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 슬견설(虱犬說)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7. 1.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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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 - 슬견설(虱犬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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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4:11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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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고전
슬견설(虱犬說)
요약 「슬견설」은 ‘이[虱]와 개[犬]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신이자 문인인 이규보의 우언적 설 작품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21권에 전한다.
개와 이의 죽음을 둘러싼 ‘객’과 ‘나’와의 두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지며, 주 내용은 객의 일상적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대한 내용이다. 곧 이는 미물이어서 죽어도 슬프지 않으나, 개는 큰 짐승이므로 죽으면 불쌍하다는 인식에 대해서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동일하다’는 바른 사물인식의 자세를 일깨워주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 이규보 (李奎報, 1168년 ~ 1241년) |
장르 | 산문, 설(說) |
발생 | 12세기 후반~13세기 초 |
작품해설
고려 중기 의종~고종 연간에 최씨 무신 집권하의 문한직 관리의 대표적 문신이었던 이규보가 쓴 열두 편의 ‘우언적 설’문학 작품 중 한 편으로 전문 250여 자의 짧은 글이다. 제목 ‘슬견설’이란 ‘이[虱]와 개[犬]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설 문학은 우리나라 한문 산문 중 상위 갈래로는 의론체(議論體: 논리와 논지가 정연한 글) 산문에 속하며, 중간 갈래로는 논변류(論辨類: 사리를 분석하고 시비 변별을 위주로 하는 글)에 속한다. 다시 설(說)은 ‘직서적 설(直敍的 說: 논리를 위주로 제재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과 주장을 개진하는 글)’과 ‘우언적 설(寓言的 說: 글의 전반부에 허구적 상황을 설정하고 후반부에 유추된 결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신의 뜻을 밝히는 글)’로 나뉜다.
작가인 이규보는 이 일련의 열두 편의 우언적 설 작품인 「경설(鏡說)」, 「주뢰설(舟賂說)」, 「슬견설(虱犬說)」, 「뇌설(雷說)」, 「기명설(忌名說)」, 「괴토실설(壞土室說)」, 「이옥설(理屋說)」, 「완격탐신설(琬擊貪臣說)」, 「논시설(論詩說)」, 「칠현설(七賢說)」, 「천인상승설(天人相勝說)」, 「몽설(夢說)」 등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설 작품을 창작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한문학 중 설 양식의 일반적 의미는 ‘說은 풀어 설명함[釋]’이며(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說은 푸는 것이요, 서술하는 것이니, 의리를 해석하여 자기의 뜻을 서술하는 것’(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文體明辯)』)에 의거하면, 가장 뚜렷한 특징은 논리를 바탕으로 ‘필자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주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둘째로는 우언이라는 측면에서는 ‘甲를 들어 乙를 말함’이니, 일반적 비유와 다른 점은 갑이 사물이 아닌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서사체)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우언적 설 작품의 일반적인 구성상의 분류는 1단 구성, 2단 구성, 3단 구성 작품들로 나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보편적인 구성은 3단 구성이다. 곧 3단 구성이란 일화부(逸話部: 또는 작가가 관찰한 객관적 상황)에 이어, 설리부(說理部: 일화에 대한 작가의 이치 구명), 그리고 마지막 창작 의도 제시부로 구성된다. 3단 구성의 경우, 1단의 일화부분은 허구적 성격을 띠면서 단형 서사체적 특성과 우언적 특성으로 인해 문학 예술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한문 산문 중 전(傳)과 함께 실용문이 아닌 문학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슬견설」은 이러한 구성상의 분류로는 ‘객(客)’과 ‘나’가 묻고 답하는 의론적 문대로 이루어진 1단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의론적 문대(議論的問對)에 의한 전개는 유추적 형상화(類推的形象化)와 함께 우언적 설 양식의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다. 곧 문대 방식은 논리에 입각해서 두 사람 이상이 묻고 답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작가의 주관적이고 설명적인 개입을 차단시키고 사건을 극화·장면화 시킴으로서 이야기에 객관적 사실감을 높여주는 표현효과를 거둔다. 「슬견설」은 바로 이러한 의론적 문대에 의한 담론으로 전개시키고 있으니, 곧 전편이 시종일관 ‘객(客)’과 ‘내’ 사이에 논리적으로 묻고 답하는 네 토막의 대화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네 토막의 짧은 대화 속에 촌철살인의 묘를 살려 ‘올바른 사물인식’이라는 주제를 형상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글로, 작가 이규보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글이다.
