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고북면 천장사길 100
천장사는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운화선사]가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나
담화선사는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며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나 유적도 현존하지 않는다.
15년간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150만부 돌파한 최인호의 [길없는 길]
각 권마다 책의 내용에 부합하는 경허 선사의 친필과 법문,
만공 스님의 생전 모습과 친필 현액들,
두 스님이 몸담았던 사찰 등의 귀중한 자료들을 화보집으로 묶었다.
각 권의 내용에 부합되는 이 자료들은 작가가 위대한 선사들의 발자취를 좇으며 길어 올린 천금같은 것이다.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
기골이 장대한 선승의 우직한 눈매와 주장자를 힘껏 움켜진 경허,
일지스님이 경허 선사(鏡虛 禪師)를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 그려낸 수작
- 천장사 주차장 -
- 연암산 천장사 -
천장사는 마치 제비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연암산(燕岩山)에 숨어있는 작은 절집이다.
‘천장(天藏)’이란 ‘하늘 속에 감춘다’는 뜻으로서
장자가 물가에 매어둔 배를 온전히 숨기려면
산이나 들이 아닌 배 그곳에 숨겨야 했던 말과 통하고 있다.
이처럼 천장사는 제비바위가 있는 산 중턱에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
'하늘도 땅도 감추어진 곳'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제비바위의 가파른 봉오리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에 조성된 천장사는
이러한 산 계곡 간에 세워진 너무도 작은 절집이지만
이 집을 거쳐 간 큰 스님들로 인하여 그 어느 곳보다 큰 사찰이다.
이 천장사에는 근세에 이 땅에 선풍(禪風)을 새롭게 불러 일으킨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선사가 일년 석달 동안 보림수행을 한 곳이다.
이후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대사가 이곳에서 불법을 계승한 사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몇 해전 큰 산불로 인해 주위에 울창한 송림이 다 불타버려 제비바위에서 사찰 쪽을 바라보면
죽은 나무들이 둘러싼 가운데 오로지 천장사만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어
불법의 오묘함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다시 제비바위에서 눈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고북저수지가 눈에 들어오고
날씨 맑은 날에는 서해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한 천장사는 이처럼 그 규모는 매우 작지만
선사들의 높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 참선도량으로서,
오늘도 햇빛 잘 드는 사찰 앞마당에 서면
큰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바람소리를 헤치고 들리는 듯하다.
- 연암산과 내포문화숲길에 서있는 경허선사 오도송 -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六月 巖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 인법당과 7층 석탑 -
- 인법당과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비 -
- 인법당 옆의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비_2012년에 세움 -
- 경허선사와 천장사 사연 -
- 경허선사 열반송 -
- 인법당의 원구문과 월면당 -
- '원구문(圓求門) 현판_원성문(圓成門) 으로도 읽는다' _경허선사의 친필 -
1평 밖에 안되는 쪽방에 들어 長坐不臥를 하는 수행에
속인들이 보기에 그건 전쟁이거나 지옥일 텐데 경허 선사는 이를 태연히 치러냈다.
대소변을 보는 일 외엔 일체의 움직임이 없어 머리 위엔 하얀 이가 싸락눈처럼 소복이 쌓였단다.
이렇게 1년 여를 바위덩이로 뭉쳐 있다가 드디어 한 소식을 얻고서 방을 뛰쳐나오게 된다.
1881년 6월의 일이었으며, 그게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무비공심(無鼻孔心) : 나고 죽음이 없는 마음" 이었다
- 경허선사를 주제로 한 최인호 소설 안내판 -
- 손바닥만한 쪽방에 들어 송곳으로 睡魔를 쫓으며 長坐不臥를 했던 방에 걸린 경허선사 영정 -
- 만공선사의 방 -
- 월면당 방에 걸린 만공선사 영정 -
- 만공선사가 경허선사를 시봉하는 월면당과 三月선사 안내판 -
경허 선사의 제자 중에 '삼월(三月)'로 불리는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
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선사가 있으며..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 천장사 법당에 그려진 경허와 그 제자인 만공, 수월, 혜월스님 -
- 경허선사 영정 -
[경허 선사와 녹두장군과의 혼맥]
경허선사(鏡虛禪師)의 여동생과 동학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이 결혼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따라서 전봉준 장군은 경허선사의 매제(妹弟)이다.
