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알대장이 제게 던진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는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을 흉내내 '산행기(山行記)'가 아닌 '근참기(覲參記)'라고 달았습니다. 육당이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을 신성시해 '뵐 근(覲)'자를 썼듯이, 마니산도 운동 삼아 걷거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오르는 여느 산과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지요.(쳇! 잘난 척하기는...")
알대장이 9월 산행을 마니산으로 정한 연유는 "되는 일이 없고 한없이 잘못된 방향으로만 가는 느낌이고, 바쁘고 분주한데 실속은 드립다 없어 기도발 좀 받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랍니다. 피플러버 회장님도 "기 좀 받으러 가자"는 댓글을 남겼지요.
9월 17일 토요일. 집결지인 합정역에 모이기로 한 시간은 오전 8시30분. 몇 분 늦게 도착해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는데, 늦었다고 핀잔을 주는 기색 없이 모두들 느긋한 표정입니다. 아직 댕기의 차량이 도착하지 않은 덕분이지요. 모처럼 보는 마포나루를 비롯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댕기의 9인승 승합차가 도착합니다.
오늘 마니산 근참에 동참할 인원은 모두 9명. 댕기의 차에 빽빽히 몰아 타도 되지만, 하산 후 이동 등을 고려해 알대장의 승용차도 동원해 분승하기로 했습니다. 회장님과 컴불형님, 그리고 저는 알대장의 차에 탔고 마포나루, 멍게,재로, 오솔길은 댕기의 차에 탔습니다.
가는 길이 생각보다 막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알대장의 차가 길을 다소 헤매고 주유소까지 들렀던 터라 목적지인 함허동천에 앞차보다 20여분 늦게 착했습니다.
강화도 남쪽 해변, 마니산 서쪽 기슭의 함허동천은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가 마니산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보통 승려는 법명과 법호와 당호 등이 있습니다. 서산대사도 법명은 휴정이고 법호가 서산, 당호가 청허당입니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이고 사명당은 당호지요. 법호는 송운입니다. 지금 함허동천에는 야영장이 들어서 상가와 화장실, 주차장 등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마니산 정상까지는 2.9km. 정상의 높이도 469.4m여서 그리 부담되는 거리와 높이가 아니지만, 암릉길이 이어져 있고 거의 해발 0m에서 등산을 시작하기 때문에 만만치는 않습니다.
이동속도가 다소 늦은 마포나루가 일행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먼저 출발했다고 합니다. 나머지도 서둘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출발하자마자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왼쪽은 계곡길, 오른쪽은 능선길입니다. 회장님과 오솔길은 이미 능선길에 들어섰는데, 뒤에서 마포나루는 계곡길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회장님과 오솔길은 어차피 가다가 만난다면서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릴없이 컴불형과 저는 회장님을 보좌하고 오솔길을 챙기기 위해 능선길에 합류했고 나머지는 계곡길을 선택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물으니 계곡길이 훨씬 힘들다고 하네요. 회장님의 혜안에 감복하며 즐겁게 산길을 올랐습니다. 조금만 땀을 빼니 서해바다와 갯벌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그러나 능선에 올랐어도 바람이 거의 없어 땀이 줄줄 흐릅니다.
계곡길과 능선길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자 재로와 댕기가 보입니다. 우리를 기다린 것인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알대장과 멍게에 뒤처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마포나루는 올라오다 발목이 삐끗해 등산을 포기하고 다시 내려갔다고 하네요. 2주 전 설악산 청봉을 넘었다고 하더니 너무 무리한 탓일까요? 마포나루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차량을 몰고 하산 장소에 미리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니 고마운 일입니다.
바위 능선에 이르자 아이스케키와 청량음료를 파는 아저씨가 나타납니다. 회장님이 아이스케키를 하나 먹고 싶다고 해서 저와 함께 하나씩 물었습니다. 컴불형은 물이 제일 낫다면서 사양합니다(저도 그리 먹고 싶지 않았지만 회장님이 민망해할까봐 예의상 나도 먹겠다고 한 건데). 뒤따라온 오솔길은 게토레이를 골랐습니다. 우리가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댕기와 재로도 나타나 하나씩 집어들었습니다.
