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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 |
HAITAI Tigers | |
창단 | |
매각 | |
모기업 | 해태제과 |
연고지 | |
구단명 변천 | 해태 타이거즈(1982~2001) |
홈 구장 | |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1982~1989)[3] | |
최종 우승[4] | 9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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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단일 구단으로는 가장 많은 챔피언 트로피를 보유한 팀[5]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왕조 칭호를 받은 구단[6]
100%의 어마무시한 KBO 한국시리즈 우승 확률을 자랑했던 구단[7]
대략 이 구단은 프로야구 창설후 처음 20년간의 반, 즉 기아로 바뀌기 전, 1982-2001년 동안 9번 우승했으니, 이 팀을 레전드라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당시의 야구 화두는 우승팀이 해태인가, 아닌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82년부터 2001년 7월까지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명으로 있다가 기아자동차가 인수한 후 2001년 8월부터KIA 타이거즈로 전환되었다.걍 전설의 팀이니 만큼 연도별로 아는사람들 기록 추가바람
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될 당시 기업주의 고향이 호남 출신인 기업 중에서 해태제과를 택해 창단된 팀. KBO쪽에서 호남 연고로 접근한 삼양사, 금호고속, 대한교육보험에서 모조리 거부당하자 정말 궁여지책으로 중소기업 수준인 해태제과가 선정된 것이다. 그만큼 호남 연고 대기업이 없었다는 사실. 그때 당시 정부에서 호남연고의 구단 창설이 실패할 경우 프로야구출범 계획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뿐만 아니라 한국프로야구 자체가 정치적 농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부인할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그런데, 그걸 깔 수 있을까. 연고기업이 거절했다고 호남빼고 출범시켰다면 어땠을 것 같아?
현대, 럭키금성, 대우, 선경 같은 최상위권 재벌은 참여하지 않고,[8] 롯데,[9] 삼미, 해태 등이 선정되자 삼성은 '이런듣보잡 피래미들과 같이 못 놀겠다'고 창단을 포기하려는 걸 억지로 주저앉혔다고 한다. 몇년 후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해태가 프로야구에 참여한건 굉장히 의외인 일이었다. 오죽하면 창단 전에 사장이 청와대에 끌려가서 전두환과 만났다는 말이 나돌 정도. 사실 원래는 금호그룹에게 구단이 할당 될 뻔했지만 금호그룹이 명목상으로는 오너와의 상의없이 아들들이 멋대로 정한 일이라고 해서 거절하는[10] 통에 호남 연고가 붕 뜬 상황에서 박건배 회장이 참여의사를 표력하여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할 권리를 약속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타이거즈는 창단되었지만, 절대적인 선수 숫자의 부족으로 창단 당시 6개 구단중 가장 적은 14명의 선수로 시작했다. 시즌 개막 직전, 82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결성한 국가대표 선수단에서 무단이탈한 김일권을 우여곡절 끝에 영입하기도 했다. 김일권은 그 해 53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했다. 또한 약속대로 초대 감독으로 김동엽이 선임되었지만 코치진과의 불화로 인해 한 달만에 5승 8패라는 성적만 남기고 경질당했고, 조창수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한국프로야구였지만, 해태는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에 가끔 지명타자 없이 김성한이 선발투수와 타자의 투잡을 뛰기도 했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지명타자를 쓰지 않고 선수교체도 없이 한 팀이 한 경기를 9명만으로 치른 경우가 딱 2번 있는데, 전부 원년의 해태가 기록한 것이다. 김성한의 투타겸업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참고로 김성한의 1982년 성적은 다음과 같다. 투수로서는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 타자로서는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였다. 둘 중 하나에 더 전념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중론.
1982년 원년멤버[11]
투수 : 김용남, 이상윤, 방수원, 강만식, 신태중
야수 : 김봉연, 김일권, 김종모, 김준환, 차영화, 조충열, 김종윤, 김우근, 김용만, 박전섭, 김경훈, 임경섭, 최영조, 홍순만
투타겸업(....) : 김성한
선수 뎁스는 습자지 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의외로 선수 개인 수준이 굉장히 높은편이다. 투수에 김용남, 이상윤은 국가대표도 해본적도 있었고, 강만식, 방수원도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나름 이름 날리던 투수였다. 야수중에서도 김봉연은 실업야구계를 평정하던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원년 연봉1위였고[12] 김성한, 김종모, 김준환에 뒤늦게 합류하는 김일권도 국가대표로 잘 뽑히던 선수였기때문. 한마디로 소수정예로 원년리그를 보낸셈이다. 얇은 선수층으로도 어째서 4위를 할수있었는지 알수있는 대목.
우승 6회라는 전대미문한 대기록을 세운 유니폼.
1983년 미국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였고,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과 주동식을 영입하면서 바야흐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김응룡 감독은 부임 첫해에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한국시리즈에서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을 4승 1무로 일축하고 우승을 차지하였으며[13] 이후 1984년과 1985년은 잠시 주춤했지만,[14]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단 둘뿐인 대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1986년 시즌 우승에는 그 해 변경된 규정의 덕을 좀 봤다. 전해 시즌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를 전부 싹쓸이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소멸시키는 통합 우승을 거두었다. 삼성은 기뻐서 우는데[15] KBO는 흥행참패로 인해 진짜로 우는 상황이 발생하자 전후기 모두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방식으로 포스트시즌 규정을 변경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후기 모두 2위를 한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기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 후기 1위인 OB 베어스는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콩라인이어도 득을 볼 수 있는 희한한 상황이라고 할까...