송희옥을 비롯하여 여산 송씨 일가들이 동학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도
이런 친연관계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의 4대 강령 중 첫째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며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라(不殺人不殺物)는
경허 선사의 사상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송씨 부인은 1876년 장녀 전옥련을 낳고 이듬해 차녀 전성녀를 낳고 바로 사망하였다.
전봉준은 어린 딸들을 양육하기 위해 젖이 잘 나오는 청상과부 이순영을 젖어미로 집안에 들였다.
남평 이씨(南平 李氏) 이문기의 딸 이순영은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19세에 전봉준 집안에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후처가 됐다.
두 딸을 친딸처럼 키우다 1879년에 장남 전용규 낳고 1882년 차남 전용현을 낳았다.
장남 전용규가 1894년 16살에 폐병이 걸리자 차남 전용현은 전염을 막고자
시집간 큰 누나 전옥련 집으로 보내졌다.
1895년 아버지가 처형되자 누나 전옥례는 전용현의 이름을 전의천으로 바꿔주었다.
모친 이순영은 장남 전용규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토굴 속에서 생활했다.
경허선사는 전봉준 장군이 교수형을 당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아마도 목멱산(남산)에 가매장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1919년 전봉준의 차남 전용현이 정읍 비봉산자락으로 이장하였다.
경허선사는 멸문지화의 위기에 놓인 전봉준 가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때 경허선사가 전봉준의 둘째 딸 전성녀를 김옥련으로 개명하여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도피시켰다.
금당사 안에서도 사방을 조망하기 쉽고 유사시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기 좋은 고금당(古金堂)으로 데려갔다.
고금당은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수행했던 곳이기도 했다.
평소 인연이 있던 독립지사이며 금당사 주지였던 김대완 스님에게 조카딸을 맡긴 것이다.
나중에 그녀의 모친 이순영도 함께 살게 되었다.
경허선사는 이 시기 서해 비안도에 잠시 은거하기도 하고
호서지방 수덕사, 개심사, 문수사, 마곡사, 태고사, 갑사, 법주사와
영호남의 범어사, 해인사, 화엄사, 송광사, 천은사, 백장암, 태안사 등 수많은 사찰에 선방(禪房)을 차리고
수행을 지도했으며 혜월, 수월, 만공, 한암 등 훌륭한 제자들을 교육하여
단절된 선맥(禪脈)을 잇는 등 정신없이 바쁜 때였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고금당을 찾아 조카딸의 안위를 살폈다.
입산 5년만인 1899년 전성녀의 나이 23살에 인근 진안 부귀에 사는 이영찬에게 시집을 보냈다.
전성녀는 시집을 가서도 모친 이순영을 모셨다.
그러나 폐병 때문에 4년 만인 1903년 44세의 나이로
전봉준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모친인 이순영은 사망하였다.
경허선사는 전봉준의 장남이 폐병으로 일찍 죽자
전용현을 동학교도들이 많은 전남 무안의 배씨 집성촌으로 보내 끝까지 혈족의 안전을 도모했다.
전용현은 살아남아 결혼하여 결국 대를 이어 장군의 혈통을 이었다.
이후 경허선사는 3족(三族: 親族/妻族/外族)을 멸하는 역적의 신분이라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승복을 벗고 박난주(朴蘭州)로 개명하여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들어갔다.
산골마을의 훈장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독립지사 김탁 등을 길러내다가 1912년 4월 25일에 입적하였다.
세수(世壽) 64세, 법랍(法臘) 56세다.
1년 4개월 늦게 열반 소식을 들은 제자 만공(滿空)과 혜월(慧月) 스님이 갑산에 달려가
법구(法軀)를 모셔와 예산 덕숭산(德崇山) 수덕사에 다비(茶毘)하여 모셨다.
