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아이의 동짓날 추억
김미옥
불면증이 도진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잠이 오지 않아 유리창에 얼비치는 그림자만 쫓아다니다 늦잠에 빠졌다.
창문이 환하게 밝아오고 하루를 시작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귓전에 부딪히고 나서야 실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휴대폰에 밤사이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주방으로 달려가 포트에 물을 끓인다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보골보골 물이 끓는다.
오늘은 무슨 변덕인지 맨날 마시던 드립 커피를 마다하고 믹스커피가 당긴다.
싱크대를 뒤져 믹스커피를 찻잔에 쏟아 붓고 휘익 저어 얼른 한 모금 삼킨다.
아~~이 향기로움, 달보드레함,
주름진 입가의 근육을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 한 잔의 커피에 신경세포는 직립으로 일어나 통통 튄다.
빈 찻잔을 내려놓고 여느 때처럼 모바일을 통해 오늘의 주요 뉴스를 확인한다.
정치, 경제, 연예 등등, 밤새 쌓인 새로운 소식과 사건 사고를 살핀 후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요리 코너에 눈길을 돌린다.
먹음직스러운 각종 요리를 훑어보는 눈에 식전임에도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이 눈에 띈다.
새알심이 동동 떠있는 팥죽이다.
돋보기를 고쳐 쓰고 요리 기사를 꼼꼼하게 살핀다.
오늘이 동지란다.
주요 페이지가 아니라고 그냥 지나쳤으면 절기도 잊고 지낼 뻔했다.
문명의 혜택으로 힘들이지 않고 나라 안 밖의 소식과 지구촌 소식을 듣고,
뉘 집 식단까지 훔쳐볼 수 있는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동짓날이라는 것도 알았고 팥죽이라면 자다가 흔들어 깨워도 마다치 않고 그릇을 비워내는 터라 오늘 같은 날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얼른 동지팥죽을 쑤어야겠다.
예정에 없는 일이라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전에 사용하고 남은 팥이 있어 손쉽게 씻어 삶아놓고 김치 담글 때 쓰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딸과 마주앉아 새알심을 빚는다.
한참 새알심을 빚어내는 손가락 사이로 해묵은 기억 하나 톡, 떨어진다.
여덟 살 아이의 감추고 싶었던 동짓날 추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던 일이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동짓날 저녁이었지 싶다.
온 식구가 모여앉아 새알심을 빚었고 아이의 엄마는 팥죽을 끓이셨다.
워낙 입이 짧았던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돌밥그릇에 밥을 먹고 자랐다.
이런 아이의 식상을 잘 아는 엄마는 그날도 새알심 대 여섯 개 띄운 팥죽 그릇을 아이 앞에 내미셨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많다 적다 생떼를 부렸을 아이가 웬일로 양이 너무 적다 싶었는지,
먹어보지도 않고 더 달라 요구했다
피식 웃으시던 아이의 엄마는 "새알심은 나이대로 먹는 거란다" 하시더니 금방 엄마의 죽 그릇에서 새알심 몇 개를
더 건져 아이에게 덜어주셨다.
아이는 평소와 달리 꾸역꾸역 참 맛있게도 먹었다.
그렇게 맛나게 먹고도 서운했는지 아이는 엄마의 죽 그릇에서 새알심 두 개를 더 받아먹었다
아이의 행동에 놀란 부모는 서로 번갈아가며 욕심 없는 아이가 별일이라는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그렇게 먹었던 동지팥죽의 맛은 아이가 그때까지 먹어본 음식 중 최고의 맛으로 기억되었다.
이렇게 맛있게 팥죽을 먹고 밤이 깊어 얌전히 잠자리에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덟 살 아이는 이불 속에 누워서도 팥죽 생각이 났었던 모양이다.
아침이 되면 남아있던 죽이 하나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맴돌아 아이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이는 캄캄한 부엌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불을 밝히고 아무도 몰래 큰 대접에 남은 동지팥죽을 떠 담기 시작했다.
아침에 혼자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몰래 담은 죽 그릇을 놓아둘 곳을 찾던 아이는 마땅한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고 와 이불 밑에 넣어놓고 꼼지락거리다 그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아이는 뒤척이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그런데 실눈을 부비며 일어난 아이의 눈에 빳빳하게 풀 먹인 옥양목 이불 홑청에 희끗희끗 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물체가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뿐 아니다. 팔과 머리에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아이의 여동생이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도 보았다.
아니는 다급하게 엄마! 피~~피!를 외쳤다.
아이의 목소리에 안방에서 주무시던 엄마가 건넌방으로 쿵쾅쿵쾅 뛰어나오시고 순식간에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다가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라는 엄마의 화난 목소리에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아이는 맨발로 대문을 박차고 도망을 갔다
어둑새벽 오돌오돌 떨면서 한 시간을 걸어 찾아간 외할머니 댁에서조차 놀림을 받고
해마다 찾아오는 동짓날만 되면 부모님 앞에서 얼굴을 붉혀야 했던 여덟 살 아이는 여동생의 머리에 묻었던 붉은 피가
팥죽이었다는 것을 다음날에야 알았다.