당시 후기리그가 끝난 후 해태와 OB는 동률로 공동 1위였다. 그런데 당시는 동률인 경우 3전 2선승제로 순위결정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고, 포스트시즌 대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후기리그 우승결정전을 치렀다.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 전후기 통합성적은 70승 1무 37패를 마크한 삼성이 1위, 67승 4무 37패를 기록한 해태가 2위였지만 이 규정 때문에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16]
당연히 해태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삼성과 OB는 플레이오프 끝에 삼성이 이기고 체력을 비축해 놓은 해태가 그 삼성을 잡고 통산 2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1986~89 시즌 해태의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보면(괄호 안은 통합 승률 순위)
1986 시즌 67승 4무 37패 .644(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70승 1무 37패 .654)
1987 시즌 55승 3무 48패 .532(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64승 44패 .593)
1988 시즌 68승 2무 38패 .639(1위)
1989 시즌 65승 4무 51패 .558(2위) (1위: 빙그레 이글스 71승 3무 46패 .604)그야말로 콩라인의 전설! 오오오.
즉 16승 투수 둘(선동열, 이상윤), 30홈런(김성한), 26홈런(장채근)으로 56홈런을 합작한 슬러거를 앞세운, 팀타율도 .283으로 압도적이었던 1988년만 절대적으로 리그를 지배했을 뿐 나머지 시즌에서 해태는 강팀 수준일 뿐 리그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1986 시즌엔 전, 후기 규정이 있는데다 투타를 보면 삼성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방어율, 실점은 비슷했으며 타율은 삼성이 무려 1푼5리나 앞섰지만 홈런은 해태가 훨신 많은 수준(25개 차이), 말 그대로 단일시즌으로 시즌을 치렀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 거기다 대 삼성전에서 11승 1무 6패로 다소 강했다는 점, 무엇보다 262이닝 24승 0.99을 마크한 선동렬의 존재를 보면 우승전력은 충분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1987년의 경우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다. 1987년의 삼성은 팀타율 3할을 기록했으며 23승의 다승왕 김시진까지 건재한, 말 그대로 그 다음해의 해태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팀이었다. 해태는 2위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치고받는 수준에다 주전의 줄부진 내지는 부상 때문에 팀타율 .252의 빈타까지 겹쳤다. 하지만 4전 전승으로 삼성을 셧아웃, 명실상부한 "왕조"를 세우는 해가 되었다.
1989년에도 빙그레 이글스보다 사실상의 전력은 조금 약해보였다. 물론 기존의 선동열에 이강철, 조계현이 가세한 투수진은 이상군, 한희민의 빙그레와도 막상막하였지만 타선이 그해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최초로 20-20을 달성한김성한, 이 해 제2의 코끼리로 등극하며 .318을 찍은 박철우 이외에는 믿을만한 타자가 별로 없었다. 반면 빙그레는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에 말년의 유승안마저 타점왕에 홈런 2위를 달성한,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절정을 찍던 시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4승 1패로 빙그레를 압도하면서 4연패를 이뤄내고 만다.
이러한 4년 연속 우승에는 선동열, 이상윤 등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마운드와 방수원[17], 신동수, 김정수 등이 중심인 불펜진,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순철 등으로 구축된 공포의 타선, 그리고 뛰어난 용병술과 팀 장악력, 카리스마를 발휘한 김응용 감독의 수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으로 성장했다. 이때나 요즘이나 여성팬을 데려와야 흥한다는 주장이 나오는건 똑같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해태의 강력함은 변함없었다. 1991, 1993, 1996, 1997년 네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90년대에 들어 마운드에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타자진에는 이종범과 그 분, 홍현우, 장성호, 이호준이 등장하여 선동열, 김성한의 뒤를 이었다. 1996년과 1997년의 한국시리즈 2연패는 선동열의 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해 '해태도 한물 갔다'는 평을 뒤엎고 나온 것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91 시즌[18]과 1993 시즌은 압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해였다. 1991 시즌은 79승 5무 42패(.647), 1993 시즌은 81승 3무 42패(.655)로[19] 2위와 7~8경기차로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로 독주를 하였다. 1996 시즌과 1997 시즌은 상위권 4팀이 용호상박인 상태로 치고받았지만 역시 관록의 해태가 2위(쌍방울, LG)를 근소한 차이로 밀어내며 페넌트레이스 1위를 지켰다. 90년대의 해태는 4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의미있는 것은 모두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이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해태에게는 징크스가 있었는데 우승한 시즌에는 그 해 페넌트레이스 2위팀에게 약했다는 것이다. 1991년에 빙그레와 상대하며 8승 3무 7패로 아주 근소한 우위이기는 했지만 단일팀에게 3무를 기록할 정도로 피튀기는 접전을 많이 벌였으며, 93년의 삼성(7승 11패), 96년의 쌍방울과 97년의 LG(각각 8승 10패)에게는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96년을 제외하면 한국시리즈에서 그 2위팀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여주며 패권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96년에 페넌트레이스 4위로 준PO, PO를 모두 이기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고전하기도 했다. 최종시리즈전적 4승 2패, 정명원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할 정도로.이게 여담으로 달릴 정도로 포스트시즌에 시즌 팀 방어율 1위를 하고 못 나간 팀이 있는데 그게 바로 95년도의 해태이다. 그때는 타율이 .242(7위)로 엇박자를 달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시 규정에는 3위와 4위가 3.5게임 차이 이상이면 준플레이오프를 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종범이 홈런왕을 먹을 뻔한 시즌이었다.[20]