- 수월선사 부엌 -
- 수월선사의 부엌과 放光 안내판 -
- 수월선사 영정 -
- 경허선사의 오도송이 주련으로 걸려있다 -
천장사 인법당 주련(柱聯) 9개 중의 하나인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무슨 뜻인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몸의 육근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온다.’ 는 말로
'수월' 선사의 수행과 放光을 의미한다.
수월의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수월당 음관선사는 1855년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전 씨인데 온전 전(全)을 사용했는지 밭 전(田)자 전 씨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실부모한 다음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자랐다는 그의 성품은 단순하고 맑았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자기 몸처럼 여겨 비록 모기나 빈대 같은 벌레라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죽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수월이 동진출가했다는 설도 있으나 발심하여 불문에 귀의할 생각을 한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서른이 다 되었을 무렵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출가 본사로 천장암을 택한 것은 단지
그 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는
지리적 접근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천장암에서 늦깎이로 행자생활을 시작했었다.
나무를 해오는 것은 물론 밥까지 지어야 하는 행자생활은
머슴살이 보다 나을 것이 없는 고단한 것이었지만
그는 일체 불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나갔다.
당시 천장암의 주지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스님이었다.
따라서 수월에게 처음으로 머리를 깎아 준 은사는 태허스님이다.
나중에 경허선사가 이곳에서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 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수월이 경허의 법통을 잇게 되는 인연의 고리로 작용한 것이었다.
수월의 뒤를 이어 훗날 천진도인(天眞道人)으로 이름을 날리는 혜월(慧月)이 찾아와서
밭일을 하며 수심결(修心訣)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월, 혜월과 더불어 경허선사의 세 달로 꼽히는 월면당 만공스님은 14세 소년의 몸으로,
세 달 중 가장 늦게 천장암 식구가 된 것이었다.
1887년 겨울 어느 날, 수월이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게 되었다.
급히 수월을 밀치자 그 직후 공이는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이때 수월의 순전한 수행력을 목격한 태허스님은
바로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리는 수계식을 거행한 다음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수월은 스승 경허의 가르침을 받으며 종일 일하면서 죽기 살기로 천수대비주를 외웠다.
이때 경허선사가 제자인 음관스님이 자나 깨나 큰 소리로 천수경을 외더니
마침내 깨우쳐 부처를 이룬 것으로 여겨 매우 기뻐한 다음
천수경에 나오는 수월관음의 이름을 따 수월이란 법호를 내려준다.
밝은 달이 바다 위를 환하게 비추었을 때 한 연꽃이 바다 위에 떠 있고
그 연꽃 위에 화신하여 나타나서 계신 관세음보살의 32가지 모습 중 하나가 수월관음이다.
수월관음이 되어 방광을 한 것을 표현한 문구가 주련의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다.
몸의 육근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천장암이 수월선사가 득도한 관음도량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비밀의 열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림을 위해 천장암을 떠난 수월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지리산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 →
충남 청양군 칠갑산 장곡사(長谷寺) →오대산 상원사를 거쳐→ 묘향산 중비로암에 들어가 3년 동안 머물렀다.
이 무렵 스승인 경허선사가 행각 중 자쥐를 감추었다는 소식을 들은 수월스님은
1910년경 강계군에 있는 자북사(子北寺)에 머물며 스승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마침내 수월은 갑산군 도하리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감춘 채
훈장 노릇을 하던 스승 경허를 찾게 된다.
그러나 경허는 방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닫은 다음 말했다.
“나는 스님이 찾는 사람이 아니오”
매정하게 말하며 끝내 만나주지 않는 스승에게, 수월은
짚신 몇 켤레를 정성껏 삼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스승의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수월→묵언→도천으로 이어지는 법맥에서 수월하 손증손상좌가 되는 명선스님에 따르면
“수월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스님을 찾아와서
먼발치서 지켜보다가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그 사실을 당시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정진하던 만공에게 알려준 뒤
두만강을 넘어 간도(間島)로 들어갔다.”고 한다.
수월이 은사 주위를 맴돈 기간은 대략 2년간이며,
이때 갑산에서 멀지않은 회령군 팔을면 백천사, 경원군 만월산 월명사,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 등지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간도으로 간 수월은 백두산 기슭에 있는 도문시 회막동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의 실력을 발휘하여 소먹이 일꾼 노릇을 했다.
