란을 몰고와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민란의 단초를 제공했던 여인.
자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왕비의 자리, 대비의 자리를 철저히 이용했던 여인.
일찌기 효종이 그녀 5대조의 지극한 효성을 보고 집을 지어 하사했었는데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 올라 조선을 파국으로 몰아갔다.
안동김씨 세도정치하에서 비루먹는 개처럼 보이면서도 마음 속에 큰 뜻을 품었던 흥선군이
2대 천자를 낸다는 명혈에 부친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2만냥의 돈을 들여 가야사를 사들이고
가야사지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장한지 7년 후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났다.
12세의 명복이 즉위하자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의 안정책을 폈으며,
서구열강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하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일은 며느리였다.
안동 김씨나 풍양조씨 같은 세도정치의 싹을 키우지 않도록 고아 소녀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했던 흥선대원군.
장차 그녀와 정적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남연군 묘을 도굴하였고,
분노한 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다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간택한 며느리 민자영의 사주로 최익현이 올린 상소에 의해 실각하고
운현궁에서 절치부심했던 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후기와 조선이 근대화를 맞던 시점에 권력의 정점에 섰던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가문의 영달을 위해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전제군주제에는 합당했으나
거센 새시대의 흐름을 바로 읽지 못한 시대를 거슬러가는 정책이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조선의 인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해미읍성으로 가서 누각에 올라 두 다리를 뻗히고 앉아 쉬면서
몇 군데를 둘러보고 오라했더니 지치지도 않는 아이들은 성곽위를 뛰어다니고
호야나무까지 갔다오는 아이들도 있다.
태안까지 오는데 지체한 시간을 이런 곳에서 가볍게 조금씩 메꿔가야 한다.
왜침에 대비해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쌓은 해미읍성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병인박해 때
성 안의 호야나무에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를 목 메어 순교시키기도 했다.
이 나무에는 그 때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수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이 장소에 전국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그 때처럼 통곡하는 사람들이 아닌 함박 웃음을 머금은 어린이들과
즐거워보이는 어른들로인해 곳곳에 차려진 주막과 매점들엔 손님이 넘치고 해미읍성 안은 술렁거린다.
수덕사로 오르는 길은 수목에 물이 올라 고단한 하루를 보낸 우리에게 듬뿍 생기를 전해준다.
이름모를 꽃과 나무들로인해 정작 수덕사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수덕사를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서부터는 걸음이 느린 할머니들과 지치지 않는 손자들의 거리가 벌어져 자유관람을 하게했다,
이 계단만 오르면 끝인가 했는데 또 계단이 나타나 할머니들은 아픈 무릎을 호소하고
대웅전이 확 안기듯 다가와야할 마지막 계단 위에는 수백 수천의 연등이 달려있어 대웅전이 보이지 않았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 충렬왕 때 창건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대웅전은
단청이 벗겨져 소탈한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절마다 흔한 꽃창살도 아니다.
그런데도 화려한 단청을 올린 다른 전각을 압도하는 위엄과 기품이 넘친다.
나도 수덕사 대웅전을 닮고 싶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 앞에서 스크린인듯 스치고 지나치는데
대웅전 아랫단 고목옆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나는 권력을 탐하지도, 명예를 탐하지도, 돈을 탐하지도 않으며
그저 아름다운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즐기며 내 삶을 반추하는 이런 삶이 좋다.
한때는 열심히 일하고 많은 돈을 벌어야 편안히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잠시 유보를 했었으나 지금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어린 청소년들과 산천을 유람하며 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이런 삶이 좋다.
장래에 이 중에서 나보다 훨씬 똑똑한 미술사학도가 나와서 다행히
나와 함께했던 답사여행을 기억해준다면 이보다 더 기쁜일이 있을까하고 생각한다.
효도여행이라 하면서 정작 형부나 언니랑 얘기도 한번 나누지 않았다.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온 큰언니는 발그레 볼이 상기되도록 뒤처지지 않으려고
미리미리 앞서 걷는 것을 보면서 새삼 언니한테도 감사함을 느낀다.
"혜민아, 패티 김이 칠십네살인데 아직도 노래하잖아.
엄마도 칠십이 될 때까지 건강해서 이렇게 답사여행 다닐 수 있을까?"
"응, 엄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거야."
뻔한 대답을 듣고 싶어 작은딸에게 한 마디 하고나니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