그러나 1998년 이후로 해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모 회사인 해태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21]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팀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 선동열, 이종범의 일본 진출도 본인들이 원해서 간 것도 있지만, 팀 입장에서는 현금확보를 위한 면이 컸다. 특히 이종범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향후 10년은 팀을 이끌 주축 선수로 주목했었다는 점에서 그 공백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해태가 삼성, 현대같이 재정만 빵빵했다면 이종범을 잡았을 것이다 요즘 구단들 보자 3할2푼에 30-30, 3할9푼에 84도루를 해대는 선수 그것도 포수와 더불어 수비부담이 가장 크다는 유격수를 일본에 잡아가라고 내줄 구단이 있나.. ㄷㄷㄷ
이종범의 해외 진출에 묻혀서 그렇지 한때 에이스 역할을 하던 조계현을 현금 4억원에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고액연봉자인 이순철을 방출시키는 등, 지출을 줄이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1998년 전체만 보면 말 그대로 "종범이만 있었어도" 정도로 괜찮았다. 이강철이 15승을 거두며 199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12승을 거둔 이대진도 현대와의 경기에서 10타자연속 삼진 잡을 정도로 건재했으며 故 김상진이 생애에서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듯 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마무리에는 임창용이 철벽같이 버티고 있었다. 일부는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보다 이 시기에 더 강력한 구위를 구사했다고 평가한다. statiz 기준 1998 1위는 임창용 도박꾼이지만 이종범에 버금가는 팀의 운명을 바꾸는 선수였다
게다가 타선도 나쁘지 않았다. 김창희가 조금이나마 성장세를 보이고, 장성호, 이호준이 본격적으로 3할 타자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종범이 해태에 잔류해서 계속 1996~97년처럼 호령했다면 짜임새는 더 좋았을 뻔했다. 용병도입 첫 해인 만큼 다른 팀처럼 타이론 우즈는 바라지 않아도 스캇 쿨바나 3급의 용병이 있었다면... 하지만 현실은 숀 헤어
전체적으로 투수력도 좋았고 무엇보다 이강철-이대진의 원투펀치와 임창용의 철벽 마무리의 조화가 최고인 시즌이었다. 장성호는 15홈런+타율 5위를 기록하면서 볼넷도 골라내는 대단한 1번타자였다. 여기까지 장성호는 이종범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스피드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클린업의 축이었던 홍현우와 성님이 조금 부진했다. 그것은 이 해 해태가 최저득점(489)을 올리는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 OB와의 2경기를 남기고, 해태는 분수령에 서있었다. 2경기를 모두 이기면 시즌 3위[22], 1무만 거둬도 플레이오프 진출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OB에게 2연전 싹쓸이패(...) 지난 V9의 업보를 받는 듯했다. 특히 마지막 경기는 임창용이 3회에 등판했음에도 11:5로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해태는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만없이긴 하지만 이종범이 있었다면, 그래서 몇 승이라도 더 챙길 수 있었다면 1998년 포스트시즌의 양상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종범이가 아니라 중박이상 치는 타자 용병, 타이론 우즈급은 아니더라도 쿨바, 치멜리스 하다못해 숀 헤어가 풀시즌 .260 15홈런 정도만 하는 외국인선수였다면 이런 탈락은 없었을 것이다;
IMF 후폭풍으로 해태그룹은 점점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고 있었고, 해태제과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8년 시즌 후 타이거즈는 주력 선수들을 현금트레이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팔려갔던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임창용. 대가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 30억원 등등을 얻어오긴 했다.[23] 하지만 이들도 임창용의 구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24] 그나마 쌍방울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쌍방울의 상황은 이보다 더더욱 비참했다. 해태는 이종범과 선동열의 이적료&임대료를 매년 수십억씩 받기라도 했지 쌍방울은 이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양준혁을 데려옴으로서 1999년은 해태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엄청난 화력을 뿜을 수 있었다.
극단적인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1999년, 해태 타선은 왕조의 마지막 불꽃을 발하듯 핵방망이를 연신 터뜨려댔다. 양준혁의 가세에, 기존의 홍현우, 장성호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으며 트레이시 샌더스, 스토니 브릭스 두 용병 또한 출중한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혁이라는 핵우산 효과가 엄청났다.[25] 샌더스의 40홈런은 2009년 김상현(1980)도 넘지 못한 역대 타이거즈 최다 홈런 기록이다.[26] 그해 팀홈런 개수만 210개를 기록하며 2003년 삼성의 213개에 이어 역대 한 시즌 팀홈런 개수 2위를 기록. 허나 몇몇 포지션에 생긴 구멍과 붕괴한 투수진 문제로 승률은 .457(전체 7위)에 그쳤다.
리그 전체가 타고투저를 타긴 했지만 이 해 해태의 타선은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경기 3홈런은 무려 24회를 기록했으며 4홈런이상경기도 8번이었다. 4게임 중 1게임은 3홈런이상 경기였으며, 10득점도 우습게 해댔다. 광주구장에 심심할 때마다 A를 새길 정도로.[27] 1999년이 아무리 타고투저의 시즌이었어도 해태의 210홈런은 대단한 기록이다. 1999년 해태는 팀 홈런 말고도 프로야구에 여러가지 기록을 세웠다. 팀 최다홈런(210),[28] 팀 최다 득점,[29] 그리고 순득점(득점-실점)이 많은 팀 중 최초의 7위 달성!! 구장 문제에 관해 덧붙이자면 해태타선은잠실 19경기에서 23홈런을 쳤다.[30][31] 이수치를 가지고 만약 이해 해태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구단이었다면? 산술적으로지만 잠실에서만 9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나오며[32] 원정경기까지 감안하면 210홈런 까진 아니어도 190홈런정도는 충분히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ㄷㄷㄷ
이렇게 핵타선을 가지고도 7위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시망한 투수진과 수비진이었다. 우선 에이스 역할을 하던 이대진과 이강철이 나란히 부상으로 거의 몫을 하지 못했다. 1998 시즌정도로 했다면 해태는 다시 포스트시즌을 갔겠지만.. 선발 투수진의 젊은 피로 주목받던 김상진마저 청천벽력같은 말기암 진단을 받았고, 결국 시즌 도중 향년 22세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뒷문을 잠그던 임창용의 부재도 너무나 뼈아팠다.