등장인물
객(客) : 구체적인 이름이나 성별 직업 등은 밝혀지지 않는 채로 ‘객(客)’이라는 미지칭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보편적 인간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허구적으로 설정한 인물이다. 이러한 객이 보고 느낀 바는 ‘길에서 돌아다니던 개가 불령한 남자에게 몽둥이로 무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며 마음이 아파서 앞으로는 개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의 사물인식의 태도는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의 대꾸에 대해서는 ‘개와 이는 크고 작음에 차이가 있으니 이[虱]와 같은 미물을 들어서 나를 놀리고 있다’고 하면서 반발하는 태도 또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과 유사한 인물이다. 즉, 사물인식에서 본질보다는 크고 작음에 얽매이는 외형적 인식이나 인간 중심의 이용가치의 유무에 의한 선입견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일상적 인간으로 등장한다.
나 : ‘나’는 ‘객’과 대화를 나누며 선입견에 의한 그릇된 사물인식을 적극적으로 깨우쳐 주고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인물이다. 객의 말에 대해 첫 번째 대화 속에는 객에 대해 ‘이’를 잡아 죽이지 않겠다는 대꾸로 맞받아쳐 풍자적 태도를 갖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발하는 객에 대해 마지막 대화를 통해 진정한 도(道), 곧 사물인식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깨우쳐 준다. 이 세상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하며, 이것은 크고 작거나, 인간에 쓸모 있거나 쓸모없거나에 관계없이 공통적이고 본질적 속성이라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 ‘개와 이’의 관계를 소·말·돼지·양·손가락·달팽이뿔·쇠뿔·메추리·대붕 등을 예로 들면서 일반화시킨다. 그러면서 ‘당신은 물러가 눈을 감고······그런 후에야 비로소 당신과 도를 말하겠다.’고 하면서 우언적 방법으로 교훈적 내용을 깨우쳐 주는 인물이다.
작품전문
손이 있어 나에게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한 불량한 남자가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쳐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죽는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개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라고 했다. 내가 이에 대꾸하여 말하기를,
“어제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를 끼고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라고 하니, 손이 실심하여 말하기를,
“이는 미물이다. 내가 본 것은 큰 물건의 죽음이어서 가히 슬퍼할 만한 것이기에 말한 것인데, 당신은 이(와 같은 작은 미물의 죽음)것으로 내 대답을 삼으니 어찌 나를 놀리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양·곤충·개미에 이르기 까지 그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거의가 같은 마음이니, 어찌 큰 놈만 특별히 죽기를 싫어하고 작다고 해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즉 개와 이의 죽음은 한 가지인 것이네. 그래서 적당한 대조로 삼은 것이지 어찌 서로를 놀리겠는가? 당신이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당신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라.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 않는가? 한 몸 가운데 큰 지절과 작은 부분이 골고루 피와 살이 있으므로 그 아픔은 같은 것이다. 하물며 각기 숨과 기운을 받은 것으로서 어찌 저것만이 죽음을 싫어하고 이것은 좋아하겠는가? 당신은 물러가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라.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지극히 작은 것)을 쇠뿔(큰 것)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大鵬)과 같이 보라. 그런 후에야 나는 비로소 당신과 함께 도를 말하겠다.”
라고 하였다.
작품 줄거리
‘객’이 와서 개가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앞으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자, ‘나’는 이를 잡아 화롯불에 넣어 죽이는 것을 보고 앞으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대꾸한다. 그러자 객은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고 하자, ‘나’는 이 세상에 개 같은 큰 짐승의 죽음만이 불쌍하고 이 같은 작은 미물의 죽음은 불쌍하지 않다거나, 인간에게 쓸모 있음과 없음을 중심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에 의한 인식이라고 한다. 아울러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동등하게 바라보고, 올바른 태도로 사물을 인식하라는 주제를 짧은 네 토막의 대화 속에 요약적이고 함축적으로 형상화 시킨 우언적 설 작품이다.
작품 속의 명문장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 (중략) ~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거의 같으니, 어찌 큰 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다고 해서 그렇지 않겠는가?”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살기를 바라고 죽는 것을 싫어하니, 외물보다는 본질을 인식하라.
“당신은 물러가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보라. 그리하여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대붕과 같이 보라. 그런 후에야 나는 비로소 당신과 도(道)를 말하겠다.”
외물(外物)에 얽매이지 말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함.
작품읽기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슬견설(虱犬說)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고전, 2013. 11., 양현승, 강명관,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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