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話 |
"금란(金襴)"에 대해 『조계촉설(曹溪觸說)』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법의(法衣)를 전하는 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란보의(金襴補衣)이니, 부처님과 부처님이 전하는 것으로서
가섭이 가지고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가서
자씨(慈氏)의 하생(下生)을 기다리는 것이요,
둘째는 금란보의(金襴補衣)이니, 조사와 조사가 전하는 것으로서
남천축(南天竺)의 득승왕궁(得勝王宮)에 보존된 거이며,
셋째는 굴순보의(屈眴補衣)이니, 달마가 올 때 가지고 와서
조계(曹溪)에 보존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이어받고[佛佛相承]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한다[祖祖相傳]는 말이 있게 되었다."
『전등록(傳燈錄)』에 의하면 제24조인 사자(師子) 존자께서
제25조 바사사다(波舍斯多)에게 말하기를
"나의 스승께서 재난에 걸릴 날이 멀지 않다고
은밀히 수기하시고 게송을 설하여 법을 전하신 뒤
승가리(僧迦利)를 가만히 나에게 전하셨다"고 하였을 뿐,
사자 존자 이전에는 법의를 전한 자취가 없다.
바사사다에 이르러, 그가 제26조 불여밀다(不如蜜多)에게 이르기를
"이 옷은 법난(法難)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빌어 증명을 삼기 위한 것인데,
그대의 몸에는 법난이 없으니 어찌 옷을 의지하겠는가?
덕화(德化)가 시방에 미쳐 사람들이 저절로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즉 『조계촉설』에서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따라서 옛 사람이 이르기를
"『조계촉설』은 딴 말이 없을 수 없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이 화두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하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전한다는 말이 도리에 아무 상관이 없거늘
어찌 굳이 따지겠는가?
그러나 구태여 말한다면 가섭이 가지고 계족산으로 들어간 것이
역시 부처와 부처가 서로 전하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하는 도리가 된다.
아난이 그렇게 물은 데 대해서는 『전등록』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세존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청정한 법안(法眼)과 열반의 묘한 마음과
실상(實相)이며 무상(無相)인 미묘한 법을 네에게 전하노니
너는 잘 지니도록 하라' 하시고
또 아난에게 분부하시되
'전하고 교화하는 일을 도와 끊임이 없게 하라' 하셨다.
그러시면서 게송을 말씀하시되
'법이란 본래의 법은 법이 없으며/
법이 없단 그 법도 법이다/
이제 법 없음을 전해 주노니/ 법과 법이 그 언제 법이었으랴' 하셨다.
이렇게 게송을 설하시고는 다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금루승가리의(金縷僧伽梨衣)를 네에게 전해 주노니,
보처(補處)에게 주되 자씨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기까지
손상시키지 말지니라' 하셨다.
그 때 부처님의 분부를 함께 들었으므로 금란가사를 전하는 것은
내가 직접 보았거니와 이 밖에 달리 전한 것은 어떤 법인가 한 것이니,
대체로 전하고 교화하는 일을 도우라는 분부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난이여, 하고 부르니 아난이 대답하였다[召阿難阿難應諾]" 함은
옛 성인이 법을 보이실 때는 방편이 비록 많으나
부르고 대답하는 일이 가장 친근[親切]했으니
부르는 것이 분명하고 대꾸하는 것이 참된 것이다.
"문 앞에 서 있는 찰간을 쓰러뜨려라[倒却門前刹竿著]" 한 것에서,
예전에는 찰(刹)이라 했는데 갖추어 말하면 찰슬치(刹瑟致)라 하며,
이곳 말로 번역하면 간(竿 : 장대)이 된다.
이 법을 부지런히 닦아서 한 법을 얻은 이가
문 밖에 세워서 사방에 고했던 것인데,
지금은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이가 사는 데에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종지(宗旨)를 세우니 이는 법을 전하는 사람 쪽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쓰러뜨리라 했으니
전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도리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선등(禪燈)은 가섭의 마음에 전했고,
교해(敎海)는 아난의 입에 전했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난은 전력을 다해 다문(多聞)만 구하여 도력(道力)이 온전치 못했으므로,
'금란가사를 전한 것 이 외에 따로 어떤 법을 전했는가? 하고 물었으니,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 마치 찰간을 세우는 것과 같으므로
아난으로 하여금 쓰러뜨려라 했다"고 했다.