원투펀치가 떠나고 김상진마저 암투병을 할 시기 사실상 에이스로 활약한 곽현희는 팀 최다승인 11승을 올렸음에도 6점대의 방어율(6.15)을 기록했으며, 하나같이 믿었던 선발투수인 곽채진, 오철민, 최상덕 등이 4점 후반~5점대의 방어율을 올렸다. 그나마 지금은 휘발유동훈으로 불리는 유동훈이 신인으로서 4.75에 7승을 올려준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수비진도 영 아니었다. 타이거즈 역사상 손꼽히는 수비수 김종국은 부상으로 단 3경기만 출장하였으며,[33] 그 수비 안 좋은 장성호는 좌익수, 1루수를 떠돌아다녔고 때에 따라서는 흠좀무하게 중견수로도 나왔다. 양준혁은 지명타자로 주로 나왔으며 이호준도 그 전해 지명타자에서 3루수~1루수를 전전하였다. 그나마 1차지명으로 정성훈이 입단해서 3루를 봐준게 다행이었다. 당시 용병제도 도입 초창기상 비슷한 팀이 많았지만 해태는 유독 타력이 좋아도 떠도는 선수가 많았다.
1998~1999 시즌에 맹타를 휘두르며 활약했던 이호준은 2000년 성영재를 상대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고,[34][35] 결국 1983년부터 장기 집권해 오던 김응용 감독마저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삼성으로 옮겼다. 감독의 빈 자리는 2001년부터 김응용 밑에서 타격코치로 있던 김성한 감독이 이어받았다. 그나마 장성호가 외로이 암흑기를 떠받치던 기둥이었다.
2000년 시즌은 전체 순위는 전년도 우승팀 한화 이글스와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손잡고 나란히 바닥을 기어주며 그나마 그전해보다 1단계 올라갔지만, 20홈런 타자의 부재, 13승 투수의 부재, 방어율 3점 투수의 부재 등으로 팬들 입장에서는 재미가 없는 시즌이었다. 장성호가 출루율왕을 먹어서 그나마 종범이와 창용이가 떠나고 남은 타이거즈의 꼴찌 추락은 막아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대진이 미친 듯이 킬끼리에게 굴려졌고, 다시는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다.그리고 시즌 끝나고 주전 3루수인 홍현우마저 FA를 통해서 LG 트윈스로 이적해버리면서 장타력이 있는 선수가 남아나지 않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다.
이 해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그래도 광주의 해태 팬에게는 의의가 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5월 18일의 홈경기이다. 해태 타이거즈는 창단 이후 매년 5월 18일에는 반드시 무등야구장을 떠나서 원정 경기를 치뤄야 했다. 5월 18일이 광주 시민들에게 어떤 날인지를 생각해 보면 왜 해태가 이날 홈경기를 할 수 없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다가 2000년 5월 18일에야 5월 18일에 광주에서 홈 경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2001 시즌 해태는 그야말로 해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비밀번호 5-7-6을 찍었던 종전 3년을 뒤집을 정도로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7월 29일 삼성과 마지막 경기를 벌일 때까지 4위를 놓치지 않았다.[36][37]
그리고 2001년 8월 1일,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변신한다. 당시 전라남도 및 광주광역시 연고 기업 중 가장 대기업인 금호그룹에서 타이거즈를 인수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끓었으나 금호그룹은 프로 구단에 관심이 없는 데다가 자신들의 호남색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룹이여서 무산되었다.[38] 때문에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프로 팀을 창단하려 했고, 그 산물이 인천광역시 연고의 금호생명 여자농구팀이었지만 투자는...
금호그룹 대신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동에 아시아자동차 시절부터 군용 및 상용차량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이었던 기아자동차가 인수하게 된다. 기아자동차의 인수에 대해 광주광역시 지역 여론은 좋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기아자동차가 태생이 전라도 기업이라는 등으로 조롱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정작 기아자동차는 1976년이 되서야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호남에 자동차 공장을 운영한 것이다.[39] 이 부분은 기아자동차 항목을 참조.
이후 역사는 KIA 타이거즈 참조.
붉은색으로 대변되며 빨간상의에 검정하의의 유니폼이 상대팀들에게 무시무시함으로 통했다.[40]
해태 타이거즈는 창단때부터 자원이 많지 않아[41] 소수정예로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주전과 백업선수들의 기량차는 엄청났으며, 이렇다 보니 2군도 원년 멤버 프로야구팀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 타팀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2군을 만들고 있었으나, 해태는 그보다 한참 늦은 1994년에 2군을 신설했다.[42]
이후 모기업이 기아자동차로 바뀌었음에도 2군 시설은 여전히 부실했고, 팜의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가 그나마 2012년 2군 구장을 새로 리모델링하며 상황이 나아졌다. 코치의 수도 전구단에서 가장 적었고, 2000년대 이전까지는 코치도 자기네 같은 명문구단을 본받았는지 순혈만을 선호하여 타팀 출신은 거의 오지 못했다.
김봉연, 김성한, 이종범등의 화려한 장타력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태는 기본적으로 투수력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다. 해태의 다른 포지션의 선수층은 매우 얇았으나 투수층은 매우 두터웠고, 특히 1980년대에는 방수원, 신동수, 김정수가, 1990년대에는 기존의 김정수와, 송유석, 선동열, 임창용이 중간계투나 마무리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해태 투수진은 난공불락이었다. 해태의 1990년대 이후의 우승은 대부분 투수력에 의존한 우승이었다.