아둔한 건 아니었지만, 그러한 이유는 순전히 삼십 촉 백열등의 희미한 불빛 때문이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요즘처럼 밝게 빛나는 형광등을 켜고 살았더라면 피가 묻은 건지 팥죽인지 금방 알았을 테고 기겁을 하며 야단을 떨지는 않았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늘 남에게 퍼주기 좋아한다고 맨날 지청구만 들었던 아이가 그날은 왜 그리 팥죽 한 그릇에 욕심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그날이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아이는 어느새 오십 중반을 넘긴 중년 여인이 되어 팥죽을 앞에 놓고 나이를 세탁해서라도 새알심을 덜어내고 싶어 안달한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다지 두렵거나 서러운 일만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곰삭은 김치처럼 감칠맛이 나는 삶은 이해와 용서를 알고 행동에도 여유가 생긴다.
그럼에도 오늘처럼 동지팥죽 앞에선 나이를 계산하고 싶지 않다.
쫄깃쫄깃한 새알심이 욕심나서 나이를 속여 가며 두어 개 더 받아먹었던 철없던 시절만 기억하고 싶은데,
돌아보면 웃음뿐인 여덟 살 아이의 동짓날 추억은 이렇게 또 한 살을 더 먹는다.
“야야~~미옥이 나이 몇 살이냐 새알심 잘 챙겨라” 하시던 할아버지의 말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첫댓글 ㅎㅎ 새알 여듧개 먹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네요.
아릿한 추억의 아랫목으로
들어가 손을 녹입니다.
건안건필하시고
메리크리스마스!!
늘 이맘때만 되면 떠오르는 추억에
나이 한 살 더 먹네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날 보내십시오^^*
시인님 덕분에 따스한 밤입니다
저는 나이가 먹고싶어 안달이엇지요
동생것 까지 뺐어먹으려다 혼이나기도 하구요^^
그나이엔 얼마나 민망하였을까요
우리집 같앗으면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전기세 나간다고 이른 저녁에 밥을 먹었으니까요^^
행복하게 머물다 갑니다 건안하시고 향기로운 시간 되세요
유년엔 그랬었지요
얼른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요.
남들보다 문화혜택을 좀 더 일찍 받으며 살아오긴 했지만
정말 민망하고 부끄러웠답니다.
팥죽은 드셨나요?
전 팥 알르지로 못먹어요
어릴적 팜만 먹음 이상하더만 그땐 왜그랬는지도 모르고 먹었지요
이젠 먹지않아요 대신에 지인들이 보내주신 팥죽 그릇을 보며 눈으만 먹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요~
ㅋ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나요?
여덟살이 이제 여덟살 손주를 보고......
행복한 날들 되세요.^^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그 아이는 손녀를 보고
또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이제 방학인가요?
허둥지둥 지낸 한 주
동지팥죽도 못 얻어먹고 보내버린 동지였네요
시인님...동지팥죽 드셨지요?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임진년 환한 웃음으로 배웅하는 날들이기를
기원합니다.
네~~
새알심 빚어 타국에서 먹는 동지팥죽 맛은
여느 때와 달랐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웃음 잃지 않는
좋은 날들만 되시길 빕니다
밤이 가장 긴 동짓날
어머니는 팥죽을 쑤시어
문지방이며 장광이며 곳곳에 뿌려 잡귀신 물렀거라 불호령으로 호통을 치시고
새알심을 수줍게 떠서 먹던 동짓날 세시기가 생각나네요~~
문밖에 오밤중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눈위에 내려앉던 달빛은 어찌도 그렇게 청승맞던지...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서 그날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갑니다
정말 그때는 그랬었지요.
잡귀를 몰아낸다고
엄마가 집안 구석구석에 팥물을 뿌렸던 일이 기억나네요.
정말 눈밭에 달빛은 왜 그리도 푸르고 시리게 내렸는지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한국엔 강추위가 계속된다지요?
건강 유의하시고 고운 날들 보내십시오^^*
먼 기억속에 동지 풍경이 미소짓게 합니다.
어머니께서 옹가지에 팥죽을 가득 담으시면
그릇에서 모락모락구수한 김이 올라가고
가마솥에서 팥죽 누룽지를 동생들과 서로 먹으려고 하던 유년의 동짓날이 그립네요.
선생님의 사연에서 정겨운 동지를 떠올리게 됬습니다.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나이 들어서도 부끄럽게 떠오릅니다.
팥죽누룽지??그런 누룽지도 있었나요?
전 팥죽 누룽지를 먹어 본 기억은 없어서
새로운 사실에 구미가 당깁니다.
한 번 먹어 보고 싶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김연덕 시인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옛 맛이 그리웠고
워낙 좋아하는 음식이라 팥죽을 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