그 일을 해서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짬짬이 틈을 내어 큰 솥에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고는 하였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며 보살행을 묵묵히 실천한 것이었다.
명선스님의 증언이다.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간 곳이 간도였어요.
고갯마루에서 상처입고 지친 그들을 기다렸다가
밥 한술을 먹이고, 짚신을 주워 보내는 식으로 생의 마지막 수년을 보내신 것입니다.”
생전에 한 번도 대우를 받으려하기는 커녕 오직 남의 손발 같은 머슴으로 살았던 수월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이런 식으로 조용히 헌신을 한 것이었다.
수월은 1915년 회막동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있는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그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채
한 젊은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을 했다.
그러다가 1921년 봄 수월은 왕청현 나자구(羅在溝)에 들어가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날이 밝으면 종일 들이나 산에 나가 늘 말없이 일했고,
탁발을 자주 다녔으며, 생식을 했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산짐승이나 날짐승과 어울려 놀거나, 때때로 호랑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
이때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과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 등이 스승을 찾아와
한철을 지내면서 그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었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 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에게만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을, 그들이 나중에 증언하였다.
1928년 하안거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7월 16일 수월은 절 뒤편 송림산에 올라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잘 접어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세상을 떠났다.
세수 74세, 법랍 45세였다.
그가 원적에 든 후 7일 동안 밤마다 송림산에 불기둥이 치솟는 대방광이 일어났고,
산짐승과 날짐승이 떼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방시 노인은 "수월스님께서 열반에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다비하고는 다음날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수북이 쌓인 하얀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해
걸어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는 증언도 했었단다.
은사인 진성대종사를 모시고 현지를 다녀온 설정스님 이외에도,
김진태 전 청주지검장이 젊은 시절 지리산의 한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수월의 얘기를 전해 듣고 발심해, 훗날 간도 현장을 답사한 뒤
수월에 대한 책 『물속을 걸어가는 달』을 펴낸 바 있고,
명선스님이 『수월평전』을 출간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런 책들을 통해 어느 정도 수월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 주며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은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 땅의 많은 민초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던 자비의 관세음보살이며,
이름 그대로 물속의 달처럼 흔적 없이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성자였다.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으며,
글과는 담을 쌓았던 까막눈 선사였지만,
일상의 노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어난 수행력과 함께 때때로
내툰 방광불사(放光佛事)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불교사의 전설적인 선지식이다.
- 종무소 앞의 안내판 -
- 종무소 편액엔 '연암산 천장암'이다 -
- 염궁선원(念窮禪院)_ 수행하는 스님들이 묵고 공부하는 수행처 -
2016년 12월 8일에 화목보일러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된 것임
- ‘염궁문(念弓門)’ 편액 -
집자(集字)해온 글씨가 아니라 경허스님이 종이에 직접 쓴 글씨.
- 천장사에서 바라본 삼준산(490m) -
- 천장사에서 수행한 스님들을 를 주제로 한 '길없는 길' 표지석 -
2018년에 독고개에서 천장암에 이르는 길에
'경허만공 오도의 길', 최인호의 구도소설 <길 없는 길>을 기리는 표지석을 세웠다.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최인호(1945-2013)는
1990년대 초 불가의 가르침에 감화, 구한말 선승들의 흔적을 찾아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녔다.
그가 발견한 첫 번째 선승은 근대 불교 선풍을 일으킨 경허 선사(1849∼1912)다.
1993년, 최인호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 '길 없는 길'을 펴냈다.
매스컴과 독자들에게 호평받으며 지난 10년 간 150만부 이상이 팔렸다.
'단순한 구도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은 최인호 인간주의 문학의 백미'라는 평도 뒤따랐다.
- 故 최인호 작가의 소설 '할' -
경허 선사 열반 100주년이던 2012년, 최인호는 경허 선사와 그의 세 수법제자를 다시 떠올렸다.
2013년 석가탄신일에 맞춰 나온 최인호의 '할'은 '길 없는 길' 중
경허 선사와 그의 수법제자 수월·혜월·만공의 이야기를 발췌해 재구성한 장편소설이다.