해태는 다른 팀에 비해서도 군기가 센 것으로 유명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구타와 같은 폭력과 결부되는 똥군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감독부터가 버젓이 TV카메라 돌아가는 앞에서 선수들을 구타하는 위인인지라 코치진들도 선수들에게 욕설이나 구타를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고. 최향남의 경우 신인시절 해태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해 군대를 현역으로 갔으며, 한대화가 94년도 시즌에 LG로 트레이드 된 것도 이런 똥군기로 인한 감독과의 불화[43]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 이런 상황인지라 다른 팀 선수들이 해태에 트레이드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LG 소속이었던 손혁과, 두산의 최용호[44], 그리고 삼성의 양준혁이 그 예. 1996년에는 선수들의 불만이 쌓이다 터져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사사구에서 이병훈 해설위원이 밝힌 당시 해태 분위기에서도 언급하는데 이 시기에는 타팀의 이적생들은 어느정도 우리 선수 아니다 이런식으로 천대받았던 것 같다.[45][46] 그래서 이런대우에 빡친 이병훈이 이호성과 주먹다짐을 했다고한다.[47]
박충식에 의하면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런 구타문화가 남아있었다고 하며, 팀내 멤버 중에서 나이가 3년차 이상은 "형", 5년차 이상은 "선배"라고 부르도록 호칭도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선배에 대한 인사도 일단 정지후 90도 하도록 했다.[48] 이건 군대도 아니고.. 참고로 타 팀에서는 보통 나이 차이가 7~8년 이하면 XX(이) 형, 그 이상이면 XXX선배님[49]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30대 중반을 넘긴 최고참급의 선수만이 모든 선수들한테 선배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94년 해태 소속이었던 한대화가 LG로 가서 했던 일이 군기 잡는 일이었다한다. 당시 LG는 신바람 야구란 컬러로 젊은 선수들이 서로 형, 동생하는 사이였는데 기강이 해이해질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령이나 커리어나 고참 급이었던 한대화가 군기 반장을 했다한다. 해태와 LG의 팀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부분.
1997년 LG 트윈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후 얼마 안되어 최훈재가 이종범, 홍현우, 이대진이 같이 운동장에서 도시락까먹는것을 보며, "너희들 밥먹니?"라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이 먹는것을 쓰레기통에 치우고 운동장에서 다시 연습하러 갔다고 한다. 최훈재는 당시 LG에서 이적해 온 상태였으며, 후에 회고하기를 어느구단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적은 없었다고 한다.
2000년대 KIA로 넘어가면서 이종범과 이대진이 총대를 메고 똥군기 및 악폐습을 줄이는데 노력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도 다른 팀들에 비해서는 군기가 쎄다. 김주찬도 한 방송에서 다른 팀보다 군기가 쎈거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2015년에는 경기끝나고 단체로 원산폭격 비슷한 모습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빡센 군기와 달리 선수들의 충성도가 강한걸로도 유명하다. 특히 해태의 영광을 겪었던 선수들이 더 그렇다. 없던 살림에 트레이드 된 김상현, 이호준, 정성훈, 홍현우, 장성호, 임창용 등이 그 예인데 트레이드 되자 가기 싫다며 거부하며 울었다는 에피소드가 꼭 들어있고, 이적 후에도 친정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기아로 바뀐 이후에도 이어져 신종길같은 경우는 한화시절에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고 하자 자신은 고향팀아니면 안간다고 선언했을 정도. 또한 임창용도 대표적인 예, 해태에서 삼성으로 팔려나간 이후 꾸준히 기아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고 트레이드까지 요청했었을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모기업 해태가 일단 공업화 정도가 낮았던 호남지역의 기업이었기 때문에 재정상태가 부실했다. 그리하여 프로야구단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었다. 구단의 연봉협상 관계자가 신인 계약금을 받으려는 이종범에게 "광주는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받는 것보다는 광주에서 7000만원을 받는게 낫다"는 드립은 유명하다.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당대의 삼미 슈퍼스타즈나 오늘날의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처럼 재정이 영 좋지 못했고,[50]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최소한 2000년대 후반 넥센처럼 트레이드를 대놓고 하는 악행은 아니었더라도[51] 1980년대 프로야구 구단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해태의 경우 오프시즌 때 연봉 분쟁이 거의 연례행사이다시피했다. 그런데 이것도 종범이와 동열이가 없었으면 쌍방울처럼 개꼴날뻔했다.
1980년대부터 선수단에 대한 대우는 1990년대 쌍방울만큼이나 악명높았다. 차라리 삼청태가 해태보다는 나을 정도였다. 역시 상기됐듯 명절 때 보너스 대신 과자 선물세트를 돌린 건 이미 전설. 심지어는 부상선수들의 재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자비로 재활훈련을 하는 등,[52] 지금 기준으로 도저히 프로 구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1차 선수협 사태의 단초가 됐던[53] '김대현·이순철 교통사고 사건' 역시 해태 구단에서 어떠한 위로도 제대로 해주지 못해 일어났던 일이었다.
심지어는 파파이스 치킨이 먹고 싶다는 외국인 투수 루이스 안두하에게 파파이스는커녕 광주 양동시장에서 파는 양동통닭을 사다주기도 했다.[54] 이에 1984년에는 선수들이 시즌 개막 초반에 구단주가 참석한 회식자리에서 회식메뉴로 나온 불고기를 손도 대지않고 그대로 태워버리면서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55] 이른바 불고기 화형식 사건. 이 당시 사건의 주동자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구단에게 미움받던 김일권이 주동자로 오해를 사게 되었고 급기야 그날 회식 후에 김일권이 김응용 감독에게 말대꾸를 하다 따귀를 맞는 일까지 겹쳐 오해는 더 커졌다. 이 사건 이후 김일권은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버렸고 결국 1988년 태평양으로 트레이드 되는 단초가 된다. 구단이 잘 나갈 때도 이런 판국이었기에, 결국 후에 모기업 사정 악화로 인해 그나마 있던 지원마저 부실해지고 선수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1997년까지도 기세등등했던 성적은 금새 곤두박질쳤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당시 김응용이 있던 삼성을 돌아가고 싶은 구단으로 꼽은 것은 바로 이런 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KIA의 인수가 결정되고 이종범은 타이거즈에 복귀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삼성에 가고싶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한 건 아니고 김응용 감독 밑에서 뛰고 싶다.라는 이야기였다.
