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흉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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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
경주 대능원의 황남대총이나 문무왕비문.삼국사기.한단고기는 신라의 흉노족에 대해 자세히 증명하고 기록하고 있는 증거자료들이다. 중국북부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흉노족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붙잡힌 흉노 휴도왕의 장자 김일제가 한무제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자, 투후국 왕(투후)까지 된다. 세력이 커지자 김왕망과 김알제세력은 한나라에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10년간 버티다가 다시 한족들에게 권력을 찬탈당해 결국 한반도로 망명함..이들이 김씨왕족들......문헌과 유적유물들이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3한 중 마한의 진왕에게 조공을 바친 진한에서 출발하는 신라는 본래 주인이 진시황에게 붙잡혀 고된 노역에서 망명한 진한사람들과 부여에서 망명온 박혁거세 세력이다(후한서-동이열전,삼국지 위지 동이전,한단고기), 마지막에 망명한 흉노족 김씨왕족들이 나중에 쿠테타로 이들을 몰아내고 신라권력을 잡는 것이다.
고구려의 속국-신라
부정할 수 없는 광개토태왕비문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 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고증자료]신라.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를 동남아로 비정하는 코메디를 연출하지마라! 왜는 [한단고기]에도 지금의 일본열도라고 기록하고 있다.왜를 동남아로 비정하면 당연히 신라도 중국으로 비정되면서 문헌해석의 오류가 생기고 역사판도가 개판된다.
[유물: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 제사용 청동그릇]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 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자료] kbs역사추적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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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
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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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묘 |
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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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문의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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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시 김일제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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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이다. 초기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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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석목곽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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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
1.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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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능원 |
2.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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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출토 기마인물형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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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주출토 흉노동복 |
3.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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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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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 김씨왕조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경상도 지역인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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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의 나라 신나라가 주조한 화폐-화천 |
5. 성한왕은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흉노계 선비족 당나라와 손잡고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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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비고 |
신라만의 통일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신들의 실체를 문무왕비문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백한 유물인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신라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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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이 두개로 나누어 지는데, 서로 좀 다른내용을 담고 있네요. 대륙설은 같지만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인가, 김일제인가?
박혁거세 든. 투후 김일제 든. 하루속히 정립된 우리의 참 역사가 밝혀지기를 기다립니다, 하루속히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著 에서 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해일, 지진, 별자리 등을 분석하여 당시의 관측 지점을 분석하여 수도의 위치를 추정한 책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신라는 상대 신라 수도와 하대 신라의 수도가 다릅니다. 즉, 상대 신라의 수도(천문대는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기에 왕실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추정함)는 양쯔강 유역이고, 하대 신라는 한반도 남쪽 유역으로 나옵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읍니다.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설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결국 하대로 와서는(삼국통일할 당시에는) 한반도 내로 정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위 재야 사학자들께서 주장하시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너무 국수주의적 주장을 함으로써 오히려 강단사학자에게 허구라는 빌미를 주기에 이런 글을 보면서 비애를 느낍니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재현시킬 수 있읍니까? 그러한 사실이 맞던 안맞던 현재 지금 이 시점에서 학자들이 하여할 것은 균형감각을 잊지마시고 제대로 된 사실을 객과적이고 과학적으로 입증해주시면 좋겠읍니다. 어떤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여 침소봉대하는 우를 벌이지 말았으면 합니다. 경주땅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유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특히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석조건축물인 석굴암과 불국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남산의 수많은 유적과 안압지, 포석정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좀 더 차분히 한가지씩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으로 증거를 찾아내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작업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잘 하자는 뜻에서 말이 길었읍니다....에고!! 그냥 지나간 흔적일 뿐인데~~"온고이지신"이란 옛것을 그냥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서 새로이 창조해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