경허의 기행으로 시작된다.
겨울날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던 여인 한 명을 자신이 머물던 해인사로 데리고 온 경허는
여인과 조실에 틀어박힌 채 며칠 동안 두문불출한다.
한센병이 들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여인을 스승 경허가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 경허는 저 썩어가는 육체를 지닌 여인을 열흘 동안이나 곁에 두고 살을 맞대었다.
너는 그리할 수 있겠는가.
스승 경허는 제정신이 아닌 미친 저 여인을 열흘 동안 밥을 먹여주고 함께 다정히 말을 나누었다.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20쪽)
그의 수법제자인 수월·혜월·만공이 보인 선화와 그들이 남긴 법훈도 하나하나 좇았다.
세속뿐 아니라 불가에조차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사라진 수월,
이 세상에 거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천진불 혜월,
일제에 의해 국운이 스러져 가고 불심이 퇴색해 가는 현실 앞에서 대중을 깨우친 만공을 그렸다.
책의 제목 '할'은 사찰과 선원에서 학인을 꾸짖거나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나타내 보일 때 내뱉는 소리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최인호의 '할'은 법기와 수련이 높은 '깨달은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기운 넘치는 '할'을 날린다.
부록으로 실린 경허·수월·혜월·만공의 사진들도 이해를 돕는다.
최인호는 여는 글을 통해 "'길 없는 길'을 통해 경허를 만나게 됐던 인연으로
열반 100주년을 맞아 경허의 법제자들을 다시 한 번 살려 봄으로써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아랫물이 맑으면 윗물도 맑다'는 진리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가만히 열어보는 심정으로 밝혀보았다.
하오니 조용히 들어와 제자들에게 때리고 '할'하는 경허의 여전한 고함 소리를 엿들으셨으면 한다"고 바랐다.
- 수월선사 기념비 -
- 혜월선사 토굴 안내판 -
- 표지석 -
- 혜월선사 토굴 -
- 혜월선사 영정 -
토굴서 앉은 채 얼어죽을 뻔했던 선사
혜월(慧月)선사는 경허선사의 수제자 가운데 한분이었다.
스님은 186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는데 속성은 신(申)씨였다.
11살 때 예산 정혜사에서 득도하였고 1884년 천장암에서
경허선사로부터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을 배우면서부터
글공부를 시작, 처절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경허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그대는 남방에 인연이 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스승의 분부에 따라
선산의 도리사, 팔공산의 파계사, 울산의 마타암, 통도사의 극락암,
천성산 내원사, 부산 선암사에서 선풍을 크게 드날리고
1937년 부산 금정산 안양암에서 세수 77,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까막눈의 일자무식으로 출가
혜월스님은 어려서 글공부를 해본 일이 없는 까막눈이었다.
경허선사를 천장암에서 모시고 있던 혜월은 어느 날 경허선사께 글공부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했다.
“뒤늦게 글공부는 무슨 글공부를 하겠다고 그러는가?”
“글 공부 하는데 이르고 뒤늦고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배우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배워 보게나.”
혜월은 그날부터 경허선사로부터 《수심결》을 배우며 마음 닦는 법과 한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익히게 되었다.
그후 혜월은 불교의 진리가 글자 속에 있지 아니함을 깨닫고
바위 밑에 뚫린 토굴속에 들어가 오직 화두참구에 매달렸다.
때는 엄동설한, 바위굴 속의 돌바닥위에 정좌하고 며칠동안 화두만 들고 있었으니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갔지만 혜월은 몸이 얼어 굳어 가는 것도 잊은 채 참선삼매에 빠져 있었다.
혜월이 바위 밑 토굴에 들어간지 7일째 되던날, 경허선사와 만공이
토굴속으로 들아가보니 혜월의 몸은 이미 얼어서 굳어있었다.
“이것 보게 만공, 혜월의 몸이 얼어 앉은채로 굳어버렸어.”
“스님, 날씨가 너무 추워 얼어죽었나 봅니다.”