또 평상적인 문답이 있는데 모두가 가섭이나 아난의 뜻이 아니다.
또 이렇게 전하기도 한다.
"덕승왕(德勝王)이 즉위하여 조사에게 법난(法難)을 가할 때
왕이 갑자기 사다(斯多 : 波舍斯多)에게 묻기를
'스님이 전한 바는 어떤 종(宗)인가?' 하니
조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얻은 바는 불종(佛宗)입니다' 하였다.
왕이 다시 묻기를
'부처께서 입멸하신 지 어언 1천 2백 년인데, 스님은 누구에게 받았는가?' 하니
조사가 대답하기를
'음광(飮光) 대사가 친히 부처님께 인가를 받으셔서
차례차례 이어져 24조 사자 존자(師子尊者)에 이르렀는데,
나는 그에게서 받았습니다' 하였다.
왕이 다시 묻기를
'내가 들으니 사자 존자는 형륙(刑戮)을 면치 못했는데,
어찌 뒷 사람에게 법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하니,
조사가 대답하기를
'나의 스승께서는 법난이 일어나기 전에 은밀히 나에게
법의(法衣)와 법게(法偈)를 전하셔서 이어받은 증표를 삼으셨습니다' 하였다.
왕이 다시 묻기를
'그 법의가 어디에 있느냐?' 하니
조사는 곧 주머니에서 법의를 꺼내어 왕에게 보였는데,
왕이 곧 태워버리라 명했으나 오색서기가 천지를 뒤덮더니
다른 나무가 다 탄 뒤에도 법의만은 여전하였다.
왕은 곧 뉘우치고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사자 존자의 참된 법사(法嗣)가 분명하도다' 하였다.
불여밀다(不如蜜多)가 조사에게 아뢰기를
'법의를 전해주소서'하니,
조사가 이르되
'이 법의는 법난을 위한 것이므로 전해 주지 않겠노라' 하였다."
대각(大覺)의 송에서
"밤이 되니[入夜]....."라 한 것은 싸늘해서 으스스한 경지요,
"온 하늘의[滿天]....."이라 함은 문채(文彩)가 어뵷지 않다는 뜻이다.
대홍(大洪)의 송에
"달살아갈(怛薩阿竭)"이라 함은 이곳 말로 번역하면
자금광(紫金光)이라 하니, 숨은 뜻은 문면에 드러나 있다.
운거(雲居)의 송에서
첫 구절은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이 금란가사 하나로 얻었다는 뜻이다.
"해진 가사[壞衲]"란 금란가사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가섭이 입던 분소의(糞掃衣)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구절은 만일 조사의 맑은 가풍이라면 잘 보호해 지녀야 한다는 뜻이요,
세째 구절은 그런데 사람들은 철간을 쓰러뜨리라는 뜻을 잘 모른다는 내용이며,
네째 구절은 비록 천하 사람들에게 맡겨도 손[針椎]을 댈 수 없다는 뜻이다,
천동(天童)의 첫 송은
아난을 부른 대목을 송한 것이다.
이 가운데 처음 두 구절에서 "한 점[一着]"이란
한 판 바둑을 두는데 한 점이라는 뜻이다.
대혜(大慧)는 도솔화(兜率話)의 인연에 대해 말하기를
"마지막 구절의 한 점[一着]"이라 했는데 그러한 한 점이다.
"한 판의 승부를 좌우한다[能廻一局碁]" 함은 선인(仙人)의 묘한 수이다.
셋째 구절에서 "죽이고 살릴 줄 안다[分生殺]" 함은
죽임도 있고 살림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아난의 활기찬 눈을 틔워 주었기 때문에 죽이고 살림을 안다 했으니,
즉 죽은 말이나 고치는 의원은 아니다.