정상이 700m쯤 남은 지점에 알대장과 멍게가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자 준비한 음식을 꺼내니 돗자리가 그득해집니다. 알대장은 호박쌈에 시래기국, 된장, 총각김치 등 보온밥통에 제대로 된 점심을 준비해왔습니다. 멍게는 유부초밥을 넉넉히 싸왔고 오솔길은 떡을 준비해왔습니다. 가스버너에 물을 끓여 컵라면 세 개도 곁들였지요. 저는 김밥을 두 줄 사왔는데 한 줄은 컴불형이 배고프다고 해서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먹었고 나머지 한 줄을 여기서 풀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기를 끈 메뉴는 재로가 배낭에 지고 올라온 '월매(月梅)' 냉막걸리였지요. 전날 냉동실에서 깡깡 얼려놓았다가 아침에 꺼내 오니 몇 시간 만에 적당히 녹아 시원한 냉막걸리가 돼 있었던 겁니다. 모두들 재로의 정성에 고마워하며 기분 좋게 막걸리를 들이켭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객쩍은 농담을 몇 마디 했는데 모두 기억하시나요? 지금 강화도에는 갯벌이 많이 펼쳐져 있지만 19세기만 해도 바닷가에 조약돌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생겨난 한자 성어가 있는데 역사책에도 기록이 나와 있다고 하네요. '강화도조약'이라고.
이밖에도 '어중이떠중이'의 어원, 소몰이 소리 '이랴'의 어원, 난봉꾼의 사리 수습기 등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농담 시리즈는 나중에 뒤풀이 자리에서도 계속됐는데, 마포나루가 '반성문'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묻더군요. 정답은 '글로벌'입니다. 답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퇴화된 센스를 자책하십시요.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습니다. 우리 일행의 등정로는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참성단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좌우로 다 바다가 펼쳐져 가슴이 확 트입니다. 쾌청한 날씨는 아니지만 며칠 전 비가 올지 모른다고 했던 기상청 예보를 생각하면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람 한점 없는 것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마침내 참성단에 도착했습니다. 수백개의 돌로 제단을 쌓고 울타리까지 돌로 쳐놓아 자못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바람 한점 없고 땡볕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 눈으로만 쓱 한바퀴 둘러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오른쪽의 계단길을 버리고 왼쪽의 단군길을 택했습니다. 단군길로 가다가 왼쪽 능선길로 계속 걸으면 선수 선착장이 나오지요. 화도면 관리사무소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 능선 안부(鞍部)에 이르자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옵니다. 모두들 땀을 식히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컴불형이 모처럼 산에서 오수를 즐기고 가자고 제안합니다. 저도 휴대용 돗자리를 깔고 큰대자로 누웠습니다. 멍게가 시체놀이 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10분쯤 지나자 주섬주섬 행장을 꾸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도 일어나 짐을 다시 꾸렸습니다.컴불형은 아직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네요. 컴불형과 알대장을 남겨두고 길을 떠났습니다.
함허동천에서 참성단에 이르는 길은 암릉 투성이였는데, 이쪽 능선은 몇 군데 빼고는 푹신한 흙길이 이어집니다. 걷기는 괜찮았지만 바람도 안 불고, 먹을 것 다 먹었고, 정상도 지나와 목표의식도 옅어지다보니 빨리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막 나타난 이정표는 선수 4.3km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허걱! 산길 4.3km라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그러나 몇백m를 내려가자 능선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가 나오고 여기에 마포나루가 승합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뒤늦게 컴불형과 함께 도착한 알대장은 내쳐 4km를 더 걸을 기세였으나 시간도 많이 흘러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뒤풀이 장소인 식당의 이름은 거억나지 않지만 음식이 꽤 먹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주꾸미와 밴댕이는 철이 아니라고 해서 전어회와 왕새우소금구이, 그리고 꽃게탕을 주문했습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들 맛있게 먹었지요. 꽃게탕의 국물이 일품이었습니다. 물론 소폭도 몇 잔 곁들였지요.
함허동천 주차장에서 다시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해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강남권인 컴불형과 마포나루는 알대장의 차에 탑승했습니다. 회장님과 저, 오솔길, 재로, 멍게는 댕기의 차에 탔지요. 서울로 가는 길에 제가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마포 갈매기살?" 아니면 삼각지 대구탕?"하며 2차 뒤풀이를 제안합니다.