“아니야. 눈빛이 아직 살아 있으니 죽지는 않았어. 어서 가서 따뜻한 물이나 갖고 오게나.”
만공이 천장암으로 급히 내려가 더운물을 가져다가 가까스로 혜월을 구했다.
혜월은 짚신 삼는 솜씨가 뛰어나서 남이 한 켤레 삼을 동안에
세 켤레를 너끈히 삼아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짚신을 삼아서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아무나 필요한 사람이 신도록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았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채 토굴속에서 참선삼매에 빠져있던 어느 날,
스승 경허선사가 짚단을 토굴 안으로 던져 넣으며 한마디 하셨다.
“내일은 먼길을 떠나야겠으니 짚신이나 한 켤레 삼아 주게나.”
혜월은 스승의 분부를 받자 곧바로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짚신을 다 삼은 후 마지막 손질을 하느라고 나무망치로 짚신을 탁탁 두드렸다.
그 순간, 나무망치 소리에 천하의 문이 활짝 열렸다.
드디어 깨달음의 한순간이 혜월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혜월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경허선사께 달려갔다.
“그대는 대체 참선은 무엇하러 하는가?”
“못에는 물고기가 뛰고 있습니다.”
“허면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산꼭대기에 바람이 지나 갑니다.”
짚신 삼다 한 소식 얻어
경허선사는 그 자리에서 혜월이 한 소식 얻었음을 인가하시고 전법 게송을 내린 뒤
“그대는 남쪽에 인연이 있으니 이 길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제자가 마지막으로 삼아준 짚신을 신고 천장암을 떠났고, 혜월 또한 그 길로 남쪽으로 향했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혜월이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혜월스님이 양산의 내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스님이 출타하려고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계곡 냇물에서
한무리의 아이들이 물고기를 신나게 잡고 있었다.
스님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아이들이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는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들이 몇 마리 펄떡거리고 있었다.
“이 물고기들 모두 너희들이 잡은 것이냐?”
“예 스님. 우리들이 잡았심니더.”
“그 그럼 말이다. 이 물고기 모두다 나한테 팔아라.”
“예? 아니 물고기를 팔라니요?”
“내가 값을 후하게 쳐줄 것이니, 이 물고기들 다 나한테 팔란 말이다.”
“값을 후하게 쳐주신다구요?”
“그래 그래. 그 돈으로 너희들은 사탕이나 사먹으면 그게 더 좋지 않겠느냐?”
혜월스님은 기어이 아이들을 달래 후한 값을 쳐주고 바구니에 담겨있던 물고기를 모두 다 샀다.
그런데 물고기 바구니를 건네 받은 혜월스님은 그 자리에서 물고기들을 냇물에 풀어주었다.
바구니에 갇혀있던 물고기들은 그야말로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흐르는 물결을 따라 뿔뿔이 흩어져 떠내려갔다.
아이들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물고기를 잡으러 쫓아 내려가더니
여기 저기서 “잡았다. 잡았다.”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물고기 나에게 팔아라”
결국 혜월스님이 돈을 주고 사서 냇물에 풀어주었던 물고기들은 대부분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혜월스님은 이번에도 또 후한 값을 쳐주고 그 물고기들을 모두 다 사서 또 다시 냇물에 풀어 주었다.
그러나 물고기는 또 금방 아이들 손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혜월스님은 이번에도 또 돈을 주고 물고기를 사서 냇물에 풀어주었다.
세상에 참 별 이상스러운 스님도 다 있다는 듯, 아이들이 스님을 이상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스님, 왜 물고기를 돈주고 사서 자꾸 냇물에 풀어 주시는 겁니까?”
“왜는 인석들아, 물고기들이 불쌍해서 그런다.”
“불쌍해서요?”
“그래. 헌데 이번에는 또 안잡을거냐?”
아이들은 그제서야 멋쩍은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자 그만 잡을랍니더.”
그리고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기 잡던 도구들을 챙겨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혜월스님은 그제서야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자무식으로 출가득도 했던 스님, 혜월스님은 바로 그런 스님이셨다.
- 수월선사와 물레방아터 -
- 경허선사의 오도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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