천동(天童)의 둘째 송에서
"문 앞의.... 쓰러뜨려라 하니[倒却門前]"에서부터
"숨어 움츠릴꼬?[藏縮]"까지는
다시 다른 일이 없이 철저히 사람을 위한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갈고 닦는 공부 쌓아....."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째 송에서
"문 앞의 찰간 쓰러뜨린 일 얼버무린다[影略門前倒刹竿]" 한데서
'얼버무린다[影略]' 함은 그림자를 놔두고 형체를 생략했다는 뜻으로서,
이른바 찰간을 쓰러뜨린 곳에 쓰러뜨리지 않은 소식이 숨어있는데
그 도리를 얼버무렸다는 것이니,
이것이 전해 받고 전해 주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영롱시자(玲瓏侍者)....."라 함은 이런 도리를 잘 안다는 뜻이니,
가히 소반에 구슬이 구르듯 구슬이 소반에 구르는듯 하다는 내용이다.
한암(寒嵓)의 송에서
"80세 노파가 두 아이를 낳았다[八十婆生兩箇兒]" 함은
세존이 가섭과 아난을 낳았다는 뜻이요,
"만 권의 서적을 남김없이 다 읽었네[讀書萬卷一無遺]" 함은
선등(禪燈)과 교해(敎海)가 그 근원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며,
"또 겸하여[又還]......"라 함은
오늘에 다시 부르고 응대하면서 서로 만난다는 뜻이다.
개암(介庵)의 송은
그 뜻이 아래 나오는 황룡(黃龍)의 상당에 나타나 있다.
분양(汾陽)의 염은
비록 본유(本有)이지만 반드시 신훈(新熏)을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조(五祖)의 착어에서
"드러났구나[露]."라고 한 것은 따로 전할 일이 드러났다는 것인가?
선 자리가 드러났다는 것인가?
취암(翠巖)의 착어는
금시(今時)와 본분(本分)이 구족(具足)하니,
문 앞의 찰간을 쓰러뜨린 곳도 역시 금시의 뜻이 있어,
한 아름 밀어 내어 감출 곳이 없는 경지이다.
황룡(黃龍)의 상당에서
"금란을 벌써 전해줬거늘 아난이[金襴己傳阿難]..."는
온전히 다문(多聞)만을 구하기에 도력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뜻이요,
"찰간을 쓰러뜨리지 못해서 가섭은 헛수고를 면치 못했다
[刹竿未倒迦葉未免攒眉]" 함은 모름지기 찰간을 쓰러뜨려야 하니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찌 남의 부정[不肯]을 면할 수 있으랴 함이다.
"말해 보라. 어느 찰간을 쓰러뜨리리요?[且道倒那箇刹竿]" 함은
본래 쓰러뜨릴 찰간이 없다는 뜻이니,
만일 쓰러뜨릴 찰간이 있다면 마치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끌고 다닌다는 말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금으로 금을 바꿀 수 없고 물로는 물을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학자들이 가섭의 문 앞의 찰간을 쓰러뜨린다거나
아난의 문 앞의 찰간을 쓰러뜨린다 하면서 따지고 헤아리는데,
황룡의 이 대목을 잘못 안 것이다.
불안(佛眼)의 상당에서
"만일 이런 공안이 없었다면 생사가 요란했을 것이다
[若無者箇公案生死熾然]" 함은
만일 가섭과 아난이 전한 것이 있거나 받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생사의 흐름에 쓸려감을 면치 못한다는 뜻이니,
어찌 하여야 남의 문턱이나 담장 곁에 기대는 꼴을 면할 수 있을까?
비록 그러나 생사가 요란해서 담장 곁에 기대선 경지에 눈길을 돌리면
적멸한 광채 속에서 백련(부처님의 눈매)에게 예배함이 무방할 것이다.
*자금광(紫金光) : 자금은 붉은 금을 말하니, 자금광은 불그레한 금빛이다.
선문염송. 염송설화((禪門拈頌 拈頌說話) 중
제3권 서천(西天)의 조사(祖師)
81. 금란(金襴) p391~p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