우승 후 선수단에 대한 우승보너스가 만원도 안되는 해태제과 종합선물세트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해태의 열악한 지원을 비꼰 진담같은 농담. 거기다 우승보너스를 줄 돈이 없어서 앨범제작까지 시키는 기행을 보여줬다. 그래서 나온 게 양수경과 선동열&이종범의 투앤원.(...)[56]
연봉협상 때 구단 담당자가 "너 연봉이 맛동산 몇 봉지인 줄 알아?", "너희들 연봉 주느라 부라보콘을 얼마나 팔아야 하는지 알아?"라는 얘기를 자기 입으로 했다고 하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있을 수가 없다.[57] 오늘날로 치자면 "너 연봉이 K5 몇 대인 줄 알아?", "너희들 연봉 주느라 스포티지 얼마나 팔아야 하는지 알아?"라고 말하는 식이다. 근데 K5나 스포티지 한 3~40대 정도 팔면 고액연봉자 연봉이 나오지만, 맛동산, 부라보콘은 한 몇 십만개 팔아야 나오는 금액. 선동열도 현역시절 연봉 1억을 요구했더니 구단 담당자 왈, "야, 1억이면 아카시아껌을 몇 통이나 팔아야 하는지 알아?"라고 답한것도 유명한 일화. 심지어 상기됐듯 이종범에게는 "광주물가는 서울의 절반이라 광주서 7000만원 받는 게 서울서 1억보다 낫다"는 식의 이야기도 했다. 후에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로 넘어간 이후 박건배 전 구단주는 전 해태 선수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이렇게라도 해서 팀을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그 당시 섭섭하게 했던 건 미안하네." 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김응용의 말에 의하면 박건배 회장은 야구단에 돈을 쓰고 싶어 했으나 박건배 회장 아래 이사진들이 야구단에 돈쓰는건 돈낭비라고 했다고 하며 박건배 회장을 옹호하고 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이후 해태그룹은 전자사업, 중공업사업까지 진출하는 몸집불리기를 했는데, IMF 크리를 맞고 쌍방울과 선수를 팔아 연명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결국 야구단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연습 구장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체력단련실은 일개 동네 헬스클럽보다도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해태제과에서 생산하는 과자들 항목을 보면 "너희들 연봉 줄려면 ○○○ 몇 개 팔아야 하는지 알아?!" 하는 개드립이 달려있다(...)[58]
해태 타이거즈의 강력함은 다른 팀들에게는 공포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끈끈한 근성야구[59]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호남인들의 일상의 유일한 낙이요 희망이었[60] 워낙 전설적인 그 이름의 무게로 인해 지금의KIA 타이거즈는 해태의 전설에 좀 눌려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KIA는 해태의 계보를 계속 이으려고 함과 동시에 해태색을 지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올드팬들의 반발이 심해지니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워낙에 성적이 좋은 전설적인 구단이며 호남을 연고로 한 탓에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는 선호도가 높았다. 예를 들면 군산상고를 나온 최해식은 쌍방울이 창단되는 해 졸업하여 지역 우선 지명을 당하면서 '해태 가고 싶은데 1년만 늦게 창단되지.'하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뒤 트레이드 되어 해태 선수가 되었는데 최해식의 증언에 따르면 우승 보너스는 나쁘지 않았던 편이라고 한다. 위의 탄생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해태가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구단을 억지로 창단하여 마음대로 해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해태 구단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전라도에 대기업이 없는게 모든 것의 원인. 만약 풍족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창단을 했다면 해태와 같은 성적이 나왔을까? 그런 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일. 어쨌거나 지금도 해태 전성기를 보낸 김봉연, 김성한, 이병훈 등의 OB들의 해태부심은 대단하다.
하지만 광주일고 출신인 박재홍은 많은 계약금을 줄 수 없던 해태를 거부하고 현대와 계약했다.[61]
최초의 응원단장 임갑교 옹과 구슬픈 곡조의 응원가 목포의 눈물로도 유명하다. 이는 해태의 첫 우승 당시 잠실야구장에서 제창한 것이 유명한 장면인데, 프로야구의 출범이 소위 3S 정책의 일환이였지만 역으로 호남 지역에서는역사의 상처를 프로야구 승리의 기쁨으로 표출하는 분출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야구 자유기고가 김은식은 2009년 펴낸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을 통해서 표출된 호남의 정서를 1980~90년대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연결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홈경기 유니폼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경기 유니폼을 본딴 것이었다.
그러나 원정경기 유니폼은 매우 독특해서 다른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빨간상의에 검은 바지였고, 이는 김동엽 초대감독의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해태 런던 드라이진에 붙어있었던 영국 버킹검궁 근위병의 복장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이 있다. 이 유니폼은 하도 강렬한 인상을 줘서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62] 또한 검은 바지는 열을 흡수하여 여름만 되면 선수들이 땀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예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일명 "검빨 쫄쫄이" 유니폼의 단점을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96년부터는 원정과 홈경기 유니폼 모두 앞가슴의 "해태" 한글 로고를 영문으로 바꾼 새로운 유니폼이 도입된다.
해태의 검빨 유니폼은 아직도 올드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팬들은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하면, 당연히 하얀색의 홈팀 전용 유니폼만 보다가 검빨 유니폼을 보니 적응이 잘 안되는 모양..
구단 쪽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지만, 2011년 7월 2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실시.[63] 아이러니한 것은 이 유니폼을 입은 2연전을 삼성에 전패했고, 이것이 KIA 후반기의 몰락의 시초가 되었다. 결국 4위로 정규 시즌을 마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광탈... 저주받은 유니폼인가...