차를 모느라 술을 못 마셨던 댕기는 자기 사무실이 있는 강남구 신사동에서 아구찜을 먹자고 합니다. 집이 목동인 멍게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신사동에서 회장님만 집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아구찜에 소폭 잔을 기울이고 나서야 헤어졌습니다.
마니산에서 듬뿍 받은 기 덕분에 모두들 하시는 일이 잘 풀리기 바랍니다. 참성단에 오르지 못했던 나머지 회원 여러분도 카페의 근참기와 산행앨범에서 뿜어져나오는 기를 쪼이십시오(산행앨범 빨리 올려주세요). 앞으로 하는 일이 잘될 겁니다. 모두들 외쳐 봅시다. '하쿠나 마타타!!"
첫댓글 신속 감동 박식 ...하쿠나 마타나~~
형, 얼떨결에 능선코스로 접어드시는 바람에, 느린 걸음인 오솔길 대원 끌고 가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능선에 올라 마신 게토레이 덕분에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게토레이 마시게 해준 재로, 고맙당.
꽃게탕, 그리고 전어회가 맛있었던 뒤풀이 장소는 '인천식당'이었던 것 같아요.
자호 언니, 안뇽하죠?^^ 맛있는 점심 드셈....ㅎ~
제가 지리산 가는 일로 온갖 검색에 지친 뒤라...헥헥...마니산에서 받은 기가 절실허네유...낭중에 산에서 뵈유...기운 읎어서 오솔길 말마따나 빨리 점심 먹어야.... .. .
고생하셨습니다. 개스가 자욱해 바다와 간척지의 선명한 속살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 그지 없었습니다.
하쿠나 마타타. take it easy. 다이지오부 관바때루
날이 무척 더웠는데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데서 자는,잠깐 동안(한 15분?)의 낮잠은 정말 꿀맛이다.
아마도 이때 마니산의 정기가 우리들 몸 속에 들어왔을 거다.
마니산 낮잠을 시작으로 앞으로 점심식사 후에는 오수를 즐기는 걸 정례화하기로 했지 아마.^^
언제나 그렇듯이 즐거운 산행이었고 '이 시대의 희망과 용기'의 해박한 지식에 늘 감탄할 뿐이었다.즐거웠어~
얘가 나한테 아이스케키 사 준게 아까운겨, 분명히...넌 먹고 싶지 않았는데 나땜시 먹었다고? 담에 곡 되갚아야겠네...
그날은 날씨가 좋긴 했지만 바람이 좀 적어서 다소 서운...역시 기자의 구라가 삼삼하니 글은 청산유수구나. 니 말대로 모든 게 다 잘됐으면 좋겠다. 다들 힘내자...
앗! 회장님 사드린 게 아깝다니요. 글을 쓰다가 말았는데 "첨엔 그리 먹고 싶지 않았지만, 먹다 보니 이 맛있는 걸 왜 안먹으려 했을까. 정말 안 먹었다면 후회할 뻔했다"는 뒷말이 생략된 거랍니다. 잠시나마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이스케키건 게토레이건 맛도 못 본 저와 알대장은 서운합니다. 끝까지 몰랐다면 몰라도 나중에 알게 되니 더욱 서운합니다. 나중에 산에서 아이스케키 파는 행상이 있으면 꼭 사달래고 말겠습니다.ㅋㅋ 마니산 근참기 잘 읽었습니다.
멍게의 답글을 보면 일행의 아이스케키와 게토레이 값을 내가 다 치른 것처럼 착각하겠네. 나는 회장님과 내가 먹을 4천원만 지불하고 난 뒤 후배들이 뒤이어 도착해도 지갑을 다시 배낭에 넣었다는 핑계로 시치미 뚝 떼고 있었다네. 뒤에 온 친구들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돈을 내서 사먹더군. 끈끈하던 선후배 간의 정이 아이스케키 하나로 금방 틀어지네 그려. 역시 먹는 것에는 모두 민감한 법이지. 앞으로 말 한마디, 글 한줄도 특히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해야겠네.
복숭아도 있어. 그리고 또하나의 숨은 선물도. 세상이 다 그런 거야.ㅋ
재미있게 잘 읽어습니다. 9월달에 산행에 참가한건 처음이였습니다. 우리옛멋을 엄청키워서 성수기에도 산악회등반에 참가를 해야 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신사동에서 아구찜을 사준 희망과용기형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