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평의 아름답고 따뜻한 바다의 기억
모든 작가들의 작품에는 그들만의 풍경과 스토리가 있다. 그것이 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추상의 차원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작품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자신을 비추거나 투영하는 하나의 거울이다. 보편적으로 사실주의 기법으로 작업이 완성 될 때 그러한 작가의 내면은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드러난다. 오래전부터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잘 알려진 채수평의 작품들은 그러한 과정과 모습을 가장 실증적으로 드러낸 대표적 작가이다. <바람에 흔들리다 >의 시리즈에서 보여준 그의 이전에 작품들은 바닷가나 강변에 고즈넉하고 다소 쓸쓸한 풍경을 뒤로 하염없이 흔들리는 나무에 모습에 크게 주목했다. 물론 때로 그러한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 때문에 단순하게 인상파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작품들은 1차원적인 묘사에 그치기보다는 내면에 일렁이는 풍경을 묘사한 서정적인 부드러움을 가진 그림이었다. 그러나 최근 그는 그러한 풍경에 자신의 내면 정서를 담아내는 스토리텔링의 화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때 그는 “존재하는 것들은 내 작업의 어떤 형상의 표현이다.”라고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면 채수평 작가의 작품들은 어떤 가슴속에 기억된 '흔적’의 하나로서 그가 살면서 겪어 아름다움이나 행복, 기다림 같은 마음속 내면의 조심스러운 이야기였다. 그에게 바다는 마치 터너나 컨스터블 같은 영국의 풍경화가처럼 소중하고 특별하게 다루어진다. 마치 그들이 바다의 변화무쌍한 풍경과 날씨를 치열하게 삶속에 담아냈다면 채수평은 체험의 바다이기보다 보다는 그 자신의 이상을 반듯하고 정직하게 상징한다.
특히 그에게 바다는 소멸의 공간에서 생성의 공간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만남과 이별 등을 아우르는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근래에 보여준 바다 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 한 그루에 담겨진 쓸쓸함과 고요함에서 벗어나, 그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나 장난감, 자전거, 레고등을 통해 바람과 구름이 어울려 하나의 축제의 공간에 놓인 어린이에 사랑을 그대로 담아낸다. 우리는 그 채수평의 아름답고 정겨운 아이들의 놀이터인 바다를 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숨겨진 행복을 발견하고 꿈꾸게 된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인생을 보고 항해를 하고 무서움과 자연의 힘을 발견한다. 그러나 채수평의 바다에는 피로하고 지친 삶의 자락에서 누워 새로운 꿈을 꾸는 행복한 고향의 풍경들로 가득차 있다. 마치 그의 놀이터 같은 동심의 세계가 떠오르는 어린 잠결 속의 바다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토록 자신의 그림이 피로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영혼을 치유하는 진정제 같은 것이 되길 갈망했던 마티스의 바다가 연상 된다. 아마도 그의 이런 추억과 기억들은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자신의 미술실기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거머쥐고 자장면을 처음 먹었던 그 한없는 추억과 아름다운 시간들의 귀향과 같은 즐거움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채수평은 사실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형식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거침없고 솔직한 언어로 사람들에게 예술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마음이 푸근한 작가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세계는 모든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한 자락의 노래나 영혼을 치유하는 힐링으로서의 그림이길 소망하는 작가임이 틀림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에게 그림속 바다는 행복이며 희망이며 사랑이며 웃음이며 그것으로 가득한 예술가적 기쁨이자 본질이다. 그가 고백한 “영혼의 아픔은 철학이 되고 우리들의 작업에 대한 숭고한 눈물은 예술이 되어 영원한 역사와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이다.”라고 고백한 그의 예술가적 열정과 뜨거움이야말로 개념과 유희만으로 가득찬 공허한 그림과는 어딘가는 다른 인간의 냄새가 풍기는 이유이다. 언젠가는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진정한 작업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가 진솔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소망하는 바다 앞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리고 어릴 적 보았던 그 아름다운 바다를 다시 만날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