2013년 8월 11일에도 올드 유니폼 데이를 실시했다. 이날도 삼성과의 경기를 가졌으며, 이번에는 삼성전 연패를 끊는 귀중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희한할 정도로 왼손잡이 선수가 희귀한 팀이었다.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조계현, 이종범, 홍현우 등등 해태왕조를 이끈 선수들은 예외없이 오른손잡이다.[64] 타자쪽에선 그나마 장성호라도 있지[65] 투수쪽에선 왼손잡이는 김정수,신동수, 강태원 정도를 제외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66]때문에 김응용 감독은 투수든 타자든간에 왼손잡이를 데려오려고 그렇게 동분서주 했고[67] 트레이드로 박노준, 정성룡, 김상훈, 동봉철 등을 데려오고[68], 결국 양준혁을 데려오면서 그 소원을 풀었지만......1년만 뛰고 LG행(...) 80년대 중반에는 주전 라인업중 이순철 한 명 빼고 죄다 '김'씨에 오른손잡이라서 킴스클럽'김씨타선', '가장 한국적인 타선'[69]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주전라인업중 왼손잡이가 3~4명이되던[70] 1999년에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돈이없었으니 이해하자
왼손잡이에 혈안을 띈 해태와는 다르게 LG 트윈스는 정반대로 뛰어난 왼손잡이들이 많았다. 이상훈, 김재현, 이병규, 박용택, 봉중근 등등... 물론 왼손잡이들이 넘쳤던 만큼 LG에는 희한하게도 뛰어난 오른손잡이 거포가 없는 실정이다. 사실 오른손 거포는 리그에서도 드물긴 하다. 해결사로 통했던 한대화도 오른손잡이였지만 거포는 아니었고, 그 외에 오른손 거포는 현재까지 없다시피하다. 거포로 키우려 했던 김상현(1980)과 박병호, 정의윤 은 타 팀에서 펄펄 나는데(...)
그나마 왼손 타자들은 KIA 타이거즈로 넘어오면서 이용규, 김원섭, 최희섭 같은 선수들이 들어오며[71] 해태 시절에 비해 많이 나아졌으나 왼손 투수는 여전히 없다시피할 정도다.(...) 왼손으로 밥먹으면 투수한다는 농담이 공공연히 돌 정도. 그나마 2009년 이후에 양현종이 포텐이 터지면서 조금은 나아졌다. 물론 지금도 왼손으로 밥먹으면 좌완투수인 선수는 수두룩하다.[72][73]
김일환 (1983~1987)
1982년 롯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해태로 트레이드. 포지션은 주로 1루수를 봤지만 김성한, 김봉연 등에 밀려 잘해야 백업 신세였다. 1987시즌 태평양으로 이적하여 이듬해 은퇴할 때 까지 통산성적은 타율 0.240, 76타점, 8도루였고 홈런은 한개도 없었다.(...)
송일섭 (1983~1988)
1983년부터 해태에서 뛰기 시작한 좌타 외야수이다. 그가 그때부터 이적한 88년까지는 87년 박철우, 88년 흑역사김성규 빼고는 그가 정말 말 그대로 유일한 좌타자였다. 1985년 해태에서 103경기 338타수 104안타 15홈런 41타점 타율 0.308을 기록했다. 사실 이때와 1989년 빙그레에서 반짝 부활한 것 빼고는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 해태에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 뛰었고, 빙그레에서는 중견수도 봤다.
김성규 (1988~1991)
1988년 입단한 외야수이다. 해태의 좌타 갈증을 풀어줄듯....했으나, 기대에 비해서 너무 못했다(...) 첫해 80경기 출장해 타율 2할 8푼에 8도루로 나름대로 선전했다. 그런데 그 다음해 시즌의 1/3도 못 뛰고 타율은 1할 5푼대로 추락하더니 그 다음해도 겨우 80경기 뛰고는 0.245에 6타점 2도루. 91년까지 뛰고 쌍방울로 이적해 93년에 은퇴했다.
박철우 (1987~1993)
1987년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좌익수였다가 전성기 찍고는 지명타자로 활약하였으며,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 1993년까지 해태에서 뛰었고, 1997년 쌍방울에서 은퇴한 선수. 큰 덩치와 느린 발로 전형적인 거포의 외형.......이었으나, 커리어 하이인 1989년 홈런이 13개(...)였다. 타율도 3할을 넘긴 것은 1989년밖에 없었다(0.318). 하지만 좌타자가 그밖에 없었던 해태의 사정상 중심타선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짧고 굵은 선수생활을 했다.
933경기 출장 2813타석 2487타수 695안타 58홈런 370타점 통산타율 0.280
박노준 (1992)
지금 SBS에서 해설하는 "손가락을 살짝 벌렸죠? 스플리터에요" 와 "아 넘어갔어요, 끝났어요 기아우승"으로 악명높은 그 박노준 맞다. 1992년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왔다. 1991년 OB에서 타율 0.293에 19도루의 준수한 성적으로 전성기를 계속 구가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92년 딱 서른이 되던 해 해태에서의 성적은 2할 4푼에 11도루(...). 1시즌만 뛰고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 OB-해태-쌍방울 테크트리라니 안습. 보통 이런 테크트리(강팀-열악한 강팀-신생팀)면 그냥 어영부영 은퇴할텐데...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보란듯이 부활한다(...) 심지어 1994 시즌에는 OB시절에도 못 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김응용이 배아파했을 선수.
김상훈 (1994~1995)
2000년대 중반 위의 박노준과 함께 직구 아님 변화구, 초시계 드립으로 야구팬들에게 욕을 먹던 SBS 스포츠의 전 해설위원이자 현 SPOTV의 해설위원. 그렇지만 해설위원 시절과는 달리 선수시절은 미스터 청룡/LG라 불리운 MBC 청룡과 LG 트윈스의 대표 타자였다. 88년 타격왕과 90년 1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이적 직전 시즌인 1993년에는 타율 0.285, 12홈런 71타점으로 주포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연봉협상 마찰과 올스타전 쪼인트 사건으로 한대화와 사이가 안좋던 해태와 송구홍의 입대, 김상훈의 하락세에 의구심을 가지던 LG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93년 12월 1일 한대화, 신동수, 허문회, 김봉재 - 김상훈, 이병훈의 트레이드가 성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해태의 승라라고 생각했으나... 1994 시즌이 시작하자 트레이드의 핵심이었던 김상훈은 부상에 시달리며 2할 3푼대로 주저앉은 반면 한대화는 타율 0.297, 10홈런 67타점으로 부활에 성공하였다. 결국 이해 무너진 김상훈은 1995 시즌까지 뛰고 은퇴를 선언, 이 트레이드는 해태에게 있어 흑역사가 되었다.
