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형제회 정신으로 되돌아가기
우리는 성서형제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지에 앞서서 성서형제회를
공동체정신으로 모여서 나눔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서형제회의 여정을 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초대교회의 공동체처럼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을 하지 않기 떄문입니다
성서형제회의 헌장은 복음연구와 보급 그리고 아나윔정신으로 살기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절대로 방법론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떄문이고, 이런 이해는 우리가 이웃을
통해 이들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 지금은 어느것으로 예비자교리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거의 20여년가까이에 서울교구에서 새로운 예비자교리서를 발간해서
저는 교구에서 하는 봉사자교육을 받은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2년전인가 대구교구 평리동성당에서
예비자교리과정을 다시 듣게 되었을떄에 그때에 이교제를
하는 것을 보고 꾸준히 참석하였지요 그교리책을 보충하기 위해서 짧은
동영상교육도 도움이 되었지요 이과정은 제가 보기에는 예비자교육뿐만
아니라 신자재교육용으로 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강좌는 전문교육자신 사제나 수도자가 해도 좋지만
이를 매주 소모임을 통해서 읽어보고 느끼는 것을 나누워보는것도 좋을 것입니다
다소 정리흫 위해서라면 매학기 마다 사제나 수도자가 정리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속에서 이들을 주제로 하는 소모임리더교육도
첨가되었으면 하는데요 이를 통해서 구역.반공동체의 봉사자를 양성하는
계기가 될것입니다
우리는 구역.반모임이나 레지오팀모임이나 간혹 받는 꾸료실요교육이나
ME주말과정은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가정에서 붙어 우리가 사느 지역의나 세상에 나가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사랑의 성찬- 잡지 ‘사목’에서
주님의 최후 만찬을 기억(anamnesis)하여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미”(사도 2,46-47)하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소박한 성찬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이르러
장엄한 공회당(Basilica) 전례로 바뀌었다.
중세에 접어들어 프랑크 제국의 통합을 위하여 전례 통일을 주도한
칼 대제의 영향으로 전례는 더욱 화려하고 엄숙하게 변하였고,
분리된 공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거행되는 ‘거룩한 예식’에서
신자들은 점점 소외되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신앙의 신비에
마치 국외자나 말 없는 구경꾼처럼 끼여 있지 않도록”(전례 헌장, 48항)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participatio actuosa)’를 강조하였고,
미사란 사제가 자신의 ‘거룩한 힘(potestas sacra)’으로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바쳐 올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더불어’ 거행하는
감사(eucharistia)와 찬미(eulogia)의 잔치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위해서 몸소 마련해 주시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며 사랑의 끈”
(전례 헌장, 47항)임을 일깨워 주었다.
오늘도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어느 이층 방에서 애틋한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바로 그 빵을 받아 먹고 그 술을 받아 마신다.
우리가 먹는 한 조각의 빵은 세상의 불의와 거짓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를 증언하다
처절하게 부서지고 찢겨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몸이요, 우리가 마시는
한 방울의 술은 일생을 남을 위해 살다 마침내 목숨마저 내놓으신 예수님의
심장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사랑의 피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빵과 술 안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
미사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온 인류를 향하여 지니고 계신
그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살아 숨 쉬는 자리이다. 못내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내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이 살아 있는 곳이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건네주었던(tradere)’ 배신자 유다에게도 당신의 몸과 피를
‘건네주시던(tradere)’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가
‘기억(anamnesis)’되는 곳이며, 십자가에 고통스레 매달린 순간에도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용서가 선포되는 자리이고, 서로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남을 위하여 피 흘리고 먹히는 성찬의 삶으로 변화되는 자리이다.
주일마다 함께 모여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아름답고 오랜 우리 교회의
전통이지만(유스티노, 『첫째 호교서』Apologia prima 67장 참조 - 150~160년 무렵),
주일 의무를 지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찬의 식탁에서
소외되는 것은 주님의 성찬이 지닌 참뜻에 어긋난다. 성찬은 그야말로 사랑과
자비의 성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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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사 첫머리에,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루카 18,13)라고
기도하던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참회하고, 한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어서 우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당신 자비와 용서를 신뢰하는 교회의 믿음을 굽어보십사 기도한 후,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 거듭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면서 비록 부당하기 짝이 없는
우리이지만, 주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죄와 허물에 병든 우리 영혼이 당장
낫게 되리라는 이방인의 믿음을 고백한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는 당신 자녀를 성찬의
식탁에서 내치실까? 성찬 식탁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당신 자신을 식탁의 선물로 내어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그 식탁에 모여드는 사람이 죄인이라 하여 가로막는 일을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실까?
파견된 사람은 파견하신 분이 지니신 사랑의 마음과 구원의 의지를 충실히
드러내야 한다. 사제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동하고,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할 때, 신자들은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종(minister)’의 ‘직무(ministerium)’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제들은 미사 전례 안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언제나 예수님께 내어
드릴 줄 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부족할지라도 날마다 당신 제단에
나아와 “봉사하게(ministrare)” 해 주심에 감사한다. 교부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에서 보듯, 성사의 주인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시고, 모든 전례와
성사는 ‘하느님의 일(opus Dei)’이며 ‘그리스도의 행위(actus Christi)’이기에,
성직자들은 언제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전례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거행하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삶도 성찬적이고
전례적이다. 본당 공동체의 전례 봉사자들이 사제와 더불어 각자의 역할에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정성스레 준비하여 드리는 미사를 통하여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젖어들고 공동체적 친교에 맛들이게 된다. 미사 전례야말로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주님 몸소 가르치고 양육하시는,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신앙 교육의
자리이다. 이번 『사목』 3월 호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찬을 통하여
나눔과 섬김,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를 엮어 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성찰하고자 한다.
글·최원오 신부(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