동봉철 (1996)
최훈재 (1996.11~1998.12)
어떻게 보면 해태 왼손잡이 수맥을 끊어냈다고 볼 수 있는 인물. LG에서는 김재현과 박준태, 노찬엽, 심재학 에 밀려서 왼손 대타-외야 백업 역할이었고 96년 11월 2일에 최향남을 상대로 트레이드를 되어 해태로 오게 되었다[74]. 해태에서의 2년간은 97년엔 3번타자로 뛰며 우승을 이끄는 등 상당히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면서 탈쥐효과를 입증하나 싶었으나, 트레이드 당시 LG로 건너간 최향남의 포텐이 터지면서 묻혀졌다. IMF 이후 재정난이 심해진 해태는 최훈재를 1998년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당시 OB)로 넘기면서 그와 해태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해태 타이거즈는 매년 5월 18일 즈음만 되면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당시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KBO가 정부의 암묵적 지시로 인해 5월 18일 근처의 날짜에는 광주 경기를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5월 18일이 어떤 날인가를 생각한다면 이해가 쉽다. 굳이 홈경기를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면 전주에서 옮겨 치렀다. [75]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5월 15일부터 이틀간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와 삼성의 주말 2연전이 편성돼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정부에서 그 시합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치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해당 날짜가 5월 18일과 가장 가까운 주말이었던 만큼 5.18 추모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야구장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KBO 관계자들은 정부 관계자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을 하고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정부의 우려와 달리 이 경기 중은 물론 경기 후에도 아무 소요사태가 없이 일정이 무사히 진행됐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해당 사항은 4분 29초부터 보면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광주시민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군사정권은 KBO 측에 5월 18일에 광주 경기를 편성하지 말도록 지시했고 이 암묵적 룰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에서야 깨지게 됐다.[76]
프로야구 출범 이후 5월 18일에 무등 야구장에서 해태 홈경기가 열린 첫 해는 2000년이었고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경기에서 해태는 회장님에게 노히트 노런을 조공하는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타자는 NC 다이노스의 이호준, FA로 혜자소리를 듣는 한화 이글스의 김경언, LG 트윈스의 정성훈이 있고, 투수는롯데 자이언츠의 강영식이 있다. 그리고 2016년 3월 28일 임창용이 KIA 타이거즈와 계약을 하면서 현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먼 길을 돌고돌아 결국 현재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는 선수는 임창용이 유일하다.
이중 맏형인 이호준은 2016년 프로 23년차가 된다.[77] 2015년 이후 장성호는 은퇴하였다.
해태 타이거즈가 치른 마지막 한국시리즈이자 우승 시즌인 1997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현역선수는 임창용과 이호준만 남게 됐다.[78]
드 = 드림리그, 매 = 매직리그 | |||||||
년도 | 순위/팀숫자 | 팀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82 | 4/6 | 해태 | 80 | 38 | 42 | 0 | 0.475 |
1983 | 1/6 | 100 | 55 | 44 | 1 | 0.556 | |
1984 | 5/6 | 100 | 43 | 54 | 3 | 0.443 | |
1985 | 3/6 | 110 | 57 | 52 | 1 | 0.523 | |
1986 | 1/7 | 108 | 67 | 37 | 4 | 0.644 | |
1987 | 1/7 | 108 | 55 | 48 | 5 | 0.532 | |
1988 | 1/7 | 108 | 68 | 38 | 2 | 0.639 | |
1989 | 1/7 | 120 | 65 | 51 | 4 | 0.558 | |
1990 | 3/7 | 120 | 68 | 49 | 3 | 0.579 | |
1991 | 1/8 | 126 | 79 | 42 | 5 | 0.647 | |
1992 | 3/8 | 126 | 71 | 54 | 1 | 0.567 | |
1993 | 1/8 | 126 | 81 | 42 | 3 | 0.655 | |
1994 | 4/8 | 126 | 65 | 59 | 2 | 0.524 | |
1995 | 4/8 | 126 | 64 | 58 | 4 | 0.524 | |
1996 | 1/8 | 126 | 73 | 51 | 2 | 0.587 | |
1997 | 1/8 | 126 | 75 | 50 | 1 | 0.599 | |
1998 | 5/8 | 126 | 61 | 64 | 1 | 0.488 | |
1999 | 드4/4(7/8) | 132 | 60 | 69 | 3 | 0.465 | |
2000 | 드4/4(6/8) | 133 | 57 | 72 | 4 | 0.442 |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D%95%B4%ED%83%9C%20%ED%83%80%EC%9D%B4%EA%B1%B0%EC%A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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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0는 2009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으로 마무리 되어죠
그당시 왼쪽타자는 없고 오른쪽 타자들만..그리고 김씨종친회인듯 김씨들이 바글바글했던..말그대로 누워서 떡먹듯 우승하던..저런한 팀은 두번 다시 없을듯 싶네요..
야구를 몰라서..;; 내용이 참 방대하군요.
타이거즈 승리를 위해 승리의 함성을 외쳐라, 기아 타이거즈 포에버
요즘은 엘롯키티3 이라고 ㅡㅡ;
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에서 김대중을 연호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해태 야구선수중엔 김대중이 없었는데...ㅎㅎ
해태가 이기거나 지던 경기 역전을 시키면 목포의 눈물 노래를 하거나 김대중을 연호했죠 ㅎㅎ
그런데 빙그레 하고 게임하는데 빙그레 투수가 김대중이었다는 ㅎㅎ